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57
하필 중요할 때 소란을 떨다가 문짝을 부숴 먹은 탓에 그다음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지 못하게 되었다.
“결혼을··· 안 한다. 스파르타의 여왕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들은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럴 만한 무게를 지닌 말이었다. 오디세우스는 방금 자기가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겼다.
“···페넬로페, 어째야 하겠습니까?”
“뭘 어째요?”
“헬레네 님의 방으로 잠입해 들어갈까 하는 말입니다. 아니면 귀라도 심든가요. 대강 그 방의 호위들 중 디오니소스 신도가 섞여 있는 걸 아는데 남들한테 알린다 협박하고서···”
“오디세우스! 너무 못됐잖아요.”
“···.”
“···하지만 좋은 생각이에요. 근데 저라면 중요한 얘기를 하면서 호위를 가까이에 둘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기각입니까?”
“예. 다른 좋은 방법 없어요?”
오디세우스는 장인어른이 이 대화를 들었더라면 속이 찢어졌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면 속이 찢어진 김에 겸사겸사 미운 사위를 찢어놓았을지도 모르고. ‘망할 사위 놈이 내 딸을 물들였다!!’ 따위 소리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역시 이카리오스의 생각은 틀렸다.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를 물들인 게 아니라,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죽이 맞아서 결혼까지 간 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디세우스의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만약 오디세우스가 파리스에게 자기 생각을 공유했다면 파리스 역시 동의해 주었을 것이다.
아무렴 저택의 구혼자 100여 명을 죄다 죽인 피투성이 남자가 칼 들고서 자기가 20년만에 돌아온 남편이라고 주장하는데, 거기서 진짜 남편인지 시험해보겠다고 생각한 사람 아닌가.
진짜 남편이 아니라도 결혼해야 할 상황에서, 겁도 안 먹고 잔대가리부터 굴린 사람이라면 그럴 만했다.
아무튼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해보다 결국 헬레네의 방으로 침투할 수 없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어쩌면 헬레네가 좀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한 걸 수도 있고, 확실한 건 없죠.”
페넬로페의 입은 그리 말했지만, 이미 눈빛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사촌 헬레네의 말이 농담이었을까? 가볍게 던져본 말이었나? 아니면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 하더라도 가능성에 불과했을까?
아니다.
페넬로페는 오랫동안 헬레네와 함께 자랐다. 헬레네에게는 친자매인 클리타임네스트라만큼이나 그녀가 익숙하고 친근할 것이다. 페넬로페 역시 그랬다.
헬레네가 어떤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정도는 페넬로페 역시 알고 있었다.
“정말 확실하지 않은 것 같습니까?”
그렇기에 오디세우스가 그리 물었을 때 페넬로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분명하게, 헬레네는 재혼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원인까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무리 설득해도 쉽사리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알았다.
확실한 정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정치적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이 정보는 머지않아 주위에 은밀히 공유될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헬레네 본인이 알 필요가 있다 여기는 이들에게는 빠르게 알려지리라.
즉.
“팝시다.”
“잠시만요.”
빠르게 정보의 값어치가 줄어든다는 의미다.
헬레네의 정보를 팔아넘기자는 오디세우스의 말을 빠르게 쳐내며 페넬로페는 눈살을 찌푸렸다.
“헬레네는 저를 친자매처럼 아껴요. 그런데 이런 소식을 어떻게 중요하지 않은 남한테 팔아넘겨요?”
“···.”
“···.”
부부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선에도 점성이 있다면 아마 두 사람의 눈은 이미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서로 착 달라붙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팔아넘기는 게 아니에요.”
“‘그분’이 중요하지 않은 남도 아니고요.”
두 사람은 더 망설이지 않고 ‘그분’에게 향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 정보를 가장 손에 넣고 싶어 할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이 앞으로 빚을 지워둬야 할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예, 그러합니다. 위대한 트로이아의 왕이시여.”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는 프리아모스에게 헬레네의 정보를 팔았다.
죄책감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파리스는 오디세우스에게 가족 같은 벗이다. 파리스의 의향은 묻지 않았지만 그 역시 오디세우스와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넓게 보면 프리아모스는 가족 같은 사람이다. 가족에게 가족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데 ‘팔았다’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이상하다. 그러니까··· 그냥 넘긴 것이다.
호의의 표시로. 물론 프리아모스가 더 큰 호의로 보답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런 건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생각지도 않아도 프리아모스가 알아서 챙겨주리라 믿는다.
‘가족 같은’ 사이니까.
“···.”
프리아모스는 안 그래도 복잡해진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나니 어지러울 것 같았지만 꾹 참고 고개를 숙였다.
“귀한 소식을 전해주어서 고맙네.”
“아닙니다. 왕중왕께서는 저희와 혈맹 아니십니까?”
“···.”
프리아모스는 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두 사람을 어떻게든 내보내면서 깊은 고민에 빠질 뿐이었다.
그는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늙은 환관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파리스를 데려오게나.”
그 아이에게 전해줘야 할 이야기가 생겼으니.
***
헬레네는 페넬로페의 예상대로 호위병들을 비롯한 모든 사용인들을 방 바깥으로 내보냈다.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닫았고, 복도 바깥으로 스무 걸음 안으로 사람이 없도록 명령해놓았다.
이카리오스와 페리보이아 둘 모두 이건 좀 과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그들은 착하고 순진무구한 자기 딸은 믿어도 딸을 바다 밖으로 데리고 도망친 사위는 믿지 못했다.
결국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보안을 신경쓴 다음, 헬레네는 어둑해진 실내를 밝히려 등잔불을 켰다.
-화륵.
작은 불꽃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니 세 사람의 얼굴이 어슴푸레하게 비쳐온다. 어쩐지 비밀스러운 분위기에 그들은 목소리를 죽였다.
“이 전쟁은··· 스파르타의 여왕인 저를 두고서 일어났어요. 제가 이 전쟁을 일으킨 거죠.”
“그게 무슨 말이냐. 메넬라오스, 그 저주받은 작자의 짓이지.”
“표면상의 명분을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어디까지나, 명분은 헬레네였다. 헬레네의 존재로 말미암아 아카이아의 수많은 나라들이 수월하게 합류하여 정벌을 떠날 수 있었다.
한쪽은 스파르타의 여왕의 ‘도주 행각’을 비난하면서 다음 그녀의 정통성을 부정했다.
한쪽은 그녀의 ‘망명’을 받아들이고는 그녀의 신변 안전과 정당한 권리를 보호해주겠다며 나섰다.
그리고 후자가 승리했다.
필연적으로, 전후처리에서 헬레네의 왕위와 왕권에 관한 문제는 핵심적인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에게는 후사가 없어요. 아, 생각해보니 이제 반려도 없네요. 땅 밑에 묻어버릴 예정이죠.”
당연하지만, 헬레네가 쓰디쓴 웃음과 함께 뱉은 농담에 이카리오스와 페리보이아는 웃지 못했다.
그러나 헬레네의 말은 사태의 핵심을 꿰뚫었다.
헬레네에게는 후사가 없다.
고로, 그녀 이후로 이어질 안정적인 왕권에 대한 확신도 없다. 미래의 불확실성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을 불안케 한다. 스파르타의 정국이 쉬이 안정되지 않으리라.
헬레네에게는 또한 반려가 없다.
즉, 그녀와 함께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묶일 동맹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 ‘동맹’이란 게 메넬라오스의 사례에서처럼 무의미해질 수는 있지만, 그는 특이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혼인을 통해 하나의 가정으로 묶인다. 두 사람의, 두 가문의 재산과 영광을 둘 사이에서 나온 자식을 통해 합친다.
그 모든 과정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우호관계를 확고히 하는 강력한 기제가 된다.
단숨에 강력한 권위를 손에 넣었으면서 혼인한 상태가 아닌 헬레네에게 쥐어진, 매우 효과적인 무기이기도 하고.
헬레네는 스파르타의 어느 유력가와 혼인하여 그들을 왕가(王家)로 만들어줄 수 있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스파르타 내부의 권력 구도를 완전히 재편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왕이나 왕자와 혼인을 통해 새로 동맹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녀가 활용할 수 있는 외부세력을 얻는 것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헬레네는 그 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 어째서니?”
페리보이아의 질문에 헬레네는 비릿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제가 스파르타 내부에서 혼처를 찾을 이유가 있나요? 어차피 스파르타의 귀족 가문들은 이 전쟁에서 많이들 무너져내렸는데. 굳이 스파르타의 정계를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왕이나 왕자와 결혼하는 것은?
그 질문에도 헬레네는 고개를 저었다.
“동맹이 생기는 것도··· 끌리기는 하지만 원치 않아요. 제가 원치 않을 뿐 아니라 트로이아도 원치 않을 거예요.”
“트로이아··· 말이냐.”
“네, 이카리오스 님. 제가 프리아모스 님이라면 스파르타의 여왕이 다른 나라와 혼인 동맹을 맺는 게 곱게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아요.”
“네 결혼 상대를 정하는 것은 네 자유고 권리다! 트로이아의 왕중왕은 명예롭다. 네게 간섭하지 않을 게야.”
“하지만··· 불편해 할 수는 있잖아요? 트로이아와 스파르타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고요.”
트로이아가 스파르타의 여왕을 다시 옹립하였다.
그 사실이 두 가문을 묶어내면서 이루어지는 강고한 연결과 유대.
그 사이에 다른 누군가를 끼어들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트로이아는 이제 에게 해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다. 하투샤를 무너뜨렸고,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동원 가능한 외부세력?
트로이아 같은 강대국과의 혈맹을 약화하면서까지 얻을 이익치고는··· 보잘것없다.
“그러니까, 어쩌면 제가 혼인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단순히 혼인하지 않는 상태로 머무르는 게 아니라, 혼인하지 않겠다고 못박아두는 쪽이 괜한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헬레네는 아버지 틴다레오스가, 자신을 도구처럼 구혼자들 앞에 전시하고 팔아 넘기려 했던 그때를 기억해낸다.
틴다레오스와 아가멤논이 야합하여 이미 혼인 상대를 정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스파르타의 궁정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아카이아 최고의 미인과 스파르타의 차기 왕위를 가져다 줄 혼인을 얻어내기 위해 여러 나라의 왕과 왕자들이 칼을 뽑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니, 못박아야만 한다.
꿈도 꾸지 말라고.
“···어떤가요?”
“···.”
“···.”
“물론 제가 후계자를 따로 정해 놓기는 해야겠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마음은 정해놓았어요. 제 생각을 들려드리면 두 분도 기뻐하실지 몰라요.”
“···.”
“···.”
헬레네는, 두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을 본다. 그들의 눈이 혼란감에 흔들리고, 그들의 바싹 마른 입술이 열렸다가 다시 닫힌다.
그녀는 두 사람이 거세게 반대하리라 생각했다. 너무 위험한 결정이라고, 잘못 처신하다가는 기댈 곳 없이 그대로 트로이아에 종속될지 모르는 일이라고.
아니면 고민 끝에 찬성해주거나. 눈물을 흘리든, 어떻든 간에 자신의 결정을 믿고 지지해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반응은 둘 중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뭔가 꺼내야 할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직 이야기되지 않은 부분이 있지 않냐고 묻는 것 같았다.
“···.”
그 반응에 헬레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헬레네.”
마침내 고민을 마친 이카리오스가 입을 열었다.
“스파르타의 가문들과는 결혼할 필요가 없고, 다른 왕가들과는 트로이아와의 관계 때문에라도 결혼해야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예.”
“그러면··· 말이다.”
이카리오스가 헬레네와 눈을 마주했다.
“트로이아의 아직 혼인하지 않은 왕자와 결혼하면 되지 않···”
“잠시만요.”
그녀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차마 끝까지 들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헬레네가 고개를 돌렸을 때, 이카리오스와 페리보이아는 충분한 대답을 얻었다.
그녀는 트로이아의 왕자와 혼인할 수 없었다.
그 가문의 다른 누군가와 결혼하고서, 고개를 들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힘을 주는 동맹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녀의 영혼에 채워질 족쇄가 되리라.
헬레네의 숙부는 그 소문이 사실임을 알아챘다.
···그래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헬레네는 떨리는 두 손을 맞잡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저는··· 자유롭고 싶을 뿐이에요.”
스파르타의 여왕은 그 말 한마디를 꺼낼 뿐이었다.
여왕 (3)
피비린내 나는 반역과 찬탈과 근친 살해의 이야기는 세상 어디에서나 들려온다. 아트레우스와 그 형제, 자손들이 피로 써온 역사가 유독 끔찍할지언정 ‘독창적’이지는 않았다.
스파르타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바로 한 세대 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아마 스파르타의 어느 골목, 아주 구석진 어딘가에는 그날에 생긴 핏자국이 비바람에 씻겨나가지 않고 검게 말라붙어 남아 있을지 모른다. 마치 오래된 흉터처럼.
스파르타의 왕 페리에레스가 죽자 그 아들 틴다레오스가 그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스파르타와 다른 여러 도시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그의 혈족 히포콘이 그의 왕위를 찬탈했다. 그에게도 정당성과 권리가 있었다. 그 역시 스파르타의 왕족이었으니까.
새로운 왕은 틴다레오스와 더불어 그의 형제이자 친우였던 이카리오스 역시 추방했고, 그렇게 고향 없는 떠돌이가 된 두 사람은 각지에 몸을 의탁했다.
순리대로라면 그들은 그렇게 외진 변방을 떠돌다가 죽어야만 했다. 힘이 없고, 기회를 얻지 못했기에 그들은 복수를 꿈꿀 수조차 없어야 했다.
-“그 개자식이 나를 적으로 돌렸소. 제 분수를 모르는 놈이지. 아마 그대들 역시 히포콘이라는 작자를 씹어먹고 싶어 할 터.”
그러나 그들의 앞에 순리를 뒤틀어버리는 존재가 나타났다.
신들조차 두려워하는 가공할 힘과 함께.
-“그놈은 나를 적대하는 넬레우스의 편을 들었고 내 사촌을 죽였소. 심지어 찬탈자이기까지 하지.
보시오. 나의 뒤를 따르겠소? 아니면, 구차하게 삶을 유지하면서 겁쟁이처럼 숨어있겠소?”
알크메네의 위대한 아들 헤라클레스.
그들은 그의 뒤를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여러 나라를 부수고 여러 군대를 짓밟은 그의 완력과 영광이 그들 형제를 홀렸다.
그래서 무장을 갖추고 위대한 영웅의 뒤를 따랐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 살려주시오, 제우스의 아들이여! 제발!! 내 아들들만이라도!!”
그는 단숨에 군대와 군대가 맞붙어 싸우는 틈에 단숨에 스파르타의 궁정까지 쳐들어가서는, 히포콘의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자르고 무릎 꿇렸다. 그 고통과 압도감 속에서 반쯤 미친 히포콘이 자식들의 목숨을 구걸했다.
분명 원수가 고통받는 즐거운 광경일 텐데, 그 모습을 보고 이카리오스는 겁에 질려 몸이 굳어버렸다.
-“이보게, 스파르타의 ‘정당한’ 왕이여. 찬탈자를 무릎 꿇렸네. 기분이 어떤가?”
하지만 틴다레오스는 달랐다.
-“···짜릿합니다.”
-“저자가 아들들을 살려달라 하는군. 불충과 반역의 씨앗을 말일세. 어찌할 것인가?”
내심 이카리오스는 틴다레오스가 자비를 베풀리라 믿었다. 적어도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히포콘 역시 그들을 죽이지 않고 추방만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틴다레오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반역자가 왜 살아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 말에 헤라클레스는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틴다레오스 역시 따라 웃었고, 히포콘은 그 웃음소리에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리다가 기절했다.
그렇게 피를 흘렸으니 아마 기절한 채로 죽었으리라. 이카리오스는 내심 그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헤라클레스와 틴다레오스가 히포콘의 아들들을 몰살했으니까. 히포콘의 집권을 도운 20명의 아들들 중에서 살아남은 이는 없었다.
그 모두의 죽음을 보고 나서야, 틴다레오스는 구토를 내뱉던 이카리오스의 등을 두드리며 알현실로 향했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왕좌에 앉아 헤라클레스와 다른 장수들의 만세성을 들었다.
그렇게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을 때 이카리오스의 형제 틴다레오스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왕위에 앉은 채 그는 기뻐하며 이카리오스에게 말했다.
-“왜, 모든 족속과 시대에서 형제자매를 범하고 부모자식을 죽이는 이들이 나오는지 아나?
신처럼 영원히 살기 위해서일세.”
그의 눈에는 피비린내 나는 광기가 엿보였다.
-“사람의 몸은 언젠가 재와 먼지로 흩어질 뿐이지만··· 피에서 피로 이어지고, 이름에서 이름으로 이어지는 영광은 영원히 살아숨쉬네.
이카리오스, 히포콘은 영원히 죽었네. 내가 그의 혈통과 이름이 이어지지 않도록 그 빌어먹을 핏줄들을 모조리 죽여버렸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영원히 살 걸세. 신들의 축복 속에서 말일세.”
그랬던 그가, 그의 자식들이 제우스의 혈통을 이었다고 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도 기억한다.
그가 해산 중인 레다의 앞에서 소리지르면서 그녀가 낳은 알들을 내던져버리려 했던 것도 보았다.
낯선 침입자가 그의 ‘영생’을 도둑질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감히 항의할 수조차 없는, 강대한 신들의 왕 제우스가.
그나마도 그의 아들이라 할 수 있을 카스토르는 형제 폴리데우케스와 함께 살해당하고, 그의 딸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다른 나라의 여왕이 되었으니.
유일하게 남은 헬레네는 그의 혈육이 아니었다.
“···그다음부터는 저도 잘 아는 이야기네요.”
“그렇···겠지.”
헬레네는 이카리오스의 긴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지난날의 기억을 되짚어본다.
틴다레오스는 좌절했다. 자신의 핏줄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야만 했으니 이카리오스 말마따나 그의 ‘영생’을 도둑질맞은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좌절을 딸에 대한 냉대로서 풀어냈다.
왜 하필 나였을까? 분명 아버지는 알에서 나온 다른 형제자매들에게도 차가웠지만, 자신을 향한 냉대는 유독 강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래도 아버지의 딸이기는 했으니까. 그나마도 아가멤논을 지원해 그녀의 원래 남편을 죽여버리기는 했지만.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 두 오빠는 강하고 신들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감히 건드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헬레네는 아버지의 딸도 아니고 약했기에, 그 모든 냉대를 한몸에 받아야 했다. 아버지는, 페리에레스의 아들 틴다레오스는 비겁했다.
헬레네는 그 쓰디쓴 과거를 곱씹다가, 이카리오스의 말에 주의를 돌린다.
“···프리아모스의 다른 아들 중에서 결혼 상대를 찾지 못하겠다면, 네 뜻을 존중하겠다.”
“···.”
“하지만 가문의 이름은, 이어지는 혈통은 내버려두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다. 그 문제로 수많은 왕국이 피로 물들었고, 스파르타 역시 그랬다.”
“저도 알아요.”
헬레네는 그 긴 세월 동안 이어진 비극의 의미를 잘 알았다.
아버지가 무엇에 집착했는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집착했는지도.
그 집착의 의미는 수십 년 동안 그녀의 살과 피에 새겨져 있었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의 눈빛 역시 아버지와 비슷한 광기로 불타오를 때가 많았다.
핏줄, 가문.
이것들은 단지 이름일 뿐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하다.
헬레네가 재혼하지 않겠다 선언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스파르타는 요동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