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41
“···디오메데스 님.”
“무얼 하고 있었소? 식사 시간에, 그것도 음식을 잔뜩 남기고서.”
살짝 야윈 메넬라오스는 모두의 걱정거리였다. 그러나 메넬라오스는 아르고스의 왕이 던지는 질문에 영혼 없는 웃음으로 반응하다가, 입을 열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디오메데스는 그가 대답을 거부하는 줄 알고 있다가 곧 깨달았다.
메넬라오스가 먹지 않은 생쥐와 사슴의 고기를, 그의 발치에 앉은 개들이 먹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메넬라오스는 그리 답하며 다시 웃었다.
차라리 광물질이 그보다 감정이 풍부할 듯했다.
진실 (1)
“이제야 네 마음이 좀 놓이겠구나.”
“···예. 마음이 놓입니다, 누님.”
프리아모스는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지요. 아군이 이겼습니다.
“그리고?”
“···제 자식들이 모두 살았지요.”
헤시오네는 프리아모스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본다.
“헥토르, 파리스, 데이포보스, 헬레노스···. 누구 하나 죽은 아이가 없습니다.”
만약 패배한다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지만 승리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살아남지는 못 하리라.
프리아모스는 그리 생각하며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마치 큰 죄를 지어 사지가 잘리기를 기다리는 수감자처럼.
한데 천운으로 모두가 살아남았으니 그것이 그의 큰 기쁨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지요. 아직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축하하며 잔치를 열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 기쁨을 힘들게 억눌렀다. 섣불리 기뻐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의 비참함을, 그는 잘 알고 있으니까.
어릴 적 그는, 헤라클레스가 괴물들을 무찔렀을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다. 그가 트로이아를 모조리 불태워버리기 전까지는.
프리아모스는 옛날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았다. 현명한 왕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되씹는다.
“아직··· 멀었습니다. 적들이 많이 남았으니까요.”
프리아모스는 그 말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트로이아는 아직도 적들의 손 아래 놓여 있었다.
몇 번 정도 항복을 권하는 사절을 보내보기는 하였으나, 대답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나마 저 호전적인 아카이아인들이 사절을 죽이거나 상하게 하지 않았으니 낙관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프리아모스는 바보가 아니다.
저들이 하투샤와 손을 잡든, 아니면 하투샤와 트로이아가 서로의 힘을 깎아 먹는 것을 본 뒤 포위망을 빠져나가든, 둘 중 한쪽을 택하는 편이 저들 자신에게는 이로우리라.
프리아모스와 아군들이 위기에 처한 이 상황에서 굳이 고개 숙이고 들어올 필요는 없다.
게다가 하투샤의 대왕이 직접 이끄는 대군이 트로이아의 영역에 입성하였다.
지금 크레타인들과 아마존인들은 해안을 따라 북상한 다음 곳곳에서 진을 치고 있지만 아직 전장은 뚜렷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적들이 움직일 경로를 알지 못해서였다.
‘적들을 당장 공격해서는 안 된다.’
상당한 대군이다. 아무리 철저히 준비했더라도 배후에 안탄드로스를 두고 진격했으니 쉬이 보급을 이어가지는 못할 테다.
그러니만큼 하루라도 더 오래 적들을 아군의 영역으로 끌고 오는 것이 유리하다.
허나 반대로, 너무 오래 끌어서도 안 된다.
적들이 트로이아나 서쪽 해안 근방에 닿는다면··· 아카이아라는 변수가 폭발할 테니까.
아카이아인들이 닿지 못할 곳에서, 적들이 적절히 지칠 만한 곳에서 쳐야 한다.
물론 싸움터를 정하는 것은 공격자다. 특별한 전략적 이점이 주어지지 않는 한 방어자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투샤인들이 어디로 향할지가 곧 핵심이니···
[적들은··· 다르다노스로 향할지어다.]“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 맞았다. 헤시오네는 쭉 입을 다물고 있었고, 방금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가 여성의 것이기는 하였으나 젊었으니.
당황한 그가 올리브 나무를 깎아 만든 의자 팔걸이에 손을 올리자, 곧 팔걸이에서 가지가 자라나더니 그 위에 올리브 열매가 맺힌다.
[지혜의 여신이 트로이아의 왕과 그 동맹 군주들에게 이르노니.]이번에는, 헤시오네의 눈동자 역시 커진다. 그녀 역시 지금 이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윽고 둘밖에 없던 방에 아름다운 여성이 나타나 방금 돋아난 가지에서 올리브를 따다가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한다.
[적들이 다르다노스로 향하기 전에 제압하라.]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형상은 사라졌다.
그리고 여신의 계시를 받은 것은 프리아모스와 헤시오네뿐만이 아니었다.
***
“···보셨습니까?”
“어··· 그래. 안 볼 수가 없지.”
내 말에 헥토르는 갑자기 탁자 위에 자라난 올리브나무 가지를 바라본다.
“아테네 여신께서 말씀을 전하신 게 맞아.”
“이 소식을 당장 알려야···”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내가 급히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헥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팔라스 아테나께서 언급하셨듯 트로이아의 왕과 그 동맹 군주들 모두에게 그 말씀을 전하셨겠지.”
다르다노스.
“해협이 가장 좁아지는 곳이야.”
헬레스폰토스 해협은 우리의 방벽이다. 우리의 수뇌부인 칼리폴리스가 그 너머에 있으니.
“다르다노스를 장악하면 해협을 건너 곧장 칼리폴리아 반도로 향할 수 있어.”
“그렇죠. 그럼, 칼리폴리스 인근에서 까다로운 상륙전을 펼치는 대신, 북쪽에서 상륙한 다음 남하해서 칼리폴리스를 노릴 수 있을 테고 말입니다.”
“여신께서 말씀하신 거라면, 적들의 동태는 이미 살피신 거겠지. 확실할 거다.”
“···다른 것보다도, 다르다노스면 말이야?”
나와 헥토르의 말을 끊고서 이노가 입을 열었다.
“트로이아랑 그렇게까지 멀진 않아.”
“···.”
“···.”
어쩌면 아카이아와 하투샤의 합류도 가능해진다.
메넬라오스, 디오메데스, 네스토르 등이 이끄는 아카이아군과 하투샤가 협력할 수도 있다.
그 사실에 모두가 긴장하고 있자니, 이노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그래도··· 걱정은 덜었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잖아. 애초부터 아카이아인들이랑 하투샤가 서로 합의했다면 위험부담을 감수할 것 없이 트로이아로 직행했겠지. 그 엄청난 장수들이랑 그래도 머릿수만 따지면 수천 명은 넘기는 아군이 생기는데.”
“아.”
그러니까.
하투샤와 아카이아는 지금 긴밀한 협력 관계가 아니다.
우리 쪽에서 보낸 사절을 무시하고 있긴 하지만, 아카이아 역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눈치만 보는 상태란 이야기다.
‘···하투샤랑 간이라도 보는 건가?’
오디세우스 그 새끼처럼?
“뭐요? 왜 날 그렇게 보시오?”
“잘생겨서.”
“···아닌 거 같은데. 물론 내가 잘생기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대의 말이 미심쩍다는 말이오.”
하여간 눈치는 빠르다. 내가 헥토르 쪽으로 눈을 돌리자 그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크흠, 아버지께서도 아카이아인들의 움직임은 알 수가 없다더군.”
“사절을 보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동태를 살펴보았을 텐데요?”
“말단 병사들에게 식량을 찔러주고 속사정을 알아 왔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탈영 않고 트로이아에 남았다면 대부분 충성심이 증명된 이들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
“어땠습니까?”
“의외로 메넬라오스나 디오메데스 같은 이들을 중심으로 잘 단결되어 있었어. 주요한 인사들 사이에 분열도 없고.”
“뭐, 분열될 여지가 있었더라면 그런 인간들은 진작 개별적으로 항복했을 테니까요.”
실제로 이미 많은 아카이아인들이 그리 항복했고 말이다.
지금 아카이아인들이 트로이아에 1만 명쯤 남아있다고 한다. 그것보다 더 줄었을지도 모르고.
원래 3만이 넘었다.
3명 중 2명 이상이 도망치고 떠날 정도로 참혹했던 상황을 지나··· 여전히 저 페허 속에 비참하게들 웅크리고 있다.
왜일까?
저들은 하투샤와 신뢰관계가 구축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에게 항복하려 하고 있거나.
어쩌면 우리가 공멸하는 틈에 운 좋게 빠져나간다는 요행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체 무슨 생각일지 모르겠군.”
“누가 알겠소? 신들조차 우리를 돕는데 아직도 아득바득 버티고 있으니.”
듣고만 있던 필록테테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말이 아니오. 왜 패배한 필멸자들의 의견 따위를 생각하고 계시오?”
내 말을 들은 필록테테스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 말의 속뜻을 깨닫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다른 이들 역시 내 쪽으로 시선을 집중시킨다.
“패배한 ‘필멸자’들 얘기가 아니라면···”
“맞습니다, 형님.”
이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내가 궁금해하는 것은 아카이아의 속내가 아니다.
“대체 장수하는 신들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
지휘관이 왕들에게 고기를 나누어준다. 그러자 왕들은 족장들에게, 족장들은 부족원과 씨족원들에게 각자 몫의 고기를 나눈다.
이는 필멸자들 사이에 왕도, 노예도 없을 적부터 이어진 거룩한 전통이니.
모두가 함께하는 이 식사의 유일한 법칙은 바로 ‘공평’이었다. 가장 고결한 왕부터 징집된 노예 병사들까지 먹는 고기 양의 차이는 해봐야 2배 정도였다.
분배가 끝나자 각자 섬기는 신을 향하여 기도를 올린 다음 곡물과 각종 재료를 넣고 쑨 죽을 목구멍 너머로 넘긴다. 얼마 안 되는 고기 몇 점을 허겁지겁 던져넣고 우물거린다.
슬프게도 이전보다 식량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 진작 많이들 도망치고 굶어 식량이 돌아갈 입이 줄어든 덕이었다.
이전처럼 주린 배로 며칠을 보내거나, 심하면 바다나 산의 잡초까지 뜯어먹을 필요는 사라졌으니 아카이아인들은 거기서 아릿한 위안을 얻었다.
-드르륵.
그러나 한 사람은 여전히 굶주렸다.
메넬라오스는 오늘도 작은 고깃조각 하나를 물어뜯다 만 다음, 곡물을 갈아만든 죽을 입에 넣고 우물거린 뒤 간단히 식사를 마친다.
“이보시오. 이 죽이라도 한 그릇 더 들으시오. 그대는 우리의 지휘관이 아니오.”
“···괜찮습니다. 지휘관이기에 다른 이들에게 나눌 줄 알아야지요.”
물론 디오메데스가 그를 잠시 막아섰지만, 이것도 벌써 수십 번 벌어지는 일이었으니 메넬라오스가 단호히 거절하자 아르고스의 왕 역시 더 붙잡지 않았다.
스파르타의 왕이자 그들 모두의 총사령관이 그렇게 나가버리자, 모두가 잠시 먹는 것을 멈추고 문 쪽을 바라보다 다시 그릇과 고깃조각을 들어올린다.
아무튼 그들은 배가 고팠으니까.
메넬라오스는 그런 그들을 뒤로 한 채 프리아모스의 옛 궁정을 나선다.
한때 부유한 트로이아로 찾아온 손님들을 재웠던 수십 개가 넘는 침실은 이제 왕들의 숙소가 되었고, 나머지 넓은 정원과 공터는 공동 식당이 되었다.
메넬라오스는 그 긴 복도를 나서고, 대로를 건너, 병사들이 재수 없다며 잘 오가지 않는 곳으로 향한다.
불탄 건물들이 즐비한 곳.
큰 화재가 일어났던 곳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왕과 병사들이 어떤 영광도 찾지 못하고 죽어갔더랬다.
그는 그 폐허의 중심지로 향한다.
모든 화재가 시작된 파리스의 궁전으로.
그가 무너진 벽 사이를 넘어다니며 휘파람을 불자, 곧 그에 대답하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짖는 소리가 들린다.
“보레아스.”
그러자 메넬라오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린다.
“나머지는 어디에 있지?”
그의 소중한 동반자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짐승들.
즉, 다른 병사들에게는 먹을 수 있는 고기로 보이리라.
사슴, 멧돼지는 물론이고 한때 고양이와 쥐와 벌레까지 잡아먹던 병사들에게 보이기 죄스러워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개들을 이곳에 숨겼다.
주인의 말을 알아들은 듯 총명한 보레아스는 꼬리치며 뒤돌아 머리로 한쪽을 가리킨다. 거기서 노토스와 에우로스는 무언가 작고 꼬물거리는 것을 핥기 시작했다.
메넬라오스는 그들 사이에 끼어있던 아기 강아지를 들어올린다. 부모가 되어서도 노토스와 에우로스는 메넬라오스를 경계하지 않고 그가 그들의 아이를 끌어안는 것을 확인한다.
“앞으로··· 더 많은 먹이를 줘야겠구나.”
메넬라오스는 지난 수년 동안 지어본 적 없는 환한 웃음과 함께 죽그릇과 고깃조각을 내려놓는다.
충견 세 마리··· 아니 네 마리가 서로 음식을 나눠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원래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러 되돌아간다.
그는 일전에 이곳에서 발견한 어느 특별한 ‘벽’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힘껏 밀었다.
-쿠쿠쿠쿵.
본래 잠금장치가 있어, 사람 한 명의 힘으로 쉽게 열리지 않았을 비밀문은 이제 세월과 불꽃과 메넬라오스의 강력한 완력에 훼손되어 그 뒤의 풍경을 스파르타의 왕에게 보였다.
메넬라오스는 비밀문 좁은 방에서, 다시 바닥에 있는 또다른 문을 찾아 들어올린다.
그러자 그곳에는 어두운 공간으로 통하는 긴 계단 있었다. 메넬라오스가 그 너머로 조약돌을 던져보자.
-툭. 툭. 탁.
하는 소리가 길고 깊게 울렸다.
꽤나 넓은 공간임에 틀림없었다.
사람 여럿이 대피하여 며칠 동안이나 틀어박혀 있기에 충분할 정도로.
헬레네는 저택을 불태운 뒤 이곳에 있다가 탈출했다.
그제야 메넬라오스는 진상을 깨닫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렇게 한참이나 앉아있자니 누군가 그의 어깨를 짚었다.
“메넬라오스야.”
“···네스토르 님.”
메넬라오스가 고개를 돌리니 언제나와 같이 그를 차분히 주시하는 노인의 눈이 보인다.
“이곳에 매일 오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궁금해 따라왔다. 단순히 개들에게 밥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아.”
메넬라오스는 벌써 꽤 오랫동안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깨닫고 쓰게 웃는다.
“빈틈을 보였군요.”
“그런 것은 빈틈을 보였다 하는 것이 아니다.”
네스토르는 그의 옆에 함께 앉으며 말한다. 메넬라오스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런 것은 다른 사람의 걱정을 시켰다 하는 것이지.”
“하하··· 걱정을 시켰습니까?”
“모두가 너를 걱정한다. 모두가 네게 의지하고 있으니까.”
“···.”
메넬라오스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무책임했군요.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니.”
“이유라면··· 오늘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게, 너의 이유였느냐?”
“예.”
메넬라오스는 네스토르가 손가락으로 저 비밀공간을 가리키자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이 근처에서 헬레네 님을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
이번에는 네스토르가 침묵을 지킨다. 그러자 메넬라오스는 이야기를 허락한 것으로 알고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저의 환상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손을 내저었더니 헬레네 님의 영상을 그대로 통과하기에 그저 좌절감에 미쳐버린 제가 보는 환영이라 생각했지요.
네스토르 님, 저는 사실 아직도 형님의 환상을 봅니다.”
-너를 돕기 위해서지.
“지금도 제게 말씀하시는군요. 네스토르 님의 건너편에 서 계십니다.”
그 말에 네스토르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구나.”
“예. 제가 나약한 탓이지요.
하지만 헬레네 님은 환상이 아니었던 듯합니다. 이것이 그 증거지요.”
메넬라오스는 통로의 어둠 속으로 손을 뻗는다. 그러자 먼지가 굳어 만들어진 발자욱이 만져진다.
“이곳에서 헬레네 님을 봤던 날과 헬레네 님이 칼리폴리스에 도착한 날 사이의 간극이 크지 않습니다. 아마 제가 그분을 환상으로 여긴 건 어느 신께서 도우신 덕이겠죠.”
“그래서 후회되느냐? 그때 스파르타의 여왕을 사로잡지 못한 것이?”
“아뇨.”
메넬라오스는 문득 고개를 쳐들고서 웃옷을 벗어던진다. 크게 거슬린다는 듯이.
그러자 날붙이와 불꽃으로 흉터가 남은 창백한 어깨 위로 별빛이 쏟아진다. 그의 짙은 눈동자 위로 하얀 별빛이 점점이 박힌다.
“제가 후회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더냐?”
“저의 추함입니다.”
“추함?”
네스토르는 메넬라오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다. 그러자 돌멩이를 던진 연못 위에서 흔들리는 나뭇잎들처럼 그 눈에 담긴 별빛들 역시 좌우로 출렁인다.
“제가 헬레네 님께 너무 추하게 굴었습니다. 저는 제 광기가 빚어낸 환상인 줄 알고 자포자기하여 헬레네 님께 칭얼거렸습니다. 후회한다면서, 사죄하고 싶다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너의 본심이 아니더냐?”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었습니다.”
갑자기 메넬라오스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자 네스토르는 흠칫, 몸을 젖혔다.
“죄 지은 이는 사죄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이는 결코 사죄해서는 아니 됩니다.
용서를 고민할···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