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30
130화
130. 묶은 자가 풀어야
중행범연합이 퇴각하자마자 송웅을 조가현으로 보냈다.
당장 움직일 수는 없었기에, 그를 미리 보내서 다른 일족과 세력이 침략하여 점거할지 모를 상황에 대비했던 거다.
그런데.
“임하송이 문도들을 모두 데리고 중행가의 장원으로 향했습니다. 임하송도 그렇고 문도들이 모두 단단히 무장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나, 별일은 없을 거라고 봤습니다. 중행가의 안주인인 요시가 임하송과 내연의 관계라는 소문도 있잖습니까. 그래서 중행열이 죽었으니, 그들을 피신시키려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다.
“임하송이 다짜고짜 문을 부수고 들어가더니, 앞을 막는 병사들과 무사들을 족족 죽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요시와 그 무리가 놀라서 밖으로 나오자, 일왕자의 가족과 공주와 그 무리를 모두 내놓으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중행가의 일족까지 다 죽인다고 하더군요.”
요시는 당연히 거부했다.
그녀와 중행가는 희오를 지원하여 왕으로 만들고 외척으로서 왕가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는데, 아직 생사가 불분명하여 희망을 놓을 수 없는데, 희오의 가족을 죽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중행열이 죽어서 공주와 희오와 가족들의 가치는 더욱 높아져 그들에게 구명줄과 다름없었다.
“요시가 좋은 말로 다독이긴 했지만, 임하송의 상태가 이상했습니다. 처음엔 부드러운 말로 자기의 말을 따르라고 하더니, 듣지 않으니까 요시를 창녀라며 비난하고, 아무도 자기 마음을 모른다느니, 문도들의 넋을 위로하려면 그만큼의 피가 필요하다느니, 횡설수설하고 욕을 하고, 분위기가 완전히 살벌하게 변했습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은 몹시 위급한 상태였다니까요. 그래서 백개들에게 장원 주변을 지켜보게 한 후에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려왔습니다.”
중군을 조을 등에게 맡긴 후에 희오를 메고 주둔지를 나와 조가현으로 향한 내막이었다.
* * *
송웅은 앞뒤로 열심히 흔들던 오른손을 내저으며 반박했다.
“에이, 설마 애들까지 죽이겠습니까.”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던 문도들을 직접 마무리하고 사라지던 임하송의 얼굴을 보았다면, 송웅도 반박하진 못했으리라.
“임 문주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문도들이 죽은 게 일왕자의 탓이고, 그러니 일왕자의 무리를 모두 죽여 복수할 생각뿐인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을 겁니다. 중행가에서 막았다면 정말로 그들까지 죽이고도 남습니다.”
“오랫동안 살을 섞으며 정을 쌓은 요시가 있잖습니까.”
“소문입니다.”
“다들 그렇다니,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소문이죠.”
“세 사람만 우겨도 없는 호랑이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쨌든,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아들은 임 문주의 아들일 수도 있는데, 설마요.”
“차라리 그 소문이 진실이어서 임 문주가 독하게 손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기대감에만 의지할 수는 없으니, 나는 더 빨리 가야겠습니다.”
“전 지금도 온 힘을 다하고 있는데요?”
“말을 하고 있다면 아직 더 힘을 낼 여유가 있는 겁니다.”
“전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뜨는 놈입니다.”
“……먼저 가겠습니다.”
선천기까지 끌어내 전력을 다해서 비천무영신법을 펼치니.
“와- 장정 하나를 짊어지고도 완전히 새처럼 날아가시네. 저 정도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해야 할 거 같은데. 아, 나는 어느 세월에 저런 수준에 오르려나.”
송웅의 감탄과 한탄을 멀리 뒤로 하고, 지상을 한참 밑으로 하며 쭉쭉 뻗어나갔다.
조가현에 들어섰으나, 중행범연합이 전투에 패배한 소식이 전해져서인지 길거리에는 사람이 아무도 안 보여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지붕을 징검다리처럼 밟다 보니, 어느덧 중행가의 높은 담장이 나타났다. 가뿐히 넘어 병사와 무사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곳에 내려섰다.
임하송은 노인과 여자, 아이들뿐인 무리를 구석으로 몰아 검을 겨누고 있었다.
포위된 이들 중에 단 한 명의 얼굴만 눈에 익었는데, 중행가의 공자와 혼인했다는 공주 희홍이었다.
그렇다면 그녀 품에 안겨 있는 사내아이가 남편 중행창이리라.
뭔가 보지 말아야 할 걸 본 것 같아서 시선을 돌리고, 기척을 감지하고 돌아보는 임하송에게 말했다.
“임 문주, 그쯤하고 물러나.”
임하송과 달리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살벌한 기세로 희홍 등을 포위 중이던 문도들은 깜짝 놀라 돌아봤다.
임하송은 물었다.
“너는 누구냐?”
이전에 만나 본 적이 없어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마주한 듯한 표정이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달리 이해하면 임하송이 그때 충격받은 영향으로 여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
그렇다면.
“나는 지한위조연합 중군의 장, 진천입니다.”
전장에서 만났을 때와 다르게, 환자를 대하듯 친절하고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깜짝 놀란 문도들은 담장 밖을 이리저리 노려봤다. 중군의 병력이 장원을 포위했다고 생각한 거다.
속일 이유가 없어 진실을 말해주었다.
“곧 일행이 한 명 더 오겠지만, 중군은 함께 오지 않았으니, 당신들은 포위되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문도들은 안도하면서도, 왜 자신에게 불리한 진실을 밝혔는지 의아해하는 표정들이었다.
임하송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더니.
“생각났다. 너는 개방의 방주가 아니냐.”
드디어 알아봐 주었다.
그렇다고 임하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물론, 반응을 보니 전체적으로 그때보다는 나아지긴 했다.
“그 또한 맞습니다. 방주든, 중군장이든, 임 문주가 편한 대로 부르면 됩니다.”
임하송을 고개를 갸웃했다.
“진 중군장, 전쟁은 끝이 난 것과 다름없고, 나는 더 이 상 지한위조연합과 싸울 생각이 없는데, 왜 병사까지 데려와서 나를 방해하지?”
그때도 중군장으로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어서 진 방주로 대할 줄 알았는데, 호칭을 중군장으로 부르는 게 의외였다.
그리고.
‘병사를 데려왔다고 하는 건 일왕자가 병사의 복장을 했고, 어깨에 축 늘어져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 오해를 한 모양이군.’
요시와 그 무리 중에도 희오를 알아보는 이가 없으니, 임하송은 오죽할까.
일단은 모른 척 대답했다.
“그래서 온 겁니다. 전쟁은 끝났고, 승패는 결정되었는데, 어찌 임 문주는 살생을 벌이며, 약자들을 핍박합니까?”
“약자는 무슨. 겉모습만 보고 멋대로 판단하지 마라. 여기 이 여자는 특히 그렇다.”
임하송이 검 끝으로 목을 바짝 겨누고 있는 여인은 옷 여기저기가 잘리고 베이며 붉은 얼룩이 생겨나 있었다.
“이 여자는 중행가의 안주인 요시다. 하지만 그냥 안주인이 아니라, 나와 한 사부를 두고 무공을 배웠다.”
요시는 저항했고, 임하송과 꽤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은 끝에 제압된 모양이다.
“비록 무공에는 재능이 없고, 노력도 하지 않아서 가까스로 일류에 근접한 수준밖에 안 되지만, 약자라고 할 수는 없어.”
“그렇다면 약자는 아니라고 합시다. 하지만 약자가 아니라고 해서 임 문주의 그릇된 행태가 용납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진 중군장이 어떻게 받아들이건 말건, 상관없다. 이들로 죽은 문도들의 넋을 달랠 뿐이다.”
“어찌 그들의 목숨으로 달랜단 말입니까?”
“본래 이들은 죽일 생각이 없었다. 나는 저 왕족들만 원했어. 저들만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나를 막았다. 문도들을 잃은 나의 슬픔과 고통, 상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해했단 말이다. 그러니 어찌 죽이지 않을 수 있나. 너는 그때 그곳에서 모든 걸 보았으니 이해하겠지? 나처럼 당했으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그때, 임하송은 희오를 비롯하여 상군의 무리를 원망스레 바라보고 떠났다.
‘하지만 내내 비웃고 조롱하며 자극하다가, 서로 목숨을 노리며 싸웠던 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왜 그랬나 싶었더니, 나를 자기와 같은 처지로 생각했던 거구나.’
같은 피해자로 여기며, 전우애 같은 감정이 생긴 모양이다.
“임 문주의 말을 듣고 나니, 지금과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상황에서 반대의 선택을 한 두 사람이 생각나는군요. 임 문주는 복우파의 우호법 일도경혼 남익 선배를 알고 있겠지요?”
“그는 복우파에서 드물게 괜찮은 사내였지. 하지만 이번엔 실망했다. 겁을 먹었는지, 중간에 사라졌더군. 생각해 보니 언 문주도 중간에 보이질 않았어. 이렇게 따져보니, 복우파는 겁쟁이들만 배출하는 곳이란 생각이 드는군.”
임하송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셋 중에서 가장 병신이라고 생각했던 좌호법 비정만이 참전해서 거우로서 중 대부를 호위하며 의리를 지켰으니, 내 안목에도 문제가 있긴 하구나.”
그렇지 않다.
비정은 팽찬에게 추적당하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중행열을 버리고 혼자서만 도망쳤으니까.
“남 선배는 도망친 게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복우파를 뒤로하고 진나라를 떠났습니다.”
“떠나? 왜?”
“내가 강호의 무인 다운 삶을 살라고 주제넘은 조언을 했는데, 더는 대부들의 충견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
임하송은 갑자기 뭔가 기분이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진 중군장은 송풍미검을 아나?”
“자분 선배라면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자분도 나의 사매지. 요시와는 다르게 무공에 재능이 있고, 노력도 많이 해서, 당당히 일류고수가 되었다. 후에 벽한파도 물려줄 생각이었어.”
요시의 얼굴에 질투가 어렸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우물거렸으나, 목에 검이 겨누어져 있어서인지 말을 하진 않았다.
“자분은 일도경혼을 따라갔나?”
“그렇습니다. 제자 몇 명도 함께 갔습니다.”
임하송의 얼굴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언 문주가 둘이 제자들을 데리고 떠나려는 걸 알아채고 포위하여 자분 선배 등을 인질로 삼아, 남 선배에게 나를 유인해서 죽이도록 협박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언 문주에게도 비슷한 조언을 했습니다.”
“그도 떠났나?”
“죽었습니다.”
“진 중군장이 죽였군.”
“내가 죽였습니다. 그가 이끌고 온 복우파의 정예 문도들도 그때 다 죽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죽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언 문주가 죽는 걸 보았고, 내 동료들이 그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으니, 그대로 물러난다고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끝까지 싸우다가 죽길 선택하더군요. ”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벽한파의 문도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복우파의 문도들은 용감하고 충직했습니다. 그때, 임 문주의 명령을 따라 참전했던 문도들과 지금도 임 문주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따르고 있는 저들처럼요.”
“…….”
“그러나 나는 아직도 언 문주에게 화가 납니다. 내 주제넘은 조언이 아니었어도, 실패와 실망을 수긍하고 제자들과 그냥 돌아갔다면, 나와 둘이서만 결판을 내자는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면 문도들이 죽을 일은 없었으니까요.”
순간 임하송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언 문주를 빙자하여 나를 비난하는 거냐!”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언 문주와 나는 다르다! 너도 내 마음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임 문주의 그 고통이란 것은 저들을 모두 죽이면 사라지는 겁니까?”
“일왕자 때문에 모두 죽었다! 그놈도 나처럼 똑같이 겪어봐야 해!”
매듭은 묶은 자가 풀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어깨에 메고 있던 희오를 내려놓고, 점혈을 풀었다.
오랫동안 점혈 되었던 희오는 굳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털썩 쓰러졌다.
한동안 온몸이 지독하게 저리면서, 개미 떼에 뜯기듯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야 하리라.
그러나.
“임, 임 문주, 내, 내가 잘못했소!”
양손의 손톱이 부러져 피가 나도록 땅을 쥐어뜯으며 상체를 일으켜 사죄하더니.
“내, 내가 죽을죄를 지었으니, 잘못은 내가 했으니, 제발 내 가족은 살려주고, 나를 죽이시오!”
눈물을 흘리며 죽여달라고 애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