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125)
벽태산은 천천히 금벽으로 다가갔다.
역시나 증혼마공의 기운이 담긴 것은 저 금벽이었다.
금벽 앞에 선 벽태산은 금벽을 유심히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매끈했다. 하지만 그건 보기에만 그런 거였다.
이 금벽에는 증혼마공이 흘러 다니고 있었다.
벽 내부가 특수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그 구조에 따라 증혼마공이 흐르면서 기의 손실을 막고, 혹여 손실이 있더라도 지속적으로 보충해서 일정한 기의 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했다.
굳이 그렇게 만든 이유는 그냥 알 수 있었다.
이건 천마를 위해 만든 벽이었다.
“어떠냐, 굉장하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 가문의 시작이다.”
벽태수의 말에 벽태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벽제혁은 뭔가에 홀린 듯 멍하니 금벽을 바라봤다.
“이 벽을 지키며, 벽을 찾아온 손님에게 이걸 보여주는 것이 우리 가문의 역할이다.”
벽제혁이 벽태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벽을 찾아온 손님이라는 걸 어떻게 압니까?”
“저 벽의 뒤를 확인해봐라.”
금벽의 뒤쪽에 공간이 있었다. 벽제혁은 얼른 뒤로 돌아가 벽의 뒤쪽을 확인했다.
벽태산도 뒤쪽으로 갔다.
거대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을 가진 사람이 손님이다. 하지만 아무리 문양을 갖고 있다고 해도 손님이 먼저 말하지 않는다면 이 벽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이건 금벽상단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지침이었다.
벽태산은 문양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벽태수를 쳐다봤다.
벽태수의 표정은 굉장히 심각했다. 그럴 수밖에. 저 문양에 대해 모를 수가 없을 테니까.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벽태수는 금벽상단이라는 거대 상단의 주인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벽제혁도 알아차렸는지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 아버님! 저, 저 문양······ 제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습니까?”
“맞다고 생각한다.”
벽제혁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금벽의 뒤에 새겨진 문양은 천마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천마신교의 문양과는 달랐다.
오직 천마만이 쓸 수 있는 문양이었다.
하늘 천(天)자에 검을 현(玄)자를 겹쳐서 만든 듯한 문양이었다.
벽제혁이 덜덜 떨었다. 이 지독한 진실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만일 이 사실이 세간에 알려진다면 어찌 되겠는가.
금벽상단은 끝장이다. 더구나 지금은 천마신교가 기이한 진법에 둘러싸여 세상일에 전혀 관여를 하지 않고 있었다.
도움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도와달라고 해도 천마신교가 도와줄 지조차 의문이긴 하지만.
“비밀은 지킬 거라 믿는다.”
그 말에 벽제혁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벽태수는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벽제혁을 바라봤다.
“네 어미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너도 모르지 않으리라 믿는다.”
“무, 물론입니다.”
벽제혁의 어머니인 채미령이 이걸 알게 된다면, 어떻게든 이 사실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그건 결국 파국으로 이어질 테고.
벽제혁이 불안한 시선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은 벽태수와 벽제혁을 쳐다봤다.
그리고 금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거기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이 씨익 웃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꽈드드드득!
금벽이 무너졌다.
두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끝
“그, 그걸······!”
“그걸 부수면 어떻게 합니까!”
벽제혁이 소리쳤다.
벽태수는 멍하니 부서진 금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두 사람은 벽태산이 아무렇지도 않게 금벽을 부쉈다는 점은 아예 머릿속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저 천마의 물건을 부쉈다는 점만 뇌리에 남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걸 천마가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금벽상단은 끝장이다.
벽태산은 부서진 금벽의 잔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역시 그냥 벽이 아니라 내부에 특수한 구조가 짜여 있었다.
부서지고 쪼개진 부분에 무수한 구멍과 홈이 보였다.
붙여서 구조를 파악하면 뭔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귀찮았다.
‘승도흥이 보면 뭔가 알아낼 만한 것이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한 벽태산이 벽태수를 보며 말했다.
“이 금덩이들은 내가 가져가죠.”
벽태수는 멍하니 벽태산을 바라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는지 젓는지도 아마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걸······ 이걸 부수면······ 이제 우리 가문은······.”
벽제혁은 혼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벽태산을 노려봤다.
“대체 어쩌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벽태산이 벽제혁을 쳐다봤다.
“천마도 잘했다고 할 거다.”
벽태산의 말에 벽제혁이 멍하니 벽태산을 바라봤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벽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안 온다. 천마는 여기 이런 게 있는 줄도 모른다. 관심도 없고.”
벽제혁이 이를 악물었다. 저게 말이나 되는가.
상대는 천마이고 천마신교다. 그들이 어떤 자들인데 이런 걸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 놓겠는가.
분명히 천마신교 내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그들이 이곳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해도 나중에 언젠가 눈을 돌리는 순간 금벽상단은 끝날 것이다.
벽태산은 벽제혁과 벽태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두 사람의 상태가 너무 심각했다.
천마신교에 대한 공포가 이성을 잠식했다. 아마 한동안 저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다보면 정신이 피폐해질 테고, 결국 파국에 이를지도 모른다.
“나약하긴.”
벽태산은 혀를 쯧쯧 찼다.
그걸 본 벽제혁은 머리가 뜨거워졌다.
한데 정말 신기하게도 벽태산에게 덤빌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성질이 마구 뻗치고 머리가 터질 것처럼 화가 나는데도 벽태산에게 대들고 싶지가 않았다.
벽제혁은 자신이 어떻게 된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부서진 금벽의 잔해를 바라봤다.
“아······!”
벽태산은 저 두꺼운 금벽을 단숨에 부쉈다. 그저 손바닥을 갖다 대는 것만으로.
그제야 머리가 좀 식었다. 그리고 덤비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여기서 덤볐다간 보는 사람도 없으니 정말 흠씬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숙부께서는 어찌 그리도 확신하십니까.”
벽태산은 시선을 돌려 벽태수를 쳐다봤다.
벽태수도 이제 정신이 좀 들어오는지 벽태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태산은 지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에게 비밀 한 가지를 더 만들어주기로 했다.
“내가 천마다.”
벽태수와 벽제혁이 멍하니 벽태산을 바라봤다.
* * *
천약방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개봉에서부터 무한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천 리가 훨씬 넘는 거리인 데다가 가져가야 할 짐도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는 도중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산적을 만날 수도 있고, 흑도 세력과 마찰이 생길 수도 있다.
아니면 천약방과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된 독마가 나설지도 모르고.
아무튼 다양한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천약방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천약방은 의원으로 이루어진 방파이긴 하지만, 결코 무공 수련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래서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대단한 의원은 없지만, 유사시에 큰 힘을 낼 수 있었다.
웬만한 산적이나 수적 따위는 천약방을 절대 건드릴 수 없었다.
게다가 무림맹에서 도와주겠다고 사람들이 합류했다.
그러니 더더욱 일이 생길 수가 없었다.
무림맹에서 나온 사람은 당연히 천검단의 칠 조장과 그의 휘하에 있는 조원들이었다.
칠 조장은 천약방의 의원들에게 굉장한 환대를 받았다.
고작 열세 명에 불과하지만, 그들 하나하나의 실력은 천약방의 의원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특히 천약방의 총관인 노주강은 칠 조장을 볼 때마다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칠 조장도 어차피 무한에 가면 천약방을 계속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노주강과의 관계를 잘 이어가려고 애썼다.
“확실히 천약방이 대단하긴 대단하군요. 저 마차에 실린 것이 전부 제조가 끝난 약이라는 겁니까?”
칠 조장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제법 커다란 수레 세 대가 줄줄이 이동 중이었는데, 각 수레마다 새하얀 종이로 포장한 약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래도 예전만 못합니다. 요즘 워낙 살림살이가 어려워서 약을 비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옮기기가 편해져서 다행이지요.”
노주강의 말에 칠 조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약방의 수레들을 차근차근 훑어봤다.
수레의 수가 정말 많았다.
그리고 각 수레마다 약재와 약이 가득 했다.
아마 저것만 갖다 팔아도 금액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한데 그나마 저것도 금월상단의 방해 때문에 제대로 물량을 맞추지 못한 거라고 하니 대체 원래는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개봉에서 오랫동안 지내셨을 텐데, 그걸 다 버리고 무한으로 가려니 많이 아쉬우시겠습니다.”
칠 조장의 말에 노주강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면 거짓말이지요. 사실 개봉에 있으면 무림맹의 도움을 받기도 편하니······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방주님의 계획대로라면 무한으로 가는 것이 미래를 위한 발판이 되어줄 테니까요.”
칠 조장은 그 뒤로도 노주강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진짜 하고 싶은 질문을 했다.
“한데, 총관님.”
“예. 말씀하시지요.”
“왠지 천약방의 인물이 아닌 것 같은 자들이 섞여 있는 듯하군요.”
“아아, 저들을 말씀하십니까? 낭인들입니다.”
“낭인?”
칠 조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굳이 낭인을 부르실 이유가 있으셨습니까? 솔직히 저희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만······.”
노주강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이런, 오해를 하셨군요. 저들은 방주님께서 보내주신 자들입니다. 무한에서 활동하는 낭인들인데, 방주님의 성의를 제가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요. 일단 알겠습니다. 하지만 낭인은 그렇게 믿을 만한 자들이 아니라는 점은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칠 조장은 거기까지 하고 살짝 물러났다.
그리고 낭인이라는 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칠 조장이 굳이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은 낭인들 중에 왠지 자신의 감각이 곤두설 정도로 위험한 느낌이 드는 자들이 섞여 있어서였다.
‘저 정도 낭인이라면 한두 푼으로는 어림도 없었을 터인데······.’
칠 조장의 감각이 곤두설 정도라면 방심하면 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무려 무림맹 천검단의 조장과 싸워볼 수 있을 정도의 고수가 대체 몇 명인가.
천약방의 의원들 사이로 섞여든 낭인의 수는 대충 훑어봐도 백 명이 넘었다.
한데 그 중에서 최소 스무 명은 칠 조장의 감각을 건드리는 놈들이었다.
나머지는 별 느낌이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었다.
‘뭐, 내가 저놈들이랑 싸울 일이 뭐가 있겠느냐마는······.’
일단은 같은 편 아닌가.
칠 조장은 일단 조용히 지켜보면서 여정을 이어갔다.
그리고 개봉을 떠난 지 이틀 째 밤이 되었을 때, 칠 조장에게 누군가 은밀히 다가왔다.
그는 금월상단에서 나온 자였다.
* * *
벽태산의 설명을 들은 벽태수와 벽제혁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설명이 길진 않았지만 핵심을 담고 있었기에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신기한 건 어느새 자신이 그 말을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벽태수와 벽제혁은 그런 신기한 기분과 두려움 속에서 벽태산과의 대화를 이어가야 했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하나 생겼다.
이건 그동안 금벽을 감춰두고 지킨 것보다 더한 비밀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누군가에게 말한다고 해서 믿어줄 것 같지도 않은 비밀이었다.
또한 누군가 그 말을 믿는다면 더 큰 문제가 생긴다. 아마 금벽상단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비밀 하나를 얻은 뒤 일단 헤어졌다.
그리고 벽태수는 따로 벽태산과 독대했다.
이건 그냥 대충 넘길 수만은 없는 문제였다. 특히 벽태수 자신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내가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예전처럼 편하게 해도 되겠소이까?”
벽태수의 물음에 벽태산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처럼 하는 게 나도 편해서 좋지.”
어느새 벽태산도 벽태수에게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
벽태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하면······ 진짜 우리 태산이는······ 죽은 건가?”
벽태산이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이건 좀 생각이 필요한 대답이었다.
“일단······ 죽기 직전에 내가 몸을 살린 셈이지.”
“몸이라······ 하면 혼이 죽었다는 건가?”
벽태산이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섞였다.”
“섞여?”
“뭐······ 원래는 내가 벽태산의 몸을 차지한 거라고 여겼는데, 지내다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섞였어. 아주 묘하게.”
벽태수가 굳은 표정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굉장히 깊고 잔잔했다.
그리고 마치 벽태산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아내겠다는 듯 날카로웠다.
“진짜로군.”
“내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으니까.”
천마가 사람을 속일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