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0
물론 그 전부터 정파와 마교로부터 추살령(追殺命)을 받아 쫓기던 신세지만, 이제는 같은 사파에게도 배신당한 처지다.
‘이제 중원천지에 내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다. 무공을 되찾는 걸 넘어 이전보다 더 강해져야 해.’
흡성대법으로 빠르게 내공을 쌓고, 거기에 곤륜의 신묘한 절학이 더해지면 본래의 무공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오를 것이다.
그 전에 서둘러 돌아가 봤자 중원에는 나를 반겨 줄 가족도 없고 만날 친구도 없다.
그럼에도 굳이 돌아가려는 이유는 손봐 줘야 할 놈들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급할 건 없다. 정천맹과 패도련, 마교까지 죄다 짓밟아 버릴 만큼 힘을 키운 다음 돌아가도 늦지 않아.’
복수의 날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테온? 테온!”
“으, 응?”
“어디까지 가냐니까요? 풉,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혼자 음흉하게 웃고 있어요?”
아우레오가 못 말린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도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가는 데까지 같이 가 보고, 중간에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거기서 헤어지는 거지.”
나는 씩 웃어 보이곤 품속에 넣어 둔 책자를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비급의 감촉이 좋았다.
‘얼른 흡성대법을 시험해 보고 싶은데.’
아우레오나 에릭, 토마스에게 흡성대법을 시전할 수는 없다.
절공을 갖고도 써먹을 기회가 없으니, 선물을 받았는데 포장을 뜯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급해졌다.
‘어디 산적 나부랭이라도 안 나타나나?’
고맙게도 산적 나부랭이는 그날 밤 찾아왔다.
* * *
“테온은 떠오르는 기억이 아예 없나요? 기억상실이라도 아주 어릴 때 기억은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기억 안 나.”
“아쉽네요. 테온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테온은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해 봤을 것 같아요. 가슴 뛰는 모험이라든가?”
늦은 밤, 모닥불 앞에 둘러앉으니 아우레오는 옛 추억을 나누고 싶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운 추억보다 끔찍한 기억이 더 많은 인간이었다.
‘지나간 일을 떠올려 봤자 기분만 잡치지.’
게다가 지금은 수다 떨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오감을 끌어올려 주변의 기척에 집중하니, 수상한 발소리가 들렸다.
바스락.
딴에는 기척을 죽이고 조심조심 다가오고 있지만 허술하다. 잠행술을 익힌 살수의 솜씨는 아니었다.
‘일곱 명. 무공은 모르는 자들이고.’
다가오는 사람은 총 일곱 명.
어둠 속에 숨어 발소리를 낮추고 접근한다면 목적은 뻔한데, 의외로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죽일 생각은 없나 보군.’
다가오는 위험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던 아우레오의 목덜미에 단검 한 자루가 닿았다.
“움직이지 마.”
“헉, 누, 누구냐!”
토마스가 벌떡 일어나려 하자, 또 다른 괴한이 오금을 차서 꿇어앉혔다.
이미 나를 제외한 모든 일행의 목에 날카로운 단검이 닿아 있었다.
“아이고, 이거 지체 높은 사제님이시네?”
“그대들은 누구요?”
“킥킥, 누구긴 누구야. 산적이지.”
일곱 산적이 헤실헤실 웃었다. 남자가 넷이나 있는 일행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제압했으니,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산, 산적이라고?”
토마스는 떨고 있는 와중에 나를 쳐다봤다. 토마스뿐만 아니라 모든 일행이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뭘 봐.”
일행의 무력한 모습에 심술이 나서 도와주지 않고 어깨만 으쓱했다.
물론 일행을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나에게는 산적을 제압해야 할 이유가 있기도 하고.
‘먹잇감이 제 발로 찾아왔네.’
흡성대법을 시험해 볼 첫 번째 기회가 왔다.
사파에서 온 용사
울어라, 태허도룡검!
산적 하나가 밧줄을 들고 다가오며 말했다.
“얌전히 있어. 저놈들 목에 바람구멍 뚫리는 꼴 보기 싫으면 말이야.”
“포박을 왜 하지?”
“뭐?”
내 물음에 밧줄을 들고 다가오던 산적이 멈춰 섰다.
“산적이면 산적답게 그냥 다 죽이고 재물을 빼앗으면 되잖아? 번거롭게 왜 생포하냐고.”
“킥킥, 호기심이 많은 놈이네. 너희는 일꾼이야. 그냥 죽이긴 아깝지.”
산적이 나를 비웃으며 다시 손을 묶으려 했다.
그 와중에 아우레오는 철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테온, 전 신경 쓰지 말고 맞서 싸우세요! 불의에 굴복하지 말아요!”
“흐흐, 그럴까? 이봐, 에릭, 너도 내가 당장 싸웠으면 좋겠어?”
이 상황에 싸움이 벌어지면 인질이 된 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고 봐야 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우레오와 달리, 에릭과 토마스는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 그게…….”
“됐어. 그냥 해 본 소리야.”
웃으면서 양손을 내밀자, 산적이 밧줄로 단단히 묶었다.
손이 묶인 채 물었다.
“우리를 너희 본거지로 데리고 갈 생각인가?”
“그래,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거든.”
“뭐, 보나 마나 허드렛일이겠지. 똥간 청소나 장작 패기 같은.”
“잘 아네? 너 산적 출신이냐?”
“그건 아니고.”
자기들이 알아서 본거지로 안내하겠다니 귀찮음을 덜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따라가서 산채에 있는 놈들까지 박살 내야겠다.
태평한 내 모습이 우스운지 산적이 낄낄 웃었다. 이놈은 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저승사자를 못 알아보는 놈이로고.’
바보 같은 산적은 자기한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내가 손발이 묶이는 고생을 하면서까지 산채로 가는 이유는 하나, 좀 더 많은 산적에게 흡성대법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흡성대법의 악명은 익히 들었고 비급도 달달 외웠지만, 실제로 써 보는 건 처음이니까.
‘대법은 심법과 달라서 실제로 행할 때 여러 변수가 생긴다. 사전에 연습을 해 보아야 해.’
흡성대법은 엄밀히 말하면 내공심법이라기보다 주술에 가까운 재주였다. 강자에게 사용하기 전, 만만한 산적을 대상으로 효용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산채에 산적이 드글드글하면 좋겠군.’
* * *
줄줄이 엮인 굴비 신세가 되어 산채에 도착했다.
‘기대한 것보다는 규모가 작네.’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산채는 외부에 목책을 둘렀고, 내부에 가옥 다섯 채가 옹기종기 지어져 있었다.
빈둥거리는 산적 놈들을 세어 보니 대략 스무 명이 상주하고 있었다.
‘요괴가 출몰하는 곳이니 산채도 대규모일 줄 알았는데……. 그래도 스무 명이면 괜찮군.’
산채의 인원과 건물 배치를 면밀히 살폈다. 다행히 우리를 제외하고 다른 양민은 없었다.
강제로 끌려온 양민이 더 있다면 싸움에 방해가 되었을 터다.
산적은 우리를 헛간에 몰아넣고, 밖에서 두꺼운 자물쇠를 걸어 문을 잠갔다.
적막만 남은 헛간,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릭이었다.
“사제님,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 없으시고요?”
“전 괜찮아요. 그나저나 이것 참 낭패로군요.”
두 사람은 목소리를 낮추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토마스도 이제야 긴장이 좀 풀렸는지, 나무 벽 틈으로 밖을 내다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횃불을 끄는데? 밤새 경계병을 배치하진 않나 봐.”
“산적 나부랭이가 다 그렇지. 경비가 허술하니 새벽에 기회를 보아 탈출하자.”
토마스와 에릭이 결의를 다지고, 아우레오도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내공을 끌어 올려 손발의 포박을 끊었다.
툭, 투툭.
“어라? 자네, 밧줄을 어떻게 풀었…….”
질문하던 에릭이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아우레오와 토마스도 수혈(睡血)을 짚어 재웠다.
“너희가 하긴 뭘 해?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기감을 끌어올려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문 앞에서 헛간을 감시하는 산적이 있었다.
문틈으로 손가락만 빼꼼 내밀고, 문 앞에 있는 산적의 수혈에 지풍을 쏘았다.
퍽.
내공을 최소한으로 사용했지만, 방심하고 있는 산적 정도는 쉽게 기절시켰다.
산적이 쓰러지는 걸 확인하고, 문틈으로 팔을 내밀어 자물쇠를 잡았다. 꿀처럼 끈적한 내공이 열쇠 구멍을 빈틈없이 채웠을 때 걸쇠를 당겼다.
쩔꺽.
답답한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렸다. 내공으로 자물쇠를 푸는 해정밀기(解穽密氣)였다.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려니, 헛간에 남은 일행이 신경 쓰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너희가 공격받으면…… 그건 팔자려니 해라.’
혹시 모르니 헛간에 빗장을 걸고 자물쇠를 다시 채웠다.
* * *
“읍, 읍!”
“쉿, 소리 내지 말고 묻는 말에 고개만 끄덕여서 대답해.”
끄덕끄덕.
등 뒤를 잡힌 산적은 목덜미에 닿은 칼날의 감촉에 금방 조용해졌다.
“지금 산채 밖으로 나가 있는 놈들이 있나?”
절레절레.
“이게 전부야? 스무 명?”
끄덕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