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 Academy 1st Hit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92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투덜거렸다. 몸에도 육중한 데미지가 쌓여 나가고 있다. 돌파에는 내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문을 파괴하고 들어갈 때마다 새 문이 생겨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한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모르죠. 대충 일이십 분쯤.”
나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학생들은 퍽이나 걱정되는 모양이다.
그보다 정말로 생각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력으로 문들을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게 내가 아닌 다른 교수진이었다면 그랬을 거라는 이야기다. 나는 품에서 「선택의 카드」를 뽑아들어 뒤집었다.
[현재의 누적 관계성 포인트 : 27,000P]“호우.”
“기뻐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학생들이 위험에 처해 있는데 기뻐할 리가요.”
언제 포인트가 이렇게 많이 쌓였지? 지난 번 마지막에 확인할 때만 해도 2천포인트 내외였던 포인트 수치가 2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무튼 이 포인트를 사용해서 원격 조종으로 여한설의 특이성을 개화한다면 그녀가 살아남을 확률은 비약적으로 올라간다.
문제는 어떤 특이성을 개화하느냐인데.
사실 살아남는 데 가장 편한 것은 그녀가 지금 쓰고 있을 것이 뻔한 빛 속성 컨트롤 덱에 맞는 특이성들이다. 당장 도움이 안 되는 「묘지」를 대신해서 권보람이 가지고 있는 「빛의 성물」이나 방어 일변도의 덱에 걸맞는「회복의 고리」같은 것을 넣는다면 오래 버티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빛의 성물」과 「회복의 고리」를 구매했다. 각각 5000 포인트 정도다. 고티어 특이성이라 그런지 비싸긴 비싸군.
구매한 두 특이성을 여한설에게 적용하려는데···.
[여한설에게 추가 가능한 특이성 : 2개] [추가한 특이성은 두 번 다시 변경할 수 없습니다. 「빛의 성물」과 「회복의 고리」를 적용하시겠습니까?]두 번 다시 변경할 수 없다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특이성의 변화, 혹은 개화는 세 번까지다.
그러니 아마 여기서 특이성 두 개를 더 추가한다면···앞으로 여한설이 얻게 될 특이성은 더 없다고 봐도 될 거다. 강해지는 속도는 더뎌질 거고, 덱은 빛 속성으로 고정되겠지.
하지만 목숨값이라고 치면 싸다. 그것도 지나치게.
“뭘 생각하시는 겁니까?”
“권보람 씨. 목숨과 개화한 특이성 중에 고르라면, 뭘 고를 겁니까?”
“목숨이죠.”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오는 대답.
“모든 사람이 그렇게 대답하겠죠?”
“지금 선문답 할 시간 없습니다. 빨리 다음 문을 공략해야 합니다.”
나는 권보람이 말하거나 말거나 선택의 카드를 노려보았다. 아마 여한설이 눈앞에 있었어도 똑같이 대답했을 거다. “멍청한 놈. 목숨과 특이성 따위가 같겠나?”같은 말을 했겠지.
“사람의 말은 얼마나 진실된 걸까요?”
“그거야 그 사람이 얼마나 진실되게 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아뇨. 사람은 진실된 행동이나 말을 거의 하지 않아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연약한 생물이다. 우리들은 그렇기에 타인에게서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진실된 마음을 감춘다. 때때로, 혹은 자주, 우리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이 진정으로 바라는 대답이라고 생각하고는 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진실된 순간을 마주하지 못해요. 하지만 자신의 진심이 완전히 보이는 순간이 있기는 하죠.”
“그게 언젭니까?”
“듀얼할 때.”
권보람의 눈이 순식간에 미친놈 보는 눈으로 변한다. 이곳이 밖이었으면 당장 112나 119에 전화를 걸었을 것 같은 표정이다. 나도 말을 내뱉고 보니 아차 싶기는 하다.
“···취소.”
하지만 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선택들 가운데서 우리는 자신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형태의 선택을 고른다. 하나의 덱은 무수한 선택의 결과물이며, 그 덱을 플레이하는 듀얼의 플레이 하나하나는 듀얼리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파편들이다.
···그만두자. 말하면 말할수록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무슨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
아무튼 내가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하나다. 여한설은 내가 「소커아」의 테스팅을 하며 무수히 많이 듀얼해 온 듀얼리스트 가운데 한 명이다. 대부분의 플레이 회차와 시뮬레이션 듀얼에서 그녀는 빛 속성의 덱이었다.
깔끔하고, 완성도가 나름대로 높고, 비싼 카드들을 우선적으로 쓰는 완성도 높은 상대. 하지만 상대하는 것이 그리 재밌지 않았다.
같은 상황에서는 같은 플레이만을 하고, 모든 덱 카드가 같은 데다가 변칙따위 없으며, 누군가 조종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기계적이고 틀에 박힌 듀얼리스트와 듀얼하는 것은 고역 중의 고역이기 때문이다.
“대답 안 하면 그대로 듀얼 하겠습니다.”
“······.”
“듀얼.”
그렇게 대충 수백 판 정도를 듀얼했을 때였었나. 처음으로 그녀가 「빛」속성이 아닌 덱을 가지고 왔었다. 「무덤」의 특이성을 탄환으로 하는 어둠 속성의 덱.
그리 신선한 종류의 덱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형적인 덱이었다.
하지만 듀얼은 재미있었다. 자유롭게 선택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수를 내놓고, 한 판의 듀얼이 끝나면 꼭 한두 장의 새 카드들을 넣어 오는 듀얼리스트.
처음에는 약해졌다. 아니, 대부분의 판에서 그녀는 빛 덱을 사용하는 것보다 약했다.
하지만 테스팅의 거의 막바지쯤에서의 여한설의 덱은 꽤나 실전성이 있는 덱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쩌면 게임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던 AI에 불과한 캐릭터와 지금의 여한설을 같은 선상에 두는 게 머저리같은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듀얼리스트들의 덱을 꽤 많이 보고, 플레이를 충분히 경험한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겠지만. 이 세계의 듀얼리스트들은 단순히 AI나 프로그래밍된 존재가 아니라···.
“「날개의 수호령」소환!”
촤르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에 깃털들이 무수히 날아와 박혔다. 앗 따가!
[「문」이 파괴되었습니다.] [「권보람」이 패배를 선언했습니다.]“뭐 하는 짓이에요!”
“문을 뚫기 위한 듀얼을 하고 있었잖습니까.”
“아니, 제가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있는데 그냥 시작해 버리면 어떡해요! 아무 플레이도 안 했는데 턴은 맘대로 진행시키고!”
“···전익현 강사님은 지금까지 플레이를 모두 했습니다.”
“네?”
나는 듀얼로그를 펼쳐봤다. 진짜네. 첫 턴부터 제대로 플레이를 하고 있다. 턴 종료 버튼도 칼같이 누르는 데다가 플레이도 군더더기없는 내 플레이 그 자체다.
···자동사냥 기능도 있다니. 역시 21세기의 게임답다.
내가 듀얼 중독일 가능성은 없으니 아무튼 자동사냥인 것이다.
나는 피가 나오기 시작한 구멍 몇 개에 응급용 연고를 바른 뒤 다시 선택의 카드를 품에서 뽑아들었다. 그리고 남은 1만 포인트를 사용해 두 개의 특이성을 골랐다.
그녀가 가장 즐겁게 듀얼하던 때 사용하던 두 가지 특이성이다.
[추가한 특이성은 두 번 다시 변경할 수 없습니다. 선택하시겠습니까?]나는 망설임없이 ‘YES’버튼을 눌렀다.
***
여한설은 나무꼬리를 여덟 마리째 처치해 나가고 있었다. 애초에 1학년의 과제로 주어진 몬스터인 만큼 개개의 난이도는 어렵지 않다.
치지지직!
물론 그렇다고 해서 데미지를 아예 받지 않고 견뎌낼 수 있는 뜻 또한 아니지만. 여한설은 독 데미지에 타들어가는 교복 상의을 무시한 채 눈 앞의 나무꼬리를 처치해냈다.
[「나무꼬리」를 처치했습니다.] [보상 :···
올라오는 창의 메시지를 무시한 채 여한설은 다시 듀얼을 준비했다.
“듀얼!”
[「나무꼬리」를 필드에 격리합니다.] [튜닝 시간입니다.]‘방금 듀얼에서 데미지를 더 많이 받았어. 체력이 부족할 테니 힐 카드의 비율을 조금 더 올리고 조금 더 극단적으로 덱을 구성해야 해.’
그녀가 지금 쥐고 있는 덱은 처음의 덱과는 완전히 다른 덱이었다. 여덟 번의 사냥과 듀얼을 거치며 상황에 맞게 덱을 다듬었기 때문이다.
전익현의 튜닝론이 이번에는 맞았다. 고장난 시계가 가끔은 맞을 때도 있는 법이다. 튜닝이 유용한 극히 희소한 경우를 만끽하며 여한설은 흘긋 옆을 쳐다봤다. 장백호는 여유롭게 듀얼을 하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는 자신과 달리 그의 몸은 여유로운 상태다.
‘잠깐 여유로워진 건 내 쪽도 마찬가지지만.’
지금 여한설의 눈 앞에 서 있는 나무꼬리를 제외하면 남은 나무꼬리는 두 마리. 한 마리는 장백호가 맡아서 상대하고 있다.
장백호의 듀얼이 거의 막바지로 접어들었으니 마지막 나무꼬리는 장백호가 상대해야 할 것이다.
장백호가 의도적으로 게임을 지연하고, 트롤링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점.
본래라면 파티원을 버려두고 이탈하는 것은 위원회에 회부될 일이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최대한 빨리 나무꼬리를 처리하고 던전에서 탈출할 생각이겠지?”
장백호의 느긋한 말이 들려왔다. 자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인지 티타임이라도 가지는 것처럼 느긋한 말투다.
“네 행동 방식은 엄청 많이 봐 왔거든. 같은 학생이라도 적의가 보이면 바로 버린다. 이런 뻔한 판단을 하니만큼 예측하기도 쉬워.”
“네가 나를 봤다고 해도 고작 반 년에 불과하지. 고작 그걸론 나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다.”
“반 년이라··· 뭐. 그렇게 생각하도록.”
여한설은 덱을 빠르게 회전해 나무꼬리에게 빠르게 데미지를 누적시켰다. 만신창이가 된 나무꼬리가 비명을 질러댔다.
장백호가 마지막 나무꼬리와 듀얼을 시작했다. 됐다. 이제 마지막 나무꼬리만 처치하면 된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여한설은 장백호의 말을 무시한 채 눈 앞의 나무꼬리의 숨통을 끊었다.
[듀얼에서 승리하셨습니다!]“그거 알아? 이 던전은 듀얼하지 않고 있는 나무꼬리가 한 마리도 없으면 자동으로 히든 몬스터인 「위대한 고목꼬리」가 튀어나오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곳이라는 거.”
“프로그래밍? 그게 무슨 뜻이···.”
뻐어어억!
여한설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등을 엄청난 충격이 강타했기 때문이다.
여한설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을 몇 바퀴 굴렀다. 컥. 커헉. 입에서 죽은 피가 터져나온다. 누적되어 왔던 데미지가 몸 전체를 요동친다.
겨우 몸을 돌려 보자 몇 배는 커다란 덩치의 나무를 꼬리에 단 몬스터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장백호가 말하는 「위대한 고목꼬리」가 바로 저 몬스터인 모양이다.
“던전에 왔을 때는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는데. 이번 회차는 꽤 물렁하단 말이지. 플레이나, 덱이나. 하긴. 쓸데없는 데 시간을 많이 써 댔으니 그럴 만도 하지.”
뭔가 머리를 굴려 보려 했지만 고목꼬리가 꼬리를 다시 들어올렸다. 몇 초라도 더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한 가지.
“···듀···얼.”
[듀얼이 시작됩니다.]끝
평범한 사람이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언제쯤일까.
명확한 통계는 내릴 수 없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한 나이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도 남을 나이다.
그렇기에 여한설은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상황에 희망이 없다는 것과,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주 조금의 희망도 없는 상황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긍지를 지켜내야만···
[추가 특이성이 부여됩니다.] [특이성 : 「빛과 어둠의 왈츠」] [특이성 : 「최후의 전사(highlander)」]“···이게 뭐야.”
그러고보니 동작대교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일이 있었었다. 정말 상황 좋게 등장했던 「흑화」특성.
그리고 지금 때 좋게 나타난 두 개의 특이성까지. 마치 세상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타이밍 좋게 주어지는 능력들.
누군지는 모르지만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있다. 누구일까.
‘상관없어.’
중요한 것은 지금이 기회라는 것이다. 여한설은 자신에게 생겨난 특이성을 빠르게 읽어내렸다.
[「빛과 어둠의 왈츠」 : 빛 속성과 어둠 속성의 카드를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다.]「흑화」가 사라져 있는 것을 보니 흑화의 상위 특이성이다. 어둠 속성과 빛 속성의 카드를 동시에 쓸 수 있는 특이성.
그리고 다음은 「최후의 전사」.
[「최후의 전사(highlander)」 : 덱에 모든 종류의 카드를 한 장씩만 사용하면 발동합니다. 가지고 있는 특이성 「무덤」을 강화합니다.]강화 이후의 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았다. 덱에 한 장씩만 카드를 넣는다는 것은 큰 리스크를 지는 일이다. 덱의 주축이 되는 고효율의 카드를 두 장씩 쓸 수 없다는 뜻이니까.
이 ‘하이랜더’라는 이명의 특이성을 발동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아마도.’
이 특이성은 자신을 지켜봐 온 누군가가 그녀에게 선물해 준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특이성은 발동할만한 가치가 있는 능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무조건 발동시켜야 하겠어.’
그런 점에서 두 속성의 카드를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대체 카드들을 사용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덱의 밸류하락을 최소화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품 안에 고이 모셔놨던 그녀의 다른 덱을 꺼내들었다.
지금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답은 한 가지다.
여한설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발악을 하는군.”
마지막 나무꼬리를 처치한 장백호는 바쁘게 덱을 짜는 여한설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한설은 포기가 빠르게 빚어진 캐릭터인데도 아직까지 포기를 하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번 회차는 변곡점이 너무나도 많다. 장백호는 불쾌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죽음에 익숙하다고 해도 죽음이 확정된 상황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이 길어진다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다.
“죽을 준비는 끝났나?”
“전혀.”
쿵! 쿵! 쿠웅! 고목꼬리가 위협적으로 꼬리로 바닥을 두들겨댔다. 분노와 활기에 가득차 있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