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136. 진나라의 대부
“크하하하!”
지백요는 더욱 자신감을 얻으며 웃었다.
진천이 땅을 진동시키던 걸음을 멈추고, 귀가 아플 만큼 쩌렁쩌렁한 외침을 터트리지도 않으면서 심신을 짓누르던 압박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멸살하라 했거늘, 왜 진격하지 않는가!”
다른 대부들은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고, 어느 병력도 꼼짝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가의 일족과 소속 장수들도 병력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명령만 내리고 앞장서지 않아서인가 해서 떨어트린 북을 들고, 채를 집으며 어자에게 나아가라고 명령하려는데.
“원수님, 신 예양이 아뢰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사단 병력의 장으로 지휘 중인 예양이 외쳤다.
“북은 진군이요, 징은 퇴각이 아닙니까. 원수님의 명이 지엄하나, 공께서 징을 치시며 퇴각을 명하시는데, 어찌 신하들이 명을 어기고 병을 이끌어 전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대군들은 물론이고, 지가 일족과 장수들조차 난감해하며 진격할 수 없었다.
지백요는 아차 했다.
절박하고 흥분하여 유공이 대군을 이끌고 나타난 것에만 마음이 쏠려, 징이 퇴각을 알리는 신호임을 간과하고 말았던 거다.
그런데 유공은 왜 나타나자마자 징을 치며, 전투를 막는 걸까?
‘특별한 이유가 있겠나. 그저 여기 사정을 모르고 있어서겠지.’
설마 경에 오른 상대부가 강호의 무인과 다투고 있을 줄은 모르고, 대부들끼리 싸움이 일어난 줄 알고 일단 제지하고 화해시킬 속셈이 아니었을까.
이제 막 자기가 지지하는 세력의 승리로 내전이 끝난 시점에, 또 분란이 일어난다면 여러 곤란한 문제가 생기고, 맹주라 자부하는 진나라의 공으로서도 체면이 떨어지고, 입장도 난처할 테니까.
그러나 지백요는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유공이 합류한 덕에 대세는 내 쪽으로 기울었다.’
이미 자기 쪽 병력의 숫자가 훨씬 많고, 일 만이 족히 넘는 유공의 병력까지 가세한다면, 진천의 무공이 아무리 대단해도 사마귀가 겁도 없이 수레에 맞서 버티는 모양새와 다를 바 없으리라.
아니, 혼자서 수만의 병력과 싸우기라도 할 것처럼 기세등등하여 날뛰다가 저리 꼼짝 않고 있는 걸 보면, 이미 겁을 먹고 주눅이 들어 살아날 방법을 고심 중인 게 아닐까.
‘네놈이 용서를 빈다고 해도, 절대 살려두지 않으리라.’
지백요는 진천을 노려보며 비웃는데, 유공과 군대가 도착했고, 지백요는 즉시 어자에게 명령해 유공에게 가까이 전차를 몰아가게 했다.
* * *
진천은 유공과 대군이 등장한 것에 놀라긴 했으나, 두렵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이제는 전투를 피할 수가 없겠구나, 수많은 이들이 죽게 되었구나, 하는 등의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라서다.
한편으로 진나라의 제후와 척을 진다면 자신을 믿어주는 진나라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게 될 텐데, 그렇다면 어떻게든 제후를 사로잡고 인질로 삼아 피신시키고 난 후에 혼자서 해결을 하자는 등의 방법도 고민했다.
그러다 기세를 거두고, 공력을 가라앉힌 건, 유공을 태운 전차의 뒤를 따르는 근위군 대장의 전차에 송웅이 함께 타고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윤갈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기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다고 하며 사라지더니…….’
제후의 군단에 섞여 나타날 줄이야.
게다가 이쪽을 보고 싱글싱글 웃으며, 마치 믿어보라는 듯 자기 가슴을 두드리기까지.
그 의미는 곧 밝혀졌다.
“지 대부의 말은 잘 들었소.”
지백요의 주장을 다 듣고, 이쪽도 한번 쳐다본 유공은 눈을 감고 고민하는 듯하더니.
“아끼던 신하 여럿이 죽어서 지 대부의 마음에 울분이 쌓여 속상한 건 알겠소. 그러나 증거도 없이 몇 사람의 주장만 가지고 내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에게 책임을 묻는 건 도리가 아닐 것이오.”
지백요의 기대를 저버렸다.
지백요의 얼굴에 당황하고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제까지 유공의 가장 강력한 후견인은 지백요였다.
또한, 지백요는 중행범연합을 물리치면서 진나라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주변국의 지지까지 얻어낸 후 병력의 지원까지 받아내서 제 것처럼 운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출신만 높을 뿐, 무능하며, 겁이 많고, 여인이나 탐하는 음란한 성정이면서, 거느린 군단도 지백요와 비교해서 보잘것없는 유공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으리라.
“유공께선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무섭게 노려보며 되묻는 지백요.
그의 위협적인 시선에 흠칫 놀란 유공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때.
“대장부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이 무겁고 가치가 있다는데, 오랫동안 맹주로 군림해 온 진나라의 인민을 두루 대표하시는 공께서 입에 올리신 한마디의 가치야 더 말해 무엇하겠소. 그런데도 지 대부는 공께서 이미 내뱉은 말씀에 의문을 표하려 하니, 심히 우려를 금할 수가 없소이다.”
지백요는 시선을 돌려 조양자를 노려보았다.
“공께서 평소답지 않게 나를 배척하는 말씀을 하시기에 의아했는데, 조 대부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던 모양이오.”
지백요는 유공과 조양자를 번갈아 보며 이를 갈았다.
“중행범연합의 잔당이 궁지에 몰리고, 벗어날 방법이 없어서 공께서 계신 도성을 포위했었습니다. 그때 내가 나서지 않은 건 나를 속여 기운을 뺄 생각으로 실속은 없으면서 허세를 부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적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 대부가 나섰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후로 공께서 조 대부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게 된 것이 아닌가, 나 역시 심히 우려되는군요.”
지백요의 협박과 경고에 유공은 진땀을 흘렸고, 낯빛도 창백해졌으나, 조양자는 웃으며 반박했다.
“주군의 위엄이 무너지는 걸 염려하고, 동지였던 이가 중행범연합이 저지른 실수를 답습하려고 하니, 부족하나마 이를 막으려는 취지인데, 지 대부는 나의 뜻을 곡해하지는 마시오.”
지백요는 대꾸도 하지 않고 유공을 노려보며 말했다.
“공께 감히 조언을 드립니다. 평소 당연하게 여겨 고마움을 모르나,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게 되며, 짐받이 판자와 수레는 서로 의지해야 큰 짐도 무사히 옮길 수 있으니, 부디 숙고하시고 다시 하명하소서.”
하지만 조양자가 듣고만 있지 않았다.
“입술이 없다고 이가 사라질 리 없고, 설사 이가 없다고 해도 잇몸이 있어서 음식을 먹고 배를 채울 수가 있는데, 나는지 대부가 무얼 걱정하는지 알 도리가 없군요.”
유공은 한숨을 내쉬며 고민하는 표정만 지을 뿐 가타부타 말을 못 했다.
지백요의 세력이 크지만, 조양자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으니, 어느 쪽의 말을 들어야 할지 혼란스럽고, 어느 쪽의 편을 들어도 걱정을 떨칠 수가 없으니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하지만 지 대부는 진 방주와 한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다 선언했고, 여러 신하를 잃기까지 했으니, 사정이 비슷한 처지로 그 입장을 모른 척할 수는 없겠지요.”
조양자가 갑자기 지백요를 지지하는 말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생사를 건 싸움밖에 없다는 것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사사로운 명분이고, 진 중군장 역시 연합의 일원이니, 따질 게 많고 복잡하여 연합 전체가 편을 나누어 싸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진 중군장과 지 대부만 각자의 무리를 이끌고 진실을 상으로 삼아서 승부를 결하여, 하늘에 뜻을 묻는 게 어떠하겠습니까.”
애초부터 지백요를 편들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자기에게 피해가 없다면, 뭘 해도 상관하지 않겠으니, 너희끼리 마음대로 치고받으라는 의미.
아니, 조양자의 제안에는 그 이상의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조양자는 이 상황을 이용해서 지백요의 힘을 조금이라도 약하게 만들려고 하는구나.’
어디 조양자만 그렇겠는가.
저들 모두 같이 어울리면서도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이전을 돌이켜보고, 현재의 행태를 보면, 지백요는 대의를 위해 내전을 일으킨 게 아니며, 윤갈의 복수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유공은 진천과 중군을 위해 지백요를 막았던 게 아니며, 조양자는 유공을 위해 지백요에 맞선 게 아니고, 당연히 두 세력 간의 싸움을 제안한 것도 유공이나 다른 대부, 혹은 진나라 전체를 위한 게 아니었다.
‘흑도가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처럼, 어떤 식으로든 권력을 차지하려는 위정자 역시 계속 나타나게 될 것이다.’
당장은 저 둘에게 밀려 숨을 죽이고 있으나, 때가 맞고, 기회만 생기면 다른 대부들도 언제든 저들처럼 돌변할 게 분명했다.
지백요가 눈을 굴리며 이를 악물었다. 단독으로 중군과 싸우는 게 무리인 걸 알면서도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고민에 빠졌으리라.
그때.
“배 터지게 얻어먹고 눈물까지 흘리며 은혜 갚는다고 약속했던 놈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
중군의 병력 어디선가 악을 쓰듯이 외치는 소리에 지가의 병사들 표정이 대번 굳어졌다.
‘굴탕?’
그리고.
“옳구나! 나랑 밥을 먹고, 계속 왕래하자며 웃고 떠들던 놈들은 다 어디로 간 거냐!”
“마누라 자랑하며 같이 먹고 싶다고 울던 놈 어디 갔어!”
“자식새끼들 걱정에 밤잠을 못 이룬다며, 나중에 딸자식 맺어주자던 놈들 다 어디로 갔냐고!”
수많은 중군의 병사들이 굴탕의 외침에 호응하며, 지가 병사들의 가슴 속 불평과 그리움을 머금은 내면의 불씨에 기름을 끼얹었다.
“더, 더 이상의 싸움은 싫습니다!”
지가의 병력 속에서도 누군가 용기를 내어 외쳤고.
“맞습니다! 같은 편끼리 왜 싸웁니까!”
“집에 가고 싶단 말입니다!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요!”
곳곳에서 울분에 찬 아우성이 터지며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장수들이 급히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제지하고, 만류하여 오래지 않아서 진정되었으나, 이미 병력의 사기는 두 동강이 난 상황이었다.
지백요는 심각하게 당황했고, 병사들의 반응에 영향을 받은 지가 일족 무리와 장수들도 흔들리는 게 보이자, 그의 얼굴에 고심하는 빛이 더욱 진해졌다.
하지만.
“지 대부, 한 입으로 두말을 하는 건 소인배나 하는 짓이라 하는데, 설마 싸우겠다고 내뱉은 말을 되삼키진 않으리라 믿소만.”
무조건 싸움을 붙이겠다는 것처럼 조양자가 또 지백요를 자극했다.
지백요의 표정이 변덕을 부리며 다시 돌변했고, 이대로라면 조양자의 의도대로 흘러갈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다시 무공을 드러내고 공력을 발산하여 지백요를 압박할 수도 없으니, 이제 그런 방식은 조양자만 돕게 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천은 여장들이 자결하는 사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틈에 지백요의 곁으로 돌아간 양영보에게 전음입밀을 보냈다.
-양 참모, 호랑이가 없는 산에는 여우가 왕 행세를 한다고 했습니다. 나와 지 대부만 싸우길 종용하는 조 대부의 속셈을 모르겠습니까? 실익과 명분, 무리의 지지도 얻기 힘든 상황에서, 지 대부가 계속 내게 집착하고, 싸우길 강행했다가는 이미 충분히 가진 것조차 잃고, 진나라의 실권도 넘겨주게 될 겁니다.
양영보는 이게 무슨 기이한 일인가, 하여 주변을 둘러보다가 눈이 딱 마주쳤고.
-경고하건대, 지 대부가 전투를 강행한다면, 나는 지 대부에 이어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겁니다.
낯빛이 하얗게 질린 그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급히 지백요의 전차에 올랐고.
“조 대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소! 윤 참모와 여장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잊겠다는 게 아니오. 그 일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높은 자리에 있고, 높은 분을 보필해야 하는 몸으로 공과 사를 구분해야 마땅하오. 그렇기에 신하 된 자가 공께서 있는 자리에서 사사로이 원한을 주장하고, 내전이 끝나 기뻐하고 축하해도 부족할 판에 다툼을 일으키는 건 옳지 않다는 게 나의 생각이오. 이에 유공님께 용서를 구하며, 대부들을 대표하는 원수로서 반성함을 고하는 바이오.”
양영보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논리로 설득했는지, 지백요는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하며 물러났다.
* * *
로를 가득 채웠던 수많은 병력은 각자의 근거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방주님, 싸우지도 않고 이렇게 간단히, 평화롭게 마무리된 건 다 제 덕분인 겁니다. 당연히 방주님이 진나라의 대부가 되신 것도 다 제 공인 거죠. 역시 개방의 대장로를 잘 두었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드시지 않습니까?”
우쭐한 표정으로 다가온 송웅이 자신의 공을 자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