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161
오와 열을 맞추어, 마치 어느 나라의 열병식에 참여하기라도 하듯 걸음걸이까지 맞춘 100여 명의 전사들이 나를 뒤따르고 있었다.
하나 같이 강철로 된 무장을, 그것도 모두 똑같은 장식과 상징이 들어간 무장을 걸치고서 그 위에 붉은 망토를 두른 전사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외쳤다.
“자네들은 무얼 하나!! 헤라클레스의 오랜 벗에게 그에 마땅한 경의를 표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자 내 부관 중 하나가 소리를 질렀고, 그들은 갑작스레 멈춰섰다.
“위대한 영웅께 경의를 먼저 표하지 않다니!! 너희들은 누구인가!!”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전사들은 부관의 외침에 맞춰 미리 정해진 문답을 시작한다.
“철쇄대!!!!”
“누구에게 충성하는가!!”
“안탄드로스의 시민들과 그들의 군주에게!!!!”
“그렇다면 그들의 명예를 위하여 경의를 표하라!!!!”
-쾅. 쾅. 쾅.
모두가 똑같은 자세로 방패를, 창을 들어올린 채로 그 둘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미케네의 시민들은 더욱 열광했고, 아가멤논과 그 가족들은 박수까지 쳤으며 모두가 환호를 던졌다.
다만 텔라몬 한 사람만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뻣뻣해진 몸을 애써 풀어낼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헥토르가 가까이 다가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어떠십니까?”
“아··· 어··· 크흠.”
“당신께서는 트로이아와 연이 깊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화답이라 여겨주십시오.”
텔라몬이 헥토르의 의미심장한 말에 뭐라 말대꾸도 못하는 틈에, 우리는 어느새 미케네의 왕궁 내로 들어왔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소들이 꼬챙이에 꽂혀 통째로 구워지고,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착석하여 웃고 떠들었다.
주로 ‘당사자’라 할 수 있을 아가멤논과 헥토르가 좌불안석이 된 텔라몬을 사이에 끼고서 뭐라뭐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안키세스는 연장자인 자신이 오래 붙어 있으면 트로이아의 대표인 헥토르가 권위가 상한다 여겼는지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그의 뒤를 따른 나도 마찬가지로 조용히 연회장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회담이 진행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데···
-헥. 헥.
뭔가 발이 축축하다 싶어 아래쪽을 보자 개가 두어 마리 붙어서 내 발을 핥고 있었다.
갑자기 웬 개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큰 키, 새하얀 얼굴, 말랐지만 근육질인 몸매에, 어쩐지 그늘이 진 무표정.
그가 가까이 오자 개들은 나에게서 벗어나 그에게 달려갔다. 순간 개들을 보는 그의 시선에 잠시 무표정이 걷히고 생기가 돌아오는 듯싶었다.
“제 개들이 실례를 끼쳤습니다. 사람을 따르는 아이들이라, 많이 귀찮으셨겠군요.”
“아닙니다.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메넬라오스 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프리아모스의 아들 파리스.”
메넬라오스가 개들을 내려다 보던 시선을 들어올려 나와 눈을 마주친다. 이것으로 두번째였다.
가까이서 본 그는 하얀 대리석으로 빚어놓은 것 같은 미남이었다.
무엇보다도, 대리석으로 빚은 조각만큼 생기가 없다는 점에서 적확한 비유였다.
“···저도 원래는 연회장까지 들이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개들을 데리고서 좁은 곳에 있기 뭐했는지, 그는 연결된 중정으로 빠져나가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제 개들은 저와 떨어져 있는 것을 너무 싫어해서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데려 왔다가 잠시 자리를 비웠더니 그만.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개를 좋아합니다. 한 마리 길렀었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아마 메넬라오스 역시 내게 개가 있었다는 점 정도는 유추해낼 수 있었으리라. 지금 놀라는 척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배려의 일환이었다.
양치기였던 내게 개가 있었을 것은 확실하고 그를 언급하는 것은 내 천한 출신에 대한 조롱이 될 수 있으니.
“예, 그렇습니다. 활달한 녀석이었는데.”
“이 녀석들의 이름은··· 저기 저 녀석부터 에우로스, 보레아스, 노토스라 합니다.”
“서풍, 남풍, 북풍··· 모두 바람의 신들이군요. 동풍은, 그러니까 제피로스는 아직 없습니까?”
그 말에 잠시 메넬라오스는 멈칫거렸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빠르게 웃었지만 나는 그 얼굴에 순간 암울함이 차오르던 것을 보았다.
“이미 죽었습니다.”
“아, 저런.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르던 녀석이라서요.”
“정말 공교롭군요. 저도 어릴 적에 제피로스라는 개를 한 마리 길렀었는데 제가 10살을 넘기고 얼마 안 되어 죽어버렸죠.”
“아.”
순간 메넬라오스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혹시···”
“예?”
“아닙니다.”
메넬라오스는 살짝 흔들리던 얼굴빛을 바꾼 뒤 내게 웃으며 물었다. 이것으로 그의 표정이 급변한 것은 두번째였고, 그가 띄운 미소는 여전히 감정 없는 사교용 미소였다.
“혹시 그, 양부모께서 개를 키우기를 허락치 않으셨습니까? 개가 그렇게 일찍 죽어버리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닙니다. 다행히도 제가 어릴 적에 태어난 녀석이라서요. 노사(老死)였습니다. 행복하게, 잠들듯이 죽었죠.”
“다행이군요. 사람도, 개도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기 어려운 세상인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그제야 정말 부드러운 웃음이 어려 있었다.
“충성스러운 개에게는 충분히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권리가 있습니다.”
“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잘 키운 개가 사람만큼 낫죠?”
“아뇨.”
“음, 예?”
“사람 따위보다 훨씬 낫습니다.”
“···.”
“아, 하하하, 저도 모르게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냈군요. 죄송합니다.”
다시 돌아보니 그의 얼굴에는 원래의 생기 없는 미소뿐이다.
“아닙니다. 즐거웠습니다. 그, 애견인끼리의 좋은 대화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개들이 자주 뛰어다니던데 혹시 침대나 이런저런 가구들 위로도 뛰어오르나요?”
“예, 맞습니다. 어떻게···”
“자꾸 그러면 어깨뼈와 관절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개들이 다니는 주요한 길목마다 경사로를 설치···”
“파리스 님, 헥토르 님께서 부르십니다.”
어느새 중정으로 몇몇 철쇄대원들이 뛰어온다.
아가멤논의 배려 아래 왕궁 안에서도 무장을 갖추고 있었는데, 나중에 미케네의 무사들과 대련도 할 거란다. 텔라몬을 어디까지 밀어붙이려는지 모르겠다.
“헥토르 님께서 상의할 것이 있다고 하시는군요. 일단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저런. 이만 가봐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안녕히.”
“만나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왕이시여.”
나는 왠지 모를 한기를 느끼며 자리를 떴다.
슬쩍 뒤돌아보았을 때는,
메넬라오스가 안 그러는 척하면서 나와 병사들을 매섭게 훑고 있었다.
***
“···.”
고도로 훈련받은 이들의 걸음걸이.
저 아이깁토스와 하투샤의 제왕들도 얻지 못해 안달일 무구들.
그리고 저들의 모든 행위에서 뿜어져나오는 대단한 충성심.
하기사, 자신들의 군주가 살아서 별자리를 만든 영웅이라면 어떻게 존경하고 충성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나. 그런 이가 직접 훈련시키고 끌어모은 전사들이라면 또 얼마나 자부심이 크겠고.
저런 이들이 500명.
도시 몇 개를 문자 그대로 갈아버릴 수 있을 군대다.
‘···저런 병력을, 프리아모스는 좌시만 하고 있다고?’
많은 것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가멤논 형님께서 헤시오네를 반환하겠다 처음 결정하셨을 때, 그를 위해 텔라몬을 직접 압박하겠다 하셨을 때 메넬라오스 자신이 얼마나 반대했었는지 떠올려본다.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중요해도, 아무리 소중해도 그저 노파 한 사람이다.
게다가 아무리 이쪽에서 공을 써도 반환받고 난 뒤에는 그것으로 끝이다.
그녀의 반환을 위해 많은 자원을 쏟아보았자 실질로 트로이아와 미케네 사이에 남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형님이 뭐라 하셨더라?
-“너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구나. 우리들의 그 고약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느냐? 아니면 그분과 서로 죽고 죽이던 형제들을?”
-“프리아모스는 다르다. 그리고 그 아들 헥토르 역시 우리들의 아버지와는 다르다. 그들은 절대로, 우리에게 입게 될 은혜를 배반하지 못할 것이다.”
-“그걸 배신하는 건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배신하는 거나 다름이 없지. 아, 그래. 우리 아버지께서는 스스로든 주위 사람이든 참 많이 배신하셨지만.”
“···.”
여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납득은 했다.
살아숨쉬는 반역의 불씨를 두고서 죽이지 않음만 보아도 그들의 무모함을 짐작할 만했다.
분명 어리석음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지만, 그들에게는 뭔가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트로이아가 오래 갈 수 있을까.”
메넬라오스가 누구도 듣지 못하게 속삭이는 와중에 갑자기 연회장이 시끄러워졌다.
“아빠!”
“이피게네이아!”
자세히 보니 피치 못할 사정으로 따로 출발했다는 조카가 도착한 모양이다. 아이를 낳은 몸이니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며 데이포보스가 여정을 말렸다는 것 같고.
조카사위 데이포보스가 깜짝 놀라 뛰쳐나가고, 그 뒤로 아가멤논과 그 아들딸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가 나와서 이피게네이아를 맞이한다.
“아니,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요? 위험하잖아요!”
“별 호들갑 떨지 말아요. 여긴 제 집인데요. 집에 오는 게 뭐가 위험하다고.”
“언니!!”
“누나!!”
이피게네이아의 다리를 이제는 무거워진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 남매가 끌어안고, 그들을 떼어낸 아가멤논이 이피게네이아의 품에 안긴 아이를 건네받는다.
“고생이··· 많았다. 아들의 이름은?”
“레오니다스. 용맹하게 자랐으면 한다고 하니까 파리스 님께서 정해주셨어요.”
“사자의 아들이라··· 좋은 이름이구나.”
“우리 딸!”
“엄마! 손자 좀 보실래요?”
“나는 손자보다도 네가 더 걱정된다. 얼굴이 반쪽이 된 것 같구나. 어서 앉으렴.”
“엄마도 그렇고 데이포보스도 그렇고 다들 걱정이 왜 그렇게 많아요!”
그렇게 가족들이 웃고 떠들며 즐겁게 대화하자 다른 이들 역시 위대한 아가멤논의 손자가 훌륭한 군주가 되기를 바란다며 축배를 들며 일어나 노래 부른다.
그 모든 왁자지껄한 속에서.
메넬라오스는 천천히 뒷걸음질쳐 멀어진다.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성장
그것 아는가? 춘향가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완창에 최소 대여섯 시간에서 여덟아홉 시간까지 걸린다.
그러니까 춘향이가 그네 타면서 이몽룡과 마주치고 사또에게 수청을 들라며 협박당하다가 어찌저찌 해서 이몽룡과 결혼하게 되기까지를 다 보고 들으려면 영화 3편에서 5편 볼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보통은 그만큼 앉아만 있기도 힘들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그걸 듣고만 있었을까?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김 매고 밭 가는 조선 농민들이, 퇴근하고 책상에서 모니터만 붙들고 4~5시간 정도 끙끙 앓다가 새벽쯤 되어 침대에 누워버리는 21세기의 웹소설 작가보다 건강하기 때문일까?
···물론 그것도 영향을 미쳤을 거란 사실은 명확하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람들이라고 다리가 강철로 되어 있어 앉은 자리에서 최대 10시간까지 가만히 견딜 수는 없었을 테다.
그럼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판소리 완창을 들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완창이란 게 없었다.
옛날로 갈수록 교통은 불편하고 왕래는 어렵다. 일단 소리꾼이 마을에 왔으면 며칠 붙들어 놓고서 막걸리도 먹이고 몇 밤 재우기도 하면서 오늘 이만큼, 내일 저만큼 듣는 것이 원래 판소리였다.
이 시대의 연회도 비슷하다. 나랑 일행들만 하더라도 미케네까지 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데 연회를 고작 하루 하고서 끝내겠나? 며칠씩은 먹고 자면서 머무르게 하는 게 주인으로서의 예의다.
“텔라몬 님, 어디 불편하신 것 있으십니까?”
“···아닐세.”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다시 트로이아의 전사들이 전투 훈련하는 모습이나 구경하시지요.”
“···.”
그러니, 살라미스의 왕 텔라몬을 향한 이런저런 간접 압박 역시 며칠 동안 이어졌다는 소리다.
그동안 나는 자리에 끼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면서 안키세스와 함께 노닥거렸다. 보통은 노는 게 노는 게 아니라, 미케네의 숱한 귀족들과 청년들을 만나면서 인맥을 쌓고 다녔지만.
그래도 역시 가장 고생한 것은 끊임없이 아가멤논이나 텔라몬과 눈치를 주고 받아야 했던 헥토르였고 데이포보스였다.
나와 안키세스는 해봐야 고생 3, 4순위를 다투는지라 별 불만은 없었다.
···다만, 걱정이 있었을 뿐.
“···.”
“저, 텔라몬 님?”
“···.”
겁을 먹은 듯, 위축된 듯 보이는 텔라몬이 왠지 헤시오네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려 할 것 같으면 말을 돌리거나 입을 꾹 다문다. 그것도 며칠째.
그러자 아가멤논과 헥토르도 어느새 그를 압박하다가도 조금씩 조금씩 그를 띄워주고 위로하면서 왜 눈치도 빠른 양반이 좀처럼 입을 안 여나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고.
또 다시 몇 날이 지나쳐가자···
“텔라몬 님, 다름이 아니라 라오메돈의 딸 헤시오네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오, 아카이아의 왕중왕이여?”
결국 아가멤논이 직접 입을 열어야만 했다.
며칠이 지난 뒤의 연회장, 잡담을 나누려 해도 슬슬 화제거리가 떨어져 처음보다 약간 활기가 떨어진 곳.
때가 무르익었다 생각한 아가멤논이 드디어 연회의 목적을 밝히고, 이제 대화를 본론으로 이끌어가기 시작한다.
좌중은 조용히 아가멤논과 텔라몬 두 사람의 입만을 바라보며 긴장한다. 저 멀리서 시종들이 쇠꼬챙이에 끼운 소를 통째로 돌려가며 굽는 끼릭, 끼릭 소리가 날 뿐 사위가 고요하다.
그 상태에서 소극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텔라몬이, 천천히 고개를 쳐든다.
거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천연덕스러운 무표정이 걸려 있다.
이전의 움츠러든 기색은 가면처럼 벗겨져 나간다.
“갑자기 라오메돈의 딸인 나의 전리품에 대해 이야기하니 나는 놀랍기 그지 없구려. 여기 멀리서 온 손님들이 있지 않소? 다른 이야기나 합시다.”
“아니요, 저희도 정확히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흠? 그러하였소?”
텔라몬은 잠시 그 말을 꺼낸 헥토르 쪽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몰랐구려. 혹시 거기 라오메돈의 손자인 데이포보스도 같은 생각인가?”
“···예, 그렇습니다.”
순간 그 자리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는다.
재건자 프리아모스의 아들이 아니라, 굳이 자신이 헤라클레스와 함께 물리친 라오메돈의 손자로서 호칭했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아마 우리에게 긍정적인 것은 아닐 테고.
텔라몬은 표정이 굳은 나를, 그리고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취하는 안키세스와 여전히 흔들림 없는 미소를 유지하는 아가멤논까지 조용히 살펴보고 쓰게 미소짓는다.
“나는 전혀 알지 못했군그래. 나는 그저 그대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려고 여기에 부른 줄로만 알았는데.”
“우리는 모두 왕이고 군주입니다. 어떻게 그러하겠습니까?”
“과연 그런가, 트로이아의 첫째 왕자여? 내 오랜 벗,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것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헤라클레스의 이야기, 하대하는 말투. 모두가 긴장하는 가운데 그는 말을 이어간다.
“며칠씩이나 바보스럽게 자네들 전사가 얼마나 강하고, 자네들 무기가 얼마나 예리하고, 그런 이야기나 나누기에 나는 또 자랑이나 하러 온 줄 알았네만.”
“그 무슨···!”
“데이포보스.”
모욕에 발끈한 데이포보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헥토르가 누구도 보지 못한 사이 팔을 뻗어 그의 손목을 쥐었다. 헥토르는 흥분한 데이포보스를 살살 달래가며 앉힌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가장 당황했을 사람은 우리가 아니었다. 아카이아의 패권을 놓고 도박을 했던 이가 따로 있었다.
“···살라미스의 왕이여, 무슨 말씀이신지 더 들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아가멤논.
그는 용케도 미소를 잃지 않고 텔라몬에게 물었으나, 그 꽉 쥔 손에서 느껴지는 긴장은 이곳에 자리한 모두에게 전해졌다.
텔라몬은 언제 자신이 겁먹은 적이 있었냐는 듯 앞에 놓인 잔을 집으며 말한다.
“말 그대로일세, 젊은 친구들. 헤라클레스는 하룻밤을 보낼 남자를, 여자를 원했으면 거침없이 말했네. 마실 물을, 뜯을 고기를, 창칼을, 화살을, 영토를, 도시를, 왕홀을 원하면 그는 그대로 내게 말했네. ‘이보게, 텔라몬! 당장 손에 넣으러 가지!’
아, 이 잔은 황금이군. 사용이 불편하니 대신 구리 잔이나 쓰겠네.”
텔라몬은 등 뒤로 황금 잔을 던지면서 자리를 박차듯 일어선다.
그 눈에는 이제껏 본 적 없는 격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게 영웅일세. 비겁한 협박과 빙빙 돌리는 이야기는 영웅의 것이 아니야. 이 며칠이 내 인생에서 당해본 적 없는 모욕이었네. 매 순간이 신들과 인간들에게 모욕이었어. 이건 수치일세.”
“아무렴, 평생을 원수에게 끌려가 그 아이를 낳고 노예로 산 이보다 더 큰 모욕을 느끼셨으려고요.”
“하! 자네 고모님을 말하나, 젊은 왕자여?”
데이포보스의 비아냥에 텔라몬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자네의 고모 되는 라오메돈의 딸 헤시오네는 내 노예가 되었을지언정 긍지 있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제 온몸으로 일족을 구했고 나라를 구했지. 헤라클레스를 눈물로, 그리고 용기로 감동시킨 여자는 맹세코 그녀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어.”
“···.”
“여기, 위대한 영웅들이 많군. 아트레우스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여신의 남편···
그 위대하고 현명한 프리아모스의 세 아들들.
한 명은 바다괴물을 단칼에 썰었고, 한 명은 아이깁토스를 불태웠으며, 한 명은 트라키아의 왕과 함께 적들을 죽였다지?”
“실례이나 저는 아이깁토스를 불태운 적이···”
“그래서,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가멤논이 묵직하게 탁자를 두드리며 말한다. 그러자 텔라몬의 눈빛이 일변하여 아가멤논을 노려본다.
“별 것 아닐세. 이 대단한 영웅들이, 당당하게 군대를 이끌고 살라미스에 쳐들어와 나를 죽이고 헤시오네를 되찾아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지 생각하고 있을 뿐.”
···뭐?
“그것이 아카이아일세. 위대한 자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무용과 투쟁심을 드러내어 적들을 굴복시키네.
잘 구워진 빵 따윌 내밀면서 상대에게 조곤조곤 속삭이는 대신, 그 목에 창날을 박아주고서 그가 얼마나 죽을 만했는지 외칠 뿐일세.”
빵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텔라몬은 그의 앞에 있던 빵을 들어 으적으적 씹는다. 그러고는 남은 것은 다시 아까의 잔처럼 어깨 너머로 던져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