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160
그러니···
“미케네로 가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가멤논 왕이 직접 우리를 초대했다. 아마 텔라몬도 그렇게 초대하여 부를 작정인 듯하구나.”
아가멤논의 서신이 왔을 때는 조금 당황했다.
“왜 그러느냐, 파리스?”
“···아닙니다. 혹시나 싶어 말입니다. 미케네에서의 연회에 어떤 이들이 더 참여할지를 모르니 신중을 기해 준비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아카이아의 왕중왕이 보내온 서신에 따르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와 살라미스의 왕 텔라몬이 참여한다고 하는구나.”
“메넬라오스가 말입니까? 그렇다면 혹시···”
“그 부인이자 스파르타의 여왕인 틴다레오스의 딸 헬레네는.”
프리아모스가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깍지 낀 손을 탁자 위로 올려놓으며, 그는 단호히 말했다.
“오지 않는다.”
“···.”
“이것을 묻고 싶었던 게 아니더냐?”
“맞습니다.”
“왕이 도시 바깥으로 떠날 때면, 보통 여왕은 안주인으로서 도시와 왕국을 지킨다. 그것이 관례에 따라 정해진 역할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겠지. 보거라.”
프리아모스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어 쥐고 있던 서신의 한 자락을 가리킨다.
-‘위대한 트로스의 후예이자 현명하신 트로이아의 왕이시여, 연회에 초대된 이들은 이와 같습니다. 이곳에 언급되지 아니한 이들은 모두 누군가의 시종과 피후견인에 불과할 터이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헬레네는 거기 없었다.
만일 누군가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그러니까 메넬라오스가 오면 당연히 따라붙는다는 감각으로 빠뜨린 건 아닐까 싶었으나 명단에는 아가멤논의 부인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이름도 당당히 적혀 있었다.
명백히 헬레네는 오지 않는다.
“이런 정보까지 보내주는 것을 보면 아가멤논 역시 우리에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올 것을 기대하는 듯하구나.”
“···.”
“네가 예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 황금사과와 그 서글픈 선물에 관해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주겠다.’
아프로디테의 약속이었다. 이제 아프로디테 스스로가 원치 않더라도 지켜야 할 약속이고.
꽤나 오래 전에, 그러니까 내가 트로이아에 막 올라왔을 적에 했던 이야기임에도 프리아모스는 그를 잊지 않았다.
“너는 스파르타의 헬레네가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프리아모스는 빠르게 나를 훑었다. 내 내장 속까지 깊숙이 살피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에 나도 모르게 긴장한다.
“만나본 적은 있느냐? 틴다레오스의 딸 헬레네를 말이다.”
“없습니다.”
“허면 스파르타의 여왕을 사랑의 어머니께서 직접 지목하신 바가 있더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는 어째서 그를 확신하느냐?”
“···.”
여기서 잘 대답해야 했다.
혹시라도 이상한 답을 내놓았다가는 프리아모스의 신뢰를 깎아먹을 수도 있으니.
“온 아카이아의 왕과 왕자와 영웅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
내가 서두를 떼자 프리아모스는 조용히 나를 주시하며 다음 구절을 기다렸다.
“바로 헬레네의 구혼자로서 스파르타의 궁정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헬레네와 결혼하기를 갈구하며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대었고, 서로에게 모욕을 일삼았습니다.
큰 싸움을 막아낸 것은 오디세우스의 지혜 덕분이었습니다. 고결한 왕들이 서로를 질투하게 만들고, 오랜 벗들이 그녀에게 손을 내뻗기 위해 경쟁하였으니 헬레네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아닙니까?”
“···잘 모르겠구나.”
프리아모스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그리 말했다. 그리고 깜빡 잊었다는 듯 한 마디를 덧붙인다.
“하지만 일리는 있구나. 조심하는 게 좋겠지. ‘가장 아름다운 여인’일 수 있는 이에게 이미 반려가 있다면 말이다.”
프리아모스가 웃는다.
“그리고 너도 반려가 있지 않으냐?”
나도 웃었다.
“물론입니다. 제가 제 반려를 버리느니 죽겠습니다.”
***
“제 부인은 지금쯤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오랜 가신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 제가 그 기회를 준 줄도 알지 못하고 있겠죠.”
메넬라오스는 조용히 선미에 서서 멀어져가는 스파르타를 내다보았다.
“···생각해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제 부인도 스파르타의 정당한 여왕이고 선왕의 딸입니다. 부부가 이렇게 서로를 의심하고 움직여야 하다니 참 우울해지는 일입니다.”
“왕은 나라를 위해서 움직여야 합니다. 라케다이몬인들(라케다이몬은 스파르타의 별명.)의 정당한 왕으로서, 라케다이몬인들을 위해서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을 필요가 있지요”
“···하지만 외롭지는 않을까요? 제 편으로 돌아선 듯했던 오랜 가신들이 갑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재개해준 것이 시선 돌리기용이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말입니다.”
메넬라오스는 강 위에 떠가는 배에 서서 스파르타의 전경을 샅샅이 훑었다. 성벽 바깥의 밭과, 그 안쪽의 저택, 신전, 시장이 햇빛을 받아 회백색으로 빛났다.
지금쯤 헬레네가 있을 곳도 그의 눈에 들어왔다.
“권력은 나눠져서는 안 됩니다. 머리가 둘인 짐승은 괴물입니다.”
“맞습니다. 왕께서 군림하시는 동안 나라의 의지가 둘 또는 셋으로 쪼개진다면 재앙이 일어났을 겁니다. 라케다이몬인들은 아트레우스의 차자(次子)가 통치하기 시작한 뒤로 지복을 누립니다.”
“···.”
옆에 선 스파르타의 장로들은 메넬라오스의 말이 충성 시험이라 생각하는지 제각기 아첨과 헛소리들을 쏟아내었다.
그 말들이 듣기 싫어서 메넬라오스는 선미에서 걸어나오며 깊은 외로움과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이 도시의 왕이 되기 위해 강처럼 흘린 피에 대해서도.
-‘가문이 잘 되어야지.’
그렇지. 그게 맞다. 아트레우스의 후손들이 비렁뱅이처럼 목숨을 구걸하며 떠돌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죽더라도 오직 가문만은 죽지 않으니.
메넬라오스는 형님의 말로써 의지를 다잡는다. 그러면서도 슬그머니 흘러나오는 애수에 잠시 몸을 맡긴다.
“···부인이 고통스러워하겠지요.
아마 많이 외롭겠지요. 나 때문에.”
내가 헬레네의 친구들을 모조리 죽였으니.
메넬라오스는 아주 작게 말했고.
그 때문에 그의 말을 들은 것은 네 마리의 짐승뿐이었다.
에우로스, 노토스, 보레아스 세 마리의 개들이 주인의 발치를 따라다니며 차갑게 주먹 쥔 손을 핥아주었고, 주인은 그들의 머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그리고 가까이 스쳐 날던 어느 철새는 바람결에 메넬라오스의 말을 흘린 채 날개짓했다.
새는 천천히 강 위에서 궤적을 틀어 스파르타 시내에 있는 자신의 둥지로 자리를 옮겨간다.
그곳에서 새는 자식들을 먹이고 반려와 음식을 나누었다.
그리고 새가 둥지 튼 정원수 아래, 궁전의 어느 방에서는.
“···떠났다고. 내게 말도 없이.”
“그러합니다. 메넬라오스 님께서는 자신이 떠난 동안 스파르타의 통치를 잘 부탁드린다면서 인사를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이미 시일이 늦은지라 급히 출발하실 수밖에···”
“알겠네. 나가 있게나.”
“알겠습니다, 여왕이시여.”
그리 말하며 시녀는 방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실질로는 그 뒤로 한발짝도 떼지 않고서 방으로부터 새어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마치 쥐새끼처럼···.”
헬레네는 입모양만으로 소리없이 속삭였다.
저 쥐새끼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시녀였다.
스파르타 말씨가 아니라 미케네 말씨로 말하는 시녀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어떤 온도의 목욕물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지, 나흘에 한 번씩은 궁전 주위를 돌며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따위에 대해 알지 못했다. 사실 관심도 없었다.
그녀에게 관심 있던 이들은 모두 쥐도새도 모르게 죽거나 패배했다.
헬레네는 잠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자신을 위로하던 아가멤논을 떠올렸다. 혼례를 올리던 날에 자신은 미숙하니 잘 부탁한다며 소극적으로 말하던 메넬라오스도.
그들이 칼을 숨기고 있는지 그녀는 몰랐다. 그 칼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도.
잠시 이 새장을 빠져나가 외부 세력과 일을 도모할 기회. 그런 기회가 다시 한번 날아갔다.
신뢰하던 가신들과의 대담이 함정이었다. 그들 역시 메넬라오스의 꼭두각시였으니.
“발디딜 곳이··· 없어···.”
역시 소리 없는 속삭임. 자기 이외에는 누구도 듣지 못할 메아리.
“말할 수가 없어···.”
그녀의 목 아래에서부터 뜨겁고도 거치른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녀는 자존심으로 그것을 꾹꾹 눌러담으려 애썼다.
오랜 벗들을 떠올린다. 충성스럽던 가신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매와도 같던 시녀들을 떠올린다.
다시 변절한 벗들을 생각한다. 숙청당한 가신들의 최후를 생각한다. 아마 지금쯤 어딘가에서 들짐승들에게 파먹혔을 시녀들을 생각한다.
“···아빠.”
아빠가 살아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어. 아빠가 살아있었다면 이렇지 않았을 거야.
그런 말은 공허했다. ‘아빠’가, 틴다레오스가 직접 고른 남편이었다. 그는 언니의 남편도 간단히 죽여버리고 그 자리에 아가멤논을 대신 세웠다.
정말로, 그 자상하던 ‘아빠’가 이럴 것도 모르고서 사위를 골라주었을까?
그럴 리가.
하다 못해 이미 죽어 이 세상에 없는 자조차 그녀를 배신했다.
이때쯤부터 뜨거운 기운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그녀의 코로, 눈으로, 온 마음으로 이어졌다.
자존심이 슬픔에 패배했다.
그래서 그녀는 울었다.
물론 소리 죽여서.
문밖에서 문에 귀를 대고 있던 시녀는 조용히 진흙판에다 ‘오늘, 세번째로 여왕이 울었다.’라고 기록했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닌 일상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스파르타의 여왕은 남편이 떠난 동안 자신의 방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고.
그 덕분에 트로이아의 둘째 왕자 파리스는 안심하면서 미케네로 향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에로스? 다른 방법은 찾아 놓았니?] [···조금 있으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은 못 찾았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꼭 저 아이일 필요는 없잖니? 저 아이도 물론 가여운 아이지만, 파리스는 그 어느 여자보다도 자기 반려를 더욱 사랑한단다.] [찾아보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어머니.] [급하단다. 정말로. 내 마음이 그런 게 아니라 저 아이들이 급해.]그리고 그동안 하늘의 신들은 또 다른 일들을 꾸민다.
특히 ‘아름다움’과, 그의 아들 ‘사랑’이.
비원 (3)
“후우, 정말 대단했습니다, 헥토르 형님.”
“그러게 말이다, 파리스. 정말 엄청난 여정이었어.”
“헥토르 형님도, 데이포보스도 함께 보았지만 말입니다. 이번 항해에서 보고 겪은 것들은 저는 평생을 가도 잊지 못할 겁니다. 아마 글로 쓰면 5,700자, 아니 57,000자로도 모자라겠군요!”
“두 분 형님께서 중간에 튀어나온 바다 괴물을 물리치실 땐 정말 멋졌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쪽 발을 절뚝이시면서도 해적들을 그렇게 물리치신 안키세스 님이 정말 존경스럽네요!”
“개인적으로 저도 놀랐습니다, 안키세스 님.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방법으로··· 그 광경을 보지 못한 이들은 평생 후회하게 될 겁니다.”
“하하! 아닐세, 헥토르. 여기 있는 모두가 그 광경을 보지 않았나? 선원들부터 자네들까지. 아마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테니 자네들의 명성도 깊이를 더해가겠군.”
“하하하! 이 항해에 대한 이야기를 못 듣게 될 사람들이 불쌍합니다!”
마지막으로 데이포보스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아마 그 이야기를 못 들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놀랍고도 흥미로운 이야기는 당장 온 아카이아에서 저 트로이아까지 널리 퍼질 테니.
산골에 묻혀살거나 하는 이들이 불쌍할 뿐이다.
그때 안키세스가 어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해적선 3척을 물리쳤는지, 우리가 무슨 괴물을 어떻게 물리쳤는지 영영 알지 못할 테니. 웹소설로 쓰면 10화 분량은 훌쩍 넘겼을 텐데.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아무튼 기나긴 항해를 끝낸 우리는 아르고스의 항구 도시 나우플리아(Ναυπλία)에 잠시 들렀다가, 곧바로 아르고스를 지나 미케네로 향했다.
지금 우리의 앞에 미케네의 성벽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면 다사다난했던 여정은 여기서 끝인 듯했다.
“끝이 아니다. 시작이지.”
내가 안심하여 그리 말하자마자 안키세스는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미케네의 성문 앞에는 성대하게 차려입은 남녀의 무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우리를 응대하기 위해 준비한 대열일 것이다.
낯선 얼굴과 화려한 복식들. 나는 그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다.
“아가멤논···.”
“그 옆에 서있는 여인이 아마 클리타임네스트라 님일 게다.”
“저는, 뵌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결혼한 뒤에 장인장모 님을 찾아뵈어야 했으니까요.”
클리타임네스트라.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죽인 남편 아가멤논을 죽이고, 다시 아들에게 살해당한 비극의 주인공.
“그러면 그 둘 사이에 있는 작은 소녀와 소년이···”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살해한 자식들.
오지 않은 미래, 어쩌면 오지 않을 미래라 하더라도 괜히 소름이 끼쳐온다.
“데이포보스?”
“예, 형님.”
“저 분은 누구인지 알고 있나?”
그리고 아가멤논의 가족들과 함께 서 있는 어느 미청년을 발견한다.
나와 별로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아 보이는, 그러나 어쩐지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고 어두운 인상의 소년 같은 남자.
데이포보스는 내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크게 뜨더니 손뼉을 치며 말한다.
“그렇죠. 형님만큼은 아니지만 저분도 잘생기셔서 눈에 띄지 않습니까? 생각보다도 훨씬 젊고요.”
“···그래, 누군지도 아는 모양이구나.”
“아트레우스의 차자(次子) 되시는 메넬라오스 님 아니십니까?”
···메넬라오스.
따지자면, 파리스의 연적이었던 남자.
‘아가멤논은 자상한 아버지였고, 아이네이아스는 심약하고 소심한 성격이었지.’
그는 싸늘하고도 영혼 없는 시선으로 주위를 훑더니 자연스레 대오에 맨앞에 서 있던 내 쪽을 바라본다. 그렇게 자연스레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서로 목례를 나눈다.
차갑다.
시선에서 사람의 온도를 느낄 수 있다면, 아마 저 메넬라오스라는 인간을 규정하는 단어는 ‘차가움’이 되리라.
나는 거기서 무언가를 눈치챈다.
신화 원전에서 누락되어 있던 수많은 묘사들, 그 비어있는 자리 사이사이를 채우던 의외의 사실들을 떠올린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나는 메넬라오스가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직감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벗들이여.”
우리가 성문 가까이 다가가자 양팔을 벌린 아가멤논이 웃으며 말했고, 그와 함께 왕의 등 뒤에서 거대한 성문이 열렸다.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진, 번영하는 도시가 엿보였다.
아카이아의 배꼽인 미케네였다.
***
화려함은 당연히 아이깁토스보다 아래였다.
정결함도 물론 고도로 발전된 상하수도를 갖춘 안탄드로스보다 못했고.
대신 힘과 자부심이 있었다.
시민들의 얼굴에는 자신들이 한 세계의 중심에서 살아간다는 확고한 믿음이 엿보였고, 곳곳을 돌아다니는 무장한 시민병들은 그 믿음의 증명으로서 시민들에게 환영받았다.
“저기, 파리스다!!”
“강철의 왕자!!!!”
“인어살해자!!!!”
그 환영은 역시 우리에게도 향했다.
트로이아인들은 이제 미케네인들에게 혈맹이었다. 그들이 아카이아의 두목 자리에 앉는 것을 넘어, 아카이아의 심장이 될 수 있도록 해줄 또 다른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저기, 저 헥토르는 여행 도중에 바다 괴물을 단칼에 베어넘겼다 하네!!”
“데이포보스다! 우리 왕의 잘생긴 사위!”
“저기 저 사람이오! 저 사람이 해적들의 공포라는 다르다노스의 군주 안키세스요!”
“아, 그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해적들을 물리쳤다는?”
“그때 저 안키세스라는 사람이 웃통을 벗고 춤을 추기 시작하니 해적들이 일제히 광기에···”
“쉿, 조용히 하시오! 저쪽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잖소!”
나보다는 못했지만 시민들의 관심은 다른 이들에게도 쏠렸다. 특히 트로이아의 후계자인 헥토르와 미케네 왕의 사위인 데이포보스는 더욱 큰 환호를 받았다.
우리 곁에서 걸어가는 아가멤논은 그 모습을 만족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한 노인을 이끌고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트로이아의 벗들이여, 이분이 바로 살라미스의 왕이신 텔라몬이라 하오.”
“···저 머나먼 바다를 건너온 이들에게 인사드리오.”
헤라클레스의 전우였다기에는 너무도 늙고 쇠약해진 노인이 눈알을 또릿또릿 굴리며 인사한다. 그러자 우리 일행의 대표로 헥토르가 나서서 텔라몬에게 예를 갖춰 화답했다.
“살라미스의 위대한 영웅께 경의를 표합니다. 불사조 근위대!”
“예!!!!!!”
“아이아코스의 아들 텔라몬께 함성으로 인사를 올려라!!”
우리 일행은 큼직한 배 4척에 나눠 타고 왔는데, 대강 그 머리수만 따지면 300명 정도 되었다.
그 중 200명이 병사였다.
“우와아아아아아!!!!!!!”
그 중 100명 정도가 지금 소리지르는 불사조 근위대였고.
트로이아에 남은 테오와 몇몇 호위들을 제한 거의 전원에 가까웠다.
우리의 뒤에서 터벅터벅 걸어오던 장정 100명이 소리지르자 텔라몬은 살짝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기선제압용이다.
이번에 재미없는 결과가 나오기라도 하면 곧장 살라미스에서 ‘불장난’을 쳐놓을 수도 있다는 암시를 더한.
텔라몬의 시원찮은 반응을 보던 헥토르는 살짝 웃더니 나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지원사격 요청이었다.
나는 내 등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