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100
100화. 모략 (2)
“···하투샤의 강철을 키프로스를 통하여 보내라 하였습니다. 그리하면 흑해와 지중해가 통하는 길목을 장악한 트로이아에게 들키지 않고서 지원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요.”
“그리고.”
“당연하지만 금수조치의 제한을 영구히 풀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아카이아인들은 이제 트로이아든 하투샤든 어느 땅의 지배자에게서도 제약받지 않고 자유로운 무역을 행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
“···.”
시종장이 말을 머뭇거리자 수필룰리우마는 대강 이어질 내용을 짐작하면서도 그를 채근했다.
“그것만으로 아가멤논이라는 자가 만족했을 리 없다. 분명히 더 많은 것을 요구했을 듯한 작자일세. 탐욕과 야망을 먹이로 질주하는 말 같은.
분명 더 많은 요구가 있었을 테다. 그 내용이 어떻든 징벌을 내리지 않을 터이니 말하라.”
“···트로이아 외의 다른 번국들을 쳐부수더라도 어떠한 간섭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은 노예를 끌고 가더라도, 아무리 많은 제물을 약탈하더라도 말입니다.
트로이아의 문제는 사소한 노략질과 뱃놀이로만 해결될 수 없다고 하면서···
이것은 전쟁으로서만 해결될 문제라 하였습니다.”
역시 예상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시종장의 말에 대왕은 관자놀이를 주무른다. 아니, 주무르다 못해 그 피부를 뚫어버리고 뇌까지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짓누른다.
“···주군?”
보다 못한 신하들이 부르자 대왕은 지끈지끈 올라오는 두통에 감았던 눈을 뜬다.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팔과 다리를 불로 지지고서 한 쪽 손은 아예 잘라버려야 한다고···?”
“···.”
대왕의 말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송구함에 고개를 숙인다.
장로들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과 비어가는 정수리를 물끄러미 구경하던 대왕은 허탈한 듯 피식거리며 한 마디를 던진다.
“아가멤논이라는 인간은 어땠나? 믿을 만하던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온당할지는 모르겠사오나.”
시종장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어갔다.
“그를 믿을 바에야 차라리 생선 앞의 고양이를 믿겠습니다.”
그 대답에 만족한 듯 수필룰리우마는 낄낄거렸다.
“얕보이는 짐승은 무리에서 쫓겨나 홀로 포식자에게 잡아먹히지.
그리고 우리는 얕보이기를 택하고 약점을 내보였네. 어떻게 저 짐승 같은 아카이아 해적의 우두머리가 우리를 가만두길 바랄까?”
자신과 상대에 대한 적확한 분석 능력은 아가멤논만 갖춘 미덕이 아니었다.
하투샤는 늙어가고 있으며, 아카이아는 도의를 모르는 해적들이다.
아르고 호의 영웅들 이야기가 고작 몇 세대 전이다.
이아손은 완전무장한 반인반신들 수십 명을 이끌고 콜키스 왕국에 쳐들어가 왕국의 국보인 황금양털을 요구했다. 콜키스의 왕이 거부하자 이아손은 그 공주 메데이아를 꼬셔서는 몰래 황금양털을 훔쳐 달아난다.
즉, 아카이아 각지의 영웅들이 모여 외국으로 나가 공주를 납치하고 왕자를 죽이며 국보를 빼앗았으니 그냥 해적질이다.
여기에 참여한 영웅들만 해도 테세우스, 헤라클레스, 이아손, 네스토르, 오르페우스··· 알 만한 인물들이고.
왕들이 직접 나서서 해적질을 해대는 아카이아인들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바보다.
아가멤논은 기회가 생기는 그 즉시 하투샤를 배신할 것이다.
그러니,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배를 준비하게.
그들이 요구한 황금과 쇠솥도 전부 그 안에 실어서.”
“하오나 너무 무모한 계획이 아닙니까?”
“자네들은 몰랐던 척하지 말게. 아카이아족에게 사신을 보냈을 그때부터 예상했던 바가 아닌가.”
“···.”
“아무튼 그 배들을 미케네로 보내고, 그 뒤로는···”
대왕은 옥좌에서 일어나 꿇어앉은 신하들을, 저 멀리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하투샤의 전경을 살펴본다.
서서히 몰락해가는, 한때 있었던 찬란히 빛나던 그 시절을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듯한 도시를.
“첩자들도 실어보내게.”
그러나 다 죽어가는 노인이라도 자기 발을 물어뜯는 개미는 밟아죽일 수 있다.
“아가멤논의 주위를 단단히 둘러싸고 감시할 수 있는 이들을 모아야 하네. 아카이아인들의 언어에 능하고, 그들의 문화에 익숙한 이들을 모아들이게.”
“알겠습니다, 주군.”
“또, 저들의 목줄을 쥘 방안을 이리저리 모아보지. 미케네와 스파르타가 그 작자의 발 아래 들어왔다 한들 아가멤논에게 트로이아와 그 근역을 쑥대밭으로 만들 만한 힘은 부족할 테니.”
트로이아는 엄연히 수많은 도시들을 거느린 강국이다. 흑해와 지중해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그 사이의 무역을 통제하는 부유한 무역국가이기도 하다.
미케네의 왕이 아무리 용을 써봐야 트로이아를 본격적으로 칠 힘 따위 있을 리가 없다. 그 악명 높던 도적 두목 헤라클레스 같은 괴물이 아니라면야.
“그 다음에는···”
대왕의 명을 바쁘게 받아적으며 움직이던 신하들은 이어지는 말에 다시 멈춰선다.
수필룰리우마는 가볍게 눈을 감는다.
이 찬란한 제국이 영원하기를.
“그 다음에는, 운명에 맡기지. 필멸자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대강 다한 것 같군.”
트로이아를 움켜쥔 채, 아카이아인들의 마수를 쳐내고서, 다시금 웅비하기를.
“저 하늘의 신들께서 우릴 보우하시길.”
그는 간절히 바랐다.
***
아가멤논는 아버지에게서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지배자에게는 강인함만이 미덕이며 나약함은 죄악이다.
강인한 왕은 제 백성과 가문을 지키며, 성벽을 튼튼히 하고 가장 위대한 위업들을 이룬다.
허나 나약한 자는 그 백성, 가문, 명예 그 무엇 하나 지킬 수 없다.
만일 저 트로이아의 라오메돈이 헤라클레스보다 강했더라면 그 아들 프리아모스가 그 끔찍한 시련 속에서 왕국을 재건할 일도 없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그는 프리아모스를 존경했다. 그 현명한 노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지켜내고자 자신의 온몸을 내던져 살아남았다. 비열한 아버지 아트레우스는 그리하지 못했다.
허나 이제 존경하는 이웃을 향해 칼을 꽂을 때였다.
시들어가는 하투샤가 눈을 꿈뻑거리는 동안 아가멤논의 군세가 트로이아를 휩쓸고 에게 해의 패권을 손에 넣는다. 아, 그 이름 높은 제철기술도 웬만하면 손에 넣었으면 한다.
‘이런 것’을 끝없이 만들어낼 수 있는 대장간이라.
아가멤논은 트로이아산 강철검의 칼몸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그 시린 금속의 내부에 아로새겨진 꿈결 같은 무늬들···.
그는 이내 칼집에 검을 꽂아놓고는 고개를 돌려 말한다.
“자,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가멤논은 기대감에 찬 눈으로 사랑하는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마, 만일 그 일이 형님의 말씀대로만 이뤄진다면 정말 위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 켕기는 점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리고 메넬라오스는 아가멤논이 바라던 그대로의 반응으로 그를 기쁘게 했다.
“형님과 제가 모을 수 있는 군세를 모두 모은다 하여 트로이아를 정벌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투샤에서 온 사신에게 지나치게 호언장담한 것은 아닌지···.”
아가멤논은 동생의 말에 웃으며 그 어깨를 토닥이다.
“그래, 좋은 지적이다. 좋은 지적이야.”
형님의 칭찬에 메넬라오스가 가볍게 웃자 아가멤논은 말을 잇는다.
“우리가 어떻게 바다 건너의 강대국을 이길 수 있겠느냐? 게다가 트로이아는 중요한 땅에 자리한 중요한 나라다. 그 주위의 동맹들이 아카이아의 침략자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겠지.”
당장 흑해와 지중해의 길목에 혼란이 생기면 많은 이들이 피해를 본다.
오랜 세월 동안 왕국을 재건하며 주위에 빚을 쌓고 빚을 지운 신뢰할 수 있는 동맹 프리아모스가 아니라 다른 이가 트로이아를 차지한다면 두고 보지 않을 이들이 많다.
필시 지난한 싸움이 이어지리라.
아무리 아카이아에서 강하다 한들 미케네와 스파르타로서는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아카이아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텐데.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가멤논이 아카이아의 왕중왕이라 불린다 한들, 반쯤은 농담이며 반쯤은 견제의 의미를 품고 있는 별명이다.
아카이아의 그 어떤 왕도 아가멤논을 상전으로 모시길 원치 않는다.
아카이아에서 가장 강한 우두머리일 뿐인 아가멤논이 모두에게 해상 정벌을 요구한다면 각 도시의 왕들은 상큼한 무시 또는 격한 반발로 화답하리라.
그리 생각하며 아가멤논의 얼굴을 올려다본 메넬라오스는··· 자신이 틀린 답을 내놓았음을 깨닫고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을 덧붙인다.
“하, 하지만 형님께서는 답을 가지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나갈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직은, 뚜렷하지 않다.”
아가멤논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메넬라오스를 내려다본다.
아가멤논은 어떤 눈초리가 메넬라오스를 안심시키고, 어떤 입모양이 그를 두려움에 질리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직 3살배기였던 동생에게 처음 곤봉을 휘두른 그날부터 차근차근 쌓여온 지식들이다.
“아, 아, 그···.”
메넬라오스가 벌벌 떨자 아가멤논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실망의 의미로.
“길은 상황에 따라 만들어가는 것이지. 중요한 것은 나아갈 방향이다.”
“그, 그, 그렇지요. 방향입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아카이아의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카이아의 지원을 끌어내기에 우리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이 일이 불가능하다 생각하지 말거라.”
아가멤논은 나긋나긋하게, 그러나 서늘한 기운을 담아 동생에게 말한다.
그가 내뱉는 한 음절, 한 음절이 메넬라오스의 심장에 대못처럼 박히는 것을 보며 천천히.
마침내 메넬라오스가 말을 꺼내기를 멈추자 아가멤논은 다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거꾸로, 우리가 이 일을 기회라고 생각하거라.”
“기회라면···”
“아카이아를 얻을 기회.”
메넬라오스는 이제 다시 고개를 들어 아가멤논을 마주보았다. 그래야 하는 시점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이상을 얻을 기회가 될지도 모르지. 하투샤의 한 팔을 자르고, 트로이아와 그 동맹들을 무릎 꿇리며, 막대한 부와 영예를 아카이아의 왕과 귀족들에게 안긴 우리는···”
또는,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아가멤논도 메넬라오스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답을 알고 있었다. 답을 알고 있었기에 입을 열 필요도 없던 것이다.
왕중왕(Ϝάναξ).
그 희열에 아가멤논의 입꼬리가 잠시 떨리는 것을 지켜보다, 메넬라오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형님?”
“왜 그러느냐?”
“전에 말씀하셨던 그 건은 취소해야 하겠습니까?”
“무얼 말이냐.”
아가멤논이 차갑게 되묻자 메넬라오스는 긴장한다.
또 틀렸나? 형님께서 알면서 되물으시는 건가?
아무튼 꺼낸 말을 되돌릴 수는 없기에 메넬라오스는 말했다.
“그, 프리아모스의 아들 파리스의 건 말입니다.”
“···.”
“전에 조카딸을, 그러니까 이피게네이아 그 애를 파리스와 혼인시켜 보는 건 어떻겠냐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쯤이면 미케네에서도 준비에 들어갔을지도 모르는데 취소하는 게···”
메넬라오스는 말을 다 마칠 수 없었다.
아가멤논이 석상 같은 얼굴로, 차갑게 정제된 분노를 담아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종류의 표정, 가장 두려워하는 종류의 자세, 가장 두려워하는 종류의 침묵으로.
“···.”
침묵.
공기가 순간 무겁게 변하여 그를 짓누른다. 마치 이 공간이, 이 세상이 메넬라오스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다.
사방의 공간이 그를 짓이긴다.
세상 바깥으로 쫓아내기 위하여.
아주 어렸을 때부터 느꼈던, 그러나 형님의 허락 없이 죽는다는 일을 상상하지 못하여 그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자살욕구가 조금씩 고개를 쳐든다.
“···하.”
짤막한 웃음, 또는 한숨.
메넬라오스는 아가멤논이 차라리 자신을 때리기를 바랐다. 뼈를 부러뜨리고, 살을 찢어버리기를 바랐다. 어렸을 때 그랬듯이.
허나 아가멤논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제 아가멤논은 성숙했다. 동생을 지배하는 더 효율적인 방법을 터득한 지 오래다.
“메넬라오스.”
“···.”
“그래, 멍청한 말을 내뱉고는 이제 대답하지 않겠다는 게냐? 그러면 입 다물고 거기서 듣고만 있거라.”
아가멤논이 또박또박 말한다.
숨이 막혀온다.
“내 맏딸, 이피게네이아에게 가장 좋은 옷감을 보내주거라. 시녀들과 함께 가장 아름답게 차려입어 놓으라고 전해두고.”
“···.”
“그리고, 흠, 루위어를 좀 공부해두라고도 하거라. 트로이아에서 호감을 사려면 그 나라의 말을 최대한 많이 익혀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가멤논은 그림자처럼 굳어버린 동생에게 등을 보이고 걷는다.
천천히.
높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 동생의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끼면서.
“그··· 클리타임네스트라가 가장 아끼는 딸아이니까 조금 서운해할지도 모르겠군. 아무리 원수에게서 빼앗았다 하더라도 내 부인이니 달래줘야 하겠지. 그래, 미케네의 족장들 중 가장 언변이 뛰어난 이들에게 사절단을 꾸리라고 말해두고.”
아가멤논의 머릿속에서 이미 동생은 사라져 있었다. 나무토막을 앞에다 세워놓고 혼잣말하는 것과 별 차이없는 느낌을 그는 받았다.
그러나 메넬라오스의 영혼은 온통 아가멤논의 말로 채워져 있다. 언제나 그랬다.
“가장 아름다운 신부를 트로이아에 보내줘야지. 그 옛날 제우스가 에피메테우스에게 선물했다던 판도라처럼.”
그렇게 판도라는 인류에게 선물처럼 다가왔다.
온갖 재앙이 들어있는 상자와 함께.
아가멤논은 트로이아를 위해 상자 속에 넣어놓을 재앙을 골라보았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