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6
제 6 화
은하가 노란색의 문인 유혹의 방을 멋지게 통과했을 때, 유림은 11번 문제를 풀고 있었다.
현재 남은 인원은 36명. 35명 이하만 나갈 수 있다 했으니, 전원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한 이번 문제에서 판이 끝날 것이다.
유림은 마른침을 삼키며 무자비하게 난도질 된 중앙선 위에 서 있었다. 안젤리카 8호가 워낙 초를 빨리 세다 보니 최대한 서둘러 움직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실로 중앙선은 어디로든 가장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위치였고, 이 때문에 유림은 칼이 공중에 떠오를 때마다 중앙선 위에 올라가 문제를 듣고 움직였다.
난이도는 들쑥날쑥했는데, 개중 유림이 아는 문제도 있었고, 찍어서 맞은 경우도 몇 되었다.
어찌 됐든 한 문제만 남은 상황이었다. 이것만 넘기면 3차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것이다.
[오오! 잘하면 이번 판에서 승부가 나겠군. 그렇지, 제군들? 좋아! 이번엔 내가 승부가 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내줄게!]쉬운 걸로 해, 이 거지야. 너 때문에 뛰어다닌 내 다리가 불쌍하지 않냐!!
유림은 이를 빠득빠득 갈며 안젤리카 8호를 노려봤다. 그때 녀석이 입을 열었다.
[제12번, 클레이즈는 덴 이레프에 있다!]그 질문에 일순,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짙은 침묵이 주위에 내려앉았고, 잠시 후 대다수의 아이들이 O로 이동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유림은 쉽사리 이동하지 못한 채 그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클레이즈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으나 입구가 덴 이레프에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건 이미 덴 이레프에서 공표한 적이 있었고, 클레이즈에서도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으니까.
그랬기에 답은 O에 가까웠다. 그러나 유림은 왠지 모르게 X로 이동했다. 물론, 정확한 답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문제가 제법 난제여서 그런지 안젤리카 8호가 흥미롭다는 듯 천천히 시간을 셌다.
[오~ 사아~~~]열아홉 명 정도의 아이가 O를 향했고, 유림 혼자만 X에 있는 상황. 나머지 아이들은 중앙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삼~ 이~~~]카운트가 세어지고, 그제야 자신이 X에 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유림이 혀를 찼다. 그녀는 무언가 놓친 듯 아차 한 표정으로 안젤리카 8호를 바라봤다.
클레이즈는 덴 이레프에 속해 있으나 덴 이레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클레이즈에선 학교의 위치에 대해 특별히 뭐라 말한 게 없었으니까. 더욱이 클레이즈 시험 감
독관이 원할 만한 답이라면…… ‘△’다. ‘O’도 ‘X’도 아닌 가운데 선 위가 정답인 것이다.
유림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 움직임보다,
[일, 땡!!]…이라는 안젤리카의 말이 더 빨랐다.
[정답은 △!]늦었다!
머릿속에서 짧은 비명이 울렸다.
경쾌한 안젤리카 8호의 목소리.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선을 제외한 모든 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우우우!
‘제길!’
땅이 꺼지는 아찔한 느낌. 그 느낌에 유림이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유림의 손을 재빨리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선 위로 잡아당겼다. 단번에 잡아끌 만큼 엄청난 힘이었다.
발밑에 땅이 닿고, 조심스럽게 눈을 뜬 유림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잡아끈 이를 바라봤다.
큰 키와 다부진 체격, 은은한 고동색 머리카락과 입가에 비친 옅은 미소. 그리고 자신을 잡아 끌은 이가 노란색과 주홍색의 오드아이를 하고 있는 청년이란 걸 알았을 때,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디하르……?”
디하르.
유림이 8년간 잊고 살았던 소꿉친구였다.
유림의 인생은 크게 두 덩이로 나뉜다.
사혈에 거주하기 전과 거주한 후, 쉽게 말하면 ‘박은하수’를 만나기 전과 후로 말이다. 그리고 이 디하르란 친구는 유림이 사혈에 살기 전, 즉 은하를 만나기 전에 함께 지냈던 소꿉친구 중 하나였다.
어릴 때보다 한층 더 성숙해지고 매력적으로 자란 자신의 친구. 체격은 말할 것도 없으며, 예전보다 더 그윽해져 한편으론 수려해 보이기까지 하는 오드아이와 왼쪽 눈 밑에 자리한 섹시한 눈물점에 유림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가 유림을 향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너였어. 오래간만이네.”
“아…….”
시원시원하게 생긴 얼굴에서 나오는 은은한 중저음은 꽤나 일품이었다. 그러나 썩 익숙하진 않았다. 유림과 디하르가 헤어진 건 그가 변성기를 겪기 이전이었으니 말이다.
1m의 폭을 가진 가운데의 선, 그리고 무너진 양옆의 바닥. 그 위에서 유림은 디하르와 마주 선 채 밀착되다시피 서 있었다.
고개를 높이 쳐들어야만 마주할 수 있는 시선. 바뀐 건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유림은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진짜 말 그대로 오래간만에 본 친구에게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치사한 놈…….”
젠장, 치사하게 지 혼자 크냐.
[자! 드디어 2차 시험의 합격자가 확정됐네!!]안젤리카 8호가 기쁜 듯이 떠들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등 뒤의 태엽이 달칵거리는 소리를 내며 멈췄다. 그리고 땅이 가볍게 흔들리더니, 거대한 울림과 함께 꺼졌던 바닥이 다시 형성됐다. OX 표시만 없을 뿐 조금 전 그들이 시험을 치렀던 바닥과 같은 백색이었다.
유림과 디하르는 선에서 나와 평평한 바닥 위에 올라섰다. 그런 뒤, 이 방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안젤리카 8호를 바라봤다.
[끅끅끅, 출구는 저쪽이야.]안젤리카의 익살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뒤쪽에 빛의 문이 형성됐다. 입구가 있던 방향과 같은 위치였다.
살아남은 열일곱 명의 아이는 문을 바라봤다.
2차 시험의 어이없음과 어처구니없는 난이도를 보면 분명 3차 시험도 쉽게 통과하긴 힘들 것이다, 거기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어마어마할 테고.
은하는 잘 통과했으려나? 은하가 어떤 시험을 치르는진 알 수 없지만, 자신과 같은 복불복 형식의 시험이었으면 분명 통과했을 것이다. 녀석의 운은 정말 하늘이 준 것이니까.
[저쪽으로 나가면 3차 시험을 보게 될 거야. 그럼 남은 시험도 잘 보라고, 미래의 신입생 여러분.]밝고 경쾌한 인사.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안젤리카 8호의 배에 있는 램프의 불빛이 사그라졌다.
치익.
피요용.
기계의 스위치 꺼지는 소리가 공허한 방을 울렸다.
추욱 늘어진 안젤리카 8호의 모습을 보며 살아남은 아이들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유림과 디하르만큼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모든 아이들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고 흑색의 공간엔 유림과 디하르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유림은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몸을 돌려 디하르를 바라봤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 그것도 꽤 친했던 둘이었기에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아무 일 없다 치기엔 떨어져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고, 그러자고 지난 세월을 느낄 만큼 거리감 있는 말은 어색해질 것이 뻔했기에 하고 싶지 않았다.
유림이 멋쩍음에 뺨만 긁적이며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자, 그 고민을 날려주기라도 하듯 상냥하게도 먼저 입을 여는 디하르였다.
“어째 하나도 크지 않았군.”
물론, 내용은 그닥 상냥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유림은 디하르의 말에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어이 어이, 간만이네 다음이 키 이야기냐?
“네가 비정상적으로 큰 거라 생각하지 않아?”
눈썹을 꿈틀거리며 올려다보자 디하르가 옅게 웃는 걸로 대신 답했다.
디하르는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유림을 찬찬히 살폈다. 특유의 자색 머리와 자신의 목에 살짝 못 미치는 작은 키. 과거에도 그랬지만 설마 나이를 먹어서도 이렇게 작을 줄은 몰랐다. 옛날의 식성 그대로이면 지금도 꽤 많이 먹을 텐데 왜 이렇게 크지 않은 건지. 그래도 표정은 전보다 더 밝아진 것 같아서 보기 좋았다.
“그간 잘 지냈어?”
급습과도 같은 디하르의 질문에 유림이 살짝 움찔거리더니 뭔가 찔리는 사람처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아…… 뭐, 적당히 잘 살았지. 너는?”
“나도 잘 지냈어.”
“다행이네.”
정말로 다행이라 생각했는지 유림이 가슴을 쓸며 웃었다. 이상한 곳에서 소심한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디하르는 어릴 적의 유림을 생각하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때 유림이 불쑥 물어왔다.
“근데 너 여기 왜 있어?”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디하르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왜 있겠어, 시험 보러 왔지.”
“아니, 그건 당연한 거고… 내가 묻는 건, 너 원래 학교나 대학 같은 데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래서 묻는 거야.”
그 말에 디하르가 피식 웃었다.
“어쩌다 보니까. 그보다 너야말로 웬 클레이즈야? 나보단 네가 더 어울리지 않는데.”
“아…… 난 좀 그럴 이유가 있달까?”
차마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한테 연금 때문에 시험 치러 왔다고 말할 수 없었던 유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보면 수상쩍어 보이는 그 태도에 디하르가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흐음, 뭔가 수상한데? 혹시 뭐 있는 거 아니야? 아님 무단 침입?”
“아니거든? 자, 보라고! 나 당당하게 초대받았어.”
유림은 주머니에서 초대장이라는 게 의심 갈 정도로 심하게 구겨져 있는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펴 디하르에게 내밀었다.
“종이가 아니라 쓰레기네. 분명 돼지 똥 싸는 소리라면서 집어 던졌겠지.”
“헐…… 어떻게 알았어?”
“네 생활 방식이야 늘 똑같지. 그보다 이건 뭐야?”
라면서 디하르가 초대장의 이름이 쓰여 있는 부분을 가리켰다. 유림은 그런 디하르를 보며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긴 뭐야, 내 이름 ‘한유림’이지. 언제 봐도 예쁜 이름이지 않냐?”
“이거야말로 돼지 똥 싸는 소리군.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아는…….”
디하르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유림을 내려다봤다. 약간의 침묵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좀 전의 가볍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닌 한없이 무거우면서도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이다.
“이게 가능해? 내가 알기로 분명 클레이즈 초대장은…….”
말끝을 흐리는 디하르의 모습에 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알고 있어. 처음엔 단순히 오류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유림은 다시금 종이를 구겨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에 디하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흘러내린 유림의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뭐가 있긴 있나 보군…….”
“그런가 봐. 뭐,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금은 시험이 먼저니까. 그러니 무조건 클레이즈에 붙으라고.”
단호하게 떨어지는 유림의 음성에 디하르의 표정이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알았어. 너도 꼭 붙어.”
“걱정 마. 내가 누군데.”
정말로 자신 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싱긋 웃는 유림이었다. 그녀는 마치 너도 힘내라는 듯 디하르의 등을 두어 번 두드리곤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뜩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다시 몸을 돌려 디하르를 바라봤다.
“근데, 디하르.”
“응?”
“혹시 너 혼자 왔어?”
그 질문에 디하르가 옅게 웃었다.
“그럴 리가.”
===============
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