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ch the ghost munchkin! RAW novel - Chapter 86
86화
“아파요.”
“아프라고 한 거니까 군말 없이 아파라.”
감독이 셋트장으로 들어가며 활짝 웃었다.
“촬영도 일찍 끝났는데 더 파르~야. 오랜만에 너희 집에서 삼겹살 회식 어떨까?”
덕팔의 눈물은 마를 줄 몰랐다.
**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김민석이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라는 것, 영화판에서 김민석 이름 석 자가 얼마나 대단하게 통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인사를 무시당할 정도로 인지가 없는 배우는 아니었다. 수치심에 배성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한국대학교 인근 골목.
배성우의 손에 마지막 회 대본이 들려 있었다. 그나마도 마지막 회에 자신의 촬영분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매니저가 마지막 회 대본을 가지고 왔을 때 비로소 안도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촬영장에 와보니 A팀은 한유리와 덕팔의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를 찍고 있었고 자신은 B팀 감독과 야외 촬영이 준비되어 있었다.
“후아…”
배성우가 크게 숨을 몰아쉬곤 촬영에 임했다. 교복을 입은 남학생 뒤로 슬그머니 다가가 그의 지갑을 훔쳤다. 화면에 남학생의 얼굴이 잡히진 않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대본에 잘 적혀 있다.
‘대역을 쓴단 말이지.. 감히 나를 상대로!’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오케이 컷! 다음.”
클로즈업 씬. 지갑을 열어 보니 학생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남학생을 피해 골목길로 숨어 들어갈 때, 중년 남자가 배성우의 어깨를 잡았다.
“이봐, 좀 도둑! 우리 사위의 지갑을 훔치면 안 되지.”
김민석이 배성우의 어깨를 벽에 밀치며 손을 뻗어 지갑을 낚아채려 하자 배성우의 소매 끝에서 작은 잭나이프가 튀어나왔다.
푸욱..
잡히면 안 된다는 공포심에 남자의 복부에 칼을 박아 넣은 배성우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더니 골목길을 미친 듯이 달렸다. 뒤를 힐끔거려보니 남자가 쓰러지며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다.
배성우가 남학생의 지갑을 열어 돈을 꺼내고 지갑을 대충 근처에 던져 놓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멀리서 뒤늦게 한 여학생이 뛰어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중년인을 발견하고 급히 골목길로 뛰어 들어간다.
배성우는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자리를 떠난다.
“오케이, 컷! 다음 갑시다.”
B팀 감독이 촬영에 속도를 냈다.
돈을 빼돌리다가 조직의 보스에게 얻어맞는 장면. 평소 같으면 대역을 쓰자고 했겠지만, 오늘은 직접 연기를 하기로 했다.
금이 간 각목이지만 맞을 때마다 욱신거린다. 욕지거리가 튀어나왔지만 꾸욱 참고 보스를 노려본다.
“컷! 배성우씨, 20살도 안 된 소매치기가 자신을 찍어 누르는 보스에게 얻어맞으면서 그런 눈빛을 할 수 있을까요?”
B팀 감독이 나름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있지만, 배성우의 귀에는 야유처럼 들려왔다. 합을 맞춰주고 있는 액션 배우들도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 다시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이 모든 게… 누구… 누구 때문일까?
그래.. 바로 오덕… 아니 한유리 때문이야. 그년이 날 무시하고 내 인생을 망가트리고 있어.
기다려라. 한유리! 널… 죽여주마!
8번 NG를 내고 드디어 오케이를 받았다. 그러나 B팀 감독의 눈에는 흡족함 대신 실망감과 일말의 포기가 담겨 있었다.
빌어먹을… 다 한유리 때문이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배성우는 한유리에 대한 분노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다시 시작된 활기찬 월요일.
한유리는 덕팔씨 정성스럽게 싸준 도시락을 들고 새벽부터 출근하였다. 덕팔도 첫 수업에 늦을세라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때 보조석 문이 열리며 곱게 정장을 차려입은 은혜가 차에 올랐다.
덕팔이 눈짓으로 은혜의 차를 가리키자 은혜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도로를 가리켰다.
“얼른 가요. 늦겠어요.”
“본인 차를 놔두고 왜?”
“어머?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차를 두 대나 굴려서야 쓰겠어요?”
“드라마가 끝날 때까진 제 곁에 있으면 불편할 텐데요?”
“괜찮아요. 이 감출 수 없는 미모 때문에 그런 관심은 늘 받고 있으니까..”
“네네”
덕팔이 입꼬리를 올리며 운전에 집중하였다.
“촬영 끝난 거죠?”
“네..”
“별일 없었던 거죠?”
“네, 무사히 잘 끝냈습니다.”
“그거 말고, 예를 들어 키스신이 있었다거나.. 키스신이 있었다거나.. 키스신이 있었다거나..”
덕팔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슬며시 은혜의 시선을 피하자 은혜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있었던 거예요? 진짜로?”
“저… 그게…”
“차 세워요.”
“네? 여기 도로 한복판이에요.”
“빨리 차 세우라구요.”
덕팔이 별수 없이 비상등을 켜고 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세우자 은혜가 벼락같이 달려들어 덕팔의 입술을 훔쳤다.
“이걸로 만족할 순 없지만 내 껀 내가 지켜야 하니까!! 자.. 이제 출발!”
은혜가 핸드백을 열어 화장과 입술을 다시 정리하며 태연하게 출발을 외쳤다.
“……”
할 말을 잃은 덕팔이 멍한 얼굴로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
서울00지방검찰청 214호 검사실.
“싫습니다. 네, 그런 일로 다시 연락하지 마세요.”
아영이 휴대폰 통화종료버튼을 난사하며 매우 불쾌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영의 표정을 살피던 양 계장이 슬며시 물었다.
“검사님, 무슨 일 있습니까?”
“무슨 중매쟁이가 전화해서… 어휴.. 짜증나!”
아영이 신경질을 내자 양 계장이 웃었다.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지참금으로 4억 준다고 하네요. 돈에 환장한 여자로 보이나…”
“4억요? 나 같으면 얼른 가겠다.”
민수정이 얄밉게 대답을 하자 아영이 새초롬하게 웃었다.
“남자는 돈이 아니라.. 넓은 가슴과 마스크죠.”
“인성 아닙니까?”
양 계장이 우려의 목소리로 묻자 아영이 활짝 웃었다.
“우리 오빠는 이미 아주 훌륭한 인성을 가졌으니까 그딴 건 필요 없구요.”
“결국 그 오빠네요. 뭐!”
“당연하죠. 우리 오빠가 있는데 4백억을 줘 봐요. 내가 꿈쩍이나 하나. 오호호호”
아영이 괜히 기분이 좋아졌는지 크게 웃곤 수사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즐거운 월요일 아침이었다.
**
교수 연구관 A동 102호.
“어서 오게.”
“주말은 편히 보내셨습니까? 교수님?”
“늙은이가 달리 일이 있었겠나? 덕팔군은 주말 내내 바빴다며?”
“학교에서 마지막 촬영이 있었습니다.”
“오.. 그래? 그럼 이제 드라마는 끝난 건가?”
“다른 배우들은 계속 촬영을 하지만 저는 끝났습니다.”
“우리 딸아이가 자네 사인을 받아오라고 하던데 말이야. 오랜만에 친정에 와서 늙은 아비에게 겨우 한다는 소리가 그딴 소리니 원…”
김정학이 종이 두 장을 내밀자 덕팔이 웃으며 종이를 받아 들다가 얼굴이 굳어졌다.
“재입학신청서…네요?”
“그렇지. 그다음 장도 보게.”
“전공 변경신청서면…?”
“맞네. 법대로 재입학을 한 후, 한의대로 전공을 변경하는 신청서일세.”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덕팔이 설명을 요구하자 김정학이 웃었다.
“말 그대롤세. 자넨 학칙을 위반하여 이중 입학을 하였으니 금번 입학은 취소될 걸세.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네. 단지 절차가 좀 복잡할 뿐이지. 실상은 자네에게 더 좋은 일이 될 테니..”
“그러니까 형식적으로 법대에 재입학을 하였다가 통합의대로 편입을 하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그렇게 되면 본과 1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네.”
“본과? 아.. 법대는 3학년으로 재입학을 하는 것이니 통합의대에서는 본과 1학년에 해당하겠군요.”
“그렇지. 자네는 2년의 시간을 번 셈이지.”
“하지만, 교수님 저는 1,2학년 전과목에 출석 미달로 F인데요?”
“법대는 유급제도가 없네. 그래서 전과목 F여도 승급은 하지, 다만 학점이 부족하여 졸업을 못 할 뿐이야. 반면 통합의대는 학점이 일정 기준 미만이거나 3과목 이상 F가 나오면 학년 유급일세. 대신 학점이 부족해서 졸업을 못 하는 경우는 없지. 참 공평하지 않은가?”
“네… 그런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일각에서는 특정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식의 재입학과 편입을 허가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있었네. 그래서 몇 가지 조건이 붙었어.”
덕팔이 눈만 껌뻑거리자 김정학이 덕팔이 내놓은 차를 홀짝이며 본론을 꺼내 놓았다.
“첫째, 인신선생님이 정리해 놓으신 한의학 자료를 내놓아야 하네. 물론 원본은 필요 없네. 사본이면 족하지. 특히, 침, 약초, 경락과 관련에서는 꼼꼼히 챙겨 줘야 하네.”
덕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기회를 보아 김정학에게 내 줄 생각이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둘째, 본과 수업 시간에 위 세 과목에 대해서 자네가 조교로 참가해 주어야 하네. 우리 교수들은 위 세 과목 수업을 자네와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할 생각일세. 이해가 되었나?”
덕팔의 머리가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모든 교수의 수업에 참가해야 한다면 자신의 수업은?
“대신.. 자네가 수업에 참가한 만큼 예과 기초과목 학점을 인정해 주겠네. 그럼 자네의 부족한 학점도 채워지겠지?”
덕팔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사실은 이것이 좀 문제이긴 한데 말이야. 법대 학장의 요구가 있었네.”
김정학이 덕팔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맛을 다셨다.
“내년부터 폐지되었던 사법고시가 형식을 바꿔 부활한다고 하더군. 로스쿨과 변호사 시험은 그대로 존치하고 별도로 판,검사 임용고시를 통해 매년 100명씩 우수 인원을 선발한다고 하네.”
“……”
“졸업 전에 판,검사 임용고시에 합격하지 않으면 한국대 로스쿨에 들어가는 조건일세.”
“끄응…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민 교수가 자네 친구라며? 자네가 천재였다고 하더군. 딱히 학원을 다니지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는데 늘 1등이었다고? 하긴 그렇게 대충 공부를 했는데도 법대 수석을 한 것을 보면 천재는 천재였던 모양이지. 민 교수가 그랬네. 자네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하아, 이놈 시키가 끝까지…”
김정학이 덕팔에게 다시 신청서를 내밀며 웃었다. 덕팔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두 서류에 서명하자 김정학이 깜빡 잊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참, 법대 학장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 로스쿨을 들어가도 반드시 법관임용고시에 합격해야 한다고? 그전에는 한의사 국가고시를 볼 생각도 말라고 하더군. 뭐, 자네라면 문제없을 것 같아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네. 허허허.”
“끄응…”
“오늘부터 자네는 내 연구생이니 행정실에 가서 이 방 열쇠를 하나 받아 가게. 수업 끝나도 다른데 가지 말고 이 방으로 와.”
“꼭 그래야 하나요?”
“꼭 그래야 하지. 앞으로 4년간 자네의 인생은 이곳에 저당 잡혔다 생각하게. 그게 마음이 편할 테니.. 석좌 교수 자리를 거절할까 했는데 받아들여야겠군. 아직 은퇴를 하기에는 이르지. 암!”
덕팔은 김정학을 이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