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6
36화. 고뇌
“아직도 스클레오스 님이 제조하는 철괴를 주문하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아, 뭐 그렇소만···.”
“무슨 생각이시오? 아직도 관망만 하고 있다니?”
“지금 저 교외의 대장간에서는 강철을 그냥 삽으로 퍼서 나눠주고 있소. 마치 흙처럼!”
“지금 철괴 값이 한창 쌀 때란 말입니다. 곧 왕도에 대량으로 물량을 푼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미리 쟁여놔야지요!”
당연히 헛소문이다. 하지만 그 헛소문 덕에 이 작은 도시에 경제적 열풍이 분다.
누군가의 인위적인 개입 덕분이리라. 아마 개입의 주체는 우리 사업에 투자한다던 귀족들일 테다.
아주 좋아.
“흐, 흐흐흑··· 흐흑···”
“너 뭐해? 왜 웃다가 울다가 해?”
“···기뻐서.”
그리고 전생에는 지지리도 못 벌다가, 환생하고 나서야 이렇게 되는 게 서러워서.
역시 취직 못하는 문과들은 죄다 과거로 환생시켜서 행복한 이세계 라이프를 즐길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이노, 이게 다 네 덕분이야.”
“맞아! 내가 좀 애 썼지!”
그렇게 말하며 기고만장해진 이노가 나를 내다보지만, 밉지가 않다. 아니, 미울 수가 없다.
이노가 아니었다면 정말 나는 그 날로 에게 해 수온이나 몸으로 측정하러 갔어야 했을 테니.
트로이 전쟁? 아, 그냥 다 망하는 거다. 분노한 신들을 무슨 수로 이기냐. 그것도 아가멤논이 비겁하게 한 놈 때리러 친구들 다 데리고 오는데.
그러나 사악한 동네 일진 아가멤논은 이제 강철로 무장한 트로이아의 군대에 쓰러질 것이다.
그리스 여포 아킬레우스가 깽판 칠 건··· 나중에 생각하고.
남은 문제들이 있다.
고개를 돌리자 반쯤 감긴 눈으로 날 조용히 응시하는 테오 형이 보인다.
“형? 뭐야, 벌써 시간 됐어?”
“당연히 먼저 가 있어야지. 넌 노예고 아노이토스 님은 자유민이야. 기다리게 할 셈이야?”
“하기사···”
“네 남자친구 좀 빌려갈게. 괜찮지?”
“너무 오래 데려가지 마!”
이노를 달래준 뒤 나와 테오 형은 한참을 걸었다.
안탄드로스로.
걸으면서, 나는 테오 형을 흘끗흘끗 바라본다.
아무래도 테오 형이 가장 큰 변수란 말이지.
프리아모스 왕이 테오 형의 보고 내용에 따라 예상 외의 움직임을 보인다면 나로서는 계획이 크게 어그러진다.
그럴 일은 없겠다만, 만에 하나 왕도에서 사살 명령이라도 떨어지면?
끝장이다.
‘반드시 포섭해야 될 대상인데···’
“파리스.”
“어, 으응?”
테오 형의 웃음은 평소 같았고, 경쾌한 발걸음도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뭐야, 왜 그래?”
“응? 뭐가?”
“갑자기 왜 그렇게 예전처럼 살가워졌지?”
“이건, 뭐, 그런 거다.”
테오 형이 단검을 가볍게 빼들었다가, 다시 칼집에 집어넣는다.
“깨달은 게 한 가지 있는데.”
가벼운 한숨.
“어차피 감시한 내용을 써서 트로이아로 보내봤자 소용이 없겠더라고. 차라리 무술이나 가르쳐주면서 옆에 붙어 있는 게 낫지 않겠냐?”
그 얘기를 듣자마자 안심한 내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래, 잘 생각했···”
“대신, 스틱스 강에 맹세해라.”
테오 형이 말한다. 여전히 보폭은 줄지 않았고, 표정도 변함이 없다.
“절대로 트로이아의 왕과 왕비, 그리고 왕자와 공주들의 지위를 뺏거나 그들의 생명을 위협해서는 안돼.”
“스틱스 강?”
“그래.”
어··· 뭔가 불길한데.
그리스 신화 속에서 스틱스 강의 맹세는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신조차도 스틱스 강에 맹세한 내용은 반드시 지킨다.
대체 저 맹세를 어겼을 때 무슨 처벌을 받게 되길래 다들 그리 두려워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할 거야, 안 할 거야”
“···.”
“만약 네가 맹세하지 않는다면 무술 수련도, 더 이상의 협조도 없어.
당연히 나는 바로 트로이아의 왕께 ‘불충한 생각을 품은’ 왕자에 대한 보고를 올릴 거야. 그 다음 일은 나도 통제 못해.”
“그래, 알겠어. 맹세할게.”
“스틱스 강에 대고.”
“스틱스 강에 대고.”
이렇게 거창하게 맹세까지 했건만 크게 느껴지는 건 없었다.
신을 직접 만났을 땐 무슨 코에 최루탄 뿌리는 기분이고, 도망가려고 할 때는 온세상이 멈추더니··· 이건 악명에 비해 꽤나 심심한 결과다.
나는 고개를 들어 테오 형을 올려다 보았다.
“이제 된 거야?”
“그래.”
“정말 이걸로 전부?”
“다른 방법이 뭐가 있기는 한가? 넌 왕자고, 나는 그냥 무사인데.”
테오 형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뭐가 됐든 간에 돕겠어. 내가 너랑 같이 트로이아를 멸망시킨 반역자로 남게 될지도 모르지만···.”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그냥 푸념해본 거다.”
“절대로. 그렇게 될 일은 없을 거야.”
생각보다 싱거웠지만, 테오 형은 포섭이 된 것 같았다.
슬슬 전쟁이 가까워진다.
순간순간이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것이 두렵다. 지금 낭비한 몇 초 때문에 나중에 내가 화살에 맞아 쓰러질까봐.
지금 테오 형의 발길질에 정강이가 나간다면 치료받을 수 있겠지만, 전장에서는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지리라.
전쟁이란 게 정말 나기는 할까? 벌써 이렇게 역사가 뒤바뀌었는데 그대로 전쟁이 날까?
그런 잡념 위에서 걸어올라가니, 금새 아노이토스의 저택이다.
대문도, 담장도, 생울타리도 모두 멀쩡히 재건되어 있었다. 하기사 그 옛날의 난리가 벌써 3년 전이니.
문이 열리고, 폴레몬이 우리를 무뚝뚝한 표정으로 반긴다.
“마침 아노이토스 님께서 너를 기다리셨다. 응접실로 가지.”
곳곳에서 이전에 왔을 때보다도 많은 고용인들이 더 북적이며, 더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네 덕분이라고 아노이토스 님께서는 기뻐하신다. 철괴가 대량으로 쏟아졌으니 이제 이 근방의 풍경도 꽤나 변하겠군.”
“이 근방만 바뀌지는 않겠죠.”
“···어린아이가 욕심까지 많으니.”
폴레몬은 그렇게 작게, 그러나 만족스럽다는 듯 중얼거리며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아노이토스가 예의 기다란 소파 위에 축 늘어진 상태로 고용인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델로스 근처의 귀금속 관련 무역망에 접근할 때입니다! 헤파이스토스 님께서 사랑하는 성지라고 그간 델로스인들이 얼마나 교만하게 굴었습니까?”
“안 됩니다. 스클레오스 님께서 분명히, 단호하게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해로를 사용하면 곧바로 교역은 중지입니다! 중지!”
“앞으로 이 근방에서 올리브 값이 대폭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미리 압착기를 구입해 올리브 풍년을 대비하는 것이···”
“크흠, 아노이토스 님.”
아노이토스에게 잠깐의 쉬는시간도 남겨두지 않으려는 듯 전투적인 기세로 달려들던 그들은, 폴레몬의 제지와 함께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사라진다.
“아, 폴레몬. 덕분에 살았어.
아버지가 붙여두신 다른 사람들은 쉬고 싶다고 해도 ‘도련님께서는 아직 다 배우지를 못하셨으니’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사람 숨 쉴 틈을 안 준다고.”
“그야 도련님께서 아직 주인님처럼 강인하고 굳세고 뛰어나지 못하시기 때문이겠죠. 장차 가문을 물려받으실 뿐이니 지금은 배움에 전념하셔야 합니다.”
“하아아아··· 괜히 얘기를 꺼냈어. 무슨 일이야?”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어딨지? 아!”
그제서야 시선 아래서 조그만 남자애가 꿈틀거리는 게 보인 건지 내 눈을 마주치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며 맞이한다.
“파리스? 너도 왔구나!”
“안녕하십니까, 아노이토스 님.”
“네가 많고 많은 손님 중에서 가장 편하지. 어서 앉아. 테오, 자네도 앉게.”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테오 형이 내 자리 옆에 앉아 아노이토스를 마주보았다.
아노이토스는 지친 듯 머리에 왼손을 올리고는 오른손으로는 끊임없이 꿀에 절이다시피 한 견과류를 입에다 집어넣고 있었다.
“원래 요사이 일이 많을 때가 아닌데··· 네 덕분에 할 일이 산더미가 됐다.”
“하하하.”
“아무튼, 뭐 일이 없는 것보다야 일에 치이는 게 낫지. 무슨 일로 왔지?”
말 그대로 ‘가장 편한 손님’을 대하는 아노이토스의 태도는 격식을 따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앞뒤는 다 자르고 결론만 이야기해주겠어? 곧 있으면 또 내가 부두 쪽으로 시찰을 가야 하거든.”
“그러면, 지금 진행 중인 큰 사업이 있으신가요?”
“딱히 없어. 스클레오스 님과의 거래 빼고는. 아주 쏠쏠해. 넌 아주 복덩이야, 복덩이.”
“그러면 사업 하나만 더 벌여보죠.”
약 2초 정도의 짧은 정적이 이어진다. 아노이토스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아, 스클레오스 님께서 또 뭔가를 생각해내셨나 보구나! 이번에는 뭐, 돌멩이를 청동 주괴로 바꾸는 기적이라도 부리신다니?”
“하하···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라고?”
아노이토스의 고개가 갸우뚱한다. 나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저희에게, 투자해주십시오.”
“···뭐? 투자?”
아노이토스의 목소리에서 약간 당혹감이 느껴진다.
확실히 폴레몬이 더 배워야한다고 했던 이유를 알겠다. 만약 아버지 카시우스였다면 눈도 깜짝 안 했을 텐데.
내가 봤던 카시우스라는 사람은, 어떤 반응도 없이 차가운 눈매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느냐?’라고 되물어볼 사람이었다.
나를 최대한 압박하면서 의중을 캐내기 위해.
하지만 아노이토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순간 당황한 채···
“웬, 투자?”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뿐.
테오 형은 불편한 기색은 슬쩍슬쩍 드러내 보일지언정, 대놓고 반대의사를 표하지는 않았다. 이미 내게 협력하기로 합의했으니까.
고로 테오 형이 아니라, 여전히 내 의중이 뭘까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을 굴려보는 아노이토스가 이번 대화의 타겟이 되어야 했다.
“저는 앞으로 이 도시에서 제련한 철괴를 본격적으로 유통하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말입니다.”
그 ‘언젠가’는 전쟁 직전이 되겠지만.
내 말에 눈을 커다랗게 뜨던 아노이토스가 곧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탁자에 턱을 괸다.
“아? 아아아아··· 그런 욕심을 품고 있었구나? 맹랑한 녀석, 직접 해상 교역로를 틀어쥐고 싶었다고 말하지 그랬어?”
“틀어쥐고 싶은 건 맞지만, 해상이 아니라 육상 교역로입니다.”
나는 아노이토스의 착각을 시정해주었다. 그 말에 다시 황당하다는 듯 아노이토스는 한 쪽 눈썹을 치키고 폴레몬은 헛기침을 켠다.
“···육상 교역로라고? 정말 그걸 하려고?”
“네.”
“그런 비효율적인 계획을 밀고 나간다니, 강철 제련이라는 분야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신 스클레오스 님께서 하실 만한 발상은 아니구나.”
뭔가 아노이토스는 폴레몬과 눈짓으로 어떤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아마 이 사업을 받을까, 말까에 대한 격렬한 회의가 이어지고 있으리라.
그리고,
“일단은 계획이나 말해보거라.”
회의의 결론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난 듯했다.
“저희는 대규모 도로망을 건설할 거예요. 그 투자를 아노이토스 님께 부탁하려 합니다.”
“투자라니. 스클레오스 님께서 이 근방의 모든 금과 은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계시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물론 인부들의 임금은 저희가 댑니다. 하지만 허허벌판에 인부들을 데리고 가서 먹이고 입히고 재우려면 꽤나 힘들겠죠.”
나는 미국 서부에 건설되었던 철도노동자들의 마을을 떠올렸다.
그 건설현장들을 따라 형성된 중국인 쿨리들의 정착촌들처럼, 새로운 마을이 생기고 사람과 가축과··· 돈이 움직일 테다.
“그걸 통제하는 데 도움을 주십시오. ”
즉, 새로운 마을들의 지배권을 나눠갖자는 소리다.
사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좋은 조건이다.
인부들의 임금도 우리가 준다. 아노이토스가 할 일은 자재를 실어다주고, 인부들이 사먹고, 사입을 거리들을 주는 것뿐이다.
되돌려 받는 배당은 거기에 맞지 않을 정도로 과분한 결과물이다. 사실상 새로운 영지를 주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아노이토스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내가 예상했던 기뻐하는 기색은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호기심에 가까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
마치 내 꿍꿍이를 엿보려는 것처럼.
···이번의 침착함에서는 아버지의 아우라가 엿보인다.
아무리 미숙해보여도, 카시우스라는 위인의 아들인 건 맞나 보다.
“스클레오스 님께서는?”
“이미 허락하셨어요.”
“아하··· 재밌구나.
그러면 너희가 중간중간에 이 도시를 좀 떠나야 할 텐데?”
“현장 관리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죠.”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노이토스가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폴레몬을 불렀다.
“이 아이가 돌아갈 때는 우리 쪽에서도 따로 호위를 붙여줘. 동업자로서의 예를 지켜줘야지.”
“동업자라고 하셨습니까?”
“스클레오스 님께 ‘허락’을 받았다잖아?”
아노이토스가 나를 보며 눈 한쪽을 찡긋거렸다.
“그럼 결정은 본인이 했다는 거겠지. 폴레몬, 역시 우리 짐작이 맞았어. 이 쬐끄만 녀석이 죄다 짜낸 게 맞았단 말이지? 하하!”
“···신기하신가요?”
“아니, 뭐, 보통 일할 때마다 너 같이 어린아이를 끼고 다닐 이유가 어딨겠니? 자식도 아니고 애첩도 아닐 텐데.”
아노이토스는 알듯말듯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면 이제 원하는 게 뭔데? 왜 이 노예 소년이 바닷길에는 그렇게 질색할까? 뭐 때문에 우리와 깊게 연을 맺고 싶어하지?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여기서 어마어마한 사업들을 벌이고, 높으신 대장장이의 수발을 들면서 얻어내려는 게 뭐지?”
아노이토스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내가 별 반응이 없자 테오 형에게 시선을 돌린다.
테오 형도 역시 가만히, 미동도 없이 서있을 뿐이었다. 실망한 아노이토스가 물러나자 나는 말했다.
“그건 나중에 알게 되실 겁니다. 아노이토스 님.”
“그랬으면 좋겠네. 우리 쪽에서 가져가는 몫은?”
“2할.”
“4할.”
“···3할로 하죠.”
“역시, 어려도 말이 잘 통해서 좋다니까.”
그는 내게 빙긋이 웃어보였다.
“선물은 감사히 받지. 그 대가가 무엇이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언젠가 이 빚은 갚겠어.”
대가, 빚···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희미하게 웃음이 나왔다.
나중에 전부 갚게 될 거다.
***
“설계도는?”
“저기요. 처리해놨어요.”
원래의 상형문자들이 깔끔하게 지워진 위로는 새로운 글씨들이 덧씌어져 있었다. 저 암호는 누구에게도 들킬 일이 없었다.
이 시대에는 존재할 리가 없는, 현대 한글로 적은 한국어 문장들이었으니까.
“이러면 설계도를 눈앞에서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을 거예요. 저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니까요.”
“또 뭔가 신기한 걸 만들어냈구나. 혹시 다른 데 써먹을 방법은···”
“글쎄요. 딱히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수차와 괴철로 등의 설계도가 전부 확인할 수 없게 것을 확인한 스클레오스 아저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노이토스 님께 네가 이 기술을 발명했다는 사실을 알렸다고 들었다. 괜찮겠느냐? 우리가 약점을 잡힌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괜찮아요. 그 약점은 쓰이지 못할 테니까.”
대장장이는 부와 지위를 약속받는 대신 도시에 다리를 하나 내주어야 한다.
단, 그 대장장이가 왕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솔직히 강짜나 다름 없지만, 테오 형이 내가 발이 묶이는 걸 보고만 있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올림포스로 납치될 때도 날 필사적으로 구출하려 했으니까.
아노이토스도 테오 형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나?
내게는 아노이토스에게 까보이지 않은 손패가 많다. 아노이토스도 그걸 알고.
“그래, 우리 말고 철괴를 대량으로 제련하고 공급할 사람이 없으니 그렇겠지.”
스클레오스 아저씨는 자신만의 대답을 찾았는지 나름대로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불안해보이는 기색은 있다만, 괜찮다. 그건 내가 왕자란 걸 몰라서 그러니까.
대장장이의 제자인 걸 들켜? 테오 형이 어떻게든 빼내주겠지.
누가 나한테 뒤통수를 쳐? 그 새끼도 테오 형이 족쳐준다.
나는 왕자다. 테오 형은 무적이고.
왠지 흐뭇해지는 마음에 테오 형을 돌아보니, 나를 보고 왠지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는 것 같다.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네가 결정했다 하니, 따르기는 한다만은. 내가 정말 이 도시를 벗어날 수 있겠느냐?”
“물론이죠. 분명 이 도시의 귀족분들께서도 이렇게 막대한 양의 강철을 생산해낸 대장장이가 도로를 건설한다 하면 막지 못할 테니까요. 자기들 농장이 뭘로 굴러가는데요?
분명 시민들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도시를 위해 큰 일 좀 벌여 보겠다는데 그렇게 뻣뻣하게 나올 수만은 없을 거예요.”
내 말에, 스클레오스는 생각에 잠긴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이제 대장장이가 자신의 터전을 벗어난다는 것의 의미를 알겠지.”
해방 없는 삶.
화려하지만, 자신이 선택하지는 않은 삶.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이 이제 눈앞에 아른거리겠다.
스클레오스는 잠시 자신의 찌그러진 왼다리를 내다보다가 거의 입술을 떼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고맙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스클레오스가 자신의 발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빠진 동안, 나는 천천히 대장간을 나와 걸었다.
“자금을 모은 뒤에, 거상 카시우스와 아노이토스 부자랑 인연을 닦는다?”
“맞아.”
테오 형이 옆에 바싹 붙어 걸으며 말했다.
“거창한 계획이네. 너, 정말 반역자 아니지?”
“아니라니까.”
나는 테오 형을 우리의 훈련 장소로 이끌고 갔다.
항상 아노이토스가 마련해 주는 연습장에 의존할 수 없어 함께 다니던 들판이다. 적당히 행인도 없고 조용해서 검술이든, 창술이든 뭔가를 익히는 데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들이 남았어.”
창 대신으로 휘두르던 빗자루를 손에 들어보았다. 머리 부분은 잘라버려서 그냥 기다란 나무봉처럼 되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휘둘릴 생각 따위 없어. 그러려면 나에겐 경제력도 있어야 하고, 함께 정치적 동맹도 필요해.
시골 촌뜨기가 대강 비싼 옷을 걸치고 희희낙락하는 게 아니라, 당당히 실력자로서 이 지역을 바꿔놓을 작정이니까.”
“···.”
“그리고 그런 힘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자주 위험해질 거야. 안전이 필요해.”
내가 나무봉을 치켜들자, 테오 형 역시 조심스럽게 연습용 창을 꺼내 들었다.
“내 주변을 지키고, 호위해.”
“무엇으로부터?”
“날 해치거나 죽이려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리고 대련을 시작했고.
당연히 엄청나게 맞았다.
내가 끙끙거리며 바닥에 누워 있으려니 테오 형이 가볍게 멍이 든 부분들마다 고약을 발라주었다.
“대체 11살짜리 꼬맹이가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테오 형은 만신창이인 내 꼴을 보며 한숨을 쉰다. 자기가 그렇게 만들어 놓고서.
“포기하면 안 되냐? 대체 무슨 꿍꿍이속이길래.”
“아, 거 참 말 많네. 도와주기로 했잖아. 철괴 팔아서 제대로 기반을 닦으려면 못 해도 2, 3년은 더 걸린단 말이야. 그동안 내가 그 질문을 매일 받아야겠어?”
“3년 동안 물어봐도 답을 안 해주겠다는 얘기잖아, 그거.”
“그래. 못 해줘.”
“···그래, 신들이 데려가려던 아이인데 그 정도 고집은 있어야지.”
테오 형은 저러다 폐가 찢어지는 건 아닐까 싶은 한숨을 마지막으로 내뱉고는 나를 일으켜 세운다.
“3년.”
“그래, 3년.”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하길래 그렇게 자원이 많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해보면 알게 될 거야. 같이 할 테니까.”
“···맙소사, 이런 반역이라니.”
“반역 안 한다니까.”
“허위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반역이야.”
뭐라 궁시렁대는 테오 형을 뒤로 하고, 나는 잠시 저 멀리서 달려오는 인형을 내다보았다.
저 폴짝거리고 칠칠맞지 못한 자태는··· 아마
“파리스? 너 왜 이렇게 다쳤어?”
이노다.
“또 어디서 알고 온 거야?”
“근처에 있는 언니들이 너 있는 곳은 나한테 항상 알려줘!”
아니, 그건 좀 무섭잖아.
이노는 나를 이렇게 사정없이 두들겨 팬 것으로 추정되는 테오 형을 향해 눈을 흘기다가 곧 멍든 부위들 위에 올라앉아 있던 고약들을 걷어내기 시작한다.
“어, 어어··· 너 뭐해?”
“다치면 나한테 이야기하라니까··· 얼굴만 예쁘장하게 생겨가지고 말은 안 듣고···.”
그러고서는 주머니에서 뭔가 곱게 개어낸 흙 같은 것을 내 시퍼래진 무릎에, 어깨에, 목과 이마에 발랐다.
그리고 양손을 맞잡고 가벼운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자···
-사락.
-사라락.
방금 바른 흙에서 풀이 자란다.
“뭐, 뭐야.”
“가만히 있어 봐.”
이노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꽃들이 피어났다가 다시 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흙더미들이 자연스럽게 습기를 잃고 내 몸에서 떨어지고 흩어지니, 상처는 모두 가신 상태였다.
“어··· 고마워.”
“난 뭐든 다 치료할 수 있어. 그러니까 다치면 오란 말이야!”
나는 이 아이의 정체도 이제는 대강 눈치 챘다.
“알았어, 오이노네.”
“뭐야?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우리 언니들만 날 그렇게 부르는데!”
“그냥 어쩌다 보니.”
“그냥이란 게 어딨어!”
그렇게 말하며 투덜거리는 이노에게서, 나는 시선을 돌렸다.
오이노네.
파리스의 연인이자 첫 부인.
원래의 파리스와 결혼해서 아이까지 갖고 버림받는 요정.
···파리스의 시체 곁에서 비참하게 자살하는 요정.
“형, 아무튼··· 나는 해내야 돼.”
그 모든 비극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