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 Academy 1st Hit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166
천일운이다.
“…저 자. 말도 안 되는 괴물이군.”
“동의해.”
“하지만 놈은 운이 좋지 않았어. 이 「링크」듀얼은 파트너가 쓰레기라면 결코 이길 수 없는 듀얼이니까.”
“……”
남연철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하지만 놈의 말이 맞다.
지금의 필드 상황은 농담으로라도 좋다고 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마나 번」을 통해서 마나를 계속해서 빨리고 있는 상황.
상성은 나쁘지 않지만, 덱이 너무 말려버렸다.
이렇게 져서 자신이 죽는다면. 그것은 납득할 수 있는 결과다. 하지만 여기서 지면 죽는 것은 남연철 자신이 아니었다.
남연철이 진다면 그녀의 반대편에 있는 전익현의 목숨이 위험하게 되는 것이다.
‘…젠장.’
남연철은 전익현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 진저리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수십 명이 있어도, 아니. 수백 명이 있어도 전익현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부담감이 머리를 짓눌렀다.
자신은 전익현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살아 있는 것 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인간이었다.
“자괴감이 드는 모양이군.”
“입 다물어.”
“이제야 스스로의 자리에 대해서 조금은 깨달은 모양이군. 이 「혜성가」의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붙어서 사는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란 걸 말이야.”
혜성가의 사람들은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덱조차도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난다. 그런 곳에서 카드를 얻고, 「선택의 카드」로 속성을 선택하고, 「고르디우스」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뜻이다.
죄악감은 없어진 줄 알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마 아니었던 모양이다.
“죄책감이 드는 거야?”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연철은 주변을 돌아봤다. 하지만 이 듀얼 필드 안에는 자신과 천일운 말고는 아무도 없다.
소환수들에게도 의지는 존재하지만 그들과 대화나 의사소통이 되는 것은 특별할 정도로 카드들과 교감이 높은 사람들 뿐이다.
“여기야. 여기.”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남연철은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그녀가 손목에 항상 차고 다니는 해킹 툴바였다.
“네가 나한테 말을 건 거야?”
“맞아.”
“…어떻게?”
“네가 개발하고 있던 인공지능이 모종의 이유 때문에 튀어나왔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남연철은 손목의 해킹 툴에 이상이 있는지를 점검했지만, 어떤 문제도 없었다.
확실히 인공지능 관련된 프로그램들을 몇 가지 넣어 놓기는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실행이 된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세상엔 믿을 수 없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 법이지. 잘 부탁해. 파트너.”
“파트너?”
“그래. 파트너. 인공지능과 인간은 최고의 한 팀이 될 수 있지. ‘사이버 포뮬라’ 본 적 있어?”
“그게 뭔데?”
“요새 애들은 사이버 포뮬라도 모르는구나.”
자신이 사이버 뭐시기를 모른다고 대답하자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살짝 시무룩해졌다.
[남연철의 턴입니다.]그 와중에 그녀의 턴이 돌아왔다. 턴이 돌아왔지만 할 수 있는 플레이가 지금은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턴 종료 뿐.
그렇다면 잠시간 버그 인공지능과 대화할 시간 정도는 생길 터였다.
“상황이 좋았다면 프로그램을 뜯어서 하나하나 확인을 해 줬을 텐데.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리 상황이 좋지 않아.”
“호흡도 가파르고, 땀은 흐르고, 전형적인 무대 공포증이네.”
“네가 뭘 알아. 나는 지금 다른 사람 목숨을 걸고 듀얼하고 있는 거란 말이야.”
“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지.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의 100%를 발휘하는 듀얼리스트는 알아.”
“입 다물어.”
남연철은 날카롭게 대답했다. 애초에 방금 태어난 인공지능이 뭘 알겠냐만은.
남연철은 쓰레기같은 인공지능의 헛소리에서 신경을 꺼버렸다.
“그 사람이 처음 공식전에 모습을 드러낸 건….”
그러거나 말거나, 인공지능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지만.
* * *
나는 유리창 너머에서 남연철이 벡이 들어가 있는 기계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 명중 아홉 명의 적은 이미 처리가 된 상황.
남연철이 저 천일운을 처치하기만 하면 된다.
“으음. 벡 녀석. 남연철한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겠지.”
벡의 입은 굉장히, 굉장히 싼 편이다. 개인 SNS에서 발매될 카드들에 대해서 주저리주저리 떠들다 감봉을 몇 번이나 당했으니 할 말 다 한 셈이다.
서윤하의 뒤를 맡아서 내 담당 개발자가 된 이후에는 남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뭐. 그래도 벡이 이야기를 해 줘서 뭔가 부담감을 줄여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일일지도.”
지금 내가 태평하게 서 있기는 하지만 저 건너에서의 듀얼은 내 목숨이 걸려 있는 듀얼이다. 내가 태평하게 서 있는 이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서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아프다고 발광을 떨어 댄다면 남연철의 실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확률이 크니까.
“…뭐, 당장 지금도 그다지 실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같지만.”
듀얼관이라는 것은 재미있다. 주변의 상황에 휩쓸리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제대로 된 실력이 나오지 못하게 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집안에 틀어박혔던 시절의 나처럼 말이다.
“…으으. 또 우울해지려고 그러네.”
당시의 나는 매일같이 일어나서 듀얼하고 자기를 반복했다. 목표가 없는 인생이었다. 부모님이 남긴 얼마 안 되는 유산이 바닥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집안에 먹고살 거리가 없어진 다음, 나는 반쯤 강제로 대회에 참여해야만 했다. 조그마한 대회라도 4강 이상에 들면 참가비 이상의 돈은 벌 수 있었다.
물론 먹고 살 수만 있다 뿐이지 그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고독.
당시의 나는 언제나 고독함만을 느꼈다. 혼자서 듀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나에게 편집증적인 강박과 근거 없는 오만만을 선사했었다.
혼자라는 생각. 아무도 나따위에게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생각들이 삶을 하루하루 좀먹어갔다.
그만큼 나는 완벽에 집착했고, 언제나처럼 탈락했다.
그 때 내가 만났던 것이 서윤하다.
만났다고 하는 것은 좀 우스울까. 지역 컵 대회에서 16강이라는 밑바닥 성적을 거둔 다음, 겨우 한 줄짜리 팬레터를 받았던 게 다였으니까.
[듀얼 잘 보고 있어요. 팬이에요!]그녀가 내 듀얼의 어디에 매력을 느꼈던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서윤하의 말로는 ‘부서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살고 싶어하는 시크함이 멋졌다’고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나는 듀얼이 그렇게 거창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보낸 메일은 내게 커다란 의미였다.
누군가. 혼자라고 생각하던 나를 봐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나왔던 대회의 녹화방송을 찾아봤다. 물론 내가 나간 대회들이라고 해 봤자 겨우 동이나 구 단위의 대회였다. 시청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많아야 수십 명, 적으면 열 명도 되지 않는 시청자들의 채팅.
하지만. 내 듀얼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그 안에는 있었다. 내 듀얼을 보고 즐거워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라면 사 먹을 돈도 간당간당한 주제에.
다음 대회에서 지면 수도세도 못 내는 주제에.
나를 봐 주는 사람들에게 내 듀얼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기는 것보다 더.
나는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하던 「암흑기」를 버렸다. 그리고 당시에는 예능이나 다름없던 「캐논 파이터」를 사용한 무한 번 킬 덱을 들고 나갔다. 그리고 그 해, 나는 처음으로 한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아시아 지역대회에서 우승하고, 처음으로 세계대회 우승까지 할 수 있었다.
‘저런 듣보잡도 우승시켜주는 무한 번 킬 덱이 더럽다’고 소울 사가 욕을 오질나게 먹기는 했지만, 내가 여러 대회에서 계속해서 우승을 차지한 덕분에 이런 비난도 금방 사그라들었다.
…사라졌다기보다는 비난의 대상이 소울 사가 아니라 내 쪽으로 이동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지만.
…아무튼, 듀얼리스트가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첫 번째 마음가짐은 자신이 뭘 바라는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고 싶다.’는 마음과 ‘내 듀얼을 보는 사람이 즐거웠으면 좋겠다.’두 가지였다.
비율은 대충 5대 5…는 아니고, 9대 1도 좀 아니고.
음…
99.9대 0.1 정도로 해 두자.
##무한 (3)
“…그러니까 요는, 자신이 바라는 게 뭔지를 제대로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거야.”
남연철이 듀얼을 하는 동안, 자신을 백승태라고 소개한 인공지능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쫑알거렸다.
짜증나는 일이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라면 마빈, GLaDOS, 알파고와 같은 멋진 영문명들이 있는데 투박하기 그지없는 이름이라니.
더욱 짜증나는 점은 그, 혹은 그녀가 쫑알거리고 있는 이야기가 귀에 죄다 들어왔다는 점이다.
“거지같이 시끄럽네.”
“이 이야기 다 듣고 나서도 눈물을 안 흘리다니. 심장이 메말랐어. 꼬맹이. 나는 선배한테 인계받을때 받은 폴더에서 이 이야기 보고 나서 울었는데.”
게다가 남연철이 가장 싫어하는 꼬맹이라는 소리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사람 손에 달려 있는 15cm짜리 무접점 키보드 주제에.
“그보다. 선배란 건 누구야?”
“있어. 그런 사람.”
방금 만들어진 주제에 뒷이야기가 있는 척하는 것까지 짜증난다. 남연철은 듀얼이 끝나면 반드시 디버깅을 해서 이 버그를 삭제시켜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보다, 내가 진짜로 바라는 건 언제나 똑같았어. 다른 고르디우스 멤버들도 마찬가지고.”
「혜성가」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라면 이 세계가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에 대해서 알게 된다. 능력이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을 착취하고, 무력을 통해서 위에 서고, 능력이 없는 자들조차 서로를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의 세계.
이 세계의 뒤틀림은 모두 카드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카드는 이 세상의 원천이다. 카드를 쥔 자와 쥐지 못한 자는 핵무기를 쥐고 있는 자와 핵무기가 없는 자들만큼의 힘의 차이가 난다.
「고르디우스」의 멤버들이 바라는 것은 언제나 같다.
“우리는. 아니, 나는 카드가 없는 세상을 바래.”
최소한 남연철은 그랬다. 이 세계에 주어진 축복처럼 이야기되는 저주. 소울 커맨더스 카드들이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리기를 간절히 바랬다.
“뭘 모르네.”
“뭐?”
“아까 이야기한 거지같은 듀얼리스트가 한 말이 있어.”
“그놈의 듀얼리스트는 지겹지도 않냐?”
“뭔가가 되길 바라는 건 진정으로 원하는 게 아냐. 정말 사람이 바라는 건, 무엇을 하고 싶으냐지.”
“…자기계발서에서 있는 척만 하는 문구 같아. 그런 말들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이 이야기가 얼마나 실제적인 이야기였는데. 그 사람이 대회에 가지고 나갈 덱을 고르는 중에 한 말이야. 그 사람은 어그로 덱 대신에 「슬라임 번식」덱을 들고 갔지.”
대회 덱 이야기였냐. 그보다 슬라임 번식 덱이라니. 전익현이랑 똑같은 짓을 하는 누군가가 이 세계 어딘가에는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 자신과 꼭 닮은 사람이 세 명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던 남연철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전익현과 꼭 닮은 인간이 세 명이나 있는데 이 세상이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을 리가 없다.
“그 사람이 만들었던 「슬라임 번식」덱은 로망 덱이었어. 메타에도 안 맞는 올드 덱에 불과했다고.”
“…근데 왜 인생 이야기하다 듀얼 이야기로 빠지지?”
“그, 그러게?”
남연철은 해킹 툴의 키보드를 쿡쿡 쑤셔댔다. 이 기계도 전익현의 듀얼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 분명했다.
인간과 기계의 바이러스가 다르다는 것쯤은 알지만 근래 봐 온 전익현 바이러스의 전파력을 보건데 기계를 감염시킬 가능성도 매우 농후했다.
이쯤되면 바이러스가 아니라 방사선에 가까운 무언가다. 기계고 인간이고 죄다 몹쓸 것으로 만드는 듀얼 방사선.
“그래서. 그 사람. 우승했어?”
“아니. 16강에서 카운터 덱 맞아서 떨어졌어.”
“…….”
남연철은 손목에서 해킹 툴을 그대로 벗겨내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내팽개쳐진 툴을 발으로 밟기 시작했다.
콰아악! 콰악!
내팽개친 툴을 신발의 밑창으로 밟자 기분이 조금 만족스러워졌다.
“자, 잠깐만! 잠깐! 기다려봐! 이야기 안 끝났다고! 야! 밟지 마! 그런 취향 없다고!”
“지껄여.”
“그 사람은 16강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쥐어들고 절망했지.”
“16강이면 충분히 잘한 것 같은데.”
“거의 2년만에 해 본 16강 탈락이었거든. 하지만 그 사람은 다음 대회에서 다시 「슬라임 번식」을 들고 갔어.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정신 나갔네.”
“나도 똑같이 생각해. 그 사람한테 물었어. 그런 똥쓰레기덱을 왜 쓰냐고.”
“그러니까?”
“이 덱으로 우승하고 싶으니까. 라고 대답하더군.”
“좋은 대답이네.”
“그 사람한테 우승은 모든 게 아닌 거야.”
대회에서 질 때마다 바닥 구르면서 판정에 항의하고, 카드 욕하고, 메일 테러를 본사에 집어넣고, 나한테 전화해서 사기 아니냐고 계속 물어보기는 하지만. 이라는 말을 벡은 집어삼켰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느냐. 무엇으로 하느냐도 결과만큼 중요하다는 거네.”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