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 (Shin Yun-hee) RAW novel - chapter 69
“옥체 미령하신 전하가 설마하니 오늘 밤에야 아니 나오시겠지.”
연못가에 이르자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저 취로정 처마 아래에 서서 작은 동심원을 무수히 그리는 연못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타닥타닥, 수초와 꽃잎에 부딪혀서 튀어 오르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어쩐지 마음이 갈앉는 느낌이었다.
손을 내밀자 손바닥으로 떨어지는 빗물이 아직은 차디찼다.
“이 비가 그치면 이제 한 계절이 완전히 끝나는구나. 아니, 아니…… 봄은 이미 오래전에 끝나 버린 것을 나는 어찌 몰랐을까.”
어느덧 스며든 한기에 몸이 떨리고 손끝이 곱아들었다. 그런데도 옴짝달싹하지 않은 채 서 있던 서현은 문득 제 뺨을 온통 적신 물기가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어리석고, 나는 무력하여, 나는 그리워할 자격도, 울 자격도 없으나…… 그러나 이 밤은 하늘도 내 마음처럼 울고 있구나…….”
어둠 너머 보이지 않는 저 먼 어느 산골을 아스라니 바라보며 그렇게 서현은 빗물을 핑계 삼아 눈물을 흘렸다. 빗소리에 제 울음소리를 감추며 비가 그칠 때까지 그렇게 목 놓아 울었다.
돌아가는 길, 어느덧 작은 물웅덩이에 달그림자가 어리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흙탕물에 치맛자락 젖을까 조심조심 걷느라 서현은 취로정 다리 건너 커다란 말채나무 밑 붉은색 우산 아래 임금이 서 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다 다리 중턱에 이르렀을 때 임금을 발견한 서현은 당황했다.
‘혹여 전하이신가? 어찌 이 우중에 또 나오셨을까.’
그러나 그녀가 다리를 거의 다 건넜을 무렵 그 자리에 임금은 없었다. 오직 어둠뿐이었다. 문득 스치는 향기로운 자취는 필시 밤에 피어난 어느 꽃의 아스라한 향일 것이다.
“내가 헛것을 보았구나.”
하여 서현은 제가 본 것이 밤안개 너머 허상인가 싶었다.
요 며칠간의 밤 산보가 그새 익숙하여진 것인가. 아니면 어둠 속을 거니는 임금의 모습이 눈에 익은 탓인가. 그 순간 서현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앙큼한 것. 익숙해지다니, 눈에 익다니!”
그런 생각을 품은 저 자신을 호되게 나무랐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한데 그리운 이는 어찌 꿈길에도 아니 오실까. 내가 그리 미우신가…….”
서현의 눈길은 검은 나무 그늘을 바라보고 있으나, 그녀의 마음은 어느덧 궁 밖으로 멀리, 저 깊은 산속 어딘가로 하염없이 내달렸다.
“그래. 당연하지. 이년이 얼마나 가증스러우실까. 아니, 이미 다 잊으셨나 보다. 수많은 밤 꿈길에도 아니 오시는 걸 보아 이년은 이미 다 잊으셨어. 참으로 다, 다행…… 흑…….”
쏴아아.
어느덧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 선 서현은 비 그을 생각도 못한 채 하염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빗물이, 어쩌면 눈물이 그녀를 흠뻑 적셨다.
밤새 내린 비는 날이 밝아도 그치지 않았다. 몇 날을 비가 내렸다. 굵은 빗줄기가 부옇게 하늘을 덮었다. 그리하여 밤 산보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밤과 낮을 구별하지 않고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서현은 그저 망연히 수를 놓았다.
“마마님은 뭐 하러 그런 걸 손수 하셔요? 괜히 실만 아깝고, 힘만 드시게요. 수방 나인들 솜씨가 얼마나 좋은데.”
내내 붙어서 종알거리는 아지의 듣그러운 소리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마님 있잖아요. 세상에 제가 오늘 아침에 우연히 의녀한테 듣자니 사실 주상 전하께서 이미 거의 쾌차하셨다네요!”
날씨만큼이나 우중충하던 아지의 눈빛과 목소리에 금세 생기가 가득 찼다.
“다만 열병 후유증으로 목소리만 잘 안 나오는 것뿐이시래요. 눈도 약해지시고. 그래서 밤에만 거동하실 뿐이지 전과 다름없으시답니다!”
얼마 전부터 임금의 성후가 좋아졌다는 말이 암암리에 궁 안에 떠돌았다. 낮이면 대전의 온 지창을 휘장으로 가리고, 밤이면 등도 거의 밝히지 않지만, 임금은 이미 쾌차하였다는 것이다. 하여 대비전에서 공공연하게 밤마다 나인들을 임금의 침전으로 밀어 넣고, 사온서(司醞署)에서 대전에 들어가는 술의 양이 부쩍 늘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니까 마마님, 이리 쓸데없이 수나 놓지 마시고 다른 후궁마마님들처럼 음기를 보하는 비방 같은 거라도 하시거나 그도 아니면, 대비마마 뫼시는 상궁마마님들께 드릴 패물을 좀 보내 달라고 형판 대감께 서신을 쓰셔요.”
아지는 노골적으로 투덜거리며 서현에게 채근했다.
“그것이 저나 마마님이 이 궁 안에서 그나마 편히 사는 길임을 왜 모르셔요. 제아무리 간택후궁이면 뭐 합니까? 승은 한 번 못 입으면 각심이나 무수리보다 나을 게 무에 있어요!”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명망 있는 사대부가에서 가려 뽑은 간택후궁이라 하여도 임금의 총애가 없다면 이 구중궁궐 안에서는 한낱 각심이보다 못한 처지다. 그러나 서현은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아지만 저리 애가 닳는 것이다.
“어찌, 제가 대전 상선 어르신이나 제조상궁께서 뭘 좋아하시나 알아볼까요? 예?”
자발없이 떠드는 아지의 말 따위는 듣자마자 흘려보내며 서현은 묵묵히 수를 놓았다.
“어머, 그런데 왜 용이 아니라 호랑이여요?”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납지만 상서로운 분위기의 호랑이 한 마리가 용맹하고 당당한 기세를 뿜어내며 비단 속에서 포효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리 무섭고 사나운 호랑이 수를 놓아서 어디에 쓰시려고요? 용종을 품으시려면 용을 놓으셔야죠, 용을! 어휴!”
서현은 차마 손을 내밀어 그 호랑이를 한 번 쓰다듬을 수도 없었다. 깊은 산속을 고고하고 유유하게 누비는 누군가와 닮은 그 산군을 그저 애달프게 바라볼 뿐이었다. 넋을 놓은 사람처럼 하염없이, 또 하염없이.
그리하여 참다못한 아지가 기어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마마님, 그러지 마시고 대감께 서신을 쓰시라니까요? 예? 아니면 낭청 나리께라도요!”
이윽고 비가 그친 밤, 서현은 다시 밤 산보를 나갔다. 그러나 취로정으로는 가지 않았다. 그 맞은편의 연못이 멀리 보이는 숲으로 갔다. 아직도 습기를 머금은 청신한 공기가 폐부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물기 젖은 검은 나무 사이를 걸으며 서현은 가까이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걸 깨달았다. 무성한 나뭇잎을 스칠 때마다 어깨 위로, 머리 위로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는 정말 여름이로구나.”
치맛자락을 스치는 풀줄기도 제법 키가 자랐다. 그러다 어느덧 앵두나무가 줄지어 자라는 곳에 이르게 된 서현은 물기 머금은 열매를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꽃이 핀 것도 못 보았는데 어느새 이리 충실하게 열매를 맺었구나. 이리 붉었구나. 하여 너는 참으로 장하고, 나는 참으로 못났구나.”
그리고 그 곁으로는 자그마한 복사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작고 풋내나는 그 열매를 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을 찌르는 듯한 느낌에 서현은 급히 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뒤가 희붐하게 밝았다. 임금이 내관들과 서 있었다.
결코 원한 적 없는 지독한 우연 앞에 서현은 허둥거렸다.
“저, 전하.”
얼른 허리를 숙이자, 임금이 저벅저벅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설마 제가 하는 말을 들었을까? 아스라하던 향기가 점점 짙어졌다. 술 향이다. 놀라서 숨을 삼키는데 임금이 앵두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달빛에 드러난 어수를 보면서 내관들의 표정이 사뭇 불편했으나 감히 입 밖에 내는 이는 없었다. 언뜻 달빛에 스치는 임금의 손등에 호를 그린 듯한 모양의 상처가 흐릿하게 있었다. 뚝뚝, 임금은 잘 익은 열매가 붉은 구슬처럼 올망졸망하게 매달린 가지를 꺾어서는 말없이 서현에게 내밀었다.
“숙원마마님은 어서 받으시지요.”
서현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자 내관이 가르치듯 말했다. 하여 서현은 두 손으로 공손히 앵두 나뭇가지를 받아 들었다.
“전하, 감읍하여이다.”
이내 몸을 돌린 임금은 걸음을 옮겼고, 어쩔 수 없이 서현은 또 그 뒤를 따랐다.
역시 아무런 말도 없는 조용한 산보였다. 그런데 연못가에 다다라 취로정으로 향하는 다리 중간에 이르렀을 때, 불현듯 임금이 내관에게 명하였다.
“달빛을 가리니 등불을 끄라.”
이제 밤을 밝히는 것은 오로지 은백색 달빛뿐이었다.
임금은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연꽃을 퍽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꽃 향에 취한다 하여 취향교(醉香橋)라 하였으나 서현은 임금의 등을 바라보며 어쩐지 지금 임금이 취해 있는 것은 꽃 향도 아니요, 이미 마신 술도 아니요, 달빛도 아니며, 그저 이 밤의 고요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자신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고요한 밤의 서글픔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그림자와 몸처럼 당신과 제가 어느 때고 함께하다 함께 사라지기를 소녀도 꿈꿨습니다.’
하여 한 번도 그 사람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연못에 비친 제 그림자에게 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빛이 있어도 그림자가 없고, 물에 그림자가 비쳐도 물가에 선 이는 가고 없으니, 저는 다만 당신을 그리워하고 또한 그리워할 뿐인 것을요…….’
그때, 잔잔하게 물결 일렁이는 소리 사이로 불현듯 임금의 어성이 들려왔다. 여전히 낮고 흐릿하여 갑갑한 소성이었다. 그러나 임금이 낭송하는 시구는 뚜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연못가에 외로이 앉아 있노라니 연못 속의 중을 우연히 만났네. 말없이 서로 마주 보며 미소 지으니, 어차피 대답 없음을 알고 있노라[혜심(慧諶), 물에 비친 나를 보네(對影)].”
느닷없는 일이라 처음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참으로 아름다운 시였다. 아마 예전의 어느 고승이 지은 시일 것이다. 그러자 자연스레 떠올라 가슴을 스치는 옛 기억.
임금의 어성에 누군가의 음성이 자연스레 겹쳐지고,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 연못 위로 드넓은 바다가 출렁였다.
‘아, 아, 나는, 나는…….’
서현은 목 안이 뜨거웠다. 눈시울이 아렸다. 먹먹한 슬픔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여 고개만 수그렸다.
그때 내관이 낮게 헛기침을 하며 속삭였다. 정중하나 사뭇 나무라는 어투였다.
“주상 전하께 화답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당황한 서현이 머뭇거리자, 임금이 힘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시를 좋아하느냐?”
몇 보 곁에 떨어져 있다지만 간신히 들릴락 말락 한 소리였다.
“그것이…… 예, 저, 전하.”
“그럼 한 수 읊조려 보거라. 달이 참으로 좋으니.”
그 말에 더욱 크게 가슴이 요동쳤다. 일그러진 제 얼굴을 들킬세라 서현은 더욱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하여 떨리는 음성으로 마치 한숨을 내쉬듯 시 한 수를 읊었다.
“물을 건너고 또 물을 건너, 꽃을 보고 또 꽃을 보며 봄바람 불어오는 강 위로 가노라니 어느새 그대의 집에 당도하였구나[고청구(高靑邱), 멀리 있는 그대를 찾아서(尋胡隱君)].”
서현은 시구의 마지막을 읊조렸을 때야 제가 읊은 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이 제 깊은 마음속에서 저도 모르게 우러나온 진심인 것을 어쩌랴. 하여 후회는 없었다.
어둠 너머로 임금이 잠시 서현을 응시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등을 돌려서는 걸어가 버렸다. 뒤를 따르는 내관의 표정이 사뭇 좋지 못한 것을 보며 서현은 임금의 어심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나 입술을 깨물며 그녀가 생각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였고, 바라는 것 또한 오직 하나였다.
‘이 미련한 년은 가지도 못하고, 찾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오늘 밤 꿈길에는 꼭 오셔요, 서방님.’
그리고 다음 날부터 서현은 더는 밤 산보를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밤의 고요와 쓸쓸함, 그 적막함을 원하였으나 이미 깨어져 버린 것을 어찌할 것인가.
::: 十九 :::
임금이 몇 달째 와병 중인 터라 대비가 수렴청정인 고로 한동안 열리지 못하다가, 얼마 전부터 드문드문 열리게 된 상참(常參)의 자리. 그나마 이번에는 닷새 만이었다. 창마다 휘장을 겹겹이 둘러서 들어오는 햇살을 한층 막아 낸 탓으로 오전임에도 편전 안은 희붐하게 밝아 있었다. 임금의 눈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다.
강무 때 다친 후유증에 아직도 시난고난 시달린다는 금상은 그저 힘없이 어좌에 기대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간혹 약한 빛이 닿을라치면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힘없이 늘어진 어깨와 구부정한 등허리는 문약하여도 젊고 활기 있던 임금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하여 몸을 휘감은 붉은 곤룡포와 머리에 쓴 익선관이 버거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 임금의 뒤로 발을 치고 앉아 있는 대비가 상참의 실제 주관자임을 편전에 늘어선 신료 중 모르는 이는 없었다.
“내 들어 보니 유시준의 구사(丘史)가 모두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일천하다 하니 혹 아랫것들이 거짓으로 하는 말을 듣고 이러는 것이 아닌가 싶소.”
사간원 정언인 유시준은 퇴청하는 길에 수표교 인근의 좁은 길에서 이조판서인 장제원의 첩실이 탄 가마 행렬과 맞닥뜨렸고, 유시준의 구사들과 그 첩의 종들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에 벌어졌다.
그 말을 들은 장제원이 제집 종들을 시켜 유시준의 구사를 잡아 오라 명한 것이다. 그러고는 그중 하나를 죽였는데, 그 와중에 장제원의 종도 죽었다.
자신의 노비라 하여도 주인이 사사로이 죽일 수 없는 것이 국법이었다. 하물며 구사는 나라에 소속된 공노비였다. 종친이나 공신, 고관대작은 그 신분과 관직에 따라서 내려 주는 구사의 수를 정했으며, 혹은 관청에 속하기도 했다. 그중 유시준의 구사는 사간원에 속한 자였다.
“마마, 이판의 노복들이 어찌 감히 구사에게 시비를 걸었겠습니까? 듣자니 죽은 구사가 술에 취해 이판의 사저를 찾아갔다 하옵니다.”
유시준은 자신이 부리던 구사를 장제원의 종들이 집까지 찾아와 끌어내서 때려죽였다고 했고, 장제원은 그 죽은 구사가 술에 취해 찾아와서는 제집 종과 시비를 벌이다 서로 칼에 찔려 죽었다고 주장했다.
영의정 강익재가 먼저 나서 장제원의 편에 서서 말하자 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