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92
92화. 영웅의 시대 (1)
헥토르의 전차 위에서 나는 잠깐 졸았다.
한번 깨어나보니 성문 안이었고, 경악한 사내들이 나를 들것에 실어 옮겼다.
전투의 소란은 도시 안까지 옮겨 붙었는지 여전히 곳곳에는 흥분한 채 뛰어다니는 꼬맹이들이 가득했고, 전투의 시작을 알리며 징을 치던 사내들은 이제 싸움의 끝을 외치고 다녔다.
아낙들은 깨끗한 천을 들고 뛰어다니며 부상자들의 상처를 감쌌고, 몸 성한 병사들은 간이로 만든 들것에 부상자들을 어딘가로 실어날랐다.
이렇게 며칠만 가면 흥분 상태는 잦아들고 다시 도시는 일상을 되찾으리라.
그러나 그 전까지 거리는 지금처럼 소란스럽게 북적일 테고.
환자의 몸에 그 시끌벅적함은 해로웠다.
거기다 들것의 흔들흔들거리는 감각까지 더해지니 왠지 토가 쏠린다.
나는 고통에 겨워 눈을 감았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었다.
원래 신전의 큰 회당 같은 공간이었던 것 같은데 급히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이것저것 치우고 침상들을 가져다 놓은 티가 났다.
씁쓰름한 풀냄새와 뭔가 향유를 태우는 향기가 뒤섞여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에서 나와 눈을 마주친 작은 대리석 신상의 시선이 약간 신경쓰였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나 이외에도 꽤 많은 이들이 신음하고 있는 듯했다.
내 신분상 일반 병사들과는 별개로 다뤄졌을 것을 생각하면 저들 대부분이 아마 전차를 직접 몰 수 있는 귀족이나 부호의 자식들이리라.
그 침상들 사이로 신전의 신관들과 환자의 가족들이 소리 죽인 발걸음으로 바삐 걸어다녔다.
···아, 젠장 주위를 둘러보느라 무리하게 고개를 들고 버텼더니 머리로 피가 몰리는 기분이 든다. 내가 목에서 힘을 빼자 털썩 소리를 내며 머리가 배게에 안겼다.
“···아, 형님. 일어나셨군요.”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내 왼쪽 침상에 누워 있던 헬레노스가 말을 걸었고.
“파리스 님? 괜찮···으으윽.”
그 반대쪽 침상에서도 여전히 신음하는 테오가 나를 돌아보았다.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자 가슴이 아릿아릿하다.
양쪽 폐를 누군가 쥐어짜고 두들긴 것 같은 기분이다.
목구멍에는 여전히 피 섞인 가래가 끓고, 현기증 때문에 눈을 뜨고 있기가 괴로웠다.
설마 여기서 죽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의식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지와 고통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치열하게 싸우다 결국 후자 쪽이 이겨버린 듯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고.
“파리스?”
이노의 목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내 저택이었다.
“어··· 이노? 너는 괜찮···.”
“움직이지 마!”
내가 몸을 일으키자 이마에 놓여 있던 물수건이 떨어진다. 여분의 수건과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있던 시종들이 나를 다시 눕히고 물수건을 돌려놓았다.
대강 누운 채로 눈만 움직여 목 아래를 내려다 보자, 온갖 씁쓸한 냄새가 나는 풀들이 짓이겨져 몸에 발라져 있었다.
옆구리 쪽에는 아예 알 수 없는 덩쿨 식물이 자라나 꽃잎으로 상처 부위를 덮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너 낫게 해주는 거지! 움직이면 큰일 나니까 가만히 있어.”
이노는 내 양어깨를 잡고 침대 위로 눕히며 옆에 있던 시종에게서 수건을 받아들어 내 몸의 땀을 닦아 주었다.
“지금 이대로 있으면 곧 완전 나으니까···. 가만히만 있어.”
“움직여서 미안해.”
“다쳐서 미안하지는 않고?”
“그것도 미안해.”
내 말에 이노는 지친 듯 내 옆에 바로 엎어져 누웠다.
“으으으··· 밤새 너 몸에 바를 약초 찾는다고 이 근처 언니들이랑 숲을 헤집고 장난 아니었어.”
“고생이 많았네.”
“다치지 마.”
“알았어.”
“거짓말인 거 알아.”
순간 말이 턱 막힌다. 이노가 고개를 살짝 들어 뭔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본다.
“그러니까 죽지만 마. 죽지만 않으면 내가 다 치료해줄 수 있으니까.”
“···응.”
“히드라 독을 맞아도 괜찮으니까. 살아서 오기만 해.”
나는 이노의 말을 듣고 잠시 숨을 멈췄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표정을 관리할 수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한참 이노와 마주보고 있었을 뿐.
아무튼 살아남았다.
***
몸을 혼자 가눌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 사흘 정도 걸렸다.
그 전까지는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움직였고, 음식은 죽만 먹었다.
이노가 몇 차례 알 수 없는 약초를 내 몸에 바르고 내게 먹이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것 같다.
그 점은 나를 병문안 왔던 헥토르나 다른 왕자들 역시 동의한 바였다. 이제야 신화 속에 영웅 근처의 인간들이 그렇게 픽픽 쓰러지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 뒤로 며칠이 더 지나고 나서야 입 안에서 느껴지던 묘한 비린내가 가셨고, 뼈와 내장 깊은 곳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치유력이다. 현대 의학으로도 어려울 수준의 회복 속도다.
뭐, 그래도 현실이니까.
그래도 반죽음 상태였던 지 열흘이 채 안 지났다 보니, 내가 다시 왕궁으로 향할 때는 서너 명쯤 되는 다른 시종들이 붙어서 나를 부축했다.
나는 괜찮다 했지만, 이노는 괜찮다 하지 않았으니까.
아무튼 그런 빌빌대는 꼴로 입궁하는 게 약간 멋쩍었는데··· 알현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런 생각은 가셨다.
고작 1,000명 정도의 장정이 참전된 전투였다.
그것도 이 시대 기준으로는 나름 많은 수라지만 전차 역시 많은 수를 동원하지 않았고, 나름 속전속결로 마무리된 싸움이었다.
그런데도 알현실에서 지팡이를 짚거나, 붕대를 감고 있는 젊은 사내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몇몇은 팔다리에 부목을 대고 있었고 몇몇은 아예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부축 정도만 받는 나는 양반이었다.
그래선지 내가 들어서자마자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파리스? 무사하구나!”
헤카베가 나를 끌어안으며, 내 등을 쓰다듬었다. 마치 뼈와 근육이 붙어야 할 곳에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그녀는 나를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나름의 진찰이 끝났는지 헤카베는 내게 질문을 퍼부었다. 이제는 문진 시간이었다.
“어디 아프지는 않니? 끌어안았을 때 불편한 곳은 없고?”
“오랫동안 뛰어다닌 것처럼 근육이 뻐근한 것 빼고는 괜찮아요.”
“피는? 피는 안 나고?”
프리아모스의 태도는 그보다는 점잖았지만, 얼굴에 깃든 기쁨과 안도감을 지우지 못한 채 내게로 다가왔다.
궁정에 모여 있던 다른 장로들과 시민들의 시선 역시 왕을 따라 내게 집중되었다.
그는 내 양어깨를 쥐고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프리아모스를 배려해 굳이 피하지는 않았다.
“···장하구나. 아레스의 딸을 앞에 두고서도 당당했다 들었다.”
프리아모스는 그리 말하며 잠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치 군중으로부터 나의 전과를 확인받으려는 듯이.
프리아모스의 그런 노력에 화답하듯 부상을 입은 젊은 사내들은 제각기 작게 수긍의 말을 뱉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아모스는 만족스레 다시 나를 바라본다.
“네가 베어낸 아마존 전사들의 머리가 수십이라고도 들었고. 마치 켄타우로스처럼 강하고 날랬다지?”
“안키세스 님께 기마술을 배워 적들 사이를 바람처럼 누볐다 합니다. 헬레노스와 테오가 말하더군요.”
프리아모스가 자랑스러움이 깃든 목소리로 말하자, 옆에서 헥토르 역시 거들었다. 내가 보기에 헥토르가 이 자리의 젊은 남자들 가운데 가장 멀쩡했다.
그렇게 격렬하게 싸워놓고서.
“별 것 아닙니다. 그저 제가 그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뿐입니다. 말 위에서 싸우면 다른 이들보다 머리 몇 개만큼은 더 커다란 거인이 된 것 같습니다.”
“거인이라. 그래, 거인처럼 싸웠다고 듣기는 하였다. 장하다.”
“···그건 그렇고 헬레노스와 테오는 어찌 되었습니까?”
나는 한참 두들겨맞은 주제에 칭찬받는 게 영 민망해서 화제를 돌렸다. 프리아모스 역시 내 낌새를 눈치챘는지 미련없이 내 질문에 답해주었다.
“둘 모두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네 배필이 치료를 도와주어 회복이 빠르더구나. 곧 있으면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게다.”
프리아모스가 그리 말하며 내 어깨를 토닥인다.
“반신과 싸우고도 살아남아 주어서 고맙다. 그것만으로도 큰 전과란다.”
반신(半神).
그래, 나는 반신과 싸웠었다.
프리아모스가 다른 이들의 부름에 다른 참전자들 역시 절뚝이며, 또는 지팡이를 짚으며 내게 다가와 대화를 나누었고, 누구도 나를 보고 패배를 위로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나를 진심으로 치켜세웠다.
마치 펜테실레이아에게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위대한 전훈이라는 듯이.
나는 그 시선과 말투를 견디다 못해 고개를 돌려 헥토르에게 말했다.
“···헥토르 형님, 혹시 갑옷이나 방패가 망가지지는 않았습니까?”
“아, 많이 찌그러지기는 했지. 워낙 거센 공격을 받아내다 보니.”
“제가 직접 수리해드려도 괜찮을까요?”
“굳이 아픈 몸으로 그럴 필요는 없어. 다른 솜씨 좋은 대장장이들이···”
“왕도에 저보다 쇠를 잘 다루는 ‘솜씨 좋은’ 대장장이는 없습니다.”
내가 강하게 말하자 헥토르는 말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걱정어린 눈길로.
“···부디 제가 고치게 해주십시오.”
나는 최대한 정중히 헥토르에게 부탁했고, 헥토르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었다.
얼마 뒤 내 저택으로 헥토르의 화려한 갑옷과 방패가 배달되어 왔고, 나는 저택을 지을 때부터 미리 마련해두었던 작업실로 그것들을 옮겼다.
“파리스? 무리하면 안 돼.”
“절대로 몸이 상할 정도로 하지는 않을게.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이노도 문 밖으로 물린 뒤 나는 헥토르의 갑옷을 쓰다듬었다.
충격 속에서.
***
안탄드로스에서 가져온 온갖 손에 익은 집기들, 화로, 거푸집 등등이 갖춰진 작은 대장간.
그곳의 중심에 가로 놓인 기다란 작업용 탁자.
거기에는 두 벌의 갑옷과 두 장의 방패가 놓여 있다.
당연히 하나는 내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헥토르의 것이다.
철판으로 된 흉갑과 등갑, 정강이받이, 팔 보호대로 구성된 갑옷에는 트로이아를 상징하는 말머리 문양 같은 것들이 가볍게 양각되어 있었다. 스클레오스 아저씨가 직접 솜씨를 부린 부분이기도 하고.
물론 지금은 죄다 흉측하게 찌그러져 있었지만.
내가 그것들을 쓰다듬으며 경악하는 중에,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혹시나 길이라도 잃은 시중인가 싶어 주의를 주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빨리 나았나 보네.”
“파리스 님.”
“둘밖에 없는데 쓸데없이.”
나는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오는 테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님’ 자는 빼.”
“아, 파리스. 여기 부탁했던 헬레노스 님이랑 내 갑옷.”
“고마워.”
테오가 자루 안에 담아 끌고 온 갑옷들까지 탁자에 올려놓고 보니, 이제 총 네 벌이다.
나, 테오, 헬레노스, 헥토르.
아무튼 짧게나마 펜테실레이아에게 대적했던 이들의 갑옷이다.
가장 먼저 둘러본 헬레노스의 흉갑은 손상이 거의 없었다.
헬레노스는 펜테실레이아의 공격을 피해 빠르게 전차를 포기한 덕분에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으니까.
나는 약간 찌그러진 부분들에다 가볍게 철필로 표시를 해둔 뒤 넘겼다.
그 다음은 테오.
자신의 갑옷을 살피자, 어쩐지 긴장한 기색으로 테오가 침을 삼킨다.
“어깨 부분이···”
뚫렸다.
펜테실레이아의 투창이 철판을 뚫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나와 헥토르의 갑옷을 둘러보았다.
나와 헥토르는 각각 펜테실레이아의 방패와 검으로 주로 공격을 당한 터라 일그러지거나 찌그러질지언정 부숴지지는 않았다.
펜테실레이아가 들고 있던 청동검이 훨씬 강도가 높았던 헥토르의 무장과 마주하며 빠르게 날이 죽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헥토르는 펜테실레이아에게 사실상 조금 예리한 둔기로 얻어맞은 셈이었다.
그러나 투창을 정통으로 맞아, 한 지점에 강력한 충격이 집중되었던 테오의 갑옷은 깔끔하게 관통당해 있었다.
“하, 하하··· 시발.”
“파리스, 왜 그래?”
“…불합리해서.”
걸어다니는 자연재해들이 바로 저 바깥에 숨쉬고 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도 불합리해서.
테오의 흉갑은 고민 끝에 저편으로 치워두었다.
“저건··· 고치기 어려울 것 같아. 새로 만드는 편이 낫겠어. 나중에 안탄드로스에 서신을 부칠게. 스클레오스 아저씨가 더 나은 걸 만들어줄 거야.”
목소리의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 테오는 능숙하게 모르는 척해주었다.
이번 전투는 내게 많은 걸 보여주었다.
테오 형과 다른 정예 병사들은 할버드에 아직 익숙하지 못해 제대로 다룰 수가 없었다.
트로이아의 시민병들 사이에 아직 강철제 무기가 많이 보급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민들이 알아서 무장을 구입하고 모이는 형식이다 보니 어느 수준 이상으로 빠른 보급이 이뤄지기 힘들었다.
전술적인 움직임에도 한계가 뚜렷했다. 보병들이 진을 짜서 체계적으로 움직인다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다.
아군도 적군도 보병들이 구름처럼 떠다니며 적과 약탈물을 찾아다닐 뿐이었다.
그 사이를 전차가 휩쓸고 지나가면 적의 사기가 꺾이기를 기다리던 아군 보병이 적들을 무찌르고 사로잡는다.
그게 전술의 전부였다.
무장에 있어서도, 병사들의 훈련과 기동에 있어서도 생각할 것들이 정말 많았다. 이번 전투에서 내가 배웠던 사실들은 정말 귀중한 지식이 되어 줄 수 있었다.
만약 영웅들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면 말이다.
단 한 사람이 수십 명을 베어버릴 수 있다.
단 한 사람이 수백의 진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어느새 망치를 두들기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헥토르의 갑옷이 대강 제 형태를 되찾는다. 그 표면의 장식을 되찾으려면 꽤나 걸리겠지만.
“헥토르, 아이네이아스, 그리고···.”
영웅들.
영웅들에 대해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