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74
제 74 화
히야스는 깃발을 뽑은 채 누워 있는 유림을 바라봤다.
푹신푹신한 솜으로 변한 미로의 벽과 주변에 흩어져 있는 솜뭉치들. 그리고 그 솜을 침대 삼아 누워 있는 유림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평소와 달리 길게 풀어헤친 머리는 흙먼지 범벅인 채 흐물흐물하게 퍼져 있었으며, 작은 몸뚱어리는 대자로 뻗어 늘어져 있었다. 뺨엔 자잘한 상처들이 나 있었으며 다리는 무슨 짓을 했는지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유림은 온몸의 진이 다 빠진 사람마냥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아마 이 수업의 진짜 목적을 찾았기 때문이리라.
히야스는 그것이 기쁘면서도 조금 씁쓸했다.
“생각보다 빠르네. 아슈팔도 만 이틀은 걸렸는데.”
유림이 고개를 돌려 히야스를 올려다봤다. 아주 잠깐이지만 눈에 이채가 띠었다.
“……히야스 교수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는 어쩐지 감정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
“왜, 한유림.”
“어제 죽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게 이런 뜻이었어요?”
그 질문에 히야스가 옅게 웃었다. 그는 안경을 가볍게 고쳐 쓰며 유림의 옆에 주저앉았다.
“네가 안 게 뭔데.”
“……설마 제가 그런 터무니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히야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확실히 터무니없는 능력이긴 했다. 자신도, 아슈팔도, 유림도, 그리고 덴 케이도……. 한편으론 참으로 얄궂은 힘이란 생각도 들었다.
히야스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안경 닦기를 꺼내 렌즈를 천천히 닦아 내렸다.
손때가 묻어 있던 렌즈가 점점 깨끗해졌다.
“8형은 말이다, 기술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사용하려는 마법이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자신의 생명을 깎아 먹어.”
그 말에 유림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그런 8형이 살기 위해 터득한 본능은 아주 엿 같고도 엿 같은 기술이지.”
울컥하고 억울함이 치밀어 오른 건 그때였다.
“본질을 무너트린다는 건 말이다…… 나와 타인, 그리고 타인과 타인의 경계를 무너트린다는 의미이기도 해.”
정말 최악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늘 그래 왔듯 이기심을 발휘하며 그러려니 넘어가면
되는데, 어쩐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자신이 이렇게 비겁한 존재가 돼야 함에.
너무나 치졸한 인간이 된 것 같았다.
“남들과 비슷한, 아니, 그보다 적은 늄을 가진 나나 아슈팔이 남들의 배나 되는 기술을 순식간에 구현할 수 있는 이유…….”
유림은 히야스의 말에 작게 답했다.
“……타인의 늄을 훔치는 것.”
악물린 잇새 사이로 쉬어버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상의 늄을 내 늄처럼 훔쳐 쓰는 것. 그게 우리 능력인 거죠?”
“……그래. 타인의 늄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부분을 변형시킨다.”
이미 렌즈가 충분히 깨끗해졌음에도 히야스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 행동 하나만으로도 유림은 그가 자신에게 이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준 스승도, 또 그 스승에게 가르쳐 준 스승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 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의 늄을 이용해 왔어. 자극이 아니라 그 자체를 끄집어낸 거지. 자연의 늄이나, 물질의 늄, 혹은 어떤 현상이 가진 늄을 말이야. 그리고 타인의 늄을 훔쳐 사용하기도 했어.”
“…….”
“가끔은 타인의 늄을 다른 이에게 양도하기도 해.”
유림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늄이 가진 의미는 생명이라면서요. 그렇다는 건 난 여태껏 다른 것들의 늄을 빼앗아 살았다는 거예요?”
“그래. 그래 왔고 또 앞으로 그렇게 살게 될 거야.”
8형이 가진 생존 본능. 그것은 자신의 늄, 즉 생명을 깎아 먹지 않게 타인의 것을 훔치는 거였다. 그래, 우리가 숨 쉬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 8형들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가능했다.
유림이 변형시킨 나무가 빨리 망가지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나무의 생명을 멋대로 사용했으니까.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히야스가 앞서 말한,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경우는 몇 없단 것도 이제 이해가 갔다. 본능이 그러지 않기 위해 남의 늄을 갉아 먹는데 그럴 경우가 몇이나 있겠는가. 정말로 무리하거나 본인이 의도하지 않는 한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슬펐다. 그것이 본능이고 아니고를 떠나 결국,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의 생명과 힘을 갉아먹는다는 게 아니던가.
“……아 진짜, 왜 하필 이렇게 태어났냐…….”
진짜 생각할수록 기구한 팔자다. 어렸을 적엔 별 시답잖은 곳에 끌려가고, 운명적으로 만난 유일한 가족은 잃고, 이제야 좀 재밌게 살아보려 하니 이젠 평생 남의 생명을 갉아먹는 팔자라는 걸 알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존재가 자신 혼자만이 아니란 거였다. 그 사실 하나가 억울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유림은 입술을 짓씹으며 히야스를 올려다봤다.
“그럼 이제 전 뭘 배워야 하나요?”
그 질문에 히야스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비폭력주의를 외치는 아슈팔도 독특한 정신 사고를 가진 자신도, 그리고 모든 일에 담담한 덴 케이도 이 사실을 알았을 땐 한동안 충격에 빠져 제대로 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성장하기 위해, 또 살기 위해 남의 생명을 갉아먹어야 한다니. 그건 너무나 역
겨운 능력이었고,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상식을 부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제자는 달랐다. 너무나 빨리 인정했고, 너무나 빨리 포기했다. 히야스는 어쩐지 그것이 사뭇 무섭다 느껴졌다.
“이제 네가 배울 건 전에도 말했듯 최소의 늄을 이용해 최대의 효과를 보는 거야.”
“타인의 늄을 최소한으로 이용해 최대로 사용한단 의미예요?”
“그래. 정확하게 말하자면 앞으로 자신의 늄을 사용하지 않는 방법과 타인, 혹은 대상의 늄을 안전하게 가져다 쓰는 방법을 배울 거야.”
남의 늄을 안전하게 쓰는 방법이라니. 정말이지 수업 한번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배워야 하는 건 사실이었다. 실수로라도 주변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면.
“그리고 그러다 보면 대상의 생명, 그니까 그릇이 아닌 늄만 빼서 사용하는 게 가능할 거야. 덴 케이나 나, 그리고 아슈팔이 그러듯 말이야.”
“……어려워요. 8형이란 거 자체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어려워요. 배열을 달리해 본질을 바꾼다더니만, 이젠 남의 늄까지 훔쳐 쓰라니……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고요.”
“배우면 알게 될 거야.”
히야스의 말에 유림은 그제야 왜 8형이 몰래 수업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타인의 늄을 빼앗는 기술을 가르치는데 그걸 어떻게 대놓고 하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힘이 있다는 게 알려지는 순간 자신들이 위험해 질 것이다, 어떤 쪽으로든.
“매주 금요일 밤 9시. 이곳 아니면 내 연구실에서 수업을 할 거야.”
“…….”
“이제 넌 네가 알던 상식 밖의 내용을 배울 거야. 과거에 네가 알고 있던 모든 방식은 너에게 적용되지 않아. 네 상식을 다 죽여야 하지.”
갑자기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유림은 부들거리는 팔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의미상의 죽음이 이런 뜻이었다니.
그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쌓아온 상식과 지식을 죽여야만 하는 거니까.
“젠장, 너무 젊은 나이에 죽는다…….”
허탈한 웃음이 계속 치밀어 올랐다. 허망함이 담긴 웃음소리는 어쩐지 애처롭기까지 했다.
비밀이 또 생겼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은하에게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이것만큼은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제 더는 거짓말도, 숨기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깊은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쉬고 싶단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교수님, 저 피곤해요.”
유림의 말에 히야스가 쓰게 웃었다.
“기숙사로 돌아가. 가서 깨끗하게 씻고 푹 자. 오늘은 안 부를 테니까.”
이 인간이, 무슨 당연한 소릴.
“안 불러야죠, 일요일인데. 부르면 저 파업합니다. 장난 아니게 행패 부릴 거예요.”
“하하하, 그것도 좋네. 나도 똑같이 보복하고.”
“…….”
정말로 즐거워하는 것 같아 유림은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아, 근데 아슈팔 선배는요?”
“녀석은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어. 누가 날 찾아서 대신 갔달까.”
그 말에 유림의 눈썹이 가볍게 들렸다. 갑자기 사라져서 어딜 갔나 했는데, 자신이 수업하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서 가서 자라. 아니면 업어다 줘?”
“절 쪽팔리게 만들어서 자퇴시키려고요?”
그 말이 웃겼는지 히야스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유림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정말 방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데몽은 기숙사 입구에 서서 유림을 기다렸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머리를 비우기 위해 밖에 나왔다가 륜의 연락을 받고 유림을 기다리기로 한 거였다.
그는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기숙사 입구를 바라봤다. 그때 그의 시야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유림이 들어왔다.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한유림.”
유림이 고개를 들어 데몽을 바라봤다. 무슨 고단한 일을 겪었는지 이곳저곳에 생체기가 나 있었고, 먼지 범벅인 몸뚱어리를 비척비척 끌고 오고 있었다.
그 행동에 데몽의 눈이 날카롭게 떠졌다. 다치거나 유난히도 지쳐 보이는 상태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 비해 지나칠 만큼 또렷한 눈동자 때문이었다.
데몽은 짐짓 모른다는 태도로 다가가 태연하게 물었다.
“뭘 하다 왔기에 꼴이 그 모양이냐?”
“아니, 그냥 좀. 넌 여기서 뭐해?”
“난 밤 산책. 근데 너 괜찮냐? 무슨 일인데?”
데몽의 말에 유림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갑자기 누르고 있던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유림은 그 감정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쉬고 싶단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더는 묻지 말라는 태도로 데몽에게 답했다.
“아무 일도.”
유림은 강조하듯 말을 토해내더니 이 불편한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간다’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데몽은 그런 유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마치 너는 알 필요 없다는 듯 단호하게 떨어지는 말이 뇌 속에 강력하게 자리했다. 그리고 그것은 데몽의 오해와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키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통신구를 열어 륜에게 연결했다.
[여- 데몽] [데몽, 뭐 알아냈냐?]두 사람의 목소리에 데몽이 한쪽 입꼬리를 말았다.
“륜, 테오. 뭔가가 있어. 우리한테 말하지 못할 무언가가”
일순 짙은 침묵이 그들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어떻게 할 거야?]침묵 뒤에 들려오는 륜의 목소리는 유달리도 낮았다.
“글쎄…….”
데몽은 유림이 들어간 기숙사를 바라봤다.
“우선, 정보를 좀 얻어야겠지?”
이윽고 미묘한 미소가 데몽의 입가에 걸렸다.
이때 유림은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의 그 대답이 데몽들에게 어떤 의심을 불러일으켰는지, 그리고 이 일이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 말이다.
===============
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