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33
033 Lubricant(2)
매사추세츠주 출신, 1815년 생으로 올해 46세.
“젠장, 역시 가야 했어.”
남들이 봤을 때 존 엘리스 박사는 인생에 있어 가장 찬란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뉴욕의 한 의과대학에서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여러 곳에서 직접 병원을 개업하고 쌓아온 커리어도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었다.
“역시 타이터스빌로 가야 해.”
그러나 정작 존 엘리스 박사 본인은 지금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것은 퀭한 얼굴로 연구실을 나오며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는 말만 들어도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델리아가 펜실베이니아주로 가는 걸 허락해줄까. 지난 주에도 그렇게 바가지를 긁혔는데···또 그 이야길 꺼내면 정말로 내쫓길지도 몰라···.”
맞은편에서 지나가는 다른 교수들이 그런 존 엘리스를 보자 혀를 찼다.
“쯧, 며칠 사이 눈이 더 퀭해졌군. 이제 그 쓸데없는 연구는 좀 그만두지 그러나.”
“뭐야, 찰스였나? 자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뭔가 될 듯한 느낌이 들어.”
“그건 뭐가 되어가는 느낌이 아니라 자네 마누라 속이 타들어 가는 조짐이라네.”
“앗···아아! 그 말은 그만하게.”
동료 교수의 신랄한 팩트 폭력에 존 엘리스는 차마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자네 정도면 의미 있는 일 하면서 살 수 있지 않나. 돈도 벌면서 의술도 행하고 학생들도 가르치면서.”
“그래, 최근 자네가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 소홀하다고 말이 나온다네. 자네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귀담아듣게나.”
동료 교수가 지나가며 남긴 말처럼 요새 좋지 않은 말이 나돈다는 걸 말이다.
자칫하면 집보다 대학에서 먼저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구도 하면서 돈도 따박따박 나오는 직장이 어디 흔하겠는가.
하물며 따로 비용들일 필요 없이 연구에 필요한 장비를 쓸 수 있고 재료를 구할 수도 있다.
“···하, 뭣보다 여기선 진료를 안 해도 되니 좋았는데.”
하지만 이제 그렇게는 안 될 모양이었다.
여기서 내쫓겨서야 그게 불가능하니 말이다.
아니, 여기서 내쫓기면 필시 아내 델리아가 자신을 집에서도 내쫓아버릴 터.
“연구는커녕 당장 잘 곳을 걱정해야 하려나. 아니, 잠깐만. 내쫓기면 그 참에 타이터스빌로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성과가 나지 않는 연구에 너무도 오래 전념했는지, 누가 보면 박사가 아니라 대학원생이라 해도 믿을 지경이다.
존 엘리스가 교정으로 나와 터벅터벅 거닐며 중얼거리는데 문득 누군가가 다가왔다.
“혹시 존 엘리스 박사님 본인이십니까?”
고개 돌려 목소리가 난 곳을 보니 수려한 외모의 검은머리 청년이 있었다.
동양인 학생인가? 아니, 아시아인 학생이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인데.
아, 옆에 젊은 처자가 함께 있는 걸 보면 그녀가 학생이고 데이트를 온 것이려나.
“학생들에게 여쭤보니 선생님께서 존 엘리스 박사님이라고 했습니다만?”
검은머리 청년이 재차 묻자 그제야 존 엘리스 박사는 약간 경계심을 띠면서 물었다.
“그렇소만 다른 학생들에게 물어봐서까지 날 찾다니 무슨 용무가 있으시기에?”
“저는 태선 킴이라 합니다. 이쪽은 제 비서인 샬롯이고요.”
태선은 자기를 소개하며 악수를 청했다.
경계심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일단 존도 악수를 받아주었다.
“비서라. 하긴 그러고 보니 차림새도 그렇고 학생은 아니겠군. 아무튼 내게는 무슨 용무요?”
그러며 다시 물었다.
‘용무라.’
있는 그대로 말하면 한 문장으로도 가능했다.
‘당신 연구로 사업합시다’라고 말이다.
다만 존의 연구는 아는 이가 그리 많진 않다.
애초에 학계에 발표는 되긴 했지만 민간인이 알 만큼 이슈가 될 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곧이곧대로 말해봤자 경계심만 높이는 꼴이 된다.
“제가 최근 두통이 좀 심해져서요. 그러던 차에 같은 호텔에 묵는 분이 존 엘리스 박사님께 치료받았는데 실력이 좋다며 추천하더군요.”
“칫, 겸사겸사 데이트라더니 진료 데이트는 또 처음이네요.”
샬롯이 약간 심술 난 듯 궁시렁거리는 사이.
태선의 용건에 존 엘리스 박사의 경계심은 풀렸지만 달가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흠, 환자 분이셨구만. 헌데 나는 진료를 보지 않은지 꽤 됐다네. 다른 분을 추천하지.”
아니나 다를까 바로 다른 의사에게 떠넘기려고 한다.
“다른 의사분은 안 됩니다. 반드시 엘리스 박사님께 치료를 받고 싶습니다.”
“아니, 나는 진료 볼 형편이 아니라고 방금 말했잖나.”
그가 다시 완강하게 거절의 뜻을 밝히려는 차에 태선은 존 엘리스가 도저히 물지 않고 못 배길 떡밥을 던졌다.
“듣자하니 새로운 약을 개발하고 계신다죠? 제가 써볼 수 없겠습니까?”
태선이 따라올세라 얼른 떨쳐내고 도망치려 하던 존 엘리스 박사가 흠칫 멈춰 섰다.
“약··· 흠, 내가 약을 개발하고 있는 건 어디서 들었나.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텐데···.”
“학생들과 교수님께 물어물어 오다 보니 약 개발로 바쁘시다고 해서요. 그래도 꼭 진료를 받고 싶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그랬구만. 그런데 어쩐다, 아직 딱히 이렇다 할 결과는 없어서 말이네······. 그렇다고 실패란 건 아닌데 이게 어중간해서 말이야.”
시인도 부정도 아닌 어중간하면서도 떨떠름한 반응에서 지금 그의 상태가 짐작이 갔다.
‘초조해하네. 연구에 진척이 없나 본데? 지금 하는 연구에 자신도 없어지고 있는 것 같고···.’
태선은 1866년 이후의 존 엘리스 박사에 대해서라면 꽤나 잘 안다.
다만 그 이전에 어땠는지는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신통한 결과를 내놓지 못해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듯 싶었다.
‘석유로 뭘 만들겠다는 아이디어에 꽂혀서 쏟아부은 시간이 상당한데 매몰비용 탓에 손을 털지 못하나 보군.’
특히 연고나 의료용품이라는 정체성에 갇혀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다만 나중에는 꼭 처음의 아이디어가 아니라도 뭐든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갖은 실험과 연구 끝에, 그는 1866년 회사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회사가 21세기에도 시장의 10퍼센트나 점유하고 있지.’
뭣보다 존이 만들어낸 결과는 소비재다. 찍어내면 찍어내는 만큼 팔리는 것이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만약 부작용이 생기더라도 절대로 존 엘리스 박사님 탓은 안 하지요.”
태선은 말하며 존 엘리스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박사님도 환자에게 써보고 싶지 않으신지요. 마침 제가 두통이 있으니 타이밍이 좋다고 봅니다만.”
“흠, 환자를 마침 딱 환자 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
“그럼 결정됐네요. 가시죠. 저쪽이 의과대학이 있는 것이죠?”
“···근데 자네, 여기 처음 온 것 아니었나?”
“지나가던 교수님이 알려줬습니다. 아무튼 빨리요!”
***
잠시 뒤, 자신의 연구실에 태선과 샬롯을 앉혀놓고 존은 자기가 만들어낸 약을 찾고 있었다.
“흠, 보자. 약이···아, 거기 잠깐만 앉아서 기다려주게.”
태선이 밀어붙이자 처음에는 정신 못 차리고 끌려온 존이었으나, 자기 연구실에 오자 의욕이 올라 적극적으로 변했다.
“두통에는···그래, 이거군. 자, 이걸 귀 뒤쪽과 관자놀이에 잘 펴서 바르게.”
존 엘리스 박사가 희뿌옇고 미끌미끌한 질감의 연고를 가져와서는 내밀었다.
하지만 태선은 차마 바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게 뭔지 아는 이상 몸에 바른다고 죽지 않는다는 건 아는데··· .’
그래도 막상 바르려니 찝찝하기는 했다.
“저기, 안 바를 건가?”
그때 존 엘리스가 조심스레 태선은 불렀다.
여기서 더 망설이면 괜히 기분만 상하게 만든다.
‘하, 그래. 먹는 것도 아니고 문제없겠지.’
태선은 이내 손가락 끝에 연고를 묻혀서는 귀 뒤쪽과 관자놀이에 골고루 듬뿍 발랐다.
그러고는 자못 눈을 감고는 효과가 있는 걸 느껴보는 듯한 시늉을 했다.
“두통이 없어지는 것 같나?”
기대감 반 초조감 반으로 존 엘리스가 물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존 엘리스와 자신의 관계를 사업 쪽으로 전환시커야 한다.
그걸 위해 대화나 이벤트를 어떤 식으로 진행시킬 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오기 전에 미리 구상해뒀었다.
“반응이 없는가?”
얼마 기다리나 싶더니 존 엘리스가 다시 묻자 태선은 이내 입을 열었다.
“없군요. 오히려 속이 좀 메스꺼운데요.”
“메스껍다고? 그럴 리가?! 두통이 가라앉아야 정상인데.”
태선은 자못 정말로 두통이 심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덧붙였다.
“냄새도 그렇고요.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효과가 있더라도 냄새 탓에 두통이 심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냄새가··· 문제라고?”
태선은 고개를 돌려 샬롯을 향해서 물었다.
“샬롯은 냄새가 어떤가요?”
찌릿─!
순간 샬롯이 자신에게 눈을 흘기며 뾰족해졌다.
존을 찾아다닐 때부터 샬롯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래서 입도 뻥끗 안 하면서 기분이 좋지 않다고 시위하고 있던 것이다.
태선에게 두고 보자고 눈빛을 보내고 샬롯은 환상적으로 장단을 맞춰줬다.
“저도 계속 맡으니 좀 어지럽네요. 전 원래 두통이 없는데도 생기는 것 같아요.”
“아니, 원래는 없었던 두통마저 생긴다고?”
“네. 아무래도 엘리스 박사님께서는 연구하시면서 냄새에 무뎌지셨는지 모르셨나봐요.”
“···그렇다고 합니다.”
무슨 2인조 사기단도 아니고 태선과 샬롯의 티키타카에 존 엘리스 박사는 의외의 복병이라도 만난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냄새라니··· 그건 몰랐군.”
“죄송합니다.”
“아냐, 죄송할 게 뭐 있나.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네.”
“그럼 죄송합니다만 얼굴에 연고를 계속 묻히고 있으니 메스꺼운 게 심해지는데 닦을 것 좀 주시겠어요.”
“저쪽에 물과 수건이 있다네. 그걸 쓰도록 하게.”
존 엘리스가 가리킨 곳으로 가서 태선은 수건과 물로 아까 얼굴에 질펀하게도 바른 석유 연고를 닦아냈다.
물론 당연히 기름인데 그게 쉽게 닦일 리가 없었다.
···그리고 태선은 그런 티를 노골적으로 내면서 말했다.
“미끄러워지네요. 닦이지도 않고요. 닦이기는커녕 점점 퍼지는 것 같습니다. 느낌이 어째 피부에 고무로 된 천을 올려놓은 것 같네요.”
“미안하네. 고생만 시켰군. 그치만 자네가 좀 심한 경우일세, 그걸 그리 많이 바르면 어쩌나. 만들기도 어렵단 말일세.”
태선은 어느 정도 연고를 닦아내고 다시 그를 봤다.
어깨가 축 쳐져있었다. 주섬주섬 연고를 정리하더니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아무튼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네. 그만 가보게. 처음에 말한 대로 다른 의사를 찾아가 보도록 하게나.”
태선은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연구실을 나왔다. 아니, 닫히는 문을 탁 잡으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잠깐만요. 그 석유 연고 말입니다.”
“응···왜? 호, 혹시 늦게라도 효과가 나오는 것 같은가?”
아직도 석유가 약이 될 수 있다고 일말의 희망을 거는 듯 보이기에 태선은 손까지 내저으며 단호히 선을 그었다.
“아뇨아뇨! 그건 재차 말씀드리지만 약으로써 효과는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몸에 닿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미끌거리고 냄새는 어찌나 고약한지.”
“······.”
순간 문간을 사이에 둔 존 엘리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시비를, 그것도 이렇게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듣는 것은 처음이다.
얼굴이 붉어진 존이 한 소리 하려 했지만, 태선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하지만 약으로는 몰라도, 제가 하고자 하는 사업에라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약으로는 몰라도 다른 방향이라면 상당히 유용하다?”
호기심 반 의심 반 눈빛. 여기서 태선은 그 호기심에 더욱 불씨를 지펴줄 미끼를 던졌다.
“예, 윤활제로 사용해보시죠.”
동업합시다. 세계 최초의 엔진오일 회사 발보린Valvoline 사장 존 엘리스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