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89
제 189 화
한참 미로를 걷던 디하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눈앞에 있는 거대한 문과 손잡이에 걸려 있는 두꺼운 자물쇠. 그제야 미로를 탈출했음을 깨달은 그가 몸을 돌렸다.
그냥 직선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미로의 출구와 이어졌던 모양이다.
“……이런.”
어쩐지 조금 낭패감이 들었다.
출구를 찾은 것은 기뻤지만, 작은 생명을 만나지 않은 채 도착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미로에 들어선 시간 기준으로 한 시간이 조금 안 지난 상태였다.
벽 너머로 중간중간 작은 비명이 들려오는 것을 보면 다른 친구들은 아직 미로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
디하르는 턱을 쓸며 고민하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덧붙여 출구서부터 벽마다 흔적을 남겨 다른 아이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이정표도 만들고 말이다.
“운 좋게 열쇠까지 얻으면 딱인데…….”
작은 생명이 유림이나 은하로만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미로 안으로 되돌아갔다. 아니, 들어가려 했다. 따끔한 충격과 함께 어떤 것이 제 앞을 막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예상치 못한 방해에 놀란 디하르가 몸을 뒤로 뺀 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끝에 벽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파직하고 전기가 튀는 게 보였다.
“……결계?”
설마 미로를 나온 사람은 다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거였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더니 이내 단정한 이마를 구기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한시가 급한 시험에서 졸지에 필요 없는 전력이 되고 말았다.
그는 키르를 꺼내 유림에게 바로 통신을 했다.
「네-」
“유림. 나야.”
「디하르, 왜? 혹시 뭔 일 있어?」
“출구에 도착했어.”
그 말에 유림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진짜? 대박. 열쇠는?」
“아직 못 찾았어. 그보다 문제가 하나 생겼어. 출구에 결계가 쳐 있어서 아무래도 미로를 탈출한 사람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아.”
「진짜?! 젠장. 이거 다른 애들도 알아?」
“네가 처음이야.”
「그럼 테오랑 륜한텐 내가 연락할 테니까 나머지한텐 네가 통신해 줘, 혹시 누가 열쇠 찾았다고 하면 연락해 주고.」
디하르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통신을 마침과 동시에 키르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유림이 이를 갈았다.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다니. 결국, 열쇠 없인 미로를 빠져나가서도 안 된다는 소리가 아니던가.
정말이지 사람 귀찮게 하는 학교라니까.
그보다 작은 생명들을 어디서 찾지?
제 턱을 날렸음에도 크게 아프지 않은 걸 보면, 작은 생명의 공격은 그리 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만나기만 하면 이쪽에 승산이 있었다.
‘녀석들이 성가신 상대로만 변하지 않는다면…….’
근데 정말, 왜 히야스 교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난 거지? 테오의 말대로 껄끄러운 상대가 나오는 걸까?
솔직히 말해 지금의 히야스는 유림에게 참으로 껄끄러운 상대이긴 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했으니까. 그래서 미로에 들어와서도 내내 집중 못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렇다 치면 조건이 좀 이상하지 않나?
작은 생명이 변하는 건 열쇠를 지키기 위한 자기 보호의 목적 아니야? 그렇다면 무서운 사람이나 소중한 사람으로 변하는 게 더 유리하잖아.
그래. 아무리 봐도 껄끄러운 인물은 애매해. 사람에 따라 오히려 더 공격하기 쉬울 수도 있는걸.
그럼 다른 조건이 있단 건데…… 왜 히야스 교수님이 나온 거지?
‘어라? 잠깐만…….’
유림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섰다.
문뜩 어떤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자신들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혹시…… 그냥 단순하게 떠올리고 있던 사람이 나오는 거 아니야?’
이곳이 히야스의 미로와 비슷한 탓에 내리 히야스를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로 변한 거 아닐까?
그렇다면 테오와 륜은?
짧게 고민하던 유림은 그냥 묻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키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테오에게 통신을 했다.
「누구야?」
“나. 야, 테오. 너 아까 미로에서 루아 생각했어?”
「…….」
짙은 침묵이 통신구 너머로 전해졌다.
유림은 긍정보다 더한 침묵에 계속 말을 이었다.
“혹시 그거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거나, 그와 연관된 사람으로 나오는 거 아냐?”
통신구 너머로 그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 히야스 교수님 생각했거든.”
「……그럴 수도 있겠다. 근데 그럼 여사님은 왜 나와.」
“륜이 어머니를 생각한 게 아닐까?”
「시험 도중에 갑자기?」
아, 그런가…….
“하지만 어쩐지 이쪽이 껄끄러운 상대보다 좀 더 말이 되는 거 같은데…….”
유림은 개운하지 않은 추측에 골머리를 앓았다. 테오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유림이 다시 걸음을 옮길 즈음에야 말을 꺼냈다.
「야, 혹시 그냥 생각하고 있는 거에 가장 관련된 사람이 나오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그니까, 륜이 자기 집이나 아니면 어머니랑 관련된 일을 생각하고 있어서 여사님이 나온 게 아니냐고.」
“그럴수도 있겠다…….”
「정 뭣하면 직접 시험해 보든지. 아니면 륜한테 통신해 봐. 그게 더 빠르겠다.」
그래. 멍청하게 테오랑 떠들 게 아니라 륜한테 연락을 해봐야겠다.
유림은 알겠다며 통신을 끊었다. 그리고 륜의 통신 번호를 입력했다.
그 순간 자욱한 안개가 다시금 유림을 덮었다. 아까 작은 생명이 나타났을 때처럼 말이다.
에?! 아직 연락 못 했는데?!
통신구를 들고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유림은 머리를 빠르게 굴려 그냥 제 추측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가급적 장소나 상황, 혹은 물건을 떠올렸다.
뭐가 있지, 뭐가 있더라?
으아 모르겠다! 이럴 때 좀 차분하고 진중한 사람이 나와서 도와줬으면 좋겠다.
유림은 키르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이를 갈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점점 가까워지는 인영. 곧이어 안개 속에 숨겨져 있던 작은 생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게 누구로 변했는지 확인한 순간 얼이 빠지고 말았다.
“다단 교수님……?”
그가, 아니 그의 모습을 한 작은 생명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찰나에 가까운 짧은 시간, 유림은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했다. 하나는 자신의 추측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또 하나는 왜 하필 나와도 공격 못 하겠는 다단 교수님이 나오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달려든 작은 생명에게 또다시 얻어맞은 유림은 고대로 다시 입구로 이동되었다.
사람이 같은 일을 반복하면 내공이 생긴다고 했던가.
좀 더 비장한 얼굴로 미로에 진입한 유림이 목도리를 고쳐 묶었다.
이걸로 벌써 네 번째 진입이었다.
어째서 네 번째인지는 묻지 말자, 창피하니까. 참고로 덧붙이자면, 세 번째로 나타났던 작은 생명은 하민의 모습이었다. 절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 못 때렸던 것이 아니다.
“……혼자 뭐하고 있냐.”
속으로 하는 변명이 민망했는지 유림이 뒷목을 벅벅 긁었다.
어쨌든 이로 인해 유림은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제한 시간인 두 시간까지 약 35분 정도가 남았다. 이제 더는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출구를 찾아 나간 이는 디하르가 전부였고, 열쇠를 찾은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이대로 가면 실격할지도 몰라……. 젠장. 분명 첫 번째 진급시험은 개나 소나 다 통과한다지 않았어? 대체 누가 이딴 헛소리를 한 거야.
유림은 억울함에 이를 빠드득 갈며 걸음을 서둘렀다.
최대한 빨리 올라가야 하는데. 심지어 아직 2층이었다. 위에 두 층이 더 있는 것이다.
조급함에 결국 유림이 미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길에 또 륜이 표시를 해둔 것이 있기에 미로의 중앙까지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참 달리던 유림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키르의 진동에 속도를 늦췄다.
“네-”
「큰일 났어!!」
받기 무섭게 루아 특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유림은 키르에서 머리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얘는 대귀족이면서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왜?”
「나랑 테오도 미로에서 탈출했어.」
“정말? 열쇠는?!”
「못 얻었으니까 큰일인 거지!!」
으아- 진짜 도움 안 되네!
출구인 걸 알면서도 버젓이 나가는 건 뭔 심보냐고!!
유림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꾸역꾸역 삼켰다. 물론 타박은 그대로 토해냈다.
“머리는 장식이냐!”
「미안- 정신을 차리니 이미 미로 밖이었어! 디하르도 하민이랑 통신하느라 우릴 못 봤고.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하냐, 나머지가 빡세게 찾아야지!”
통신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던 유림은 거기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통신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속도를 높였다.
30분도 채 안 남았는데, 열쇠를 찾아서 미로를 탈출하는 게 가능할까.
시간의 제약이 주는 조급함에 괜히 마음마저 불안에 잠겼다.
지금 미로에 남아 있는 건 륜과 하민, 그리고 유림 세 사람뿐이었다. 그나마 둘이 믿을 만한 인물이란 것에 위안을 얻었지만, 그렇다고 조급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좋아. 작은 생명이 뭐로 변하든 그냥 다 날려 버리자. 변신한 얼굴 보지 말고 날려 버리자, 이사장님이든 히야스 교수님이든. 설령 아버지가 나온다 해도 때리자. 그래도 이왕이면 때리기 편한 애가 나와라!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공격할 수 있는!!
언제라도 변형시킬 수 있게 나뭇조각을 손에 꽉 쥐며 유림이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그때 눈앞에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제는 익숙해진 작은 생명의 등장이었다.
유림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결의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안개 속에 숨어 있던 작은 생명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진심으로 쾌재를 부르고 말았다.
“박은하수!”
유림의 절친, 하나뿐인 주치의,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
“림-!!”
자신을 부르는 우렁찬 목소리에 유림의 입가가 진한 곡선을 그렸다.
“은하다. 후후후…….”
부드러운 미소는 어느새 음흉한 웃음으로 변해 버렸다.
나뭇조각을 변형할 필요도 없었다.
유림은 천천히 손가락을 풀며 작은 생명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 행동에 은하의 얼굴을 한 작은 생명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녀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유림이 점점 다가올수록 살기가 짙어지는 것 같았다.
“은하야,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해. 정말정말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데 얼굴은 살벌 그 자체였다.
“그래서 이런 게 네 모습을 하고 있는 게 너무 싫어. 절대 네가 만만해서 거리낌 없이 때릴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반짝이는 두 눈동자. 곧이어 유림이 그 어느 때보다 해맑게 웃어 보였다.
“이해해. 알겠지?”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건 뻑- 하는 경쾌한 꿀밤(?) 소리와 은하의 끔찍한 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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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