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Snake Finds the Wolf Who Played With the Snake RAW novel - Chapter 2
1. 첫 발정기
반듯하게 미친 여자.
그것은 지금 온화한 얼굴로 길가에서 아이들과 대화 중인, 로렌 루즈벡의 별명이었다.
질끈 묶어 내린 푸석한 은발과 허름한 옷차림. 껍데기는 평범했으나 단아한 이목구비만큼은 평범하지 않아서 이 복작복작한 거리에서도 그녀는 눈에 띄었다.
어찌 됐든 겉보기엔 멀쩡한 여자였다. 이런 여인을 향해 그냥 미친 것도 아니고 반듯하게 미쳤다고 수군대는 이유는…….
“로렌은 왜 우리 할아버지한테 반말해요?”
“내 나이가 더 많단다. 왕국을 수호하다 죽었다던 늑대 신이 바로 나거든.”
이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면서도 품행이 단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5년 전, 왕국을 수호하던 늑대 신이 죽었다. 은빛 털이 아름다웠던 늑대. 그것은 진짜 신이 아니라 눈물을 흘려 비를 내릴 수 있었던 신비한 영물이었다.
그것은 척박한 왕국에 비를 내려서 신으로 추앙받았다. 무려 300년이나.
하지만 언젠가부터 기운이 쇠한 늑대는 가뭄에 비를 내리지 못했다. 늑대는 국민의 원성을 들으며 그대로 죽어 버렸다. 누군가는 왕이 늑대를 죽였다고 했으나 확인된 바는 없었다.
“로렌은 거짓말쟁이! 이제 성년이 된 로렌이 어떻게 신이에요? 그리고 늑대 신은 죽었다고요.”
“맞아요. 그래서 우리도 이웃 나라처럼 하늘님을 믿어야 한대요.”
“로렌이 진짜 늑대 신이면 지금 비를 내려 봐요!”
동네 아이들이 로렌 앞에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로렌은 쓰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이제 힘이 없어서 비를 내리지 못해. 미안하구나.”
“그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로렌이 평범한 늑대 수인이라서잖아요.”
수인. 짐승과 인간의 피가 섞인 종족으로 동물적인 감각과 힘을 가진 존재.
인간은 그들을 짐승 같다며 천대했지만 그중 강력한 마력을 지닌 이는 영물이라 부르며 신으로 숭상하기도 했다. 동대륙에 사는 구미호나 호인이 산신(山神)이라 불리는 것도 그런 경우였다. 영물들은 강한 마력으로 영토를 보호했다.
“그래. 맞는 말이다. 난 이제 신이 아니라 평범한 늑대 수인이지.”
그렇게 말하는 로렌의 얼굴엔 기분 나쁜 기색은 없었다. 그때 저 멀리서 빵집 주인, 마사가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아우, 힘들었지? 애들을 봐줘서 고마워, 로렌. 갑자기 대량 주문이 들어오는 바람에 바빠서 혼났네.”
“급할 거 없으니 천천히 걸어와. 별일 아니었다.”
“급할 게 왜 없어? 너도 네 가게를 봐야 하잖아.”
마사가 뒤쪽을 턱짓했다. ‘루즈벡 찻집’. 나무 간판에 초록색 페인트로 써 놓은 가게명은 5년 전 버려진 로렌을 거둬 준 양어머니, 에블린의 작품이었다.
초록색 페인트 밑으로 ‘루즈벡 우산 가게’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비쳤다. 아마도 저 우산 사업은 폭삭 망했을 것이다. 그때 못다 판 우산이 지금까지도 가게 구석에 한가득 쌓여 있었으니까.
뭐, 업종을 바꿨다고 해서 매출이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나쁘지도 않았다. 빠듯하게 먹고살 돈은 된달까.
곧 맞은편에서 귀부인 하나가 또각또각 걸어오더니 찻집 간판을 빤히 확인했다. “왜 이런 곳에서 보자는 거야, 정말.” 작게 구시렁댄 귀부인은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한 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마사가 로렌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저 봐. 벌써 손님이 왔잖아. 어서 들어가 봐.”
그러면서 마사는 로렌의 손에 네모난 캐러멜을 쥐여 주었다. 귀족 나리나 먹는다는 고급 디저트를 내려다보며 로렌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너무 과해.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
“과하기는 무슨. 가게에서 팔고 남은 걸 남편 몰래 가져온 거야.”
“하지만…….”
“오늘 에블린의 기일이잖아. 상에라도 올려놓든가.”
마사는 로렌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여 준 뒤 세 아이를 데리고 빵집으로 돌아갔다. 아이가 “로렌이 늑대 신이었다는데 맞아요?”라고 묻자 마사는 “그건 로렌이 신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생긴 병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했잖아!”라면서 등짝을 짜악 내리쳤다.
로렌은 그런 마사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작게 웃다가 반질반질한 캐러멜을 손끝으로 쓸었다. 작년에 죽은 에블린의 기일도 기억해 주다니. 마사는 이 캐러멜만큼이나 반짝이는 마음을 갖고 있으리라.
“이보게. 주인장은 없는 건가.”
때마침 열린 가게 문 안쪽에서 귀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렌은 후다닥 가게로 들어가 주문을 받았다. 작고 소박한 가게에서 보기 힘든 귀부인의 화려한 드레스 자락은 그녀가 앉은 테이블보다도 넓게 퍼졌다.
“아주 뜨거운 홍차로 두 잔 주게나.”
로렌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귀족 앞에서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큰 화를 당할 수 있다는 걸 지난 경험에서 배운 것이다.
그때는 에블린이 지켜 주었지만, 지금은 남은 가족이 양 오라버니뿐이라 알아서 버텨야 했다. 오라버니는 모자란 제게 화를 내고 훈계하는 사람이지, 저를 지켜 주는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로렌은 주문대로 팔팔 끓는 물로 차를 우려 귀부인에게 대령했다. 레이스 장갑을 초조하게 만지작대는 걸 보면 맞은편에 앉을 일행을 애타게 기다리는 모양이다.
부우― 끼익! 그때 저만치 떨어진 벨파슨 기차역에서 정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몇 분 뒤 기차역을 빠져나온 손님이 하나둘 들어와 테이블을 차지했다.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손님은 유독 키가 큰 사내였다. 로렌은 한눈에 그가 귀부인의 일행임을 알아보았다. 구두부터 정장까지, 몸에 걸친 모든 게 캐러멜 껍질처럼 반짝이는 사내였다.
강철을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유려한 얼굴은 피로에 절어 있었다. 사내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며 귀부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귀부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할 말을 쏟아 냈다.
“이런 찻집에서 만나자고 하다니. 이젠 기본적인 예의조차 차리지 않는군요.”
“기차역에서 가장 가까운 찻집을 고른 것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사업 때문에 바쁜 몸이라.”
“저는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마레 지역 땅도 당신의 철도 사업을 위해 당신에게 팔았고요. 그런데… 헤어지자고요?”
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찻잔을 달칵거리던 다른 손님도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로렌만이 그들에게 별다른 관심 없이 카운터를 정리 중이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체사레 부인. 마레 지역 땅은 분명 제값을 주고 샀습니다. 그걸로 부인도 많은 이득을 보았잖아?”
“제가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알렉!”
훤칠한 사내 ‘알렉’이 부인이 빽 내지르는 소리에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중입니까. 난 분명 연애 기간이 짧을 거라고 미리 경고했으니 내 바짓가랑이나 잡자고 이러는 건 아닐 테고.”
“윽, 나쁜 자식!”
귀부인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제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을 들었다. 이건 살기인가. 그 순간 카운터를 행주질하던 로렌이 귀부인을 힐끔거렸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로렌은 재빨리 카운터 옆에 쌓여 있던 우산 하나를 잡았다.
“이건 날 농락한 천벌이에요, 알렉!”
귀부인은 들고 있던 찻잔을 기어코 사내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알렉이란 사내는 이 정도는 맞아 준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시선을 내렸다.
촤악! 뜨거운 찻물이 찻잔을 이탈해 사내의 얼굴로 떨어지는 순간.
‘이상하다. 안 뜨겁네?’
사내는 눈썹을 찌푸렸다. 얼굴로 쏟아졌어야 할 찻물의 감촉은 온데간데없고 눈앞이 새까맸다. 내가 눈을 감았었나?
당황한 사내가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난데없이 머리 위로 등장한 검은 우산이 뜨거운 찻물을 막아 주고 있었다.
“홍차는 뿌리는 게 아니라 마시는 것이다.”
우산을 든 로렌이 버릇처럼 상대를 꾸짖었다. 그러다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아차, 이 사람은 귀부인이었지. 귀족 앞에서는 입조심을 하라던 양어머니의 조언이 뒤늦게 떠올랐다.
오늘은 에블린의 기일인데 에블린이 하늘에서 속상한 꼴을 보겠어. 로렌은 이어질 사건을 예측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아마도 손찌검이 날아오겠지. 귀족이란 다들 그랬으니까.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콜록, 콜록!”
귀부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기침을 반복했다. 먼지투성이던 우산이 팡 펴지면서 수북하던 먼지가 귀부인의 코로 들어간 모양이다.
기침을 겨우 멈춘 귀부인의 얼굴은 달궈진 주전자처럼 붉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귀부인이 로렌의 뺨을 후려치려고 손을 올리는데.
“이런 반지 끼고 때리면 저 여자 얼굴 다 나가요, 부인.”
사내가 귀부인의 손목을 꽉 잡으면서 빙긋 웃었다. 팔을 부들부들 떨던 귀부인은 입술을 꽉 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뒤로 넘어간 의자가 뒷자리 손님의 다리를 쳤지만, 손님은 저도 로렌 꼴이 날까 봐서 아무 말 없이 아픈 다리만 문질렀다.
“어디,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볼 겁니다!”
귀부인은 붙잡힌 팔을 탁 떼어 내면서 사내를 노려보았다.
“굳이 내 생각 하며 살 필요는 없어요, 부인.”
“신께서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신이 죽어 버린 나라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신조차도 당신을 버릴 거라고, 말똥 같은 자식!”
귀부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을 쏟아 낸 뒤 찻집을 나섰다. 로렌이 ‘뭔가 오해가 있는데, 난 누군가를 버리지 않아.’라고 중얼거렸지만 누구도 그 헛소리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시대가 어느 땐데 얼어 죽을 신 타령이야.”
사내가 코웃음을 치면서 자리에서 따라 일어났다. 신조차도 당신을 버릴 거란 말이 유독 거슬렸지만 티 내진 않았다.
그는 재킷 단추를 느릿하게 채우면서 로렌을 가만히 살폈다. 황금빛 눈동자가 로렌의 이목구비를 진득하게 돌아다니더니 그녀가 들고 있던 까만 우산으로 향했다.
“이거면 되겠지?”
사내는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우산과 맞바꿔 가져갔다. 로렌은 퇴장하는 사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100실론짜리 지폐는 우산과 차 두 잔을 합한 가격보다도 커다랬다.
* * *
벨파슨 역의 막차 시간은 오후 두 시였다. 그 시간이 넘어가면 이 근방 행인이 줄고 찻집을 찾는 손님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로렌은 막차 시간에 맞춰 가게를 정리했다. 다른 날이라면 아르바이트를 했겠지만 오늘은 에블린의 기일이니까 그녀 곁에 있을 예정이다.
로렌은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왔다. 해진 거실 소파를 지나 벽에 붙여 둔 반원 테이블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테이블 위로 벽에 걸린 네모난 초상화가 보였다.
낡은 벽지와 달리 매일 먼지를 털어 낸 초상화는 새것 같았다. 양어머니, 에블린은 그곳에서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머니, 벌써 당신이 죽은 지 1년이 되었어.”
로렌은 테이블 위에 캐러멜 몇 개, 들판에서 꺾어 온 꽃 몇 송이, 큰맘 먹고 사 온 위스키를 올려 두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과 함께한 게 4년이고 당신 없이 버틴 건 1년인데… 그 1년이 내가 왕국을 지키던 지난 300년만큼이나 고독했다.”
로렌은 초상화를 보면서 지난날을 회상했다.
300년 전. 로렌은 원래 북쪽 산을 지키던 영물, 은빛 늑대였다. 열다섯 소녀의 모습을 한 그녀에게 젊은 왕, 막스웰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건국한 드라고로스 왕국을 지켜 달라고 간청했다.
‘저리도 아름다운 사내가 있구나.’
사랑에 빠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녀는 막스웰에게 본명을 알려 주고 수호신의 맹약을 맺었다. 하얀 빛이 둘을 감싸며 그의 손등과 그녀의 목덜미에 똑같은 인장이 생겼다. 단순한 맹약의 표시였으나 늑대는 그와 같은 것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렇게 그녀는 막스웰을 따라 드라고로스로 향했다. 막스웰은 왕궁 지하에 마련한 ‘성전’에 로렌의 거처를 마련한 뒤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꼭 가두어진 것 같구나.”
“다른 이가 당신께 해를 가할까 봐 두려워서요. 당신을 저만 볼 수 있도록 가장 귀한 곳에 모신 겁니다.”
막스웰은 그 음습한 지하가 이 왕국에서 가장 귀한 장소라 하였고 로렌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왕궁을 축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막스웰이 이웃 나라 왕녀와 결혼했다. 로렌은 그날 처음 그의 결혼을 지켜보기 위해 지하에서 빠져나왔다.
‘영물인 나와 막스웰이 이어질 수 없으리란 건 알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고 쏟아졌다. 그날은 왕국 사상 가장 많은 비가 내린 날이었다.
로렌은 막스웰이 죽은 뒤로도 맹약대로 드라고로스를 지켰다. 지하 성전에 잠들며 수백 년간 비를 내렸다. 자신과 맹약한 막스웰이 다시 환생할 때까지.
그리고 300년 후 막스웰은 다시 왕족으로 환생했다. 전생과 같은 이름과 같은 모습을 가진 그는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힘이 쇠하여 비를 내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야 그는 쓸모가 없어진 자신을 찾아 지하 성전으로 내려왔다.
사파이어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축 늘어진 늑대의 몸을 무심하게 훑었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초췌한 짐승이 아니라 어여쁜 소녀의 모습을 유지하며 당신을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과 달리 나를 기껍게 봐 주었을까. 의식이 가물가물한 와중에도 아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스웰은…….
“저 늑대를 죽여라.”
동행한 주술사에게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렸다. 쓸모없어진 늑대를 죽이고 신성 제국의 종교를 받아들이면 왕국이 강해질 거라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로렌은 눈을 감고 무력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여우 수인이었던 주술사가 왕의 명령에 복종하는 척 로렌을 몰래 빼돌렸다. 왕에겐 비슷한 늑대 가죽을 바친 뒤 로렌을 죽였다고 거짓으로 증언하고서.
“날 왜 살려 주었느냐.”
깊은 숲속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눈을 뜬 로렌은 주술사에게 물었다. 고작 수십 년을 산 주술사가 나이가 훨씬 많을 로렌을 자식처럼 꼭 안고서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내 딸이 당신처럼 인간에게 버림받아 죽었거든.”
수인의 몸에서 운 좋게 강한 영물로 태어난 딸. 그 귀한 아이가 욕심 많은 인간에게 난도질당했다는 설명이 뒤를 이었다.
“그런데 당신을 보고 어떻게 그냥 지나치겠어.”
“네 딸도 나도… 영물이 아니었다면 행복했을까.”
“궁금해? 그럼 지금부터 신성한 영물 따위가 아니라 평범한 수인이 되어 자유롭게 살아 보는 건 어때.”
“가능할 리가.”
“가능하다면 해 볼래?”
주술사의 말에 로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술사가 힘을 불어 넣어 주자 로렌은 짐승이 아닌 열다섯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영물이 아닌 아주 평범한 늑대 수인으로.
“오늘부터 네 이름은 로렌이야. 로렌 루즈벡.”
주술사는 본명을 빼앗긴 늑대에게 죽은 딸의 이름을 지어 주고서 그녀를 딸처럼 여겼다.
참 행복했었지. 오래된 기억을 되새긴 로렌은 눈앞의 초상화를 응시했다.
그때 그 주술사가 바로 이 에블린 루즈벡. 불치병을 앓다가 작년에 유명을 달리한 로렌의 양어머니였다.
‘당신이 내게 힘을 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더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었을까.’
살아생전 에블린은 병에 걸린 건 로렌 탓이 아니라고 했지만 로렌은 은연중에 부채감을 느끼곤 했다.
“에블린, 지금 난 왕에게서 내 진짜 이름을 되찾기 위해 살고 있어. 그래야 진정한 자유를 찾을 테니까.”
로렌은 초상화 위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물감을 덧칠한 거친 표면이 까끌까끌했다.
“고맙다, 당신의 딸로 살게 해 주어서. 당신과 함께할 때 너무도 행복했어.”
마음은 너무 슬픈데 말라 버린 눈물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철커덕. 끼이― 아래층에서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오는 이라면.’
로렌은 옷차림을 한 번 확인한 뒤 손을 다소곳이 모아 바른 자세로 섰다. 그녀의 양 오라버니, 도스턴 루즈벡이 2층으로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한쪽 어깨로 내려 묶은 갈색 장발, 몸에 꼭 맞는 정장과 테가 얇은 안경, 서류 가방을 든 모습은 지식인답게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웃들은 천치 같았던 로렌을 사람으로 만든 이가 도스턴이라고 입을 모았다.
“똑똑하지, 훤칠하지. 오죽 뛰어났으면 수인 최초로 아카데미 교수로 임용됐겠어? 로렌은 운도 참 좋아. 그런 사람을 오라비로 두고.”
그는 에블린이 떠난 후 로렌의 하나 남은 가족이자 보호자가 되었다. 차가운 인상만큼이나 성격도 예민했기에 그의 가르침은 언제나 혹독했었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 안쪽으로 갈색 눈동자가 점수를 매기듯 로렌을 훑었다.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면 지금 로렌의 자세와 옷차림이 그의 기준에 적합한 모양이다. 로렌은 방긋 웃으며 도스턴에게 인사했다.
“일은 잘하고 왔는가, 오라…….”
“말투.”
곧장 도스턴의 지적이 들어왔다. 300년간 신으로 숭배받던 세월 때문인지 말투만큼은 고치기가 힘들어서 애를 먹게 된다. 귀부인에게 호되게 혼날 뻔했으면서 실수를 반복하다니. 너무도 부끄러웠다.
“일은 잘하고 오셨나요, 오라버니.”
“그래.”
고개를 끄덕인 도스턴은 서류 가방에서 에블린이 즐겨 먹던 육포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두고, 그다음 꺼낸 종이봉투는 로렌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언가요?”
“곧 성년이 되지 않니. 성년식을 치를 것이니 옷과 신발을 새로 사거라. 레이디답게.”
“감사…합니다.”
로렌은 봉투를 만지작거리면서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스무 살이 되면 모든 왕국민은 성년식을 치른다고 했지.’
귀족은 데뷔탕트라는 무도회에 참석하고 평민은 구역별로 작은 축제를 벌인다. 수인도 인간과 마찬가지였으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성년이 된 수인은 발정기를 맞는다는 것.
발정기는 수인들이 짝을 이루기 위해 주기적으로 겪는 생리 현상이다. 암컷의 경우, 이 시기가 되면 수컷을 유혹하는 페로몬을 흘렸다. 수태하려는 본능에 휩싸인 암컷은 육체적 쾌락을 탐하며 이성을 잃었다.
첫 발정기가 언제 찾아오는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첫 발정기가 끝나야 그때부터 정확한 주기를 알 수 있을 뿐.
“성년이 되면 몸가짐을 더욱 단정히 해야 할 것이다. 그 봉투 안에 발정기를 억제하는 약초를 넣었으니 항상 조심하도록 해.”
도스턴은 짧은 말을 남긴 뒤 다시 집을 나섰다. 그는 1년의 대부분을 연구실에 머물렀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적었다. 그마저도 에블린이 죽은 후에는 잠시 들르기만 할 뿐 잠은 여관에서 청했다.
“하루쯤은 집에서 함께 있어 줘도 되는데.”
로렌은 쓸쓸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 * *
도스턴의 말대로 성년식을 준비하던 어느 날.
로렌은 고열과 함께 쓰러져 버렸다.
“로렌!”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불렀고 누군가에게 업혀 몸이 흔들렸다. 도스턴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아주 잠시 에블린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에블린은 제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와 가족이 되자꾸나.”
처음 에블린을 만났을 때의 장면이었다.
로렌은 에블린이 내민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눈물이 차오른 시야가 온통 흐릿했으나 에블린의 주름진 손만큼은 유독 또렷하게 보였다.
‘그때 에블린이 내민 손을 잡았던가.’
그리고 로렌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첨탑 꼭대기 방에 쓰러져 있었다.
돌벽과 돌바닥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은 온통 회색이었다. 가구라고는 책상과 의자, 침대 하나. 그마저도 오래되었는지 먼지가 수북했다.
‘누가 날 여기로 데려온 거지?’
이곳이 수도 외곽에 있는 버려진 첨탑이라는 걸 생각하면 데려왔다는 것보다 격리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때 도스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발정기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버텨라.”
도스턴은 로렌과 멀찍이 떨어진 창틀에 앉아 코를 틀어막고 있었다.
“발정기요?”
“그래. 그래서 내가 그리 조심하라고 일렀건만! 약초는 제대로 먹은 것이냐.”
“모, 몰랐어요. 그 약초도 제때 먹었는데 갑자기 열이…….”
“변명은 됐어. 이 첨탑에 마법을 걸어 두었으니 하찮은 수컷이 지나가더라도 여기까진 못 올라올 것이다.”
“하, 하지만 수컷이 없으면 발정기가 아주 괴롭다고 들었는데요.”
“내가 너에게 그런 천박한 사고방식을 가르쳤느냐!”
도스턴이 말꼬리를 잘라 내며 불같이 화를 냈다. 로렌은 어깨를 움츠렸다. 도스턴이 제게 실망했을까 봐 겁이 났다.
“네가 이곳에 갇힌 건 네 그 천박한 페로몬 때문이다. 그러니 정숙하게 버텨.”
차가운 설명을 퍼붓는 것이 평소의 오라버니다웠다. 지독한 냄새가 난다고 코를 막고서 첨탑을 떠나던 눈빛은 낯설었지만 말이다.
‘오라버니는 무얼 걱정한 걸까. 신이었을 적에도 버림받았던 몸, 어느 누가 나를 위해 여기까지 온다고.’
서러운 감정이 차가운 서리처럼 몸에 들러붙을 때마다 아랫배에 뭉친 열기가 홧홧하게 타올랐다.
‘배 속이 타는 것 같아.’
로렌은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이것은 굶주림과 비슷했다. 무엇이든 당장에 쑤셔 넣고 흔들고 싶었다. 뜨겁고도 가려운 배 속을 실컷 긁어내고 싶었다.
‘흐으, 안 돼.’
저속하고도 음란한 상상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영웅처럼 나타난 사내가 외딴 탑에 갇힌 저를 위로해 줬으면 싶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왕국을 수호하며 신으로 칭송받던 과거를 더듬었으나 오늘따라 그 기억이 까마득했다. 한낱 짐승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5년이 흘러서야 이리도 절절하게 깨닫는다.
‘미안, 오라버니. 아무래도 정숙하게 버티긴 글렀나 봐.’
바닥으로 추락한 자신이 너무도 끔찍해서 로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리 사이가 간지러워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바닥에 하반신을 문지를 때마다 깊은 곳에 감쳐 둔 욕망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질척이는 감각이 소름 끼쳤다.
그렇게 얼마나 버텼을까. 아까부터 창밖에서 웅성거리던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로렌은 펄펄 끓는 한숨을 토해 내며 바닥을 기었다. 해지고 구멍 난 양탄자는 로렌이 기어갈 때마다 결을 달리하며 그 흔적을 남겼다.
로렌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차가운 돌벽을 짚고 기어올랐다. 반쯤 일어선 다리는 중심을 잡지 못했고 후들거렸으나 창틀을 붙잡고 가까스로 버텼다.
로렌은 이가 나간 유리창 밖을 살폈다. 창백하도록 새하얀 보름달이 까마득한 아래를 비추고 있었고…….
“꺼져! 내가 먼저 왔어.”
“너나 꺼져. 저 여자는 내 거야!”
그곳은 아수라장이었다. 로렌의 발정 페로몬을 맡고 몰려든 수인족 사내들이 난폭한 본성을 드러내며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최후의 승자가 되어 암컷을 차지하고자 발악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탑 외벽을 기어오르려 했으나 도스턴이 걸어 둔 화염 마법 때문에 불덩이가 되어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 난장판을 보고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안도감이었다.
‘내게 와 준 이가 있구나.’
지독한 외로움을 탓해야 할지 방종한 몸뚱이를 탓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로렌은 차가운 창틀을 꼭 쥐며 밭은 숨을 내뱉었다. 바람이 실어 온 수컷 냄새가 깨진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이대로 몸을 던져서 자신을 갈구하는 수컷들에게 저를 내주고 싶다는 천박한 발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창문을 넘어갈 힘이 없어서 다행인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전신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으려던 때.
“크헉!”
“으아악!”
탑 아래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끄럽던 소음은 가위로 싹둑 잘라 낸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로렌은 안간힘을 다해 아래를 살폈다.
벼락이라도 떨어진 건가. 난폭하게 굴던 십수 명의 사내가 모두 정신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패배자들의 몸뚱이를 짓밟고 올라선 사내 하나가 느릿하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만한 사내의 눈동자가 로렌을 주시했다.
“너.”
낮고 섬뜩한 목소리. 크게 지른 것도 아니건만 귓가에 대고 말하듯이 생생했다. 척추를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이 근방에서 단내가 진동을 하던데. 알고 있어?”
사내는 수도에 있는 수인들을 모조리 유혹할 셈이냐고 비아냥거렸다. 그 목소리마저도 달콤하게 들려서 로렌은 간지러운 귀를 손으로 털어야 했다.
고아한 달빛 아래로 드러난 사내의 이목구비는 아름다웠다. 밤하늘보다도 새카만 머리칼, 창백한 얼굴 위로 규칙 없이 튀어 있는 타인의 핏방울.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다부진 체격과 제정신이 아닌 듯 살짝 풀려 있는 동공. 사냥 중인 짐승처럼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
로렌은 대답 대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디서 마주쳤던가. 낯익은 사내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발정이 났으면 알아서 사내랑 흘레붙을 것이지, 왜 이런 곳에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을까.”
피식 웃는 사내는 구세주이기보다 색정적인 악마에 가까웠다. 사내는 나른하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뭐 어쨌든 나로선 고맙지만.”
사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날개라도 달린 듯 그의 몸이 붕 떠올랐다. 고위 마법사들만이 쓴다는 부유 마법이었다.
동시에 도스턴의 마법이 발동했다. 어른 머리통만 한 불덩이들이 마법진에서 튀어나와 사내를 향해 정신없이 날아들었다.
“오, 오지 마. 위험해!”
놀란 로렌은 귀를 막고 눈을 꾹 감았다.
쾅! 눈을 감았음에도 빛이 눈앞에서 번쩍거렸다. 짧은 소음이 가시고 주변이 고요해졌다. 로렌은 재빨리 첨탑 아래를 살폈다.
‘그 남자도 떨어졌나?’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뭘 찾아?”
“……!”
화들짝 놀란 로렌이 몸을 돌리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도스턴의 마법을 피한 거지?’
함부로 피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건만, 눈 깜짝할 사이 첨탑 안으로 들어온 사내는 우두커니 서서 로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몸이 풍기는 위압감은 대단했다. 평소 용맹한 늑대라고 자부했건만 로렌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상대를 찍어 누르는 난폭한 기운이 두려우면서도 그것에 깔리고 싶은 본능적인 희열이 등허리를 오싹하게 타고 올랐다.
‘지, 진정해. 오라버니가 정숙하라고 했잖아.’
로렌은 고개를 숙여 부끄러운 표정을 감췄다. 아래로 내려간 시야로 그의 새까만 구두가 보였다. 장인이 손질한 매끈한 가죽 위로 더러운 진흙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이곳까지 정신없이 뛰어온 흔적이었다.
주름이 잘 잡힌 바짓단에는 여기저기 피가 튀어 있었다. 그 위로 보이는 셔츠와 재킷도 사정은 똑같았다. 귀족 파티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스리피스는 타인의 피 얼룩으로 엉망이었다.
로렌이 그의 몸을 살피는 사이,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로렌의 턱을 움켜쥐었다.
윽! 주저앉았던 로렌의 고개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삐딱하게 웃는 사내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것 또한 인연이겠지.”
그는 그녀의 이목구비를 지긋이 뜯어보았다.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은 탐스러웠고 유리구슬처럼 오색 빛이 스며든 눈동자는 신비로웠다. 순진해 보이는 하얀 슈미즈는 제 취향이 아니었으나 그 아래로 드러난 풍만한 실루엣은 만족스러웠다.
여유를 부리고 싶었으나 웃음은 나지 않았다. 이곳에 오기 전 마셨던 술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정신이 흐려지고 욕구가 들끓는 걸 보니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게다가 평소 쓰지 않던 마법까지 써댔으니.
“젠장.”
사내는 느슨한 실크 타이를 풀면서 무릎을 굽혀 앉아 있던 로렌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로렌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하, 냄새가 끝내주는군. 거부감이 들지 않는 페로몬이라니.”
“자, 잠깐만…….”
“너, 대체 정체가 뭐야.”
그가 연거푸 숨을 크게 들이마실 때마다 딱 맞는 셔츠가 팽팽하게 벌어졌다. 그녀의 체취를 맡을 때마다 달콤한 과실을 베어 문 기분이 들었다. 열이 끓고 목이 탔다. 그는 답답한 듯이 재킷과 조끼를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저, 저리 가…….”
로렌이 그를 밀어냈다. 발정한 것은 분명 자신인데 저 사내 또한 유혹적인 페로몬을 뿜고 있었다. 그걸 들이마실 때마다 오븐 위 버터처럼 몸이 녹아내렸다. 이대로라면 정말 사고를 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크고 단단한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 아래 득실대던 새끼들을 밟고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에게 무슨 그런 잔인한 말을 해.”
후욱. 사내가 로렌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한 번 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읏, 도망, 치라고.”
“뭐?”
“내가 그쪽에게 나쁜 짓을 할지 모르니까… 어서 여길 나가.”
로렌은 창문을 가리키며 입술을 악물었다. 그 바람에 찢어진 입술에서 핏방울이 불룩 솟아났다.
“보통 그런 말은 남자가 여자에게 하지 않나?”
사내는 로렌의 입술에 맺힌 핏방울을 손가락으로 닦아 낸 뒤 손끝에 묻은 핏방울을 혀로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그 야릇한 동작에 로렌은 그만 짧은 신음을 흘려 버렸다.
‘정말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아.’
어떡하지. 로렌은 흐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와 거리를 벌리고 싶은데 사내의 다부진 손이 허리를 휘감고 놓아주질 않는다.
허름한 실내에 조명이라고는 협탁 위 작은 기름등과 창문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이 전부였다. 어둑하고 몽롱한 시야처럼 로렌의 이성도 점차 흐려졌다.
“제발…….”
“거부하지 말고 본능을 따라가. 발정기란 그런 거 아닌가?”
“당신, 후회할 거야.”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힘주어 사내를 응시했다. 겁을 줄 요량이었나 본데 사내에겐 요만큼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런 후회라면 얼마든 환영이지.”
사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그렇다면…….
“흐윽, 네가 자초한 거야.”
로렌은 턱을 꽉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도 따라 일어나자 그의 손목을 꽉 잡고서 구석으로 끌고 갔다.
“어라, 여인치고는 힘이 대단한데?”
빈말은 아니었다. 일반인이라면 뼈가 으스러졌을 악력이리라. 물론 강철보다도 단단한 사내의 손목은 아무 일 없이 멀쩡했지만.
“힘이 좋은 걸 보니 육식계 수인인가? 사자? 아니면 표범? 악어?”
사내는 순순히 따라가면서 질문을 늘어놓았다. 힘이 좋은 건 사자 같았고 살짝 올라간 눈꼬리와 은빛 머리칼은 눈 표범을 닮았다. 한번 물리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매력은 악어 같달까.
사내는 로렌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그녀를 빤히 응시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로렌은 구석에 놓인 낡은 의자로 사내를 밀어붙였다. 사내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로렌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앉아서 하는 게 취향이야? 보기와는 다르네. 어디 맘대로 해 봐.”
사내는 히죽 웃으며 그녀에게 붙잡혔던 손목을 툭툭 털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목에는 여인의 붉은 손자국이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하하, 내 몸에 손자국을 남긴 여자는 네가 처음이군.”
“눈은, 가려 줘.”
“뭐?”
“미안, 미안해.”
로렌은 그가 착용했던 넥타이로 사내의 두 눈을 가렸다. 흐트러진 모습을 사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정숙하라는 도스턴의 충고가 이명처럼 귓가를 맴돈다.
이 일을 오라버니가 알게 된다면 분명 실망할 거야. 주변을 실망하게 하는 건 수호신일 때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 아무도 보아선 안 돼.
로렌은 넥타이를 매듭지으며 어깨를 떨었다. 그 떨림이 사내에게까지 전달되었을까.
“그래, 맞춰 주지.”
넥타이를 치워 버리려던 사내는 로렌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 주었다.
그사이 로렌은 슈미즈 앞섶을 모아 주던 리본 끈을 풀어 사내의 두 손을 의자에 묶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 사내가 반항하려던 때, 로렌이 쌕쌕 숨을 몰아쉬며 사내의 무릎 위에 앉았다. 움찔. 팔을 빼내려던 사내는 동작을 멈췄다. 허벅지 위로 바들바들 떠는 여인의 몸이 느껴지자 전신이 끓어오르며 단단해졌다. 젠장, 대체 이 여자의 정체가 뭐야.
“이쯤에서 힘센 레이디의 이름을 알고 싶은데.”
“…….”
“하긴 눈까지 가린 판에 뭘 알려 줄 리가 없지. 안 그래?”
“미안하다. 미안, 내가.”
“그 미안하다는 소리는 그만해 줄래? 내가 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다고.”
사내는 말을 마치자마자 턱을 꽉 물었다. 로렌이 제게 밀착할수록 그녀의 짙은 페로몬이 머리를 들쑤셨다.
“제기랄, 이 망할 페로몬 좀 줄여 봐.”
그의 견고한 근육이 팽창하면서 딱딱하게 굳었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던 사내는 더더욱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이게, 조절이 잘… 흑.”
로렌은 흐느끼면서도 사내의 단추를 부지런히 풀어 재꼈다. 거추장스러운 셔츠를 벗기자 그의 목덜미에서 시작해 등판에 똬리를 튼 커다란 뱀 문신이 보였다.
‘뱀 수인인가.’
뚜렷한 정체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평범한 수인은 분명 아니었다. 도스턴의 마법을 무시하고 다른 수컷을 손쉽게 제압한 걸 보면 영물에 가까운 존재이려나.
로렌은 그의 두툼한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열이 오른 자신과 달리 싸늘한 피부. 탄탄하고 매끈한 감촉은 정말 뱀 같기도 했다.
‘이 사내와 닿으니 기분이 너무 좋아.’
하얀 손은 양감이 뚜렷한 근육을 쓸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견고하게 갈라진 복근 다음으로 딱딱한 허리띠가 닿았다. 이 아래에 갈증을 해소해 줄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어찌할 줄 모르는 손은 가죽 허리띠 위만 맴돌았다.
‘무언가가 모자라서 괴로워. 더… 뭔가를…….’
눈물이 핑 돌았다. 로렌은 그의 상체에 이마를 기대고서 하반신을 어설프게 문지르며 욕구를 해소하려 들었다. 서툰 몸짓이어도 사내를 자극하기엔 충분했는지 그의 목에는 굵은 핏대가 바짝 서 있었다.
“더 기다리다가는 아래가 터져 죽겠군. 이봐, 너 다 큰 성체 맞아? 왜 제대로 못 하고 미적거려.”
“모르겠어.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흐읏.”
“설마 너… 남자가 처음이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로렌은 눈을 깜박거렸다. 사내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에도 힘을 주었는지 그의 어깨에는 나란한 손톱자국이 남았다.
“이봐, 아프잖아.”
“…아니야.”
“뭐?”
“처음, 아니라고 했다.”
발정기라서일까. 평소에는 잘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이 툭 튀어나왔다. 긴 세월을 살아 놓고도 이거 하나 제대로 모르는 반편이로 보일까 봐 덜컥 겁이 난 것이다. 안 그래도 바닥을 보여 주고 있는데 여기서 더 어설프게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조차도 티가 났을까. 사내가 미심쩍은 얼굴을 삐딱하게 기울였다.
“처음도 아니라면서 왜 이렇게 어설퍼. 우산 씌워 줄 땐 날렵하더니.”
“우산?”
“설마 날 기억 못 하는 거야? 이 나를?”
“…….”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사내가 빈정댔으나 로렌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그 제스처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사내가 한 번 더 한숨을 내쉰다.
“하아. 너 잠깐 얼굴 좀 가까이 대 봐.”
“얼굴?”
로렌이 사내의 요구대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것이 모자랐을까.
“조금 더 가까이 와야지.”
사내가 거리를 좁히려 들었다. 둘의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할 때였다. 사내의 얼굴이 훅 다가오더니 단번에 로렌의 입술을 삼켰다.
‘이, 이게 뭐야!’
놀라서 벌어진 로렌의 입술 사이로 물컹한 살덩이가 밀려들었다. 하마터면 놀라서 깨물 뻔했다. 그것은 로렌의 치열을 핥다가 뾰족한 송곳니를 확인했다.
흐음. 그가 쿡쿡 내뱉는 웃음이 겹쳐진 입 안으로 흘러와 제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다.
민망한 기분에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그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바람에 입술이 벌어졌다. 그는 예민한 입천장을 툭툭 건들다가 목구멍으로 도망간 로렌의 혀를 찾아내 뱀처럼 휘감았다.
츄읍, 츕.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입가를 따라 흘러내렸다. 그와 맞닿은 건 입술인데 배 안쪽이 홧홧해졌다.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핑 돌았다.
‘위험해. 영혼까지 먹히는 것 같아.’
로렌은 재빨리 고개를 뒤로 물렸다. 길거리에서 한 번씩 입맞춤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면 이걸 금지된 주술 따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손발이 덜덜 떨렸다.
그녀의 가쁜 숨소리를 들으며 사내가 입술을 길게 늘였다.
“너 설마, 입맞춤이 처음은 아니지?”
“다, 당연하지.”
“놀랄 정도로 못 하는데 이상하군.”
그러면서도 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입맞춤이었으나 제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접촉이었다. 이것도 이 여자의 페로몬 때문이려나.
“그동안 얼마나 질 나쁜 새끼들만 만나고 다닌 거야?”
뭐, 이 여자의 페로몬을 맡아 보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자신조차도 이 여자에게 당장 씨를 뿌리고 싶어 안달 났으니까. 그렇다고 함부로 대하고 싶지는 않은데.
하아. 한숨을 내쉰 사내는 모든 인내심을 끌어올리며 의자에 묶인 두 팔을 흔들었다.
“지금부턴 내가 할 테니 이것 좀 풀어 봐.”
그가 팔을 흔들 때마다 함께 묶어 둔 의자까지 덜컹덜컹 흔들렸다. 이런 결박 따위는 힘만 주면 쉬이 벗어날 수 있었으나 사내는 굳이 허락을 기다렸다.
“그건 안 돼.”
“나보고 이 망할 의자에 인형처럼 앉아서 애가 타 죽으라는 거야?”
“당신이 알려 주면 되잖아. 그러면 내가 알아서…….”
“하! 남자 좆도 제대로 못 꺼내는 주제에 퍽이나.”
“겨, 경박한 말 쓰지 마.”
로렌은 새빨개진 얼굴로 경고했다. 한때는 성스러웠던 자신이 천박한 발정기를 맞이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벅찼건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사내 때문에 자꾸만 서러워졌다.
“어디 수도원에라도 처박혀 있었나. 좆을 좆이라고 안 부르면 뭐라고 부를 건데?”
“그건…….”
“존슨? 윌리? 아니면 오늘 밤은 네가 특별히 지어 주든지.”
사내가 허리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부풀어 오른 하반신이 로렌의 다리 사이를 꾸욱 누르며 예민한 곳을 자극했다.
“읏, 보자 보자 하니까!”
허리를 바짝 세운 로렌이 파르르 떨면서 장난기가 그득한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쥔 뒤 그의 머리 옆으로 내리꽂았다.
콰직! 로렌의 강한 힘에 단단한 벽돌 조각은 푸딩처럼 깨져 아래로 와르르 쏟아졌다.
“…이런, 화를 돋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힘이 정말 센가 봐. 사내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렌의 힘에 놀랐는지 고개를 살짝 떠는 것도 같았다.
“별명이 맘에 안 들었으면 그냥 자지라고 부르면 되잖아. 왜 성질인데.”
“이놈이 정말!”
“너 지금 날 ‘이놈’이라고 불렀어?”
“그렇다, 이놈아!”
로렌은 얄미운 사내의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 도스턴이 언젠가 가르쳤던 ‘변태에게 본때를 보여 주는 방법’ 중 하나였다.
“또 쓸데없이 힘자랑하기는.”
사내는 한 손을 뻗어 로렌의 주먹을 가뿐히 막았다. 눈을 가렸음에도 완벽한 방어였다.
“다른 덴 괜찮아도 얼굴은 곤란해. 이래 봬도 이게 제법 효과적인 거래 도구라.”
커다란 손은 로렌의 작은 주먹을 부드럽게 감싸 아래로 내렸다. 그의 두 팔을 결박하던 리본 끈은 어느새 끊어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손이 자유로워진 사내는 눈을 가렸던 넥타이를 쓰윽 들어 올렸다. 욕망이 들끓는 황금색 눈동자가 로렌을 똑바로 응시했다.
“보, 보지 마.”
로렌은 한 손으로 사내의 두 눈을 가렸다.
“왜 자꾸 가리는데?”
“이런 추한 꼴은… 보이기 싫어.”
“추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야. 게다가 앞이 안 보이면 제대로 해 줄 수가 없고. 이건 피차 손해 아닌가?”
사내는 눈을 가리고 있던 로렌의 손목을 붙잡아 천천히 끌어 내렸다. 다시 드러난 금빛 눈동자는 오싹했다. 그 시선에 홀려 버릴 것 같아 로렌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럼 최대한 보지 말아 줘.”
“유의하도록 하지.”
허락에 가까운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내는 슈미즈 네크라인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곧은 빗장뼈와 동그란 어깨가 먹음직스러웠다.
사내는 곧장 고개를 숙여 하얀 목덜미를 잘근 깨물었다. 그곳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문신이 있었다. 사라지지 않은 맹약의 인장. 국왕의 손등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나 사내는 거기까지 알지 못했다.
“아까부터 이게 거슬리는군. 누군가와 맹약 따위를 맺었었나 본데… 남자?”
그 자식은 어디에 두고 이런 날 혼자 궁상맞게 있는지. 사내가 목덜미를 한 번 더 잘근 깨물었다. 돌아온 건 대답이 아니라 짧은 신음이었다.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기에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일개 수인이 상대와 맹약을 맺는 게 가능한지를 의심하다가도 고민을 그만두었다. 저라고 모든 수인의 특성을 아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이 여자의 모든 것이 내게 완벽하게 들어맞는 건 알겠어.’
그의 입술은 붉은 자국을 남기며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풍만한 가슴 위 분홍빛 유실을 머금더니 혀로 문지르고 빨아 대기 시작했다. 첩첩, 추잡스러운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다 큰 사내가 아이처럼 빨아 대는 모습은 너무도 외설적이었다.
“흐으, 하, 하지 마, 거기.”
로렌이 사내의 얼굴을 떼어 내려고 하자 사내는 벌을 주듯 유두를 잘근 깨물었다. 하앗! 달콤한 고통에 그만 교성이 튀어나왔다.
“잘하네.”
사내는 교성을 칭찬하면서 로렌의 다리를 쓸어 올렸다. 슈미즈 자락이 허리까지 올라가고 하얀 두 다리가 밖으로 나왔다. 그의 커다란 손이 로렌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작고 하얗고 부드러운 몸과 가녀린 몸 선은 아무리 봐도 초식 동물이었다. 강한 힘과 뾰족한 송곳니는 꼭 육식 같던데. 그렇다면…….
“혹시 사향노루인가.”
가슴에 머물던 사내의 얼굴이 로렌의 목덜미로 올라왔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켜면서 달콤한 페로몬을 만끽했다.
“노, 노루 아니야.”
어설픈 추측에는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로렌은 그의 어깨를 짚으면서 하반신을 파르르 떨었다. 엉덩이에도 이런 간지러운 감각이 존재할 줄이야. 그가 주무를 때마다 찌릿한 전류가 허벅지까지 타고 내려와 목이 바짝 탔다.
“그럼 하얀 토끼? 아, 그건 앞니가 컸었지.”
엉덩이를 지분대던 손이 점점 안쪽으로 들어왔다. 손가락이 뱀처럼 미끄러지며 속옷을 파고들었다. 로렌은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흠뻑 젖어 버린 속옷을 그에게 들키고 말았다.
“날 꽤 애타게 기다렸나 보군.”
그의 손끝이 회음을 따라 내려오다 갈라진 부분에서 멈췄다. 그의 검지와 중지가 가위질하듯 통통하게 살이 오른 음부를 천천히 양옆으로 갈랐다. 애액으로 젖은 음부가 음란한 소리를 내면서 벌어지자 로렌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이거 꼭 해야 하는 거야?”
“당연하지. 이대로는 내 걸 못 받아먹거든.”
음부를 가르던 손가락이 이번엔 작고 귀여운 음핵에 닿았다. 로렌이 허리를 바짝 세우며 긴장했다. 그가 톡 튀어나온 살점을 문지를 때마다 요의가 아랫배로 퍼지면서 소름이 돋았다.
“이, 이상해. 흣, 아흐, 하읏!”
“이상한 게 아니라 좋은 거야, 귀여운 아가씨.”
사내가 예쁘게 웃으며 붉게 물든 로렌의 눈꼬리를 혀로 할짝거렸다. 눈 아래 대롱대롱 맺혀 있던 눈물이 그의 입 안으로 쏙 들어갔다.
“잠깐, 거기, 흣, 그만, 하응!”
“혼자서 여기 만져 본 적 없어?”
“그게 무슨… 하앗!”
로렌이 그의 목을 와락 껴안으면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당황한 눈동자로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이, 이게 뭐지? 모르겠어.’
척추를 타고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머리에선 불꽃이 터졌다. 벌렁대는 음부 사이로 흘러내린 애액이 사내의 반듯한 정장 바지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빠르네.”
사내가 제게 안긴 로렌의 등을 만족스럽게 두드리면서 나머지 손으로는 절정을 만끽 중인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남자 눈부터 가렸던 걸 보면 처음은 아닐 텐데. 여긴 왜 이렇게 좁아?”
방금까지 딱 다물려 있던 구멍은 굵고 긴 손가락을 받아들이며 힘겹게 벌어졌다. 그 무엇도 닿은 적 없던 예민한 점막이 사내의 손가락을 힘껏 조였다. 뜨겁고 축축한 안쪽은 그의 손마디 주름까지도 생생하게 느꼈다. 발끝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하아, 더… 흐읏.”
로렌은 사내의 손가락이 들어오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기다렸던 것이 바로 사내의 살덩이였다는 걸.
머리가 핑 돌고 전신이 녹아내렸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얇은 이성마저 툭 끊어졌다.
“아, 안쪽. 안쪽이 간지러워.”
로렌은 그의 목을 꼭 껴안은 채로 조금 더 깊이 찔러 달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입구 쪽을 천천히 휘젓던 손가락이 끝까지 박혀 들었다.
“흐앗!”
아, 이거다. 이거였어. 벌어진 입구가 그의 손가락을 꽉꽉 물면서 환호했다.
“후, 아직도 너무 좁은데.”
사내는 손가락을 점차 늘렸다. 쫀득한 구멍이 꾸역꾸역 벌어지다가 손가락 세 개를 힘겹게 오물거렸다.
“더어… 이것 말고 더…….”
“기다려. 이렇게 조이면 내 건 들어가지도 않는다고.”
“조절이, 안 돼, 흐읏. 안쪽, 좋아.”
로렌이 그에게 더 매달렸다. 말랑한 가슴이 그의 딱딱한 흉부 위로 짓눌렸다. 그녀의 달콤한 페로몬이 짙은 향내를 풍겼다.
“하아. 사람 미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페로몬이든 구멍이든 뭐든 하나는 조절해 봐, 제기랄.”
흥분한 사내의 물건은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이대로 여자와 함께 정신을 놓아 버리고 싶었으나 턱을 꽉 물고 가느다란 이성을 붙잡았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충동. 이대로 날뛰었다가는 이 여자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흐읏, 잘… 안 돼. 힘들어.”
“젠장, 이러다 임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수인은, 흣, 임신하기 힘들다고, 도스턴이…….”
“그건 또 어떤 새끼야.”
사내는 로렌의 반듯한 빗장뼈를 잘근 깨물었다.
“흣!”
“눈 가리는 플레이를 가르친 남자? 아니면 맹약을 맺은 남자인가.”
“아앗, 흐응.”
“대답해야지? 나를 앞에 두고 다른 새끼 이름을 조잘댔으면.”
사내가 손가락을 깊게 쑤셔 박았다. 작은 몸이 파드득 떨면서 안쪽을 조이자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았다. 그는 구멍의 조임을 아쉬워하며 손을 천천히 빼냈다.
로렌은 사내가 빼낸 손을 애타게 응시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넣어 달라고 호소하듯이 애액으로 범벅인 그의 손을 입으로 가져와 츄읍, 츄읍 빨아 댔다.
그 모습을 보던 사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하하, 이런 게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제 다리 위에 마주 보고 앉아 있던 로렌을 그대로 안아 들고서 낡은 테이블 앞에 내려 주었다. 사내가 그녀의 몸을 홱 돌리자, 로렌은 테이블을 붙들고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지, 지금 무얼 하려고…….”
“네 말대로 서로 얼굴은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발갛게 달아오른 로렌을 마주할 때마다 미쳐 버릴 것 같았기에 사내는 잔머리를 굴렸다. 보통 페로몬은 체액이나 맥박이 뛰는 곳에서 진하게 흘러나오지만 이 여자는 저 말간 얼굴에서도 페로몬을 흘리는 게 틀림없었다.
“이, 이건 뭔가 부끄러워.”
“참아. 내가 금방 싸 버리면 너야말로 아쉬울 거 아냐.”
“그게 무슨 말…….”
로렌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곧 크고 두툼한 상체가 로렌의 등 뒤로 맞붙었다. 차갑고 단단한 살갗과 뚜렷하게 갈라진 근육의 양감, 쿵쿵 뛰는 그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봐? 읏!”
곧 뜨겁고 미끈대는 살덩이가 구멍에 닿았다. 사내가 압도적인 페로몬을 내뿜은 것도 그때였다.
“하, 하으윽!”
눈에 보이지 않는 페로몬이 구렁이처럼 로렌의 몸을 휘감고 끈적하게 기어 다녔다. 정수리를 관통하는 쾌감은 전신의 핏줄을 타고 발끝까지 내달렸고 벌어진 입가로는 침이 뚝뚝 떨어졌다.
로렌의 두 다리가 벌벌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사내를 모르는 구멍이 뻐끔대면서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애액을 왈칵왈칵 쏟아 냈다.
곧 뜨거운 살덩이가 로렌을 비집고 들어왔다. 손가락을 넣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압박감이 하반신을 타고 내달렸다.
“아! 아아! 아!”
단단한 성기가 여린 점막을 꾸욱 벌리면서 길을 텄다. 좁은 내벽이 한계까지 벌어질 때마다 짐승 같은 소리가 목 아래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아팠다. 뜨거웠다. 숨이 턱 막혔다.
얼마나 커다란 걸 넣었는지 몸속 장기가 모조리 위로 들리는 기분이었다.
곧 매끈한 귀두가 손가락이 들어왔던 곳 너머로 길을 뚫었다. 기둥 위로 불툭 튀어나온 핏줄이 예민한 점막을 긁을 때마다 구멍은 그의 물건을 빨아내듯이 조였다.
“하아, 숨 쉬어. 잘라먹을 셈이야?”
사내는 갈라진 목소리로 명령하면서 파르르 떠는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곧 그의 손가락이 벌어진 로렌의 입술을 가르고 침범했다.
하, 하아. 로렌이 얕은 숨을 겨우 내뱉으며 할딱거렸다. 등 뒤로 닿는 사내의 몸이 적당한 압박감을 주며 저를 감싸고 있었다. 내쉬는 숨과 함께 머리를 찌르던 고통과 쾌락이 잦아들었다.
‘이제 끝난 건가.’
행위에 대한 불안이 가시자 로렌이 긴장을 풀었다. 사내가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세게 허리를 쳐 대며 좆을 끝까지 박아 넣었다.
“흐앗!”
로렌이 고개를 꺾으며 파르르 떨었다. 그의 물건이 닿아선 안 되는 곳까지 닿은 기분이었다.
테이블을 붙잡은 로렌의 손 위로 사내의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더니 손깍지를 꼈다.
로렌은 포개어진 두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혹시 내가 울고 있는 건가. 눈가에 열이 오르고 앞이 흐릿했다. 눈을 몇 번 깜박거려도 시야는 여전히 탁했다. 하지만 제 손을 잡아 준 커다란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흔들리던 몸이 곧 허공에 붕 떠오르더니 시야가 뒤집혔다. 삐걱, 소리와 함께 등 뒤로 보드라운 천이 닿았다. 이 방에 낡은 침대가 있었던 걸 떠올리면, 이 사내가 재킷을 벗어 아래에 깔아 준 모양이었다.
‘손잡은 거, 좋았는데.’
어른거리는 시야로 사내의 커다란 손을 찾았다. 그걸 눈치챘는지 허공을 더듬대던 손을 사내가 조심스레 맞잡아 주었다. 동시에 잠시 빠져나갔던 사내의 성기가 다시 천천히 아래를 꿰뚫었다.
“흐으.”
뜨거운 감각이 아직은 생경했다. 가느다란 신음을 내뱉으며 허리를 뒤틀자 쪽 소리와 함께 손등 위로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힘을 내야지, 레이디.”
맞잡은 손 위로 미소 짓는 사내의 입술이 보였다. 거친 허릿짓과 다르게 그의 미소는 너무도 해사했다.
그렇게 로렌은 사내에게 매달려 한참을 흔들렸다. 그리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녀의 배 속에서 무언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지만 이미 의식이 짙은 무저갱으로 떨어져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 * *
비슷한 시각.
국왕, 막스웰은 왕궁 구석에 있는 손님방에 서 있었다. 그는 깨진 집기가 널려 있는 더러운 방을 둘러보다가 열린 창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차가운 밤바람이 들어올 때마다 벨벳 커튼이 크게 펄럭이면서 시야를 가렸다.
그의 발치에는 잠옷 한 장만 걸친 공주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왕족의 상징인 금발이 실내조명을 받아 반짝였으나 낯빛은 창백했다. 공주는 덜덜 떨면서 막스웰의 다리를 붙잡았다.
“부, 분명 약 탄 술을 다 마신 걸 확인했어요. 처음엔 비틀거렸는데 갑자기 정신을 차리더니 저를 밀치고 창밖으로…….”
“그만.”
다정한 목소리가 말을 잘랐다. 시릴 정도로 푸른 눈동자가 변명을 늘어놓는 여동생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같은 핏줄이 아니라 생판 남을 보는 것처럼 냉랭했다.
“판을 다 벌여 줘도 이 모양이군. 희귀하다는 약까지 구해다 줬거늘.”
“기회를 주신다면 다음에는 꼭 그자의 마음을 사로잡을게요.”
“퍽이나.”
막스웰은 코웃음을 쳤다. 그 망할 놈은 절대 한 여자를 곁에 두는 일이 없었다. 짧으면 3일, 길어도 보름이었다.
“돈 좀 만졌다고 콧대만 높은 수인 놈 때문에 머리가 지끈대는군.”
막스웰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평범한 놈이었다면 천천히 구석으로 몰아넣어 가진 것을 빼앗았을 텐데, 그놈은 감히 제 머리 위에서 놀려고 들 만큼 영리했다.
빼앗지 못할 거라면 가지면 될 일. 막스웰은 그를 제 여동생과 결혼시켜 제 수족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오라버니. 최선을 다해 그자를 유혹할게요.”
공주는 진심을 담아 호소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누구나 진심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각보다 아름다운 외모와 체격,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재력과 강력한 힘, 여자들을 사로잡는 달콤한 애티튜드까지. 완벽이란 단어는 오로지 그를 위한 것이었으니.
‘수인이라는 게 유일한 단점이지만 여느 수인처럼 평민은 아니지.’
그가 외국에서 수여 받은 수많은 작위를 합하면 웬만한 고위 귀족도 명함을 내밀기 힘들었다. 그는 대륙 내 어느 나라를 방문하더라도 공작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는 인물이었다.
공주는 그런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드라고로스의 장미라 칭송받는 자신을 거부한 건 예상 밖이었지만.
“수인은 상종도 안 할 것 같더니 웬일로 열의를 보이는구나.”
“그자가… 마음에 들어요.”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그자를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알렉이 철도 사업 때문에 왕국에 정착한 것이 벌써 5년이었다. 대륙의 자금을 주무르게 된 그를 왕국에 묶어 둔다면 현 왕실은 어마어마한 이득을 보게 될 것이다.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목이 타는군.”
막스웰이 중얼거리자마자 어린 시녀 하나가 재빨리 물잔을 대령했다. 호감 어린 시선으로 왕을 부지런히 힐끔거리다가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꺅!”
시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집기를 피하지 못하고 한쪽 발을 삐끗했다. 순간 들고 있던 물잔이 기울어지면서 막스웰이 어깨에 걸친 늑대 가죽에 물이 튀었다.
“하.”
공주가 유혹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담담하던 얼굴이 고작 가죽에 물이 튀었다는 이유로 잔뜩 일그러졌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제, 제가 잘못… 살려 주세요!”
손을 모아 빌던 시녀는 막스웰의 안색을 확인하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전하께서 저 늑대 가죽을 유독 귀하게 여긴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물이 튀었다고 저리 노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새파랗게 질린 시녀는 오들오들 떨면서 왕의 자비를 바랐다.
“누가 보면 짐이 폭군이라고 오해하겠어.”
하하. 막스웰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림 같은 미소를 흘리면서 허공에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수신호를 확인한 기사들이 다가와 물을 쏟은 시녀를 질질 끌고 나갔다.
살려 달라는 애원이 긴 꼬리표를 남겼으나 막스웰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은빛 털가죽에 묻은 물방울을 툭툭 털어 냈다. 단 한 방울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막스웰은 여동생을 향해 싱긋 웃었다.
“아아, 짐에게 다음 기회를 달라고 했던가?”
* * *
진귀한 예술품이 벽을 두른 세련된 집무실.
“빌어먹을!”
화가 난 사내가 최고급 양탄자를 짓이기며 들어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풀어 헤친 셔츠 깃 위로 빼꼼히 나온 뱀 문신이 흉포하게 꿈틀거렸다.
“그 망할 국왕이 대체 나한테 뭘 먹여서 기억이 안 나는 거냐고!”
사내의 이름은 알렉. 그 유명한 ‘검은 뱀 상단’의 상단주, 알렉산더 젠카이저가 바로 그였다.
검은 뱀 상단은 대륙의 돈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거대했다. 대륙 철도 사업으로 무역의 주도권을 오롯이 쥐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벨벳 소파를 지나 윤이 반지르르한 마호가니 책상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의자에 털썩 앉아 뒤를 따라온 경호원들을 노려보았다.
“비싼 월급을 받아먹었으면 그 여자가 누군지 제대로 알아내야 할 거 아냐!”
뜨거운 밤을 보냈던 여자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단서라곤 머리 색과 눈동자 정도. 나머지는 누군가가 지우개로 지운 듯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젠장. 그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려치자 그들의 월급만큼 비싼 펜대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모두가 숨죽이는 가운데, 덩치 커다란 그의 보좌관이 눈치 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정해― 알렉. 네가 기억 못 하는 걸 가지고 왜 우리한테 화를 내는 거야.”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알렉산더의 애칭을 부르는 인물은 곰 수인 ‘사샤’였다.
귀여운 이름처럼 생김새는 순박했으나 2m에 육박한 큰 키와 근육이 울룩불룩한 몸은 마냥 순진해 보이지 않았다.
알렉은 그런 사샤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내가 화난 이유를 꼭 말해야 알아?”
눈만 감으면 얼굴도 모를 여자가 떠올라서 미치겠다고 하려다 입술을 꾹 물었다. 이건 좀 그 여자한테 매달리는 꼴이 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하여튼 그날은 위험했어. 국왕이 건넨 수상한 술을 마시고 취해 비틀거리는데 헐벗은 공주가 방으로 들어오더군.”
재빨리 창문으로 도망치지 않았다면 아마도 자신은 공주와 거사를 치른 뒤 억지로 ‘부마’ 따위가 되었을 것이다. 거대한 상단을 견제하려던 국왕의 술책이었다.
“그 와중에 내 경호원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게 기가 막혔지.”
“잘 도망쳤으면 된 거지 뭐―”
사샤는 들고 있던 꿀단지에서 샛노란 꿀을 한 스푼 퍼먹으며 여유를 부렸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경호 대장도 ‘국왕께서 직접 저희를 물리셨습니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지금 변명하는 거야?”
눈을 부릅뜬 알렉이 높은 연봉을 받는 경호원을 순서대로 쏘아보았다. 대륙 최고의 정보원이라 자부하던 다국적 인재들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그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그만해― 알렉. 그러니까 사람들이 널 자꾸 독사라고 놀리잖아.”
그래도 지금은 상태가 나았다. 돈 앞에서 포악하고 무자비해지는 모습을 볼 때면 악마가 형님, 형님 하면서 따라다닐 정도니.
“젠장, 돈을 쏟아부은 경호대가 주인을 지키긴커녕 사람 하나 제대로 못 찾다니.”
이 정도 힌트를 주었으면 오늘 안에 대령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알렉은 자신이 그린 몽타주를 쥐고 보란 듯 흔들었다. 삐뚤빼뚤한 그림은 알렉의 작품이었다.
경호 대장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용기를 냈다.
“그, 몽타주가 부정확하여 참고하기가…….”
코와 입이 없는 그림 속 여자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었고 배경에는 의자에 결박당한 사내가 보였다. 처음엔 참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를 그려 놓은 줄 알았다.
“내 그림이 부정확하다는 건가, 네 이해력이 모자란 건가.”
“…제 이해력이 부족했었던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몽타주 속 여자를 찾아내겠습니다.”
“좋아. 나가.”
싹 다 나가. 알렉은 축객령을 내렸다. 이때다 싶었던 경호원들은 후다닥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꿀단지를 소중하게 품은 사샤만이 집무실에 남아 알렉을 다독였다.
“진정하라니까― 솔직히 그런 그림으로 어떻게 사람을 찾겠어.”
“이게 왜. 아주 정확하게 그린 거야.”
“다섯 살짜리가 그려 놓은 것 같다고―”
사샤가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특히 여자 주변에 반짝이를 잔뜩 그려 놓은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게 어딜 봐서 몽타주냐고. 애들 그림일기지.
“이건 과장이 아니야, 사샤. 그 여자가 별처럼 빛이 났다니까?”
“원래 여자한테 푹 빠지면 반짝―반짝 빛나 보이는 거야.”
“진짜 반짝였다고, 젠장. 그리고 내가 그깟 정보만 줬어?”
“어휴, 아―주 많이 줬지. 네 몸에 손자국을 남길 정도로 힘이 세고 결박하는 걸 좋아했다는 정말 대―단한 정보를.”
사샤가 ‘결박’을 강조하면서 들고 있던 꿀통을 꽉 안았다.
“그런데 알렉, 이 바닥에 암컷 수인이 한둘이야?”
“…….”
“게다가 그런 이상한 취향은 어떻게 찾고? 지나가는 여자들을 붙잡아서 ‘혹시 결박 좋아하세요?’라고 물어봐야 할 판이라고.”
사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에 동원될 줄 알았으면 미리 휴가를 쓸걸. 볕 좋은 개울가에서 수영하기 딱 좋은 날씨인데. 가서 살 오른 물고기도 잡고, 신선한 꿀도 채집하고, 숲에서 평화롭게 뒹구는 상상을 하던 찰나.
“나야말로 미치겠어. 각인만 안 했다면 다시 찾는 일도 없었을 텐데, 제기랄.”
알렉의 엄청난 고백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뭐? 각… 뭐?”
잘못 들었나? 눈을 휘둥그레 뜬 사샤가 알렉의 코앞까지 후다닥 달려갔다.
“각인했다고, 그 여자한테.”
“가, 각인? 진짜 각인? 그게 됐다고?”
사샤가 황당한 듯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각인. 수인족 남성이 제 반려에게 영혼의 표식을 남기는 행위를 말했다. 인간으로 치면 일종의 약혼으로, 어느 수인이냐에 따라 그 행위의 방식이 다른데…….
“네가 각인을 했는데 상대가 멀쩡히 걸어 나갔다는 거야, 알렉?”
알렉의 종족은 몸 안에 표식을 남기기로 유명했다.
관계를 맺을 때 상대의 배 속에 응결된 마력을 사출하며 각인하는 것이다. 이때 살덩이가 부풀어 올라 씨물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고 임신 확률을 높였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우나 천상의 쾌락을 선사한다고 한다.
하지만 상대가 웬만큼 강하지 않다면 쏟아지는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과 정신이 망가지는 것이 각인이기도 했다.
알렉은 이런 각인을 시도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어렸을 적 일족에게 배척당하고 반려로 점찍어 둔 상대에게도 버림받은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 후 그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사랑 따위 믿지 않는 삐딱한 어른이 되어 각인이나 반려란 단어에 치를 떨었다. 여자들과 가벼운 관계를 반복하는 이유도 원초적인 욕구의 해소나 거래를 위해서일 뿐이다.
그래서 사샤는 알렉이 반려를 찾는 일은 다음 생애에서나 가능할 거라고 장담했다. 알렉 스스로가 각인을 시도할 리도 없었고 각인을 멀쩡하게 견딜 여인 또한 찾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처음 본 여자에게 냅다 각인한 데다 여자가 두 발로 멀쩡하게 사라진 게 말이 돼?”
사샤가 두 팔을 들어 올리면서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하아.”
알렉은 참담하게 마른세수를 했다. 사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래도 여자가 무리 없이 멀쩡하게 걸어 나갔던 모양이다. 그것도 저 알렉산더 젠카이저 몰래.
“너희 일족은 그게 막― 부푼다며. 마력이 막― 쏟아진다며.”
“…….”
“혹시 네 물건이… 몸에 무리가 갈 만한 크기는 아니었나?”
사샤가 고개를 쭈욱 내밀어 알렉의 다리 사이를 눈짓했다. 물건이 좀 작다면야 그게 부풀어 오른다고 해서 여자가 크게 힘들진 않을 테니까. 뭐, 방대한 마력을 버티는 건 다른 말이지만.
“넌 매번 창의적인 방법으로 날 열받게 하는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조금 전 발언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자세는 거만했다. 제법 크기에 자신 있는 건가? 하여간 재수 없는 자식. 사샤가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의문점을 추가했다.
“물건을 버틴 건 그렇다 쳐도 엄청난 마력을 버틴 건 이해가 안 돼. 그러려면 너랑 긴― 시간 붙어 있든지 너만큼 대단한 존재여야 하잖아.”
하지만 알렉은 한 번 만난 여인을 두 번 찾지 않았기에 누구와 진득하게 붙어 있지 않았다. 저 자식보다 대단한 암컷은 찾아보기도 힘들었고.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왕이 먹였다는 그 이상한 약 때문에 개꿈을 꾼 게 분명해, 알렉.”
“실제 있었던 일이라니까! 그러니 당장 찾아. 임신이라도 했으면 곤란해.”
“그럼 이딴 몽타주 말고 단서를 더 줘. 종(種)이라도 알려 주면 찾기 쉽잖아.”
“…처음 맡아 본 페로몬이라 어떤 종인지 짐작도 안 가.”
“네가 구분 못 하는 냄새도 있다고? 혹시 감기 걸렸어, 알렉?”
꿀 좀 먹어 볼래? 이거 감기에 좋아. 사샤가 꿀통의 꿀을 한 스푼 떠서 알렉에게 내밀었다.
스푼 아래로 늘어진 꿀방울이 알렉의 서류 위로 뚜―욱, 뚝 떨어질 때마다 알렉의 미간에는 주름이 깊게 팼다. 이런 자식들을 믿느니, 제 방식대로 직접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 *
그 무렵 로렌은 전신 거울에 부스스한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못해도 사나흘은 갈 거라던 발정기가 하룻밤 새 끝나 버렸어.’
그날따라 아름답게 빛나던 머리칼과 눈동자는 발정기가 끝나자 다시 푸석한 잿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사내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피부였다.
‘이상해.’
새하얀 피부 위로 꽃잎이 우수수 떨어진 것처럼 전신은 붉은 자국으로 가득했다. 특히 풍만한 가슴과 새하얀 허벅지의 안쪽은 집요하게도 남겼다 싶을 정도였다.
로렌은 맹약의 인장이 있는 목덜미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지난밤 여기를 그리도 씹어 댔으니 이곳 또한 사내의 잇자국이 빼곡할 테지.
로렌은 그 자국을 손끝으로 쓸면서 격정적이던 지난 밤을 떠올렸다. 아주 잠깐 떠올렸을 뿐인데 척추가 찌르르 울리면서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성욕이란 영혼의 가장 어둡고 습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곰팡이 같은 것이다, 로렌.”
도스턴은 분명 그렇게 알려 주었으나 난생처음 마주한 욕망은 달랐다. 그것은 곰팡이 따위가 아니라 여름의 뙤약볕처럼 뜨겁고 생동했다. 그래서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몸을 화려하게 불태웠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던 그 해방감은 아직도 손끝을 간질거렸다.
‘사내와 밤을 보낸 이후 신기하게도 마법을 쓸 수 있었지.’
아침에 깨어나니 평범했던 몸에 마력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그 모든 마력을 쏟아 내 사내의 기억을 지웠다. 항마력이 높은 사내라 마법이 잘 듣지 않아서 한참을 애먹어야 했지만.
로렌은 앞으로 손을 뻗어 영물일 적에 사용했었던 아무 마법이나 구사해 보았다. 다시 평범해진 몸뚱이는 아무런 마법도 쓸 수 없었다.
“오늘은 늦을 셈이냐, 로렌.”
그때 아래층에서 로렌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양 오라버니, 도스턴이었다.
“아, 아니다, 오라버니. 지금 내려간다!”
화들짝 놀란 로렌은 존댓말도 깜박한 채 빠르게 옷을 입었다. 에블린이 물려준 낡은 스카프로 목을 감아 자국을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차, 매일 하던 인사를 깜박할 뻔했네.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가던 로렌은 벽에 걸린 작은 초상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 에블린.”
로렌은 나무 계단을 부지런히 밟았다. 뒤꿈치를 최대한 들었으나 낡은 계단은 요란하게 삐걱거렸다.
1층으로 내려가자 소담한 찻집이 나왔다.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가게엔 작은 테이블 네 개가 전부였고 그중 하나엔 도스턴이 앉아 있었다.
로렌은 카운터를 돌아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카운터 옆에 쌓아 둔 우산 더미에 발이 톡 걸렸다. 물벼락을 맞을 뻔한 사내에게 급히 우산을 씌워 주느라 쌓아 둔 모양새가 흐트러졌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그 사내가 어떻게 생겼었더라.’
사내의 얼굴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고 그가 건넨 100실론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지각이다, 로렌.”
도스턴이 신문 기사를 읽어 내리며 우산 더미를 멍하니 바라보는 로렌에게 쓴소리를 했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로렌은 후다닥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끓이고 오븐을 예열했다. 이윽고 숙성시킨 빵 반죽을 모양 좋게 잘라 내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늦어서 미안하다, 오라버니.”
“말투.”
“늦어서 미안해요.”
“수백 번을 지적해도 바뀌지 못하는구나.”
얇은 신문지가 착착 넘어가는 소리만큼 도스턴의 말투도 날이 서 있다. 단 하룻밤 만에 발정기를 끝내고 돌아온 뒤로 도스턴은 유독 날이 선 상태다.
곧 고소한 냄새가 실내로 퍼졌다. 로렌은 갓 구워진 빵을 오븐에서 꺼내 홍차와 함께 도스턴의 앞으로 갖다주었다.
도스턴은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로렌은 그가 내려놓은 신문을 대충 힐끔 보다가 몸을 굳혔다.
‘저게 뭐야.’
[검은 뱀을 농락한 여인을 찾습니다.]이상한 광고가 신문 한 면을 가득 장식하고 있었다.
‘검은 뱀이라면.’
다른 사람은 ‘검은 뱀 상단’을 떠올릴 테지만 로렌은 달랐다. 뱀 문신이 있던 다부진 사내의 몸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착각이겠지.’
고작 하룻밤을 보낸 상대를 찾겠다고 신문에 광고까지 낼 미친놈이 있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그와 밤을 보낸 후 갑자기 샘솟은 마력으로 그의 기억을 지워 버리지 않았나.
하얗게 질린 로렌이 억지로 시선을 돌리려 할 때였다. 광고 하단에 찍힌 상단주의 친필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말로 할 때 검은 뱀 상단 중앙 지점으로 오세요.]힘 있게 내려 그은 획에 비해 잔뜩 기울어진 글씨에서는 일종의 분노가 느껴졌다.
그 문장 아래에 적힌 날짜는 로렌이 발정기를 맞았던 그날이었다.
‘그래, 우연일 거야.’
생각은 그리했어도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도스턴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로렌을 힐끔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야, 아무 일도 아니에요.”
로렌은 재빨리 말투를 고치고서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도스턴은 차를 천천히 삼키면서 로렌이 응시하던 페이지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한참 그곳에 매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