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17)
채미령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누굴 모셔요? 천추신의가 벽태산을?”
“예. 이미 짐도 다 풀었습니다.”
채미령이 손을 들었다.
“자, 잠깐만요. 정리가 잘 안 되는군요. 그러니까······ 천추신의가 우리 금벽상단의 일원이 되었다는 건가요? 그 천추신의가?”
“우리 상단이 아니라 둘째 공자님을 따른다고 선을 긋긴 했습니다만······ 그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예, 우리 상단에 들어왔습니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최근 둘째 공자님 주변이 좀 묘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채미령이 보고하던 사내, 벽천일을 노려봤다.
“일 이렇게 어설프게 할 거예요? 그래서 향후 조서각을 제대로 장악할 수 있겠어요?”
“송구합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너무 의외였는지라 다들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애초에 천경완이 벽태산 쪽에 붙었을 때부터 신경 써야 한다고 했죠? 한데 내버려 뒀다가 이게 무슨 꼴인가요?”
벽천일도 할 말은 있었다.
천경완이 벽태산의 사람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지 이제 고작 며칠이었다.
한데 그 사이에 대비를 하면 뭘 얼마나 할 수 있겠는가.
최근 벽태산 주변의 일은 너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어서 뭔가 개입을 할 틈이 없었다.
“아무튼 책임지고 처리해요. 내 아들이 이 상단의 주인이 되는 데 티끌만큼의 변수도 허용할 생각 없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벽천일이 물러나자, 채미령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사실 그동안 벽태산이 눈엣가시이긴 했지만, 그래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죽을 날이 머지않았으니까.
“애초에 천추신의를 데려온다고 했을 때 막았어야 했어.”
채미령은 그때 좀 더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상단 내에서 그녀의 발언권은 아예 없었다. 상단 운영에 개입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영향력이 없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 나름의 방법으로 상단 내의 인사들을 포섭하고 움직여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곤 했다.
하지만 천추신의를 부르는 일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벽태수가 워낙 강력하게 그걸 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별 거 아닌 일로 남편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
한데 그 결과가 이거였으니 어찌 후회가 안 되겠는가.
“역시······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겠어.”
채미령이 다시 한 번 입술을 짓씹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 * *
“신의께서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천경완의 물음에 천추신의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 공자님의 몸을 항상 보살필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제가 따라가지 않으면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천경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함께 가든 말든 상관없었다. 벽태산이 허락만 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기루를 향해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그때 유서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한데 우리 공자님처럼 아픈 분이 이렇게 매일 기루에 다녀도 되는 건가요? 거의 매일 밤을 새시는데······.”
천추신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밤을 새신다고요?”
유서연이 신나서 얘기를 이어갔다.
“네. 역시 이렇게 잠도 안 주무시고 밤새도록, 그러니까······ 음······ 아무튼 그러면 안 좋은 거죠?”
천추신의의 시선이 벽태산에게 꽂혔다.
그는 슬그머니 벽태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슬쩍 물었다.
“비법이 어찌 됩니까?”
벽태산은 황당한 눈으로 천추신의를 쳐다봤다.
“솔직히 같은 남자끼리 도우면서 살면 좋지 않겠습니까? 어······ 그러고 보니 제가 아직 진맥도 제대로 하지 않았군요. 어떻습니까? 잠시 봐드릴까요? 제가 또 실력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걸어가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공자님께서는 그저 손만 잠시 맡겨주시면 됩니다.”
“말 더럽게 많네.”
“아,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사실 말이 많은 게 아니라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달변가가 되었습니다. 누구든 제가 한 번 말을 걸기 시작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신변잡기를 술술 쏟아내곤 하지요. 물론 제가 해주는 말이 훨씬 많습니다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아니겠습니까?”
벽태산이 천추신의의 입 쪽으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천추신의는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비틀어 피할 틈도 없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만일 이것이 공격이었고, 저 손에 칼이 쥐어져 있었다면 자신의 입이 꿰뚫렸으리라.
완벽하게 호흡과 호흡의 틈을 노리고 파고든 일격이었다.
“뭐해? 진맥 한다며.”
“아······! 진맥! 맞다, 진맥을 하기로 했었죠. 하하하하.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천추신의는 억지로 하하 웃으며 벽태산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사심이 가득 담긴 진맥이 시작되었다.
걸어가면서 진맥을 하는데도 천추신의는 벽태산의 몸 상태를 세심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렇게 기루로 가는 내내 진맥이 이어졌고, 천추신의는 끊임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천추신의는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어느새 손목은 놓아버렸다.
더 이상 진맥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온몸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특히 절맥이라고 했기에 기맥은 훨씬 더 세심히 확인했다.
“왜? 진맥 결과가 이상해?”
천추신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공자님.”
“말해.”
“정말 살아계신 분 맞습니까?”
좌중에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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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천마신교에서
벽태산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천추신의는 그걸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찌나 분위기가 살벌했는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느낀 천경완과 유서연이 슬그머니 움직여 천추신의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하, 하하, 하하하. 왜, 왜 이러십니까. 전 그저 공자님의 몸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드린 말씀일 뿐입니다. 제, 제 말이 좀 심하긴 했지만, 어······ 죄, 죄송합니다.”
벽태산이 서늘한 눈으로 천추신의를 보며 말했다.
“진맥해 보니까 살아있는 게 용하다 싶어?”
천추신의가 갑자기 힘을 얻은 듯 열변을 토해냈다.
“고작 그 정도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것이 기적 같은 상황입니다. 아니,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절맥에도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이렇게 세맥까지 모조리 끊어졌다는 건,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은 사람으로 보여?”
“어······ 그, 글쎄요?”
천추신의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아니면, 강시라든가, 뭐 그런 생각이라도 한 거야?”
천추신의가 맹렬히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가, 강시라니요! 전 절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솔직히 벽태산을 진맥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강시였으니까.
“아무튼 공자님의 몸 상태가 굉장히 심각합니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납니다. 바로 치료에 들어가야 합니다. 당장 쓰러지기라도 하면 끝입니다.”
“확신해?”
“확신합니다.”
“목을 걸 수 있어?”
“못 겁니다.”
너무 당당하게 대답하자 다들 황당한 표정으로 천추신의를 바라봤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단 말인가.
“목숨도 못 걸면서 뭘 그리 확신해?”
“제 진맥은 확신하지만, 공자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목을 못 걸겠습니다.”
벽태산이 코웃음을 쳤다.
“목숨 걸지 않을 거면, 닥치고 따라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서 얌전히 기다리든가.”
“이러다 쓰러지시면 전 어쩝니까.”
이대로 벽태산이 죽어 버리면 자신에게 건 금제는 대체 누가 풀어준단 말인가.
벽태산은 천추신의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천추신의가 얼른 따라붙었다.
“따라가겠습니다. 전 공자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겁니다.”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못 믿겠어? 이러다 훌쩍 가버릴 것 같아?”
“그럼 어떻게 믿습니까. 처음 만난 자리에서 금제부터 거신 분을.”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말해. 선택지는 많아.”
천추신의가 고개를 슬그머니 돌리고 투덜거렸다.
“그 선택지가 전부 죽음과 몰락으로 이어지는데 그걸 선택하라고? 아예 제시를 하지 말지. 무슨 눈 가리고 아웅도 아니고······.”
“다 들린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전 공자님 몸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귀도 잘 안 들리실 거라 여겨······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벽태산이 다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천추신의를 쳐다봤다.
천추신의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내가 정말 마음잡고 조용히 살고 싶거든? 그러니까 협조 좀 부탁해. 자꾸 내 성격 시험하지 말고.”
천추신의가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죽을 것 같은 위기감이 콧잔등을 툭툭 건드리는 기분이었다.
벽태산이 다시 휙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천추신의는 숨을 길게 몰아쉬며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후우. 죽을 뻔했네.”
천추신의는 그 꼴을 당하고도 후다닥 달려가 벽태산 옆에 붙었다.
그리고 천경완과 유서연이 어디쯤 있는지 힐끗 확인했다. 제법 거리가 있었다.
천추신의는 최대한 낮춘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공자님, 그런데 제 정체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나 너 누군지 모른다.”
“에이, 농담도 잘 하십니다. 혹시 공자님께서도 교의 일원이셨습니까? 아, 금벽상단이 교의 비밀 지부 같은 거였군요? 그럼 저기 뒤에 있는 두 사람도 교인입니까?”
“네놈이 말하는 그 교라는 게 뭔지 모른다니까? 그리고 네놈이 아무한테나 그렇게 교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걸 과연 그 교라는 곳에서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구나.”
“헙!”
천추신의가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콱 막았다.
벽태산이 그런 천추신의를 가만히 쳐다봤다.
“계속 해봐라. 어디까지 가나 보게. 정말 궁금하구나. 네놈이 가는 길의 끝에 뭐가 있을지 말이야.”
천추신의가 울상을 지었다.
슬쩍 간만 보려다가 혹만 얻었다.
* * *
모든 일이 끝나고 기루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천추신의는 조용히 벽태산의 뒤를 따랐다.
그의 표정에는 경이와 존경, 그리고 두려움과 호기심, 거기에 의문까지 잘 뒤섞여 있었다.
천추신의는 머릿속에 있는 그 모든 감정을 눈빛에 담아 벽태산의 등을 바라봤다.
어젯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을 목격했다.
‘정말 세 시진이었어.’
일단 벽태산이 기녀와 들어간 전각에서 세 시진 가까이 비명이나 다름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 벽태산에 대한 소문과 정보를 모으고,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과장이 심하다고 여겼다.
한데 정말이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 그 기녀는 목이 찢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천추신의가 놀란 것은 야왕이라는 별호를 얻은 벽태산의 잠자리가 아니었다.
그곳의 기녀들에게 놀랐다.
‘아니, 어떻게 눈만 돌리면 순수지체가 있는 거야?’
물론 금벽장에서 봤던 단영을 비롯한 벽태산의 시비들 보다는 훨씬 못했다.
냉정히 판단하면 순수지체라기보다는 누군가 순수지체를 모방해서 체질을 개선한 정도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웠다.
더구나 그 순수지체들이 전부 벽태산과 잠자리를 가졌던 기녀라는 사실은 천추신의에게 한 가지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공자님은 분명히 순수지체로 체질을 바꿀 수 있는 대법을 알고 있어.’
세 시진이나 그 짓을 하는 건 아마 대법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물어보고 싶다. 당장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듣고 싶구나!’
지식에 대한 열망과 생존에 대한 욕구가 싸우기 시작했다.
어젯밤 기루에 가면서 들었던, 대체 언제 여길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은 이미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그 자리를 채운 건, 어떻게 하면 벽태산에게 잘 보여서 대법에 대한 정보를 뽑아내느냐였다.
그때부터 천추신의는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천추신의는 벽태산의 눈치를 열심히 살폈다.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된다.
어쩌면 지식에 대한 열망 때문에 자신이 바라는 대로 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니까.
어제 기루에 가는 도중에 겪었던 경험이 떠올랐다.
죽음이 콧잔등을 툭툭 건드리는 경험을 누가 해봤겠는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으면서 식은땀이 났다.
그 순간 벽태산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천추신의는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너 의술은 좀 한다고 했지?”
의술 얘기가 나오자, 천추신의는 언제 전전긍긍했냐는 듯 얼굴이 확 폈다.
“물론입니다. 제가 이래봬도 의술은 최고에 가깝다고 자부합니다. 저보다 뛰어난 의원이라고 해봐야 천하에서 다섯 명밖에 없습니다.”
“다섯 명이나 돼?”
천추신의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아무리 대단해도 독마나 의선, 일침괴 같은 자들을 능가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자들이야 경험과 세월이 곁들여져서 만들어졌는데. 제게도 그 정도 시간이 주어지면 얼마든지 천하제일이 될 수 있습니다.”
천추신의는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
벽태산은 힐끗 시선을 돌려 방금 이 말을 들었을 천경완과 유서연을 쳐다봤다.
유서연이 벽태산의 시선을 받고는 얼른 말했다.
“다들 그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천추신의에 대한 소문이 제법 곳곳에 나 있는지라 명성이 대단했다.
의선이나 독마, 일침괴 같은 천외천과 비교하지만 않는다면 천추신의가 최고라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천추신의가 어떠냐는 듯 어깨를 쫙 펴고는 벽태산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섯이라고 하신 부분은 아마 마교를 염두에 두신 것 같습니다.”
유서연이 맞냐는 듯 천추신의를 바라보자, 천추신의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마의는 틀림없이 의선이나 독마의 위에 있을 거요.”
마의에 대한 얘기는 유서연도 제법 들어봤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머지 한 명이 누구인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혈마는 거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어서 외부에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게다가 천마신교에서도 시혈마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고 있기에 더더욱 알려지지 않았고.
유서연은 궁금했지만 굳이 나머지 한 명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의원들끼리 아는 정보가 따로 있을 거라고 여겼다.
벽태산의 분위기가 괜찮아 보이자, 천추신의는 슬슬 대법에 대한 얘기를 물어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