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82
제 182 화
겨울임을 증명하듯 빨리 져 버린 해 덕에 밤 그늘이 방을 뒤덮고 있었다.
유림은 부서진 문을 넘어 들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지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탈했다. 그와 동시에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무너진 테이블과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 알 수 없는 서류와 책들……. 히야스가 그간 얼마나 맘고생을 했는지 증명하듯 방 안은 말이 아니었다.
‘…….’
유림은 씁쓸함을 삼키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혀 어둑한 천장을 바라봤다.
순간 어떤 물체와 두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
섬뜩한 광경에 저도 모르게 비명이 새 나왔다. 그러나 그보다 천장에 있던 것이 떨어지는 게 더 빨랐다.
쾅-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물체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제야 유림은 제 앞에 떨어진 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아, 안젤리카 7호?”
그가 일어나 앉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어라, 유림님 아닙니까. 하하하하-」
“천장에서…… 아니, 여기서 뭐해요?”
「야~ 진짜 간만이네요.」
“말 돌리지 말고. 여기서 뭐하냐니까요.”
그 질문에 안젤리카 7호가 멋쩍은 듯 뺨을 긁적였다. 쇠가 긁히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울렸다.
「어…… 음, 그게 아버지가 뭘 좀 가져오라 하셔서…….」
“교수님이?”
「네. 그렇습니다…… 뭐…….」
“…….”
유림은 의심스럽게 쳐다보다 이내 됐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안젤리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보였다.
처음엔 뭐 이런 게 있나 싶었는데, 지금은 탄생 비화를 알아서 그런지 조금 측은하게 느껴졌다.
“안젤리카 7호 씨, 대체 무슨 일에 있었기에 여기가 이렇게 개판인 거죠?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히야스 교수님은 어디 계세요?”
「모, 모르는데요……?」
“거짓말하지 말고. 어디 계시는지 알잖아요. 싸게 불어요.”
「저, 정말 몰라요.」
모를 리가. 애당초 심부름으로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말도 안 되는 뻥이었다.
유림은 좀 더 추궁하려다 식은땀까지 흘릴 것 같은 그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히야스 교수님이 입막음을 해놓은 모양이었다.
“후- 알았어요. 대신 다른 거나 답해주세요.”
「뭘요?」
“대부분의 안젤리카 씨들은 히야스 교수님하고 연결되어 있죠?”
「네? 그건 또 무슨…….」
“왜, 입학시험 때, 히야스 교수님이 안젤리카 씨들 몸 빌려서 말했잖아요.”
입학시험 2차, 4차시에 히야스는 안젤리카들의 몸으로 시험도 진행하고 유림에게 이상한 즙까지 꺼내 먹였다. 어떤 원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가능할 것이다.
「그, 그렇죠. 뭐…….」
“그럼 제가 하는 말이 히야스 교수님께도 들릴 수 있는 건가요?”
안젤리카 7호가 뻣뻣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 말 좀 전해줄래요? 실시간이 안 되면 그냥 나중에 직접 전해주세요.”
유림은 안젤리카 7호가 거절하기도 전에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용기 내 오긴 했는데 막상 말로 하려니 조금 울컥하고 떨렸다.
“음……. 그러니까 이렇게 전해주세요. 제 아버지가 한하림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제가 아버지인 건 아니고, 또 전 아버지의 이상에 반한다고요. 그리고 교수님이 어떤 절망을 느꼈는지 그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으니까…… 교수님이 걱정하시는 그런 슬픈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전해주세요.”
「……그렇게만 전하면 됩니까?」
“하하, 제대로 말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음…… 아, 맞다. 저한테 스승은 교수님 한 분밖에 없으니 걱정되는 게 있으면 그냥 와서 직접 가르쳐 주시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진급시험 열심히 보고 올 테니까, 음…… 시험 보고 오면 잘했다고 칭찬해 달라고도 해주세요.”
어색한 웃음이 번졌다. 그러나 그와 달리 표정은 울기 직전이었다. 실로 목소리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유림은 다시 말할까 하다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더 했다간 괜히 울 것 같았다.
얼굴을 못 본 건 아쉽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하자.
“그럼 이만 가볼게요.”
유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펴자, 안젤리카 7호도 따라 일어섰다.
「들어가세요.」
“아, 안젤리카 7호 씨. 연구실 정리 좀 해주세요. 사실 제가 하고 싶은데…… 음, 지금은 좀 이른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말해주세요. 교수님 잘 챙겨주시고요. 알았죠?”
“…….”
유림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때 안젤리카 7호가 다가 와 팔을 잡았다.
「유림님…….」
“네?”
그는 주저하듯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제자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먼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에 유림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저야말로 제 스승이 되어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교수님 꼭 제대로 챙겨주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유림은 안젤리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곤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안젤리카 7호는 한참이나 유림이 나간 문을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난장판이 된 방의 물건들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뭘 가지러 왔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저 연구실의 문을 부순 게 걱정되니, 다시 고쳐 놓고 오라 하셨다. 그리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잠가두라고 하셨다.
근데 설마 그사이 유림을 만나게 될 줄이야.
그는 물건들을 한쪽에 모아두더니 이내 부서진 문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히 주저앉았다.
「……제가 주제넘었나요?」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흡사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냐…….」
축 처진 히야스의 목소리에 안젤리카 7호가 눈을 감았다.
유림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가 오기 전부터 히야스는 안젤리카 7호를 통해 주변을 보고 있었다. 당연히 그녀의 얼굴도 보고, 한 말도 직접 들은 것이다.
「…….」
안젤리카 7호는 마치 입술을 달싹이듯 입을 움직였다.
분명 히야스도 느꼈을 것이다. 유림이 많이 야위었고 그녀의 목소리가 많이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아버지도 힘내셔야죠. 어떻게 보면 이 일의 가장 피해자인 유림님도 저렇게 힘내고 있지 않습니까.」
「알아…….」
「아버지께서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나도 알고 있다고…….」
머리론 알고 있다. 하지만 생각한 대로 다 행동할 수 있다면 그게 어디 사람이겠는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비죽비죽 올라왔다. 아니, 그걸 떠나 유림을 보면 자꾸 하림이 생각나 분노가 치밀었다.
「감사한 일이죠. 아슈팔님도 그렇고 유림님도 그렇고, 그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하니까요.」
「난 그럴 자격 없어…….」
「아이가 있어야만 부모가 될 수 있듯 스승도 제자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죠. 그것만으로도 아버진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훌륭한 스승입니다.」
「…….」
히야스의 침묵에 안젤리카 7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그리 자신이 없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훌륭한 제자가 둘씩이나 있는데 말이다. 아니, 샨까지 포함하면 셋인가.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다시 문을 고치기 시작했다.
***
유림이 방으로 돌아왔을 땐, 데몽을 비롯한 모두가 그녀의 방에 모여 있었다. 예상치 못한 방문에 유림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뭐야…… 이 거지 떼들은?”
“어허! 거지 떼라니!! 이렇게 뇌물도 들고 왔는데!”
란 말과 함께 테오가 과자를 들어 보였다.
아주 잠깐의 침묵 후, 유림이 과자를 받아 살포시 자리에 앉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허기가 일었는데 마침 잘됐단 생각을 하며 말이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테오가 웃기다는 듯 킬킬거렸다.
“하여튼 공짜 참 좋아해.”
“시꺼.”
유림이 짤막한 욕설과 함께 과자를 뜯어 중앙에 내려놓자, 륜과 루아가 나머지 과자를 꺼내 펼쳤다.
인제 보니 다들 여기 눌러앉으려던 모양이다.
“근데 다들 왜 왔어?”
과자를 우걱거리며 묻자 데몽이 대답 대신 종이 뭉치를 건네주었다.
몇 장을 묶어 고정한 종이의 모습에 유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찬찬히 내용을 확인했다. 가장 첫머리에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글이 쓰여 있었다.
유림은 저도 모르게 그걸 따라 읽었다.
“진급시험 신청서?”
아니, 웬 진급시험 신청서? 여태까지 작성해서 낸 종이가 몇 장인데…….
“이거 제출했잖아.”
“그게 진짜래.”
“진짜? 그럼 먼저 써서 냈던 건 뭐고?”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질문에 데몽이 태연하게 안경을 닦으며 답했다.
“그건 신체 포기용 각서.”
“…….”
“정확하겐 죽어도 책임 안 진다, 뭐 이런 거?”
“…….”
입맛이 뚝 떨어졌다.
유림은 손에 들린 과자를 내려놨다. 그러곤 안내서를 찬찬히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런 돼지 똥 싸는 내용이 들어 있나 해서 말이다.
이놈의 학교는 신체 포기 각서가 무슨 공식 문서인가. 도박장 동아리도 그렇고, 학교도 그렇고 그 살벌한 걸 왜 이렇게 자주 사용하는 거야.
유림이 눈에 불을 켜며 종이를 읽자, 생각을 읽은 듯 테오가 츳츳 혀를 찼다.
“야, 그건 그냥 신청서야. 우리도 몇 번이나 읽어봤어.”
“……미치겠네. 앞의 것들도 이런 내용 아니었어?”
“몰라. 하도 장수가 많아서 다들 대충 읽고 사인했잖아.”
그래. 너무 많아서 앞의 몇 줄 읽고 그냥 사인하고 제출했었다. 상식적으로 비슷한 내용의 종이를 몇 번씩이나 뭉치로 나눠주는데 그걸 다 읽고 사인할 이가 어디 있냔 말이다.
“허…… 내가 진짜 하다하다 별걸 다 겪는다. 아주 학교가 좋은 거 가르쳐 주네, 젠장. 여튼 여기다 서명해서 내면 되는 거야?”
모두의 끄덕임에 유림이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명했다.
연금만 아니면 이 짓도 안 하는 건데. 연금 하나 타기가 뭐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자, 여기.”
유림이 신청서를 건네자 이를 받은 데몽이 일행의 것을 확인하듯 장수를 세어보더니 잃어버리지 않게 가방에 넣었다.
“그럼 이건 내가 나가는 김에 제출할게. 그보다 새로운 소식이다. 아니, 뭐 새로울 것도 없지만.”
데몽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진급시험의 조가 배정되었다고 한다.”
데몽의 말에 모두의 입에서 ‘오~’ 하는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다만 유림만이 멍청하게 두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뭐가 배정되었다고? 조?
유림이 다급히 팔을 뻗어 일행의 시선을 모았다.
“잠깐. 우리 진급시험 조별이었어?”
일행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심지어 그 착한 하민과 그 단순한 은하도 표정이 변할 정도였다.
레이먼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
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