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17)
1017화. 되찾아 가는 역사 (1)
무림맹은 한차례 난리가 났다.
안휘의 패자 남궁세가의 가주가 죽고, 섬서의 유명한 권문 청사자문의 문주도 죽었다.
남궁가주의 죽음은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던 연호정의 짓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맹주인 공공대사의 결단과 빠른 행동 덕분에 사실이 아닌 의혹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되기도 전, 청사자문의 문주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놀랍게도 사자문주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사람은 공공대사와 승현진인이라 하였다.
그 사실이 퍼지자 맹원들은 당황과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연호정이야 워낙 파격적인 행동을 일삼은 데다 나이도 젊었으며, 덕(德)보다는 그 무시무시한 재능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공공대사는 이룬 무(武)보다 소림의 방장, 태산북두의 좌장으로서 온 천하에 깊은 자비심과 덕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를 맹주로 인정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비록 공공대사가 반흑파의 중심에 있었대도 그가 사자문주를 죽였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제야 맹도들은 깨달았다. 무림맹 내에서 뭔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공공대사의 위명이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에, 오히려 반흑파를 제거하기 위해 맹의 수뇌부가 날뛴다는 여론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도 못했다.
그때, 검제 남궁승이 제 손자를 군사부로 이송하여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소상하게 밝혔다.
공공대사도 그렇지만, 남궁승의 솔직한 발언은 무림맹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아무리 반흑파가 밉다 한들 제 손자를 이용하거나 가문의 이름에 먹칠까지 하면서 밀어붙일 리는 없다.
삽시간에 여론이 뒤집혔고, 분위기는 살벌해짐과 동시에 뜨겁게 불타올랐다.
흑도를 증오하여 반흑파에 속했던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자신들의 언행이 얼마나 치명적인 사태를 불러일으켰는지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반흑파의 기세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차마 맹에서 나가지도 못한 그들은 거처에 틀어박혀 전전긍긍했다. 자칫 잘못하다가 무림맹에서 제명되어 버리면, 그들은 전쟁이 벌어지기도 전에 백도 정파에서 물러나야 할 판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 또한 큰 음모의 한 가닥이 아니겠냐며 투덜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극소수에 불과했고, 감히 남들 앞에서 입을 놀리지 못했다. 그 말은 공공대사와 남궁승을 모욕하는 발언인 동시에 무림맹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발언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들끓던 분위기가 몇몇 사건으로 단숨에 사그라들어 버린 상황.
민심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던 무림맹으로서는,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사태 속에서 반흑파 무인들을 향해 도끼눈을 치뜰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그러했다.
하지만 무림맹은 반흑파에 속했던 무사 혹은 문파들을 공식적으로 제명하지 않았다. 화가 나고 실제로도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이걸 품고 가지 못하면 무림맹의 한계를 드러내는 결과가 될 수 있었다.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며 폭풍전야 속에서 긴장하고 있을 때.
범인을 잡은 연호정이 무림맹에서 파견한 무사들과 함께 맹주부로 향했다.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갔다. 형식상 맹의 무사들에게 양팔의 자유를 박탈당했지만, 애초에 연호정의 실력이라면 그까짓 포박이야 찰나지간에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무림맹이라고 반흑파에 속한 무사들만 가득한 건 아니었다. 근래 반흑파의 기세가 너무 강해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 흑백이 힘을 합쳐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정책에 믿음을 가진 이들 역시 많았다.
그들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연호정에게 환호를 보냈고, 이 사태를 이끈 범인을 주시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그 범인이 강서 상무 연합의 젊은 맹주이자 오래전 삼교에서 파견한 세작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맹도들의 경악은 하늘까지 치솟았다.
적의 세작으로 인해 무림맹이 뒤집힌 게 벌써 두 번째다. 수뇌부들은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했지만, 덮어놓고 무마하기에는 사건이 지나치게 커진 감이 있었다.
결국 무림맹이 지닌 능력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실 그대로를 밝힐 수밖에 없었던바. 범인의 정체와 그가 세작으로 활동하며 어떻게 사람들을 구워삶았는지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맹도들은 범인, 홍익천의 화술로 인해 남궁가주와 사자문주가 자살을 하고, 남궁현이 화탄까지 장착했다는 사실을 쉬이 믿지 못했다.
이 부분만큼은 맹의 수뇌부들도 환술, 술법이 가미된 지독한 마공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을 알려 줘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수뇌부들만 해도 화술만으로 사람을 그 정도로 조종한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다.
차가운 고요로 가득했던 무림맹의 분위기가 하루아침에 초상집처럼 변했다.
그중 반흑파 무사들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삼교에서 파견한 세작으로 인해 자신들이 큰 실수를 했음을, 선동당해 무림맹을 뒤흔들었음을 깨닫곤 겁에 질려 두문불출하는 문파들이 줄을 이었다.
개중에는 제 발이 저려 스스로 무림맹을 탈퇴하겠다고 나선 이들도 꽤 많았다.
자칫 잘못하다간 내란 선동으로 인해 문파 자체가 지워질 수도 있는 판국이었다. 차라리 먼저 죄를 청하고 물러나는 것이 문파의 역사라도 이을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무림맹은 그들의 탈퇴에 대해 답을 주지 않았다.
반흑파 무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에 휩싸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공식적인 답변이라도 줬으면 아쉬워도 마음은 편했을 텐데, 오히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니 그야말로 피가 말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났다.
범인 홍익천과, 그와 대화한 몇몇 반흑파 무사들이 형당으로 끌려와 조사를 받았다. 물론 연호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홍익천은 모든 질문에 솔직하게 답했고, 그간 홍익천과 연을 맺어 선동의 중심에 있던 무사들은 조사 과정에서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당연히 조사 과정에 관한 얘기도 무림맹 전체로 퍼져 나갔다. 제갈문호가 일부러 소문을 빠르게 퍼트렸기 때문에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사건의 대략적인 전말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연호정은 한순간 용의자에서 피해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심지어 그 압박감 속에서도 기어이 세작을 잡아냈다는 사실에, 맹원들은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무림맹의 분위기는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할 정도로 차갑게 얼어붙어 버렸다.
* * *
“좋지 않습니다.”
제갈문호의 얼굴은 심각했다.
“맹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뒤숭숭해졌습니다. 언제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지금, 이러한 분위기는 결코 좋지 않습니다.”
당장 전쟁의 위험이 없다면 이러한 사건을 발판 삼아 더 단결력 있고 신뢰 가는 무림맹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나빴다.
반흑파 무사들의 기가 꺾이다 못해 바닥을 기고 있었지만, 무림맹 수뇌부들은 그것을 통쾌하게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쪽 여론이 죽다시피 하니, 반대로 전쟁 위험과 삼교에 대한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신뢰 이전에, 무림맹은 백도 정파 최대의 연합이었다. 그런 연맹체를 세작만으로 두 번이나 뒤흔들어 버렸으니, 맹도들의 사기는 땅을 칠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했고, 올바른 의견조차 쉽게 내기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자칫 잘못하다간 자신이 세작으로 몰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의 세작질로 맹의 단결력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버렸다. 이전 세작 사건과는 차원이 다른 여파였다.
삼교를 향한 증오와 적당한 공포는 좋다. 언제고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니, 그러한 감정은 맹원들 사이의 단결력과 긴장감을 유지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분위기가 도를 넘어섰다.
“정말 이게 끝이겠소?”
공공대사의 얼굴 역시 심각해졌다.
“이번 일, 분명 천하가 놀랄 만큼 치명적인 사태였으나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지나치게 빨리 무마된 감이 있소이다.”
연호정과 모용군의 빠른 대처 덕이었다.
하지만 홍익천이 지닌 그 가공할 능력과 사건의 크기를 보면, 일이 너무 빠르고 깔끔하게 정리된 감이 없지 않았다.
특히나 홍익천은 조금의 거짓도 없이 모든 것을 순순히 자백했다.
자신이 삼교 중 사음교 출신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중원으로 흘러들어 왔는지, 수룡신침도의 마지막 전인과는 어떻게 만났는지, 이후 사건들을 어떻게 만들어 나갔는지도 전부 실토했다.
그 정도 정신력이라면 끔찍한 고문을 당해도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데, 막상 뱉은 말들은 전부 사실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소.”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이상 무언가가 있을 것 같지도 않소. 만에 하나 그런 것이 있었다면 세작이 모든 진실을 다 토해 내지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드오.”
“형당부터 시작해 내성 전체 무사들을 재조사했습니다. 혹여 홍익천과 연관된 또 다른 세작이나 정보책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없을 것이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제가 보기에도 다른 세작이나 정보책들은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으음.”
공공대사가 옆에 앉은 제갈아연을 바라보았다.
제갈아연의 얼굴은 다소 창백했다. 남궁현이 자신을 납치하려 들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잘 이겨 내고 있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문제를 직면한 까닭이다.
공공대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소. 다만, 맹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좋지 않소. 하루빨리 이 분위기를 타파할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제갈문호가 옆에 앉아 차를 마시는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표정은 담담했다. 여유가 있어 보이진 않는데, 그렇다고 지나치게 심각해 보이지도 않았다.
좀처럼 읽을 수 없는 표정.
제갈문호가 물었다.
“소부주께서는 이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모두의 시선이 연호정에게로 향했다.
차를 홀짝이던 연호정이 대뜸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사님, 그리고 맹주님.”
“말씀하시게.”
“홍익천과 만나게 해 주십시오.”
제갈문호가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연호정의 얼굴을 살피던 공공대사가 조금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 다만,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네.”
“예. 말씀하십시오.”
“소부주 생각에, 세작과 관련하여 또 다른 사태가 터질 수 있을 거라 보는가?”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제 생각에도 세작은 본인의 할 일을 전부 마쳤습니다.”
“……그런가.”
“다만, 앞으로의 일이 문제겠지요.”
“무림맹을 말함인가?”
“무림맹, 나아가 중원 무림 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는가?”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세작과 대면한 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놈에게 확인해 볼 것이 있습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게. 다만 조심하시게. 소부주의 능력은 잘 알고 있네만, 화술만으로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드는 작자이니 아무래도 불안하네.”
“그렇다면 믿음직한 사람 하나를 끼고 가겠습니다.”
“믿음직한 사람?”
연호정이 제갈아연을 바라보았다.
제갈아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
“두 분은 바쁘시다. 너도 이번 일로 정신이 없을 텐데, 나랑 같이 가서 마음이나마 추슬러 봐.”
“그건…….”
제갈아연이 공공대사와 제갈문호를 보았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거라. 이 또한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