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5
‘저 아줌마는 뭐야? 설마 저 사람이 촌장인가?’
젊은 여자들 사이로 처음 보는 중년의 미부(美婦)가 끼어 있었다.
풍만한 몸매의 중년 여인은 젊은 여자들을 이끌고 마구간을 향해 걸었다.
“모두 명심해라. 사제와 수호자를 최우선으로 제압해야 한다. 그 둘만 제압하면 나머지 용병 둘은 별거 아냐.”
“네, 스승님.”
놀랍게도 중년 여인의 입에서 촌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농염한 여인의 입에서 걸걸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오니 실로 괴이한 모습이었다.
‘역용술(易容術)? 저렇게 완벽한 역용술이 있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변장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어느 쪽이 진짜 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뭐가 됐건 놀라운 재주라고 생각하며 은밀하게 뒤를 따랐다.
마구간은 멀지 않아서 바쁘게 걸음을 옮기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 중년 여인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제자리에 완전히 멈춰 섰다.
‘왜 멈추지? 설마 눈치챈 건가?’
천천히 손을 옮겨 허리의 칼자루를 잡았다. 상대가 이쪽으로 접근하면 선공을 취할 셈이었다.
“쥐 새끼처럼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었나? 역시 범상치 않은 놈이었군.”
‘들켰네. 씨팔.’
발각된 것을 확신하고 즉시 운해비영을 펼쳐 쇄도했다.
상대의 숫자가 많지만, 대부분 힘없는 여인이다. 우두머리만 속전속결로 제압하면 어렵지 않게 싸움을 끝낼 수 있으리라.
“너희는 마구간으로 가서 사제를 제압해라. 이자는 내가 맡겠다.”
“네, 스승님.”
여인들이 마구간을 향해 우르르 달려갔다.
나는 숫자가 줄었으니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앞을 가로막은 촌장에게 집중했다.
“남잔지 여잔지 가랑이 한번 보자!”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박도를 크게 휘둘렀다.
중년 여인은 내 속도에 놀란 듯 눈을 치켜떴지만, 칼을 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떨어지는 칼날을 향해 좌장을 내밀며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보호막!”
퉁!
칼이 상대에게 닿지 않았다. 반투명한 기의 방패가 허공에 불쑥 생겨나 중년 여인을 보호했다.
“호, 호신강기(護身剛氣)!?”
놀라고 있을 틈이 없다. 좌장을 거둬들인 여인이 이번에는 우장을 내질렀다.
“충격파!”
여인의 손에서 터져 나온 장력이 공기를 떨쳐 울리며 강력한 파동을 일으켰다.
“커헉……!”
이세계에서 처음으로 상대의 공격을 허용했다.
장력을 가슴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나는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불길한 놈, 네놈은 여기서 죽여 주마!”
표독스러운 얼굴로 다가오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목소리도 여자답게 바뀌어 있었다.
그녀가 품에서 작달막한 막대기를 꺼내자, 주변에 흩어져 있던 대자연의 기운이 그녀에게 빠르게 모이고 있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내겐 너무 강한 그녀
‘역시 마법사였구나!’
가슴에 일격을 허용했지만, 고통보다 마법사를 찾았다는 희열이 더 컸다.
‘겉모습을 바꾼 것도 역용술이 아니라 마법이겠군. 목소리까지 바뀌다니, 마법이란 게 제법 유용한데?’
마법은 단순히 기공의 일종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 보니 그보다 다양한 활용이 가능했다.
‘계집 마법사는 마녀(Witch)라고 했던가?’
마녀를 만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지금은 기뻐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땅에 처박기 직전 운룡대팔식으로 몸을 비틀어 안전하게 착지했다.
내가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자 마녀도 접근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그녀는 장난감 같은 막대기에 계속 기를 모았다. 큰 기술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집중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겠군.’
신행미종보를 펼쳐 마녀의 눈을 어지럽히고 빈틈을 노렸다. 동시에 입으로도 쉬지 않고 도발했다.
“날 죽인다고? 근데 죽여준다는 말이 무색하게 넌 너무 늙었구나.”
“…….”
“너, 솔직히 별로 안 죽여준다. 가슴은 크지만, 다리가 두꺼워. 난 다리 두꺼운 여자는 질색이다.”
“…….”
“따지고 보면 가슴이 크다는 것도 자랑이 아니지. 남자라도 너만큼 뚱뚱하면 가슴이 나오니까. 심지어 넌 늙어서 피부도 최악…….”
“이런 천박한 놈이! 네가 그러고도 순례의 수호자냐!”
계속되는 유치한 도발에 참다못한 마녀가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기를 모으는 게 약간 더뎌졌지만, 빈틈을 노려 공격하지는 못했다.
마녀의 주변에 반투명한 방패가 자꾸만 생겨났기 때문이다.
‘엄청난 기공이다.’
호신강기는 내공으로 체외기막(體外氣幕)을 만들어 몸을 보호하는 상승의 기공.
내공을 피부까지 밀어 올려 방어력을 높이는 충기호신(充氣護身)보다 몇 단계 높은 경지였다.
‘중원에도 강기공(剛氣功)을 쓰는 고수는 손에 꼽는데, 이런 촌구석 마녀가 호신강기라니!’
마녀의 내공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
미리 알아봤다면 후퇴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싸움이 시작된 이상 몸을 빼는 게 더 위험하다.
‘기공은 원거리에 강하다. 어쭙잖게 거리를 벌리느니, 죽든 살든 달라붙어 싸워야 해.’
심지어 나는 내공도 넉넉지 않으니, 마녀가 기를 모을수록 불리했다. 초근접전으로 단숨에 승부를 내야 승산이 있었다.
‘저 정도 내력이면 점혈도 통하지 않을 터, 초식의 정교함으로 승부를 볼 수밖에!’
양발이 바쁘게 교차하며 복잡한 방위를 밟았다.
“이익! 가까이 오지 마!”
마녀는 막대기로 나를 겨누려 했지만, 불규칙하게 방향을 전환하는 신행미종보의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했다. 일신에 지닌 내공에 비해 실전 경험이 부족한 모습이었다.
“헉!”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마녀가 급히 뒤를 돌아봤다.
“어, 없잖아!?”
전음입밀(傳音入密)을 이용한 간단한 속임수. 나는 여전히 앞에 있었다.
마녀가 엉뚱한 곳을 보는 틈에 쾌도를 뿌렸다.
“보호막!”
텅!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박도가 튕겨 나갔다. 이번에도 마녀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이거 성가시네. 허공에서 불쑥 생겨나니 예측도 안 되고.’
마녀의 보호막은 중원의 호신강기와 약간 달랐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 깨닫지 못했는데, 여러 번 보니 분명한 차이가 보였다.
‘생각만큼 단단하진 않다. 만들고 나면 위치를 옮기지도 못하는군.’
방패의 위치를 자유자재로 옮기지 못한다면, 시전자도 행동을 제약받는 셈이다.
그 점을 이용하면 쉽게 빈틈을 만들 수 있을 터, 칼을 빙글빙글 돌리며 마녀의 눈을 어지럽혔다.
“어딜 베어 줄까? 쭈글쭈글한 목? 축 처진 가슴? 아니면 못난 무다리를 잘라 주랴?”
“칫, 보호막! 보호막! 보호막!”
살살 약을 올리며 허초를 쏟아 냈다.
마녀는 허초와 살초를 구분하지 못하는지, 보호막을 남발하며 대응했다.
[내공이 얼마나 넘치면 호신강기를 그따위로 운용하느냐.]“헉, 어느새!”
귓가에 들린 목소리에 마녀의 고개가 왼쪽으로 휙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반대쪽에 있었다.
“또 속냐!”
박도를 쾌속하게 뻗었다. 마녀가 보호막을 만들 틈도 없었다.
‘우선 팔 한쪽 잘라 주마.’
승리를 확신한 내가 입꼬리를 말아 올릴 때였다.
빠지지지직-!
“아악!”
마녀의 전신에서 강렬한 뇌기(雷氣)가 터져 나왔다. 푸른 섬광이 사방으로 퍼지고, 박도를 휘감으며 다시 모여들었다.
“끄아아악!”
갈 곳 잃은 뇌기는 내 몸으로 흘러 들어왔다. 짜릿한 고통이 온몸을 강타하고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사지가 뒤틀리고 머리칼이 하늘로 뻗쳐 올랐다.
딱, 따딱!
어금니끼리 부딪히며 불똥이 튀고, 목구멍에서 매캐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어찌나 충격이 큰지 들고 있던 칼도 놓쳐 버렸다.
“번개 맛이 어떠냐? 깔깔, 천한 칼잡이 주제에 마도사에게 덤빈 대가다.”
“이, 이게 무슨……!”
사람 몸에서 벼락이 뿜어져 나오다니, 듣도 보도 못한 조화였다.
하지만 마녀도 큰 기술을 사용해서인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 틈에 달려들어 쳐 죽이고 싶지만, 몸이 따르지 않았다.
사실 이 정도 충격에서 정신을 잃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벼락이 몸속을 휘저을 때 모든 내공을 머리로 보내 뇌를 보호한 덕분이었다.
“어라, 아직도 의식이 있잖아?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내가 놀란 것처럼 마녀도 나를 보며 놀라고 있었다.
“내 ‘번개 파장’은 회색곰도 죽여 버리는 위력을 가졌는데, 이걸 버티다니……. 네놈, 정체가 뭐냐?”
그녀는 이제 마음을 놓은 듯 가까이 다가와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뭐, 상관없어. 정체가 뭐든 이제 너에게 남은 건 끔찍한 고통뿐이니까.”
마녀는 막대기를 들고, 무어라 웅얼거렸다. 그녀의 주문에 따라 또 한 번 막대한 내공이 모여들었다.
‘아직도 저만한 내공이 남아 있다고?’
마녀는 끝없이 솟아오르는 내공의 화수분 같았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내력이었다.
‘피해야 하는데, 움직일 수가 없다.’
육신의 통제력을 잃었다. 근육에 남은 뇌기 탓에 발작적인 꿈틀거림만 나올 뿐, 뜻대로 사지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사이, 주문을 완성한 마녀가 혀로 입술을 할짝였다.
“그거 알아? 나는 타인의 아픔을 즐기는 사람이야.”
“소, 손 치워……!”
“특히 너처럼 고통에 강한 남자를 보면, 꼭꼭 숨겨 놓은 마음속 상처를 헤집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