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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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공이 날 찾는다고? 왜?”
“테온이 이번에 큰일을 해냈잖아요. 전에 꿈으로 계시받고 무너지는 유적에서 성직자들을 구한 일도 있고……. 그간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부른다더군요.”
‘알 만하군.’
갑자기 살갑게 구는 보론초바 주교공의 속내가 뻔히 보였다.
그는 지금 한 사람의 전사가 아쉬운 입장이다. 휘하에 거느리던 수십 명의 기사가 대부분 죽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내가 압도적인 무력을 드러냈다. 비록 반쪽짜리라지만 데스나이트는 데스나이트, 그런 강적을 열 명이나 혼자 상대했으니, 주교공의 귀가 솔깃할 만했다.
어지간한 성기사보다 훨씬 강한 전사가 자유의 몸으로 돌아다니고 있으니 탐이 났을 터.
“진작에 잘하지. 사람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할 땐 언제고 인제 와서 포상 타령이냐?”
“그동안 테온이 격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한 건 사실이에요. 그래도 주교공 예하의 체면을 생각해서 한번 찾아뵙는 게 어때요?”
“관심 없다.”
“그러지 말고요, 테온. 제 얼굴을 봐서라도 초대에 응해 주세요.”
아우레오는 나와 주교공 사이를 적극적으로 중재했다. 그는 윈스크 교구가 이런 꼴이 된 게 무척 가슴이 아픈 모양이었다.
게다가 북부에 방문한 목적인 마법사 사냥이 이미 물 건너간 상황, 보브찬친의 존재를 모르는 아우레오 입장에서는 내가 언제 북부를 떠나 버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테온마저 외면한다면, 윈스크 교구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어요. 테온이 없을 때 데스나이트들이 다시 한번 습격하면 교회는 피바다가 되겠지요. 그런 참극을 바라시나요?”
교회가 어찌 되건 상관없지만, 종일 따라다니며 촉새처럼 보채는 아우레오의 성화는 도저히 이겨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그의 제안에 따라 주교공이 근신하고 있는 보론초바 공작 저택에 방문하기로 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다분히 계산적인 판단도 있었다.
‘동토 유적 폐허에 혹시라도 남은 마법 결계가 있다면, 결국 성직자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나는 아우레오와 함께 보론초바 공작 가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저택에서 다시 만난 주교공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패를 꺼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들은 대로다.”
보론초바 주교공이 뿔잔에 담긴 맥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늑대 도살자 테온, 오늘 그대를 ‘기사’로 임명하고, ‘교회의 수호자’라 칭하겠다.”
사파에서 온 용사
기사 테온 크로우
어안이 벙벙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순간적으로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이 잘 안 될 정도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우레오가 좋다고 방방 뛰는 바람에 더 정신이 없었다.
‘이 양반이 작정하고 날 한번 감아 보겠다는 건가?’
잠깐 뜸을 들이며 생각을 정리해 보니, 주교공이 이러는 것도 이해는 됐다.
주교공은 무력 확보가 시급한데, 자기가 생각해도 금화 따위나 몇 푼 쥐여 주며 날 포섭할 순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사 직위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기사가 갖는 의미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리 기사가 세습이 불가능한 일대작위(一代爵位)라지만, 어쨌든 귀족 아닌가?”
“후후, 그렇지. 그러니 당연히 책임도 따른다.”
그럼 그렇지. 보론초바 주교공은 기사 임명의 대가로 몇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기사 서임을 받으면 그대는 나와 정식으로 봉신 관계를 맺는 거야. 보론초바 가문에 위기가 닥치면 지체 없이 달려와야 하고, 위기가 아니어도 일 년에 두 번은 기수 소집에 응해야 해.”
여기까지는 특별할 게 없는 조건이었다. 귀족에게 작위를 받으면 해당 가문의 봉신이 되고, 작위를 준 영주의 소집에 정해진 횟수만큼 응하는 게 당연한 관례니까.
단, 중원의 군신 관계와 달리 이곳의 봉신 계약은 말 그대로 계약 관계였다. 합의해서 정한 의무만 이행하면, 나머지 시간은 어떻게 보내든 기사의 마음대로였다.
드물게 봉토까지 하사받은 기사는 자기 영지에서 대대손손 떵떵거리며 살 수도 있었다.
“너무 달콤한 과실이라 선뜻 받아먹기 꺼려지는데.”
“하하, 그대는 젊은 나이에도 용맹과 신중을 동시에 가졌군.”
보론초바 주교공이 또 한 번 뿔잔을 들어 맥주를 마셨다. 잔을 든 그의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입으로는 연달아 칭찬하고, 얼굴도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내게 기사 직위를 주는 게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불과 몇 주 전까지 무시하던 상대에게 도움을 청하는 신세가 됐으니까.
“물론 영지까지 떼어 주겠다는 건 아니야. 일단 직위만 받고, 자네가 얼마나 활약하느냐에 따라 봉토를 줄지 말지 정할 생각이지.”
‘땅을 빌미로 내 칼을 빌리시겠다?’
속 보이는 수작이지만,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기도 했다. 선뜻 득실을 따지기 어려웠다.
물론 기사 직위가 있으면 여러모로 편리했다. 기사는 세습이 불가능한 직위지만 어쨌거나 귀족 대우를 받는다.
이 세계에서 여러 사람을 거치며 평민이 겪는 설움을 똑똑히 보았다.
나는 언젠가 중원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지내는 동안은 귀족으로 사는 게 귀찮은 일을 피하는 길이었다.
또한, 만약 영지까지 받아 낸다면 거기서 많은 수익이 발생할 터, 굳이 힘들게 마법사를 찾아다닐 필요 없이 돈으로 마정석을 매입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보론초바 가문의 부름에 매년 두 번씩 응해야 한다는 것인데…….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까짓거, 몇 번 가다가 눈치껏 빠지면 되겠지.’
나는 짧은 고민을 마치고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소집에 불응해도 보론초바 주교공이 당장 기사들을 이끌고 나를 벌하러 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기엔 주교공의 힘이 너무 약해진 상태였으니까.
“준다니 받아야지.”
“정말 잘됐어요, 테온! 아니, 이젠 테온 경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하하, 축하해요!”
옆에서 숨까지 참아 가며 내 결정을 기다린 아우레오가 다시 방방 뛰었다.
보론초바 주교공은 속이 쓰린 와중에도 한시름 놓은 듯 얼굴이 편해졌다.
“서임식은 오늘 바로 거행하지. 간소하게 할 테니, 준비하는 동안 필요한 행정절차부터 끝내게.”
“좋아, 나도 귀족들 허례허식은 질색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자네에게 예법 선생을 붙여야겠군. 언제까지 경어를 모른다는 핑계로 천박한 언행을 고집할 텐가?”
주교공은 혀를 끌끌 차더니 행정관을 불렀다.
“나는 아우레오 사제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올 테니, 그대는 행정관에게 필요한 내용을 듣게. 그럼 이만.”
주교공이 휙 일어나 자리를 뜨고, 아우레오도 잰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나가기 전에 나를 보며 응원의 의미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아우레오였다.
주교공을 모시는 시종들도 우르르 따라 나가자, 어느새 넓은 응접실에 나와 행정관만 남아 있었다.
보론초바 가문에서 일하는 행정관은 염소수염을 기른 꼬장꼬장한 늙은이였는데, 나 같은 날건달이 기사 직위를 받는 게 영 못마땅한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직 서임식을 치르지 않았지만, 호칭은 지금부터 경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표정과 달리 말은 참 공손하게 하는 행정관이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경의 성(姓)을 정하는 것입니다. 주교공 전하께서 기사 직위는 하사하셨지만, 테온 경을 위해 성을 지어 놓지는 않으셨습니다. 혹시 경이 본래 쓰던 성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난 능씨다.”
“느은……? 른?”
“른이 아니라 능. 이게 발음하기 어렵나? 따라 해 봐, 능!”
“룬? 응?”
“집어치워.”
행정관은 ‘능’ 자를 발음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우레오 녀석도 처음 만났을 때 내 이름을 똑바로 발음하지 못했었다.
행정관은 내게 성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괴이한 발음에 표정을 구겼다.
“테온 경, 송구하지만 경의 성은 발음이 너무 어렵고, 단음절이라 품격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성을 새로 짓는 게 어떻습니까?”
“성은 부모가 물려주는 것인데, 그렇게 제멋대로 지어도 돼?”
“기사 직위는 주교공 전하께서 주신 것이고, 전하께서 따로 성을 지어 주지 않으셨으니, 이런 경우에는 직접 지으셔도 무방합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이야기인데 행정관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문제 될 게 무엇이냐는 반응이었다.
‘하긴, 어차피 내 성이 진짜 능가도 아니니까.’
나는 부모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천애 고아였고, 당연히 이름도 성도 없었다.
내가 능씨 성을 갖게 된 건 순전히 구걸하기 편해서였다. 내가 빌어먹고 살던 동네가 능가촌이었고, 능가촌에서는 아무래도 능씨를 써야 쉰밥 한 숟갈이라도 더 얻어먹었으니까.
이름이 태오(太烏)인 것도 거지패에서 불리던 별명을 그대로 이름으로 쓴 거였다.
어린 시절 성질이 드세고 피부가 까무잡잡했던 탓에 ‘능가촌 까마귀’라는 별명이 붙었고, 그게 결국 능태오라는 이름이 된 것이다.
“성으로 쓰고 싶은 단어가 있으십니까?”
“딱히 없는데. 아무 단어나 가져다 쓰면 되는 건가?”
“보통 부모의 이름이나 본인의 이름을 약간 바꿔서 사용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게 무난해요.”
“새로운 성이라…….”
부모 이름은 어차피 모르니 논외로 치고, 내 이름이라 할 만한 건 제법 많았다.
말년에 붙은 일각노괴부터 젊은 시절 잠깐 불리던 패악괴인(悖惡怪人), 흉면야차(兇面夜叉) 등등 다양한 별호가 있었다.
문제는 그중에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지만…….
“크로우(Crow)로 하지.”
나를 지칭하는 많고 많은 호칭 중에 그나마 까마귀가 가장 사람 새끼 같았다. 나는 결국 까마귀를 이곳 방식으로 발음해서 내 성을 정했다.
“오, 까마귀 기사라니 멋진데요? 예로부터 까마귀는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한다지요. 또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영혼은 다시 이승으로 데려와서 원한을 풀어 주기도 하고요. 동물 이름을 따서 성을 지었으니, 가문의 문장과 상징도 까마귀로 하면 되겠군요.”
내심 이상하게 들리진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행정관이 호평했다.
다행히 이 세계에서 까마귀는 상서로운 짐승이었고, 동시에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문장은 직접 그리시겠습니까? 아니면 화공을 불러 드릴까요?”
“내가 직접 그리겠다.”
“예술에도 조예가 있으셨군요. 도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아무리 사파 무인이라도 중원에서 거물 행세하며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이니, 시(詩), 서(書), 화(畵)에 어느 정도는 소양이 있었다.
나는 행정관이 가져온 물감과 붓으로 비상하는 까마귀를 그렸다.
처음엔 대강 슥슥 그렸는데, 막상 그리다 보니 욕심이 생겨 검도 한 자루 그려 넣고, 배경도 옥빛으로 칠했다.
“봐 줄 만하네.”
“정말 멋지네요. 문장관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이후에도 행정관은 귀족으로서 알아야 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서임식 식순이나 손님 접대 방법, 연회 의상 착용법 등 대부분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내용이었다.
지루한 수업에 하품이나 쩍쩍해 대고 있는데, 자리를 비웠던 주교공과 아우레오가 돌아왔다.
주교공은 돌아오자마자 약식으로 서임식을 진행해 버렸다.
일반적으로 귀족에게 작위를 받아도 다시 교회의 인정을 받아야 했지만, 주는 사람이 주교공이니 대부분의 절차를 생략할 수 있었다.
“보론초바의 이름으로, 교회의 수호자 테온 크로우를 기사의 위(位)에 봉하노라. 크로우 경의 명예와 용맹은 길이 빛날 것이며, 크로우 가문에 아도나이의 축복이 함께할 것이다.”
주교공의 검이 내 정수리와 양쪽 어깨를 오갔다. 서임식을 지켜보던 아우레오와 성직자들, 세속 기사들, 시종들이 박수 치며 축하했다.
‘…….’
기분이 이상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한평생 이렇다 할 소속이란 것이 없었다.
어린 시절 거지패에 속해 동냥하긴 했지만, 그건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저 굶어 죽지 않으려 선택한 것이었다.
와호채나 구음살막에도 잠깐 속해 있었지만, 그것도 강제로 끌려가서 노역한 것이었다.
말년에는 패도련주의 부탁을 받고 일을 처리해 주곤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패도련 소속인 건 아니었다.
‘가문이라…….’
아직은 나 혼자만의 가문이지만, 그래도 가문이 생기고 나니 어쩐지 발바닥이 땅을 좀 더 깊게 디디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사방에서 쏟아지는 축하와 박수갈채는 한평생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사부가 바란 내 모습이 이런 것일까?’
정말 오랜만에 사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우연히 만나, 고작 이 년 정도 내 곁에 머무르다 떠나 버린 사부.
나타날 때도 신기루처럼 나타난 양반이라 그런지, 떠날 때도 신기루처럼 떠나 버린 사부.
사부를 떠올리자 문득 나에게도 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는 나에게 정파 무공, 심지어 도가 무학의 원류(原流)라 할 수 있는 곤륜의 무공을 가르쳤다.
사부는 누구였고, 왜 얼굴도 모르는 나에게 이런 절공을 가르쳤을까?
내가 지고지순한 곤륜의 절학으로 무림을 들쑤시는 사파거두가 될 줄 알았다면, 사부는 과연 나를 거두고 가르쳤을까?
모르겠다. 그 대답은 사부만 알고 있을 터다.
‘하면 내 뿌리가 곤륜에 있는 것인가?’
어쩐지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었다.
나는 사부가 좋은 것이지, 곤륜에는 아무 애정도 없었다.
내 뿌리는 그저 이름도 모르는 사부에게서 뻗어 나온 것이었다.
‘내가 사부 성을 따르지 않았다고 섭섭하게 생각 마시오. 가르쳐 주지 않고 떠난 당신 탓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