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126)
벽태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넌 내 동생이기도 한 거로군.”
벽태산은 왠지 저 말을 하는 벽태수의 표정이 굉장히 편안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벽태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면 됐다. 동생이 건강해졌고, 기연을 얻은 셈이니 오히려 축하를 해줘야지. 기억이 안 남아 있는 건······ 좀 아쉽지만.”
“아, 기억. 그거 아예 안 남아 있는 건 아니야.”
벽태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벽태산을 바라봤다.
“단편적인 장면이지만 기억나는 것들이 있긴 해. 그리고 감정의 편린 같은 것도 남아 있고.”
그게 아니었다면 벽태수에게 그렇게 잘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말에 벽태수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더욱 표정이 편안해졌다.
벽태산은 벽태수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불쑥 말했다.
“무공은 잘 익히고 있는 모양이구나.”
벽태수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준 선물인데 그걸 소홀히 하겠는가.
사실 총관이 흡정결을 익힌 이후 정력도 늘고 몸이 굉장히 좋아졌다는 얘기를 계속 들어야 했다.
총관이 자랑할 때마다 서운하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했는데, 그 뒤로 벽태산이 더 좋은 거라면서 무공을 전해줬으니 그게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덕분에 약도 많이 먹고 몸도 아주 좋아졌지.”
“잘 익혀놓으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을 거다.”
벽태산이 벽태수에게 준 것은 변형된 탐혈마공이다.
원래는 피를 탐하는 마공인데, 그걸 바꿔서 피 대신 영약을 통해 힘을 얻도록 개조한 무공이었다.
그래도 탐혈마공은 탐혈마공이다. 나중에 위급한 순간에 피를 빨아들이면 한 번쯤 목숨을 구할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그 부분도 확실히 알려줬다.
“그거 피도 빨아들일 수 있다. 위험하니까 함부로 쓰지는 말고.”
벽태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거······ 마공이로구나.”
“탐혈마공이다. 내가 피 대신 영약을 쓰도록 개조한 거지. 하지만 개조했다고 해서 원래의 효능이 전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벽태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피를 흡수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성정이 좀 잔인하게 변할 수 있지. 하지만 위급할 때 한두 번 쓰는 정도로는 괜찮다.”
벽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괜찮다.
“위급한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겠군.”
벽태산이 씨익 웃었다.
“그렇지. 잘 아는구나.”
원래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다.
벽태산과 벽태수는 그 뒤로도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벽태수의 표정이 갈수록 부드럽게 풀렸고, 때때로 감격에 젖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벽태산과 이렇게 오랫동안 대화를 나눠본 적이 처음이었다.
벽태수는 그 귀한 경험을 만끽했다.
* * *
벽제혁은 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이렇게 아무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천마라니.’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믿는다. 벽태산의 말을 듣다 보면 저절로 그렇게 되니까.
마치 혼백에 말을 새겨 넣는 것 같았다.
‘아무도 알면 안 돼!’
이 일이 새 나갔다간 그야 말로 끝장이었다.
사실 벽제혁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걷던 벽제혁은 어느새 어머니인 채미령의 거처에 도착했다.
여기에 오고자 해서 온 것이 아니라 무의식중에 이리로 온 것이다.
전각에 들어서니 채미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나와 반겨주었다.
“우리 아들, 웬일로 이렇게 찾아왔을까? 아하, 오늘 아버지를 만난다고 하더니 그 일로 온 모양이로구나.”
채미령은 벽제혁을 얼른 안으로 들인 후,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그리고 기대감 어린 눈으로 벽제혁을 바라봤다.
“자, 얘기해보렴. 아버지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그나저나 안색이 별로 안 좋구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느냐?”
벽제혁은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고개를 저었다. 티를 내선 안 된다.
“아닙니다, 어머니.”
벽제혁은 오늘 있었던 일 중, 정확히 접객실에서 나눴던 대화만 채미령에게 전했다.
그 얘기를 모두 들은 채미령이 분한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기어코 그 녀석에게 상단의 재산을 떼어줄 모양이로구나.”
채미령은 환하게 웃으며 벽제혁을 바라봤다.
“우리 아들은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단다. 이 어미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우리가 가진 기루가 몇 개인데 그걸 다 줘? 말도 안 되지.”
그 말을 들은 벽제혁이 기겁을 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어머니!”
“응? 갑자기 왜 그러느냐?”
“우리 금벽상단에서 기루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작으니 그 정도는 그냥 신경 쓰지 않는 게 낫습니다. 무사히 상단을 물려받는 대가라고 치면 싼 편이지 않습니까.”
“아니, 하지만······.”
벽제혁이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제가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숙부께서도 잘되셔야 우리 금벽상단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채미령의 눈이 살짝 좁아졌다.
‘얘가 왜 이러는 거지?’
벽제혁은 흥분을 살짝 가라앉히고 다시 말을 이었다.
“조만간 숙부가 독립하신다니 당분간 조용히 지켜보세요. 꼭 그러겠다고 제게 약속해 주세요.”
벽제혁이 워낙 강하게 주장하는지라, 채미령은 차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단칼에 잘라내면 아들의 기가 죽어 나중에 큰일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뭐······ 그리 하마.”
벽제혁은 그 대답을 듣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벽제혁의 모습을 바라보는 채미령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끝
벽태수의 집무실을 나선 벽태산의 뒤로 일꾼들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그들의 손에는 커다란 금조각들이 가득했다.
증혼마공이 깃들었던 금벽을 부순 조각이었다.
벽태산은 그들을 이끌고 승도흥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승도흥과 진법가들은 벽태산의 전각에서 가까운 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금벽장 내에는 아직도 손님을 위해 준비된 빈 전각이 잔뜩 있었기에 몇 명을 손님으로 들이든 부담이 전혀 없었다.
아무튼 그곳에서 승도흥 일행은 이번에 분석해서 얻은 진법을 열심히 연구하면서 실력 향상에 힘쓰고 있었다.
벽태산이 환마를 넘어섰느냐는 질문을 한 순간부터 승도흥은 실력 향상에 목을 매고 있었다.
환마를 넘어서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서 승도흥은 잠시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그런 상태이니 이 야밤, 갑작스러운 벽태산의 방문에 얼마나 놀랐겠는가.
“고, 고, 공자님! 여, 여,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이런 야심한 시각에······.”
벽태산은 승도흥과 그 뒤에 공손한 자세로 쭉 늘어서 있는 진법가들을 슥 훑어봤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턱짓을 했다.
뒤에 서 있던 일꾼들이 우르르 나서서 들고 있던 금조각들을 전각 안에 쏟아냈다.
승도흥 일행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 이게 다 뭡니까?”
“그, 금 같은데?”
“금 맞다.”
벽태산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벽태산에게 향했다.
저러다 목이 부러질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려 벽태산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쌓인 금 무더기를 바라봤다.
그렇게 몇 번이나 번갈아 벽태산과 금을 바라보던 승도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금은······ 대체 무엇입니까?”
“분석해라.”
“예?”
“원래 벽으로 이루어져 있던 놈인데 속에 뭔가 특별한 구조를 새겨뒀더구나.”
승도흥이 얼른 달려가 금조각 하나를 집어 들고 유심히 살폈다.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마, 맞습니다. 이거 설마······!”
“분석 끝나면 찾아와라.”
벽태산은 그 말만 남기고 휙 돌아서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승도흥은 멍하니 그런 벽태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헉, 뭐야. 그럼······ 의창에 있던 거대 진법도 분석하면서 이것까지 같이 하라는 거야?”
승도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뒤에서 그를 지켜보던 나머지 진법가들의 얼굴도 똑같이 변해갔다.
아무래도 진법가가 더 많이 필요하다.
“혹시 다른 애들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 없어?”
이럴 때 가장 든든한 건 역시 같은 편이다.
* * *
벽태산은 금덩이들을 전부 넘긴 후, 홀가분하게 침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상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오늘 본 금벽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아까 벽태수가 물었었다. 금벽을 대체 왜 부쉈느냐고.
어설퍼서 부쉈다.
이 금벽은 벽태수가 생각했던 것처럼 천마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역대 천마 중 누군가가 자신이 이뤄낸 증혼마공의 새로운 깨달음을 자랑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증혼마공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당사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마공이다.
결국 벽태산도 그래서 죽었다. 그리고 그건 역대 천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다들 그걸 피해가기 위한 방법을 계속 연구하곤 한다.
금벽은 그 연구 결과 중 하나였다.
금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그래서 가치가 있는 것이기도 하고.
몇 대 위의 천마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관심을 둔 것이 바로 그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냥 척 보니 알 수 있었다. 금을 이용해 증혼마공을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그렇다고 그걸 저렇게 금으로 벽을 만들어 남겨 두다니.
확실히 천마는 천마였다.
“평범하면 천마가 아니지. 나 빼고.”
벽태산은 스스로를 차분히 돌아봤다. 혹시 자신도 저렇게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고 다녔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지극히 평범한 천마였다.
아무튼 금벽상단에 남겨진 증혼마공에 대한 천마의 깨달음은 벽태산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대신 금벽의 구조에서 뽑아낼 수 있는 기관진식에 대한 지식은 얘기가 좀 달랐다.
아마 굉장히 다양한 진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승도흥이 알아서 할 일이기에 벽태산은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을 껐다.
다시 금벽 쪽으로 생각을 돌리고 거기에 대해 고민하다보니 문득 금벽에 깃든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증혼마공을 안정시키는 데에는 거의 쓸모가 없지만,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증혼마공을 조절하는 방식이라거나.
“금이라, 금······.”
금을 매개체로 증혼마공을 증폭하거나 세밀하게 다루는 방식이 문득 떠올랐다.
벽태산은 그대로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 * *
천약방의 이주를 도와주고 있는 천검단 칠 조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얼마 전 찾아왔던 금월상단의 무사가 도움을 요청했다.
금월상단은 천약방을 이대로 무한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중간에 자신들이 원하는 걸 쏙 빼먹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천약방에 큰 피해를 입히고 말이다.
그걸 위해 습격을 할 테니 도와달라고 했다.
만일 같이 천약방을 공격하라고 했으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한데 그가 원한 것은 그저 자리를 이탈하는 것이 전부였다.
처음 기습을 하고 빠질 테니, 그들을 쫓아간다는 명목으로 행렬에서 빠져 달라는 요구였다.
그리고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면 다시 합류해서 천약방이 칠 조장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만들고 말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언제 빠지고 언제 합류하는지 시기를 잘 정하는 것이 문제였다.
칠 조장은 묵묵히 걸으면서 천약방의 전력을 가늠해봤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
천약방의 의원들도 문제지만, 약왕이 보내서 합류했다는 낭인들은 더 심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금월상단이 작정하고 나서면 저들이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칠 조장과 천검단원들이 나선다면 상황이 약간 달라지긴 하겠지만, 사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금월상단을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천약방을 도와 나설 생각도 없었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려나······.’
칠 조장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조원들에겐 이미 언질을 줬다. 자신이 나서면 무조건 전부 따라붙으라고.
그렇게 한참 걷고 있을 때, 일단의 무리가 검을 뽑은 채 달려들었다.
“쳐라!”
“습격이다!”
채채채채채챙!
천약방의 의원들이 저마다 수레를 지키면서 적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낭인들이 나서서 검을 휘둘렀고.
적들은 그렇게 한 차례 격돌한 뒤 다급히 물러갔다.
“일단 후퇴해라! 이대로는 안 된다!”
달려왔던 적들이 빠르게 물러갔다.
그리고 칠 조장은 딱 그 시점에 나섰다.
“가긴 어딜 가느냐! 이리 와서 무릎을 꿇어라!”
칠 조장이 바람 소리를 내며 그들을 쫓아가자, 나머지 조원들이 우르르 따라갔다.
누가 채 말리거나 응원할 새도 없었다.
어찌나 빠르게 도망치고 그걸 쫓아가는지 다들 그저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칠 조장이 노리던 바였다.
그는 빠르게 적, 아니, 금월상단 무사들을 쫓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으슥해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도착한 금월상단 무사들이 멈춰서 칠 조장을 기다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사 중 하나가 정중히 말하자, 칠 조장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 거 아니었소. 한데, 준비한 전력은 확실하시오? 천약방 쪽에 합류한 낭인들 실력이 심상치 않은 것 같소.”
“그래봐야 낭인은 낭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준비한 전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는 칠 조장에게 자신들이 준비한 무사들의 수준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칠 조장은 그 얘기를 들으며 가만히 계산했다.
“대략······ 반 시진 정도 후에 돌아가면 되겠군.”
그러자 금월상단 무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쯤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면 저도 일단 저쪽으로 합류해야 하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음에 술잔이라도 나누지요.”
“좋소. 그럼 무운을 빌겠소.”
금월상단 무사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