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73
누가 보면 우리 둘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이곳을 때려 부순 줄 알리라.
그런 상황에서 내가 오해를 풀기 위해 입을 열려 하니.
“어, 으어어, 어으···.”
그 전에 아노이토스의 신음성이 흘러나온다.
“···저, 저, 저거, 저거, 어, 칼리돈의 멧돼지 터럭이 보관, 된, 유리병인데, 깨, 깨졌···”
아.
그러고 보니 여기 그런 게 있었지. 미리 치워 놨어야 했는데.
나는 뭐라 해명해야 할까 바삐 생각했지만, 이미 아노이토스의 눈은 헤까닥 돌아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들을 수 없을 상태가 되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테, 테세우스와 이아손과 아탈란테가 저, 저 멧돼지를 잡으려고 칼리돈에 모여서··· 헤, 헤라클레스를 뺀 당대 모든 영웅의 신화적인 어, 업적이···.”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모습은 처량하다 못해 비참했다. 나를 돌아보는 아노이토스의 눈은 원망이 담겨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듯했다.
“주, 주, 주군··· 대체 어째서···?”
“미안하네. 내, 내가, 나중에 보상할 터이니···”
“···어,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이아손 님과 테세우스 님과 아탈란테 님은 이제 다시는 필멸자들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하실 텐데요···?”
“···.”
···그건, 그렇지.
다급하게 바닥 곳곳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아노이토스가 말한 멧돼지의 터럭은 이미 바람에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실제라면 무함마드의 수염이나 예수의 성혈 수준의 유물인데 그걸 날려먹었으니 어떤 관점에서 봐도 나는 개새끼가 맞았다.
그리고 지금 통곡하고 있는 아노이토스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거고.
카산드라 역시 아노이토스의 말을 듣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아노이토스는 이미 몸을 벌벌 떨면서 지금쯤 하데스의 왕국에 있을 영웅들에게 사죄의 기도를 올리고 있었으니···.
나는 급하게 수필룰리우마 대왕의 정강이받이를 선물해주겠다고 달랜 뒤 아노이토스를 돌려보냈다. 카산드라가 이거 괜찮은 거 맞냐는 듯 불안한 눈빛을 보내왔지만,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방금 심각한 문화재 파괴 사건이 일어나긴 했지만, 어, 일단은 그보다 중대한 문제가 우리 앞에 닥쳤으니까.
“일단, 우리한테는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까.”
“그래도···”
“신경쓰지 말고. 우리 잘못도 아니잖아.”
“···.”
아무튼 그런 것으로 치자.
“우리가 본 걸 누구와 공유할 수 있을까?”
나는 곧장 화제를 돌려 카산드라에게 물었다.
혹시나 싶어 확인하듯 물었지만, 역시 카산드라의 대답은 분명했다.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없을 거예요. 알잖아요?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란 걸.”
“···알지.”
믿지 못하는 게 아니다.
정확히는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신관으로서 우리 곁에 있었던 헬레노스의 경우에는 다를까 싶었지만, 나는 이내 이전에 헬레노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내가 미래의 이야기를 전하자.
-“형님!! 기이한 얘기로 절,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헬레노스는 눈에 띄게 괴로워하며 귀를 틀어막았다.
그의 최선은 우리가 뭔가를 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정도. 우리의 말을 이해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심지어 아폴론의 총애를 받는 예언자라는 헬레노스조차 그런 상황이라면, 다른 이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반응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아니다. 필멸자에 한해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다.
내게 이전의 환영을 보여주었던 헤르메스조차도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운명의 여신들이 비명을 질렀다고, 신들 역시 어렴풋하게 알 뿐이라고.
어쩌면.
“장수하는 신들도··· 저 재앙의 정체를 아직은 알지 못하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등줄기로 한기가 스쳐지나간다.
신을 거부하고 모두에게서 멀어진 예언자와,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미래에서 튕겨져나온 환생자.
이 둘 말고는 지상의 어떤 인간도 다가올 재앙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내가 그 사실이 주는 중압감에 빠져 입을 다물었고.
“그럼··· 일단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네요.”
긴 침묵을 깨고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카산드라였다.
“해야 할 일?”
“네. 일단은 확인이든 뭐든 해볼 게 있어서요. 일단 헬레노스는 제가 개인적으로 만나볼 테니, 오라버니는 주위를 설득해주세요.”
나는 빠르게 판단을 끝마친 카산드라의 결연한 눈을 마주보며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린다.
방금 내가 느낀 중압감을, 그녀는 아마 평생 동안 견디고 살았으리라는 사실을.
내가 바보 같이 얼이 빠져 있을 때 카산드라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헬레노스를 만나보겠다고? 하지만 너도 말했다시피 이 문제는 어떤 사람에게도 제대로 알릴 수 없잖아? 그건 헬레노스도 마찬가지고.”
“걱정 말아요. 헬레노스를 만나러 가지만 헬레노스와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건 아니니까요.”
카산드라는 그리 말하며 내게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오라버니도 할 수 있는 걸 해주세요. 오라버니는 왕이니까요.”
“···.”
“오라버니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 볼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정말 말 그대로 ‘수천 년’을 넘어서, 저 대륙 반대편까지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우리가 본 바대로 직접 다른 이들에게 얘기해줄 수는 없더라도, 오라버니는 다른 방식으로 대비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기원전 12세기에서 유일하게 서울의 하수구 냄새가 얼마나 역한지, 부산의 도로 사정이 얼마나 번잡스러운지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지.
“저는 오라버니를 믿어요.”
“나도 너를 믿어.”
우리가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겠나.
그 말을 끝으로 카산드라는 응접실을 나섰다. 다음으로 혼이 반쯤 나간 아노이토스가 들어와 주위를 둘러본다. 나는 그를 맞은편에 앉힌 다음 말을 시켰다.
“아노이토스.”
“···예, 주군.”
“이번 일은 미안하네. 반드시, 어떻게든 걸맞은 보상을 내놓겠네.”
“···.”
충격이 컸는지 예의상 사양하는 소리도 하지 못한다.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지만 지금부터 이어갈 이야기가 조금 급했다.
“혹시, 안탄드로스 부근의 작황에 대해 알아볼 수 있겠나?”
“···안탄드로스 부근의 작황 말씀이십니까? 그거야 유례 없이 훌륭하지요.”
“그야 그렇겠지. 새로 생긴 질 좋은 평야에 세상에서 가장 발전한 농기구를 쓰고 있으니.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지금의 작황이 아닐세.”
“그렇다면···”
“지난 30년, 가능하다면 50년 전까지도 작황을 알고 싶네. 여기서 돌아가자마자 안탄드로스와 인근의 토박이인 장로들과 여러 마을의 노인들을 불러모아 물어봐주게.”
나는 완전히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저택을 떠날 채비를 했다.
“아, 일단은 안탄드로스로 돌아가는 시일을 조금만 늦추자고. 똑같은 작업을 내가 직접 트로이아에서 진행할 테니까.”
안탄드로스에서 알아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안탄드로스에는 ‘나’라는 변수가 노이즈로 작동해서 기후와 작황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으니까.
고로 트로이아 인근의 작황을 비교군으로 놓고 세부적으로 비교해 본다.
내 짐작이 낳은 결과값을, 모두가 대강 느낌으로만 받아들이는 사실을 명확하게 확인해야 한다.
“나는 왕궁으로 갈 테니, 자네는 기다리고 있게.”
만일 내가 추측하는 바가 맞다면···.
***
파리스의 거처를 빠져나오는 카산드라의 발걸음은 빠르면서도 단호했다. 그녀의 시선은 명확하게 정면을 가리켰다. 이렇게 당당하고 확고한 마음으로 걸어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러나,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걸음걸이에 조금씩 망설임이 더해진다.
수십 년 동안 떠올리는 것조차 두려워해온 장소다. 가족들이 혼례를 올리는 등 특별한 때가 아니라면 근처로 다가가지도 않으려 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카산드라는 지금 제 발로 걸어가고 있다. 자신의 일평생을 부정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파리스 역시 지금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을 것을 알았으니까. 그 역시 어딘가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을 알았으니까.
카산드라는 막대한 부와 권력을 쥔 왕도 아니고, 대단한 완력을 지닌 장수도 아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명예로운 신관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길은 그녀 스스로 버렸다.
그러니 부와 권력도, 완력도, 명예도 없는 그녀의 최선이 의미를 지니려면··· 그녀밖에 할 수 없는 일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 사실을 가슴속에 새기며 카산드라는 신전의 문 앞에 섰다.
그녀의 쌍둥이가 집으로 여기고 머무르는 곳, 때로는 왕궁만큼인 이 도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
그녀에게 평생에 걸친 상흔을 안겨주었던 곳.
한때, 어릴 적 이곳에서 그녀의 쌍둥이와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서 뛰놀았다는 사실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신전의 대문이 열린다.
헬레노스가 차분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다보고 있었다.
“···아폴론께서 말씀해주신 건가?”
“아니, 내 직감.”
그리 말하며 헬레노스는 뒷걸음질치며 그녀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우린 쌍둥이니까.”
한날한시에 태어나, 같은 운명을 향해 걸어갔었던 사이니까.
이제는 헬레노스 홀로 떠나갔지만.
‘···아니지.’
카산드라는 끔찍했던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녀가 튕겨나간 것이다. 그녀가 거부한 것이다.
그녀가 함께할 수 있던 이들을, 그녀가 받을 수 있던 존경과 인망과 명예를.
자신을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다른 신관과 무녀들을 지켜보다가, 카산드라는 조용히 걸음을 앞쪽으로 향한다. 그러자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남성의 신상이 그녀를 향해 미소짓고 있다.
포이보스 아폴론의 신상이다.
헬레노스는 입고 있던 망토자락을 끌러내리며 손가락을 튕긴다. 기다리고 있던 무녀들이 카산드라의 옷자락을 당기며 헬레노스와 카산드라의 몸에 올리브유를 붓는다.
“내가 뭘 하려는 건지는 이미 알고 있던 건가?”
“말했듯이, 쌍둥이니까.”
헬레노스의 말은 간결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네가 진절머리를 치던 이곳에 자기 발로 왔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지.
눈 감아.”
두 사람의 나신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감싼다. 그러나 춥지 않다. 올리브유가 황금빛 망토처럼 둘의 몸 위로 둘러쳐졌기 때문에.
카산드라는 이마로 쏟아지는 황금빛 물결과 광휘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는다.
그리고 뜬다.
구름 속에 감싸인 광명이 보인다. 빛으로 된 알 같기도 하지만, 그저 그뿐만이 아님을 카산드라는 잘 알고 있다.
[헬레노스, 당분간은 너조차도 나를 찾아오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장수하는 신들은 너무도 격렬한 전쟁을 치렀다.숱한 이들이 지금 병상에 누워 회복을 기다리며, 회복된 이들조차 권능을 내리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들려오는 목소리.
아니, 저것은 ‘음성’이 아니다. 내리쬐는 햇살이다.
분명 인간의 감각기관은 눈을 통해 빛을 감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을 터인데, 이곳에서 그녀는 저 빛이 귓가에 속삭이는 바를 들을 수 있었다.
저 빛은 동시에 조화로운 음률이기도 했고, 삶을 북돋우는 생기이기도 했다. 그것은 헬레노스를 향해 뻗어나가면서도 사방의 모든 것에 장막처럼 따사로움을 드리웠다.
헬레노스는 조심스럽게, 그의 주인 앞에 허리를 숙이더니 옆으로 비켜난다.
“주인이시여, 당신께서 기다려오신 다른 손님이 왔습니다.”
그러자 그 뒤에 서 있던 카산드라에게 방금의 빛이 곧장 내리쬔다. 그 순간 빛-알은 파르르 진동하며 주위의 공간을 일그러뜨린다.
당혹한 듯한 목소리,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네가, 나를 보러 왔구나.]광명 그 자체가 그녀의 앞에 현현한다.
그것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오자 달걀만 해 보이던 작은 빛은 어느새 전함처럼, 산맥처럼 거대해진다. 카산드라가 그 존재감에 움찔거리기 전에 그 광명은 순식간에 인간의 형태로 압축된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투명한 피를 흘리는 아름다운 남성의 모습으로.
[프리아모스의 딸 카산드라···.]그의 손길이 머리칼을 쓸어내리려 하자 카산드라는 조용히 뒷걸음질친다. 그 모습을 본 아폴론의 미소가 깨져나간다. 어딘가를 찔린 듯 고통스럽게 찡그리며 그녀를 본다.
[내게 귀의하려 온 것은 아니로구나.]“···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카산드라는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한다.
신들에게 그녀가 알게 된 바를 온전히 알릴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 가능성을 그녀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신들이 알게 된다 하더라도 큰 변화가 생길까?
지금 아폴론의 상태를 보아하니 그것도 아닐 듯했다.
신들의 영액이 투명하게 반짝여서 그렇지, 지금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폴론의 현신은 피투성이나 다름없었다. 그리 총애하는 헬레노스조차 그동안 가까이 부르지 않았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다. 휴식과 회복을 위해서든, 올림포스의 여러 적들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든.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의 일을 해야 했다. 카산드라는 주저 없이 포이보스 아폴론의 손목을 잡아쥐었다. 놀란 헬레노스가 제지하러 다가왔지만 되려 아폴론이 그를 제지했다.
[너는, 이 세상으로부터 튕겨나간 아이지.]황금을 녹여 씌운 듯한 금발을 반짝이며, 아름다운 남성은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모두가 너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나, 그 때문에 누구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니.]그의 동공 사이로 영원히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 들여다보였다.
[내게 보여줄 것이 있는 모양이구나.]그는 지혜와 광명과 예지의 신이다. 카산드라는 굳이 부정하거나 수긍하는 대신 자신의 머릿속 영상을 떠올린다. 파리스와 함께 보았던 어떤 파편을.
그러자 곧장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척추와 빗장뼈와 팔뼈 사이로 냉기가 뿜어져나온다. 카산드라가 자각하기도 전에 그녀가 선 구름들이 뾰족하게 얼어붙고 헬레노스 역시 급격히 스미는 한기를 피해 뒤로 피한다.
그리고.
[···제기랄.]아폴론의 손목이 얼어붙는다.
광명이 얼어붙는다.
그는 급히 카산드라의 손을 뿌리치고 고함과 함께 그녀를 밀어낸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열과 광휘 속에서 당황한 카산드라는 허우적거리다가···
“끄아아아!!!!”
···일어나 보니 신전의 차가운 바닥이었다. 뜨겁게 데워진 올리브유가 묻은 맨등이 돌바닥을 데우고 있었다.
급히 무녀들이 그녀의 몸을 일으킨 다음 수건을 그녀의 몸에 둘러준다. 옆을 돌아보자 헬레노스는 조금 늦게 깨어나 그녀를 바라본다.
“···그분께서 네 이야기를 더 물어보기를 원하시던데. 네 말을 듣지도 못하고 튕겨나왔으니까.”
“···.”
“지금이라도 저 신상에 말해 봐. 원하는 게 뭔지.”
헬레노스의 말에 카산드라는 몸을 덜덜 떨면서, 옷을 걸친다.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전해야 하는 것.
카산드라는 어깨에 망토를 두른 다음 저 높이 솟아오른 신상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안탄드로스의 왕을··· 도우소서···.”
지금이 아닐지라도. 신들이 쓰러지고 지친 지금의 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때가 된다면.
그러자 카산드라는 저 신상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여 그녀를 주시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한 마디.
[가납하였다.···나의 아끼는 이여.]
이것으로··· 되었다.
···일단은.
카산드라는 눈을 감고 몸을 쉬었다. 끔찍하게도 피곤했다.
전쟁 중 깃발 부대를 이끌었던 오이노네의 일러스트입니다! 이번 작품도 이사오 작가님께서 작업해주셨습니다!
정당한 계승자
나는 곧장 프리아모스를 찾아가 트로이아의 장로들을 끌어모았다. 트로이아의 시민들뿐 아니라, 트로이아 인근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 흩어져살던 이들까지.
못해도 반세기 전의 일까지 기억해낼 만한 이들을 불러모았다. 그들 중 몇몇은 헤라클레스의 침공을 기억했고, 트로이아의 왕손들이 몰살당하던 그 순간 역시 머릿속에 담아놓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긴장해서인지 깍지를 낀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프리아모스에게는 일단 단순한 토지 조사 비슷한 거라 말해두었다.
앞으로 트로이아 인근을 재건하면서 점차 안탄드로스산 식량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할 테니까, 거기에 맞춰 이 지역의 기후 변화와 작황과 토질에 대해 알아둬야 하니까.
물론 내게 이 일을 허락해준 프리아모스의 눈길은 예사롭지 않았지만. 아마 내가 뭔가 더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강 눈치챈 듯싶었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무튼, 내 질문에 맞은편에 앉은 단단한 인상의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으레 나이 깨나 먹었다 자부하는 노인들이 늘상 이야기하고는 합니다. 옛날이 더 좋았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이리 배고프지 않았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더 예의바르고 품위 있었다.”
“자네도 그리 생각하는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부지런한 상인입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최대한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아노이토스의 아버지 카시우스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노이토스는 아버지의 눈치라도 보는지 저택을 나섰고, 다른 장로들과 노인들이 이 방 여기저기에 앉아 있었다.
“제가 스물일 적부터 지금까지 노인들 모두가 그리 말해왔으니, 세상이 저주라도 받은 듯 계속 메말라가고 인류가 끔찍하게 타락해가는 게 아닌 이상에야 헛소리로 치부하는 게 옳겠지요.
페니키아인들도, 아이깁토스인들도, 저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의 여러 야만적인 족속들조차도 늙으면 똑같이 말합니다. 저는 그들 모두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 말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 말은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부정적이라는 소리로군.”
“안탄드로스의 왕께서는 제게 물으셨습니다. 요즈음에 비해 옛날의 작황이 더 나았느냐고, 옛날 사람들이 더 풍요롭게 살았느냐고 말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저는 그 말을 부정합니다.”
카시우스는 단호하게 답했다.
“옛날보다 지금의 사람들이 더 풍요롭게 삽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그들의 선조들보다 부유하고 여유롭습니다.”
“···.”
“다만.”
그의 눈이 빛난다.
“당신이 온 다음부터만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