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88
〈 88화 〉 미친개와 미친 메이드(3)
* * *
잿빛 마법사, 라니엘.
그녀는 왕녀에게 제 1 왕자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해 엿들었다. 르뤼엘 왕녀는 자신이 한평생을 바쳐 염탐해온 것을, 조사해온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라니엘에게 속삭였다.
과연, 제 1 왕자의 파벌은 거대했다.
그의 발밑에 든 이들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아서, 왕궁이 저들을 빼도 제대로 돌아갈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다.
의구심은 표정으로 드러났다.
그런 라니엘의 표정에, 르뤼엘 왕녀가 쓰게 웃었다. 그 웃음은 ‘이래도 그대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 라고 묻는 듯 했다.
라니엘은 턱을 매만졌다.
생각을 한차례 정리하고, 들은 정보들을 토대로 할 일을 한번 정리해 보았다.
치워야 할 게 많다.
많다는 건 일일이 치우기가 번거롭다는 뜻이다.
라니엘은 잿빛 마탑의 차기 마탑주였고, 전장에선 유능한 지휘관이자 기사였다. 처리해야 할 게 많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귀찮네.’
라니엘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냥 다 엎어버리는 게 편하겠다.’
그렇게 결론 지었다.
* * *
요 며칠간, 별궁에는 흉흉한 소문이 돈다.
소문은 발이 없기에 빠르다. 사람의 입과 귀를 외길 삼아 소문은 별궁을 빠르게 한 바퀴 돌았다.
『글쎄, 요즘 별궁에서···.』
소문이란 놈은 당최 요란스러워, 별궁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아니, 르뤼엘 왕녀 전하께서···.』
왕성 내에 소문이 돈다.
그 시작은 내명부다.
제 1 왕녀, 르뤼엘을 모시던 하녀들이 속삭인다. 속삭이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왕녀 전하의 접견실에, 다섯의 궁중 마법사가 끌려들어 갔다.』
『그러나, 별궁 바깥으로 나온 마법사는 하나도 없다. 전부 어디론가 잡혀들어갔다.』
『밤이면 밤마다, 아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별궁의 지하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소문에 소문이 더해진다.
『또 궁중 마법사들이 끌려갔다. 이번에는 그 수가 남다르다. 열이다. 줄줄이 묶여 들어간다.』
『뭔가 이상하다. 궁중 마법사들의 눈에 초점이 안 맞는다. 공포에 떠는 것 같기도 하다.』
『글쎄,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짐작조차 가지 않을 때.
그 영문을 모를 때, 소문은 제 크기를 더욱 빠르게 불려간다. 소문에 추측이 따라붙는다.
『왕녀 전하께서 미친것이 아닌가.』
『광견(??)이란 이명이 실로 들어맞는···.』
『잡혀간 게 마법사만이 아닌데?』
『무어라?』
별궁으로 자꾸만 사람들이 끌려온다. 끌려오는 건 여럿이거늘, 별궁 바깥으로 나가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폐하께선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본래 폐하께선 이런 일에 사사로이 간섭하지 않으신다. 제 1 왕자께선 어떠신가?』
『그 분 또한 침묵하신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알 수 있는 게 없다.
『근위대장이 끌려가셨다.』
『그쪽도? 이쪽은 ···께서···.』
『우리는 마수 사육 부장님께서···.』
『우리 ···부서 부관께서도···.』
알 수 없는 와중에도, 사건은 계속해서 벌어진다. 그 사건의 중심에 르뤼엘 왕녀가 있다. 그리고, 왕녀의 곁을 지키는 한 메이드가 있다.
『검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
『힘이 더럽게 세다 하더라. 성인 남성을 공 던지듯 휙휙 던진다 카더라.』
『중요한 건 아닌데, 미색이 참 곱다 하더라.』
『마법을 쓸 줄 안다는데.』
『궁중 마법사도 박수 한 번에 제압했다는데?』
『아니, 세상에 그런 메이드가 어디···.』
그 누구도 메이드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정체 모를 메이드가 왕녀의 곁을 수호한다. 별궁의 하녀들은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린다.
그리고.
“통, 통촉하여주십시오오오오!”
그 소문은 정점을 찍는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기라면 기겠습니다! 핥으라면 핥겠습니다! 제게 한 번만, 한 번만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르뤼엘 왕녀의 접견실에서 누군가 끌려 나온다. 끌려 나오는 인물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하녀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궁중 마학장, 테슬루트.
궁중 마법사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긍지 높고 점잖기로 유명한 그 궁중 마학장께서.
“한 번만, 부디 한 번만!”
접견실의 문고리를 잡은 채,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애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다가서는 인물이 있다.
“테슬루트 경, 그대는 지금 무언가 착각하는 것 같군.”
르뤼엘 왕녀다.
그녀는 싱긋 미소 지으며, 손을 뻗었다. 문고리를 붙잡은 테슬루트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때어 주었다.
툭.
이윽고 마지막 손가락이 떨어진다.
문고리를 놓친 테슬루트가 바닥에 엎어진다. 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위를 올려다본다.
그 시선의 끝에는 르뤼엘 왕녀가 있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연다.
“본래 본녀가 기라면 기고, 핥으라면 핥는 게 경들의 역할이라네. 궁중 마법사가 왜 ‘궁중’ 마법사겠는가? 왕실을 위해 존재하기에 궁중 마법사이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입에 담듯, 그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다. 그 당당한 태도 앞에 테슬루트는 할 말을 잃는다.
“더 할 말은 없나 보군.”
그녀가 손짓했다.
“끌고 가라.”
“얼마나 쳐야 하겠습니까?”
호위 기사가 묻는다.
그 물음에 르뤼엘은 짧게 답했다.
“굽은 등이 펴질 때까지 매질하면 되겠군.”
테슬루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다.
“으악, 으아아아악! 르뤼엘 왕녀 전하! 이래선, 이래선 아니 되옵니다···!”
그는 비명을 내지르며 호위 기사에게 질질 끌려간다. 그 모습을 본 하녀들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끼이익, 쿵.
이윽고 접견실의 문이 도로 닫힌다.
“······.”
침묵이 감도는 복도에 새로운 소문이 싹튼다. 왕녀가 궁중 마학장을 잡아다가 아예 족쳤다. 굽은 등이 필 때까지 쥐어패겠단 뜻을 밝혔다······.
도대체 어떻게?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들 사이를 지나가는, 한 메이드 만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움직일 뿐이다.
2.
“이쯤 되면 나도 궁금해지는군.”
“예?”
“그대, 도대체 무슨 일을 해왔길래 일 처리가 이리도 깔끔한 것이지?”
“깔끔하다뇨?”
나를 바라보며 왕녀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궁중 마법사들이 머무르는 연구실이 아예 박살 났다고 들었다. 그놈들이 꽁꽁 숨겨놨던 비리들이 지금 내 앞에 이리 놓여 있지 않나.”
그녀가 방금까지 궁중 마학장, 테슬루트의 얼굴에 내밀었던 서류들을 가리켰다.
“이걸 가져온 건 그대다.”
“그렇죠?”
“궁중 마법사들의 연구실을, 그리고 그놈들의 비밀 회의실을 개박살 낸 것도 그대다.”
“그거 비밀 회의실이었어요?”
발로 걷어차니까 열리던데.
“······아무튼 간, 그대가 아주 깽판을 치고 돌아왔을 텐데···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더군.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이지?”
“음···.”
“흔적을 남겼을 줄 알고, 본녀는 그에 답할 문장을 많이 생각해놨으나··· 쓸 일은 없어 보이더군.”
하니까 되던데요, 라고 말하려다 말고 나는 잠시 턱을 매만졌다. 내가 경험해 봐서 아는데, ‘하니까 되던데요.’라는 문장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약간의 짜증과, 다량의 아니꼬움을 불러오곤 했다.
‘스케발, 그 해골바가지도 아예 속 뒤틀려 죽으려 했고 말야.’
차마 왕녀 앞에서는 그럴 수 없는 노릇이라, 나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기로 했다.
“태웠는데요.”
“뭐?”
“보는 사람이 있으면 기절시키고, 발자국이나 흔적이 남았다 싶으면 태웠죠?”
“···왕궁에 불을 질렀다고?”
“에이, 많이 안 태웠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벽면 좀 그을린 것 정도? 실험하다가 불똥 튀었다고 둘러댈 만한 크기예요.”
“···목격자를 기절시켰다는 건?”
“여기, 이쪽 보이십니까? 여길 꾹 하고 누르거나 흔들면 눈앞이 핑하는데, 그때 시야가 좀 좁아지거든요. 그러면 그때···.”
“······.”
나는 설명을 늘어놨고, 왕녀는 침묵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여력 했다.
“그대는···.”
“예?”
“아니, 되었다···.”
할 말이 많지만, 구태여 하지 않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뭐 잘못했나?’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거 같은데.
난 까래서 깠을 뿐이다.
3.
라니엘이 날뛴 지 이틀이 지났다.
이틀이 지나고 삼 일째의 아침이 밝았을 때, 별궁의 복도는 온갖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하···!
왕녀의 별궁에 찾아오는 이유가 뭐 얼마나 다양하겠냐만은··· 그들이 르뤼엘 왕녀에게 겨우 안부를 묻고자 이런 아침 댓바람부터 모인 것은 아니었다.
르뤼엘 왕녀 전하···!
부디, 부디 알현을···!
통촉하여 주십시오.
부디 한 번만 기회를, 그 정보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목소리가 별궁의 복도에 울려 퍼진다.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왕녀에게 목숨이 저당 잡힌 이들이 별궁의 복도에 목놓아 울부짖는다.
꽁꽁 숨겨놓았던 장부가, 어째서인지 왕녀의 수중에 들어가 있다.
비밀리에 진행했던 실험을, 어째서인지 왕녀가 그 개요까지 전부 알고 있다. 그 실패작을 어디에 어떻게 처리했는지까지도, 전부.
그 모든 게 이틀 만에 벌어졌다.
자신의 부서로, 자리로 도착한 한 장의 편지가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그것이, 그들이 별궁으로 모여든 이유다.
왕녀님, 부디.
비밀을 들킨 사람, 약점을 잡힌 사람, 그리하여 왕녀에게 목숨을 저당 잡힌 이들. 그런 이들이 별궁의 복도에 가득하다.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그들의 울부짖음에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짖어야 할 미친개가, 짖을 생각을 하질 않는다. 그것이 그들에겐 오히려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그들의 목소리만이 별궁의 복도에 메아리 쳤다.
* * *
“이 방음결계 말인데, 몹시 성능이 좋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르뤼엘은 체스판을 놓는다.
그 맞은편에는 라니엘이 앉아있다. 요 며칠간 그들은 심심풀이 삼아 체스를 두곤 했다.
“마저 두도록 하지.”
르뤼엘의 안색은 썩 좋지 못하다.
그녀의 목덜미에서 시작된 문양은, 이미 그녀의 가슴팍까지 뻗쳐 있었다.
그녀의 가슴골을 따라 식은땀이 흐르지만, 르뤼엘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대가 날뛴 보람이 있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교수, 그대가 날뛰어준 덕에 내 오라비는 많은 패를 잃었어. 이런 아침 댓바람부터, 본녀의 별궁 앞에 모여든 저들이 그 증거지.”
르뤼엘이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본래 제 1 왕자의 비호를 받을 이들이, 별궁에서 목놓아 울고 있다는 것은··· 저들 또한 버려졌단 뜻이다.
“비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니, 그들의 뒤를 봐주려 든다면 내 오라비도 적잖은 타격을 받겠지. 물론, 오라비는 그정도 타격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그 정도는 무시하고 저들의 편을 들어도 될 테지만···.”
탁, 하고 그녀가 기물을 움직였다.
흑색의 폰이 백색의 폰의 코앞에 놓인다. 명백한 버림말이었다.
“내 오라비는 그럴 그릇이 안 된다. 무엇이든 쉽게 버리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버림말이 잡아먹힌다.
“교수.”
“예.”
“본녀는, 그런 내 오라비가 왕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체스 말이 움직인다.
흑과 백이 체스판 위에서 서로를 물어뜯는다.
“폰은 다른 기물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지.”
폰이 움직이고, 폰이 먹힌다.
“강하지 않다. 움직임 또한 단순하지. 그러나, 그들은 단지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만으로 가치를 다한다.”
폰이 움직임을 견제한다.
흑색 폰에 위축되어, 백색 기물이 판을 헛돈다.
“폰이 버림말이 되고, 견제를 해주기에 다른 기물들이 수월하게 움직인다.”
폰 뒤에 숨어있던 기물들이 움직인다.
“교수.”
르뤼엘이 기물을 쥔 채 말했다.
“나는 기사들을 무척이나 존경한다.”
“저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몇 번을 말해도 그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말이지.”
그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본녀는 말이다. 왕실에 처박혀있는 궁중 기사들 보다, 전장의 기사들이.”
툭.
“왕실에서 웃고 떠드는 마법사들보다, 전장에서 주문을 짜올리는 마법사들이. 그런 이들이야말로 타인의 존경을 받을 만 한 이들이라 생각한다.”
툭, 하고 기물을 움직인다.
“그들에게 본녀는 본녀 자신을 낮춘다. 경의를 표한다.”
그들에겐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르뤼엘이 비숍을 쥔다.
“마법사들은 유능하다. 그 유능함을 원하는 곳은 많다. 그들은 부르는 것이 곧 값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
비숍이 판에 놓인다.
“그 유능함을, 인류를 지키는 데 바치는 이들이 있다.”
폰의 뒤에 숨어있던 비숍이 앞으로 나온다. 폰들의 곁에 선다. 때로는 그 앞에 놓인다.
“좋은 조건을, 권리를, 권한을 전부 포기하고··· 인류를 지키는데 저 자신의 재능을 바치는 인물들이 있다. 그건 가히 희생이라 불러도 옳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그럴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건 그들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다. 그렇기에, 가치 있는 일이다.
르뤼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법사든, 기사든, 저 자신의 긍지를 위해서든, 명예를 위해서든, 업적을 위해서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백색 기물에 물어 뜯긴 비숍이 명을 달리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인류를 위해 제 자신을 희생한다. 그 긍지 높은 기사들에게 본녀는 최대한의 존경을 표한다.”
그러니.
탁, 하고 왕녀가 체스 말을 내려놓았다.
“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이 나라의 내부를 지탱하는 것이겠지.”
언젠가 했던 말이지만.
그때보다는 구체화된 말을 왕녀는 계속했다. 그 말을 엿듣던 라니엘은 잠시 침묵했다.
“······.”
곧장 말을 움직이려던 라니엘이 그 손을 멈춘다. 어느새 왕을 지키는 울타리가 완성되어있다.
흑의 왕을 지키는 울타리는 견고하다.
버림말들 위에 놓인 울타리는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다. 뚫릴 것 같지 않다.
“그리고, 그들이 지킬만한 왕을 자리에 앉히는 게 본녀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왕녀가 가운데 놓인 흑색의 왕을 건드린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만들지 않을 왕이, 왕좌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
“그래서, 내 오라비는 왕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럼 누가 어울린다 생각하십니까?”
“몰라서 묻나?”
쿡쿡, 하고 그녀가 웃음을 흘렸다.
“그대 또한 잘 알고 있는, 그 아이가 왕좌에 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나는 내 목숨도 버릴 수 있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르뤼엘이 숨을 고른다.
“후우···.”
르뤼엘이 길게 숨을 뱉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고여있다. 더이상 체스를 두는 건 힘들다고 판단한 라니엘이, 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르뤼엘 역시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누운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라니엘을 흘겨봤다.
“교수.”
“듣고 있습니다.”
“덕분에 즐거웠다.”
“······.”
“이렇게 마음 편히, 속 시원하게 지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라니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주술이 끝을 향하고 있다. 그녀의 몸을 좀먹는 주술은 해방을 코앞에 두었다.
‘···그런데도, 제정신을 유지하다니.’
놀라운 정신력이었다.
전장의 기사들에 비해도 전혀 꿇리지 않을 만큼.
탁.
체스말을 정리하고, 왕녀의 침대 곁에 놓인 의자에 라니엘은 걸터앉았다. 옆으로 누운 왕녀와 그 시선이 문득 맞닿았다.
엷은 금빛의 눈동자가 푸른 눈동자를 쫓는다.
“본녀는.”
이윽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르뤼엘이 입을 열었다.
“그대를 믿겠다.”
육체를 좀먹는 고통 속에서도, 그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 목소리 또한, 흔들리지 않는다.
“타인의 판단에 기댄 신뢰가 아닌, 오롯이 나 자신이 그대를 신뢰한단 뜻이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건, 언제나와 같은 짓궂은 미소였다.
“본녀의 신뢰는 그럭저럭 무거운 편이다.”
그러니.
“본녀를 지켜라. 그대를 믿을 테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르뤼엘은 눈을 감았다.
바깥은 시끄러우나, 방안은 침묵이 감돈다.
침묵 속에서 라니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짧았지만 길었던 사흘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