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 (Shin Yun-hee) RAW novel - chapter 22
서현이 자못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무자리가 고개를 조금 기우뚱하고는 그녀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리더니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반드시 명심해라. 내가 원하면 너는 언제고, 어디서고 가랑이를 벌려야 한다.”
일말의 여지도 없이 가차 없는 무자리의 말에 서현은 흠칫 몸을 떨었다.
“내가 네년한테 쑤셔 넣고 싶어지면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을 테니. 그리고 먼저 다리 벌리고 허리 흔들면서 조를 필요는 없지만, 목석처럼 뻣뻣하게 굳어서 흥을 깨는 것도 안 되지. 할 수 있겠느냐?”
무람함 없는 짐승처럼 뻔뻔할 정도로 적나라한 무자리의 말에 아무리 각오를 했어도 서현의 얼굴은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래도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 적지요.”
“하나 더. 절대 눈 감지 마라. 내가 네년 안으로 들어갈 때, 네년을 안았을 때 절대 눈을 감아서는 안 돼.”
“……알고 있습니다.”
“하면 되었다.”
서현은 증서를 작성했다. 그녀의 조건은 반년간 제 아우와 자신을 지켜 주는 것. 단 그뿐이었다. 단정하게 쓰인 서현의 이름 옆에 ‘윤(閏)’이란 무자리의 이름자가 힘찬 서체로 적힌 것은 금세였다.
그렇게 수결을 끝내고 나자 무자리가 손에 쥐고 있던 나무토막을 서현에게 내밀었다.
“내 집에서 지내자면 해야 한다. 그 민머리를 하고 있다가 행여 누구 눈에라도 띄면 금세 파다하게 소문이 날 터이니. 하나 그렇다 하여도 네가 내 처라고 하면 그럴싸한 눈속임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나무 비녀였다.
“백정이 옥이나 쇠붙이로 비녀를 하는 법은 없으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산사나무라 꽤 단단하니 제법 오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반년간은 말이지. 본래 백정의 계집은 바깥출입 시 쪽 찐 머리도 아니 되지만, 예서는 하고 있어라.”
“산…… 사나무요?”
“왜 옥비녀가 아니라 싫으냐?”
“아닙니다.”
빈정거리는 것이 역력한 무자리의 질문에 서현은 비녀를 손에 꼭 쥐고 도리질하는 것으로 답했다. 제 처지에 옥비녀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찾을 리 만무했다. 다만 그녀는 서글펐다.
산사나무라니……. 별당 담에 아버지가 손수 심어 주신 그 산사나무는 올해도 하얗고 소담한 꽃을 피우고 붉은 열매를 알알이 맺었을 것인가.
그 아름답던 시절은 모두 흘러가 버렸으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꿈결과도 같은 것임을 서현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화양연화(花樣年華)는 모두 끝났다.
서현은 몸을 옆으로 돌리고 길게 땋아 내린 제 댕기 머리를 말아 올렸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지만, 서툰 솜씨나마 쪽을 지었다. 그러고 막 나무 비녀를 꽂아 넣으려는데 무자리가 반닫이에서 이부자리를 내리며 무심히 말했다.
“두어라. 어차피 잠자리에 들어야 할 텐데.”
그 말에 서현의 손길이 멈추었다. 손에 비녀를 꼭 쥔 채 서현은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어 방바닥만 쳐다보았다.
어째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순간이 두렵고 또 두려웠다. 바로 곁에서 이부자리 펴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방문 문풍지에 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서는 가느다란 호롱불 빛을 따라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서현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그림자가 사라졌다. 삽시간에 사방이 어둠에 묻혔다. 무자리가 입으로 훅 불어서 호롱불을 꺼 버린 것이다.
“한방에서 자는 게 싫어도 이 집에 방은 이거 하나다. 그러니 내 집에서 지내는 동안은 그냥 예서 자. 내가 동할 때마다 네년 찾아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녀서야 되겠어?”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검은 어둠만이 시야에 가득했다.
지금 이게 무슨 의미일까? 오늘 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뜻인가?
그러자 안도의 마음이 들물처럼 밀려왔다. 다행이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서현은 그대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문 옆의 벽에 등을 기댄 채 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방은 검고 고요하여 저 멀리 숲의 잘새 소리와 바람 소리만 간혹 들릴 뿐이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올 리 없었다.
원우도 보고프고, 어머니 생각도 간절하고, 무엇보다 제가 오늘 무슨 짓을 한 건가, 이런 거래 따위를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여러 생각이 갈마들었다.
그러나 곤한 몸에 잠이 찾아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가을빛이 사그라지기 시작하면서 갈색으로 물들었던 산은 어느덧 황량한 검회색으로 덮여 갔다. 그러나 좁은 마당을 비추는 햇살만큼은 아직 따스했다. 나갈 채비를 하고 방에서 나온 무자리는 서현이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다가 뒷마당까지 갔다.
“콜록콜록.”
서현은 잔기침을 하며 장독대 옆 작은 화덕 위에 솥을 걸고 무언가를 삶고 있었다. 저벅저벅 걸어간 무자리는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넌, 대체 왜 그 짓을 하는 건데?”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안을 휘젓던 서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셔요?”
“쇠가죽 갖다 주러 간다. 그런데 넌 뭐 하러 그 짓을 또 하는 게냐.”
“하얀 옷이니 깨끗해지면 좋잖아요.”
“뭐? 니미, 반나절이면 도로 피칠갑을 해 올 텐데 뭐 하러 그 짓을 해?”
서현은 핏물이 밴 무자리의 옷을 잿물에 담근 후에 다시 삶고 있는 중이었다. 무자리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서현은 기어이 그렇게 했다.
“제가 솜씨가 없어 음식을 잘하지 못하니 빨래라도 열심히 하려고요.”
“필요 없다니까. 제길, 아주 네년이 집에서 노느라 시간이 남아도는구나.”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으며 무자리가 돌아섰다.
서현이 종일 얼마나 바쁘게 보내는지 실은 잘 알고 있었다. 더럽고 어지럽던 좁은 오두막이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집에 돌아올 때마다 매번 놀라지 않던가. 그리고 멀끔해진 제 입성들은 또 어떻고.
“일찍 오실 건가요?”
“갖바치 영감을 만날 테니 술 한잔하고 느지막이 올 게다.”
“알겠습니다.”
“저녁 지어 놔라. 밥은 와서 먹을 테니까.”
“아, 예…….”
서현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머뭇거리며 답했다.
“그때처럼 또 설익은 밥을 지었다가는 경을 칠 줄 알아!”
“예, 조심하겠습니다.”
“그게 조심한다고 될 일이냐? 된장국에 간장이나 들이붓지 말고! 진밥도 안 돼!”
무자리가 홱 돌아서며 투덜거리자 서현의 얼굴은 새빨개지고 말았다. 그러나 마당을 나서는 무자리의 얼굴에는 언뜻 유쾌한 웃음이 어렸다.
‘그래도 뭐 진밥은 먹을 만하지.’
그러나 멀어지는 무자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서현의 안색은 사뭇 어두웠다. 내내 그녀를 괴롭히는 걱정은 오직 하나, 그들이 한 거래의 이행이었다.
벌써 이레가 지났다. 하지만 서현과 무자리 사이에는 그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다.
“어째서 저 사람은 내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거지? 약조를 지키라 하지 않는 거지?”
뜨거운 피를 뒤집어쓰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 목을 베는 짐승 같은 사내였다. 죽겠다고 몸을 던지고 기절한 저를 추행하고, 억지로 제 아래에 불방망이 같은 남근을 밀어 넣었을 정도로, 세상천지 아무것도 없이 몸뚱어리뿐인 저의 가당치 않은 거래에도 응할 정도로 욕정에 눈먼 사내였다. 저를 조롱하며 음탕한 말을 뻔뻔하게 내뱉던 사내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 이레간, 정작 무자리는 제 손안에 고스란히 떨어진 포획물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런 자가 하아…… 왜 그러는 것이지?”
매일 잠자리에 누우면 오늘도 아무 일 없이 하루가 갔다는 생각에 안도하면서도 서늘한 불안감에 숨이 막혀서 쉬이 잠들 수 없는 밤이 이어졌다. 하여 관노로 쫓길 때보다 훨씬 몸은 편했으나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 설마 저니의 마음이 변한 것인가……. 안 돼, 안 돼…….”
사냥의 긴장과 흥분이 사라진 탓에 흥미가 떨어진 것인가. 들끓던 뜨거운 피가 식고 나니 이제야 제가 잡은 미련한 계집의 실체가 낱낱이 보인 것인가.
무자리는 어쩌면 이대로 거래 따위는 접을 생각인지도 모른다. 처음에야 계집이 먼저 몸을 들이대니 혹해서 그러마 했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고 신중히 생각해 본 결과 이 턱도 없는 거래를 지킬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콜록콜록…….”
문득 쏟아지는 밭은기침을 삼키며 서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이 거래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했다. 제깟 것이 뭐라고 저 사내가 약조를 지키려 위험을 무릅쓰겠는가. 하여 무자리가 제 염치없는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서현은 내내 불안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무자리가 사대부에 상당한 반감을 품고 있다는 건 알았다. 아니, 관노로 떨어져 살면서 대부분의 천민이 그러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평생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양반에게 억압받고 착취당하며 사는 백성들, 그중에서도 천민들은 그저 참고 견딜 뿐 사대부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그리고 한이 가슴속 깊이 침잠해 있었다. 차곡차곡 쌓여 태산을 이루고, 시퍼렇게 깊은 바다가 되었다.
더군다나 양반에게 해를 입힌 죄로 망나니가 된 그는 더욱 심할 것이다.
하여 처음에는 그 태생이 사대부가의 여식인 자신을 짓밟고 농락하는 것이 무자리에게는 꽤 솔깃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몸이 동하지는 않아도 사대부에 대한 분풀이쯤은 충분히 될 것이니.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찰나의 복수심은 이내 시들해졌을 것이다.
“그래, 오늘 당장 저자의 색주가에만 가도 감히 나 따위와 비할 수도 없이 어여쁘고, 농염한 꽃들이 지천이겠지.”
그러니 어디 저 같은 계집이 성에 차겠는가. 한낱 증서 따위야 찢어 버리면 그뿐. 서현의 불안감은 빨래를 하고 밥을 짓는 내내 떠날 줄 몰랐다. 그래서 이윽고 무자리가 물씬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왔을 때는 불안감에 안색이 창백할 정도였다.
“너 어디 아프냐?”
“아, 아닙니다.”
“나는 아픈 년 병 수발까지 할 생각은 없으니 행여 심해지면 당장 나가라. 아니면 내가 갖다 버릴 테니.”
“예, 콜록콜록…….”
기침 쏟는 서현을 보며 무자리가 인상을 찡그렸다. 서현은 당황하여 얼굴을 돌리고 기침을 참으려 애썼으나 쉬 가라앉지 않았다.
“아직 한겨울도 아닌데 웬 놈의 고뿔이야? 가서 밥이나 차려 와!”
허둥지둥 나가는 서현의 자그맣고 가녀린 뒤태를 바라보며 무자리는 사뭇 인상을 썼다.
보리에 감자를 넣고 찐 보리밥에 호박과 감자를 넣은 된장찌개, 시래기를 된장에 무친 나물이 올려진 조촐한 밥상을 받아 든 무자리는 몇 술을 뜨다가 이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침을 참느라 고개를 수그리고 작은 어깨를 들썩이는 서현 때문이었다.
“니미! 그렇게 기침이 나면 생강물이라도 먹든가!”
“죄송…… 콜록콜록…….”
긴장해서 더 크게 기침이 터진 서현이 어쩔 줄 몰라 하자 무자리가 벌떡 일어서서는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당황한 서현이 겨우 기침을 가라앉히며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도로 방으로 들어온 무자리가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맥문동이다. 씹어 먹어. 그놈의 기침 소리 한 번만 더 나면 이대로 쫓아낼 테니.”
“예, 감사합니다. 콜록.”
약재를 받아 든 서현이 그것을 그대로 입에 넣으려고 하자 무자리가 버럭 소리쳤다.
“미련한 것! 그걸 진짜로 날로 씹으면 어떡해! 달여서 마셔야지!”
“아, 예, 예…….”
서현은 제가 생각해도 제 실수가 어처구니없었다. 너무 생각에 골몰한 탓이라 하여도 무자리의 말마따나 미련하고 아둔하기 짝이 없다.
“어서 나가서 끓여 와!”
맥없이 나가는 서현의 뒷모습을 보면서 무자리는 화가 나서 혀를 찼다.
“왜 저렇게 멍하니 투미하게 구는 거야? 안 어울리게. 쯧!”
서현이 맥문동을 달여서 들고 올 때까지 저녁밥을 먹지 않은 채 인상을 쓰고 있던 무자리는 그녀에게 맥문동 끓인 차를 석 잔이나 마시게 하고는 그제야 저녁을 마저 먹었다.
저녁상을 물린 후, 서현이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오자 이미 이부자리를 펴서 그 위에 벌렁 누워 있던 무자리는 늘 그렇듯 쭈뼛거리며 문가에 선 서현에게 당장 누우라 윽박을 질렀다. 이윽고 서현이 지친 몸을 둥글게 말고 눕자, 호롱불을 후 불어서 단숨에 끄고는 짧게 말했다.
“된장찌개는 강된장으로 끓이는 게 더 낫다.”
“아, 일전에 일러 주셨는데 제가 또 잊었네요. 다음에는 콜록…….”
“뭐야, 너 정말 많이 안 좋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