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42
제 142화
52장. 이그니스의 약점 – 2화
그간 포티아 화산을 찾아왔던 인간들 중에서 자신의 흥미를 끌었던 놈은 꽤 많았다.
다들 인간들의 세계에서 용사니, 영웅이니, 대마법사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참 우습게도, 대자연의 힘을 빌려 시행하는 예행연습에서 줄줄이 죽어갔다.
땅속에서 치솟은 마그마에 녹아 죽고, 분출된 화산재에 묻혀 죽고, 심지어는 다리를 헛디뎌 떨어져 죽었다.
이그니스 월드로 들어와서는 대부분이 토스카의 손에 정리됐다.
불을 먹고 살고, 불이 통하지 않는 토스카는 분명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무패의 신화가 오늘 깨졌다.
“머저리 같은 X끼……. 쯧.”
이그니스가 혀를 끌끌 찼다.
숨이라도 붙어 있다면 불씨를 넣어서 살려 줄 텐데, 이미 침입자가 깨끗하게 죽여 버렸다.
불과 물의 대결.
이그니스는 불의 승리를 자신했지만, 결과는 물의 승리였다.
“흥미롭기는 하군.”
이그니스가 옥좌에서 일어섰다.
화산 초입부터 만들어 놓은 수많은 함정을 돌파해 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합격점이었다.
물론 이그니스는 인간이 싫었다. 인간의 속내는 심연을 들여다보듯이 어둡기 짝이 없고, 오늘 마음을 주더라도 내일 돌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간이 자신의 속성을 사랑해 주었다. 특히 마법사들.
오늘 찾아온 마법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화염의 정령인 자신에게 떡고물이라도 하나 얻어먹고픈 속셈이겠지.
놈에게 마음을 줄 생각은 없었으나, 한번 만나서 실력을 보고 싶기는 했다.
토스카를 일격에 저승으로 보낼 정도의 실력이라면, 이미 검증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
옥좌에서 일어난 이그니스가 무의식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그의 옥좌 옆에는 똑같이 만들어진 옥좌 하나가 더 있었다.
먼지가 잔뜩 끼어 있다.
지금까지 누구도 앉아 본 적 없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훗.”
이그니스가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바로 옥좌를 떠났다.
쿠아아아아!
그리고 새 얼굴이 나타난 장소로 향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겁을 상실한 마법사인 걸까?
만나 보고 싶었다.
* * *
시잉!
이그니스 월드의 저 멀리에서 하늘 높이 무언가가 솟아올라, 하나의 점으로 맺혔다.
이그니스다.
자신의 세계에서 누구보다 자신을 빛나게 하는 방법을 잘 아는 정령이다.
좋게 보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똥폼 더럽게 잡는다는 얘기다.
‘예전에 에서는 이그니스 얼굴을 보는 게 참 어려웠는데. 그때는 내가 이렇게 강하지도 않았고.’
전생을 생각하니 내가 참 많이 강해지긴 강해졌구나 싶었다.
이그니스를 만나는 특전은 오직 최상위 랭커들에게만 주어지는 전리품이었다.
고인물이었지만, 천상계 랭커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던 나는 나중에 이그니스가 수많은 너프로 칼질을 당한 다음에야 만날 수 있었다.
그때도 이그니스는 화려하고 멋있었지만, 플레이어들은 그를 ‘호구니스’라고 부르며 무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태초의 이그니스, 그러니까 가장 찬란하고 화려하게 빛났던 시절의 이그니스다.
이 세계는 현실이다.
그러니 이그니스가 말도 안 되는 너프 같은 걸 당할 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화르르륵.
얼추 이그니스가 도착할 즈음이 되었기에 나는 플레임 애로우를 캐스팅했다.
이그니스의 기분이라는 것이 자신의 속성처럼 수시로 불타올랐다가 사그라들기에 대비는 해야 했다.
스윽.
굉음을 내며 지면에 안착했지만, 그 소리는 아주 작게 들렸다.
“…….”
나와 이그니스의 시선이 한 점에서 마주쳤다.
화염의 정령왕, 이그니스.
화신(火神)이라고도 불리는 존재.
2m 정도 되는 신장에 모든 것이 인간의 모습을 쏙 빼닮았지만, 몸 전체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는 점만은 달랐다.
정령왕 비에나를 만났을 때도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싶어 심안으로 스캔해 봤지만, 당연히 안 먹혔다.
이그니스가 내게 말했다.
“반갑군, 인간. 이름이 뭐지?”
“자레드.”
“자레드라……. 아주 흔해 빠진 이름이군.”
“이그니스라는 이름도 딱히.”
지지 않고 맞섰다.
애초에 이그니스가 기선 제압을 할 요량으로 말을 꺼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발끈한 것은 아니고!
자레드라는 이름은 나스 대륙에 그리 흔치 않다. 그러니까 내 이름을 듣는 사람마다 귀한 이름이라고들 하지.
“왜 나를 보러 왔지? 나는 인간을 혐오한다. 지금껏 많은 인간이 내 힘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왔지만, 목적을 달성한 적은 없었다.”
“당신의 시험을 통과하고, 화염의 정수를 깨달을 계기를 마련하고 싶어.”
나는 자연스럽게 6클래스 퀘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이그니스는 모를 것이다.
퀘스트라는 개념은 내게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니까.
다만 이렇게 말하면 이그니스가 시험의 장을 열어 준다.
어차피 자신의 세계인 이그니스 월드에서 인간을 데리고 시험 혹은 ‘실험’을 하는 것인데 마다할 리가 없다.
사각. 사각.
나는 손아귀에 쥐고 있는 정령왕의 원석을 만지작거렸다.
이그니스가 시험의 장을 열어 줘야, 비로소 6클래스 퀘스트가 시작된다.
내가 이용할 꼼수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이다.
“죽으려고 아주 발악을 하는군.”
이그니스가 웃으며, 허공에 몇 개의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정령왕이라고 해도,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는 것은 아니다.
이그니스도 늘 그렇듯, 정해진 순서처럼 ‘불청객’에게 자신의 세계를 보여 주겠노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꽈아악!
정령왕의 원석을 꽉 움켜쥔 뒤.
거기에 다량의 마력을 쏟아부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일진광풍이 불어닥치며 거친 회오리가 일어났다.
“뭐, 뭐야? 뭐 하는 짓이냐?”
수인을 맺던 이그니스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자신의 불길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과연 정령왕이었다.
단지 불길을 끌어올렸을 뿐인데,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당장에라도 녹아내릴 듯했다.
나는 실드를 두껍게 펼치며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직접 맞닿는 열기가 줄어들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소환 의식은 거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리는 탓인지 에서처럼 짠! 하고 비에나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여기서 괜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이그니스가 나를 의심하고 맹공을 퍼부을지도 모른다.
버틸 자신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일 뿐 확신은 절대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역시 ‘말빨’이다.
“이그니스.”
“인간!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당신도 내 이름을 그냥 불렀잖아. 이그니스, 할 얘기가 있어.”
“……뭐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나? 아니, 사랑하는 존재라 하는 게 맞겠군. 인간을 좋아하지는 않을 테니까.”
“…….”
뜬금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그니스가 아예 무시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말해 준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있다.”
이그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살아 있는 감정의 증거다.
여전히 이그니스는 무서운 존재가 맞지만, 눈빛에서는 분명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바로 이름을 질러 버렸다.
“바람의 정령왕, 비에나!”
“네놈이 그 이름을 어떻게?”
“지금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오고 계시거든. 물론…… 당사자에게는 알리지 않았지만.”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비에나도 무척이나 당황하겠지 싶다. 이런 데에 쓰라고 정령왕의 원석을 준 것은 아닐 테니까.
보통 목숨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 원석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여길 테니까!
쿠아아아아!
아니나 다를까.
차원문 안쪽에서 거친 바람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다.
비에나 한 사람만이 오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그녀를 호위하는 수많은 정령까지 함께 오는 게 틀림없었다.
바로 그때.
화아아악!
이그니스가 단숨에 내게로 달려왔다.
정말 빨랐다.
실드를 펼치지 않고 있었다면?
진즉에 멱살을 붙잡히고, 머리가 불타 없어졌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령왕의 능력도 마법의 또 다른 변형이기 때문에 실드를 무시하고 들어올 수는 없었다.
“네가 어떻게 비에나의 마음을 얻었단 말이냐? 그녀를 함부로 소환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정령왕의 원석이 없다면, 시도조차 못 해!”
“맞아. 정령왕의 원석을 비에나 님께 선물 받았어.”
나는 미소와 함께 답해 주며, 손아귀 속에서 가루가 되어 버린 원석의 흔적을 보여 주었다.
본래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원석은 생기를 잃고, 빠르게 삭아 없어지고 있었다.
“인간이 감히 정령왕의 마음을 얻어?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
“그만한 매력을 느꼈나 보지. 당신도 내게 매력을 느꼈기에 이그니스 월드로 들어오는 차원문을 열어 준 것 아니야?”
“너……!”
이그니스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내 말에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고맙다.”
“응?”
“비에나를 영원히 못 볼 줄 알았는데……. 크흑.”
갑자기 이그니스가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니, 눈불이라고 해야 하나.
눈에서 뭔가가 계속 떨어지는데 마치 마그마가 뚝뚝 계속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온갖 폼을 다 잡아 가며, 멋있는 모습을 연출하던 이그니스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물었다.
“이그니스, 시험의 장은?”
“지금 그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란 말이다!”
화아악!
이그니스가 손짓으로 시험의 장을 닫아 버렸다.
당장에 극적인 상봉이 눈앞에서 벌어지려는데, 그까짓 시험 따위가 눈에 들어올까.
순간 나는 퀘스트가 무산된 건가 싶었지만, 나쁜 예감은 오히려 좋은 결과가 됐다.
[이그니스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화염의 정수를 깨닫지는 못했으나, 필요조건을 충족하여 다음으로 넘어갑니다.]‘럭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역시 사랑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니까.
[이그니스에게 두 번째 모험에 대한 조언을 요청하십시오.화염의 힘을 꿈꾸는 마법사로서 나아갈 길에 대한 조언을 구하면 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진행을 알렸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추가 메시지도 나타났다.
[신 ‘아소스’가 당신의 기지(奇智)에 감탄합니다.] [신 ‘아소스’가 바람의 신 ‘아네모스타스’에게 당신에 대한 이야기로 만담의 꽃을 피웁니다.]‘제법 쓸 만하죠?’
나는 하늘의 어딘가를 올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신 ‘아소스’가 자신이 내린 가호를 후회하지 않는다며, 박수갈채를 보냅니다.]재밌는 답도 돌아왔다.
가장 어렵고 껄끄러울 수도 있었던 이그니스 퀘스트에 빠르게 지름길이 열리고 있었다.
우웅!
이윽고 바람의 굉음이 터져 나오며, 소환이 끝난 정령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보인 것은 선봉대 개념으로 바람의 창을 들고 나타난 정령들이었고,
그다음에 이어서 나타난 것은 내가 기다리던 해결사, 바람의 정령왕 비에나였다.
그리고.
“비에나!”
“이…… 이그니스?”
감격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화염과 바람의 만남.
세계관에서 견우와 직녀처럼, 비운의 커플로 불리던 두 남녀의 뜨거운 재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