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777
외전 127화. 운명으로 (2)
일행을 보낸 이천상이 천천히 몸을 풀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을 그대로 따라오고 있다. 흔적이야 남을 수밖에 없겠지만, 구름 없는 하늘이라도 야밤에 그 흔적들을 살필 수 있다는 건 일류의 추적자가 붙었다는 뜻.’
신교의 정보원들이 모르는 또 다른 정보통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이곳에서 적을 맞는 것보다는 봉우리 세 개 사이, 작은 강가의 상류에서 숲의 입구로 이어지는 곳이다. 그곳에서 막아야 해.’
지명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천상의 머리에는 한 시진 동안 지나온 모든 길이 입체적인 지도로 형성되어 있었다.
‘길쭉한 병기 하나만 있으면 좋았겠지만.’
있는 거라고는 비수 하나.
괜찮은 병기의 부재를 아쉬워하던 이천상은, 문득 자신도 참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에 온전히 몰두할 뿐, 없는 것을 아쉬워하고 못 했던 일을 떠올리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시간 낭비다. 이천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씩 아쉬움을 진하게 느끼는 것에도 장점은 있었다.
이 정보가 머리에, 마음에 더 강하게 각인이 된다는 것.
그 아쉬움을 떠올릴 때마다 그런 순간을 겪지 않도록 더 효율적으로 노력을 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력이야 이리 변하기 전에도 했지만, 밀도가 다르다고 할까.
우우웅.
생각을 이어 가다, 이천상은 금강야차마기가 어느 정도 회복됨을 느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슬슬 이동하려는 찰나였다.
“……?”
이천상이 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사삭.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딱히 은신술을 쓰는 게 아닌데도 기척 자체가 흐릿했다. 익히고 있는 무공 때문이리라.
잠시 후.
“엇.”
느닷없이 등장한 흑마대의 삼 조장 유이상.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일행은 어디로 갔소?”
이천상은 말없이 유이상을 주시했다.
재차 물으려던 유이상은 문득 이천상의 의복 여기저기가 찢겨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전투 중에 입은 상처는 없었지만, 나뭇가지에 긁혀 찢긴 흔적이었다. 이천상만 한 고수라면 그럴 일이 없을 터, 꽤 험한 임무였던 건 분명했다.
유이상이 양손을 들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도와주러 온 거니까.”
“도움이라니?”
“우리 대주님께서 따로 보내 주셨소. 당신을 도와서 임무를 성공시키라고.”
물론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유이상은 그것까지 말하진 않았다.
이천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온전히 내 임무라는 걸 소 대주님도 아실 텐데.”
“알지. 그래도 보냈으니 어쩌겠소? 손발이나 맞춰 봅시다.”
유이상의 어조는 무척이나 경쾌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과 내통하는 건 아닌 듯하군.”
유이상이 뜨악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내통하다니? 내가 말이오?”
“의심이 습관이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막말이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이상의 얼굴은 밝았다. 표정은 똑같은데도 조금은 긴장한 것 같은 이천상의 분위기가 퍽 신선해서였다.
이 사람도 긴장하는구나. 긴장한 이 사람을 도와 수 있다면, 그것도 꽤 재미난 일이겠지.
“근데 잠깐 의심했다가 왜 안심한 거요? 의심을 푼 이유가 뭐요?”
“당신이 적과 내통했다면 소 대주님도 내통했어야 하오.”
“아?”
유이상이 피식 웃었다.
“당신은 정말 똑똑한 것 같소.”
“칭찬 고맙소.”
이천상이 다시 몸을 돌렸다.
유이상이 표정을 굳히곤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어떤 상황이오?”
“조장들과 목표 인물들은 복건으로 보냈소. 적들의 추격이 점점 빨라지고 있기에 그들을 저지해야만 하오.”
유이상이 씨익 웃었다.
“조장들 안 시키고 본인이 나선 거요? 대단한 책임감이오.”
“적측에 나만 한, 혹은 내 이상의 고수가 한 명 있소. 그 외에 나머지 숫자가 오십여 명 정도요.”
“……!”
“누가 남아도 힘든 상황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버는 것이 좋소.”
유이상의 얼굴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이천상과 비교해 모자람이 없는 고수 한 명에 오십 명의 고수라면, 그야말로 상당한 전력이었다. 신교가 아닌 다른 문파였다면 부대 하나에 필적할 만한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목숨을 거셨구려.”
“목숨을 안 걸 때는 없었소.”
“…….”
참 할 말 없게 만드는 사람이다.
유이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법이 있소?”
이천상은 적들이 도달하는 예상 경로, 그리고 어디에서 막는 것이 좋을지를 간략하고 분명하게 설명했다.
“……흐음?”
유이상이 턱을 쓰다듬었다.
“저쪽에 일류 추적자가 있다?”
“당연히 그럴 것이오.”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리 일류 추적자라도 지나온 길을 그대로 따라올 수가 있소?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아, 하긴 틀리지 않았으니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 올 수 있었겠지만.”
“걸리는 게 있소?”
잠시 생각에 잠긴 유이상이 툭 던지듯 말했다.
“저들은 우리와 같은 마인이오. 단순히 마도에 몸담은 이들이 아니라, 십만대산 출신이라 이거지.”
“알고 있소.”
“우리는 자세한 사정도 모르고, 또 알 필요도 없소. 하지만 상대가 대산 출신이라면 단순히 능력 좋은 추적자 때문에 거리가 좁혀지고 있는 건 아닐 거요.”
“그럼?”
“혈향검의 얘기는 나도 들은 적이 있소.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검도에 대단한 조예가 있었다고.”
“…….”
“그처럼 굴강한 자마저 돌아섰다면 그보다 더 강하고 높은 지위를 지닌 자들이 돌아섰을 가능성도 충분하오. 당장 우리가 맡은 임무만 해도 삼십 년 전에 도주한 노마들을 잡아 오란 것이었으니까.”
순간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우리의 행동을 읽고 있군.”
“바로 그거요.”
능력 좋은 추적자가 개인의 실력만으로 쫓는 것과 마인으로서 같은 훈련을 받은 이들을 추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저들은 우리의 분타가 어떤 곳에 분포되어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분타 정보원들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분타 정보원들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분타들과 연락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며 도주했다는 뜻이고.”
“결국, 그들이 우릴 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분타의 위치는 물론 정보원들의 시야가 닿는 영역까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군.”
“그렇소.”
뜻밖의 깨달음이었다.
머리 좋기로는 누구 못지않음에도 이천상은 결정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
그답지 않은 실수.
그것은 어쩌면, 그만큼 그가 평범한 사람처럼 변해 가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임부를 지키기 위해, 조장들을 살리기 위해, 임무를 성공시키기 위해 집중하려다가 평소라면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부분을 놓쳐 버린 것이 아닐까.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교감이라는 것을 알고 난 이후부터 그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잘 모르겠군.’
이 변화가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나중 문제다.
놓치고 있던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진심으로 놈들을 상대해 줘야 한다.
“이미 보내 버린 일행은 분타 정보원들의 도움을 받고 있소. 교란 작전은 통하지 않을 테니, 이러나저러나 싸워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소.”
“하긴 그렇겠소.”
“다만 그들이 이쪽 정보원들의 시야 반경을 훤히 꿰고 있다면…….”
“지금 움직여야겠지.”
파아아악!
두 사람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 * *
선두에서 달리던 홍오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붙어 달려오던 마인 모두가 신법을 멈추었다.
“……흐음.”
비릿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홍오.
이 무리의 추적자, 단홍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홍 대주님?”
“뭔가…….”
“……?”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단홍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게 흘러 내려오는 강물. 밤중이라 그런지 소리가 제법 요란했다.
하지만 흐르는 강물 소리 때문에 흔적을 놓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물비린내 때문에 적이 남기고 간 혈향을 맡지 못하는 일도 없었다.
나아가 대산의 정보원들이 보는 영역을 역추적해서 들어가니 틀리려야 틀릴 수가 없었다.
“일단 이쪽 길이 맞습니다만.”
“자네의 감각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야. 그저…….”
홍오의 얼굴이 더더욱 찌푸려졌다.
“왠지 기분이 이상해. 더 추적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인데.”
단홍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오감으로 적을 추적하는 데에 누구보다 능했지만, 홍오는 육감으로 세상과 싸우는 이였다.
그랬기 때문에 죽을 뻔했던 여러 상황에서도 겨우 벗어나 이쪽 편에 붙을 수 있었던 것이다. 판세를 읽는 눈까지는 없지만, 짐승보다도 예민한 육감으로 어떤 임무에서도 생환하는 남자가 그였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다른 길을 알아보도록 할까요?”
“으음.”
고민하던 홍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쉬도록 하지. 주변을 둘러보고, 샛길이 있으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빠져서 가세나.”
“알겠습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분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인내심이 깊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감각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단홍은 물론 휘하 대원들 역시 홍오의 감각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늦더라도 괜찮을 겁니다. 대력 어르신께서 곧 오실 테니까요.”
“그렇지.”
홍오만 한 사람이 없어도 차분하게 적을 쫓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대력신마.
전대 교주가 직접 뽑은 십대마왕의 일원이자 충성심만큼이나 깊은 내공과 단단한 무공은 마왕 중에서도 손에 꼽혔다.
“그럼.”
스르륵.
단홍이 좌측 숲길로 스며들었다.
홍오가 대원들에게 말했다.
“긴장을 풀지 마라. 혹시라도 적이 기습할 가능성이 있다.”
그때였다.
우둑.
흐르는 강물 소리에 묻힌, 그러나 전대 혈마대주(血魔隊主)였던 홍오의 귀에는 들릴 수밖에 없는 살벌한 소리.
스르릉.
홍오가 허리춤에서 쌍도(雙刀)를 뽑아 들었다. 불그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명품으로, 그는 이 애병을 혈풍쌍도(血風雙刀)라 불렀다.
“누구냐.”
스르륵.
홍오의 눈이 흔들렸다.
저 멀리 숲의 입구, 강의 상류 지점에서 나타난 한 남자의 손에는 조금 전 샛길을 찾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 단홍의 목이 잡혀 있었다.
혀를 길게 빼문 단홍의 목은 기이한 각도로 부러져 있었다. 손에 잡히자마자 즉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화아아악!
홍오의 몸에서 강렬한 마기가 번져 나왔다.
남자, 이천상이 단홍의 시신을 강물 옆 돌무더기에 던져 버렸다.
퍽!
시체가 돌무더기를 허물고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홍오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누구냐?”
“너희가 쫓는 사람이다.”
“……!”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
홍오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나?”
“그런 질문이 의미가 있는 순간인가?”
“…….”
“수색꾼을 잡았으니 이쯤에서 마무리하도록 하지.”
이천상이 몸을 돌렸다.
“그럼.”
파아악!
이천상이 숲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홍오가 버럭 외쳤다.
“잡아라!”
홍오를 선두로 오십여 명의 마인들이 마기를 흩날리며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들 뒤.
강물 소리를 몸에 두른 기이한 그림자 하나가 마인들의 뒤를 따르며 시커먼 비수를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