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65
65화
65. 보람이 있네요
내공을 거두자 유형의 손은 사라졌다.
유일각에서 손을 잃었을 때도, 손을 잃었다는 걸 명확히 인식한 의방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던 상실감이 찾아와 당황스러웠다.
그사이에 감정을 담는 크기가 더 커졌기 때문일 테고, 어쩌면 내공으로 손을 만들어냈다는 성취감, 혹은 잃어버린 손을 되찾았다는 반가움 때문에 생겨난 반발심 같기도 했다.
그래서 장력이 격돌한 순간 정신을 잃었던 공손앙이 마당을 뒹굴다가 다시 깨어나서 일어나는데도, 잠시 눈을 감고 상실감이 주는 공허함을 다독였다.
“이 꼴이 되고 나니, 진 문주의 여유를 비난할 마음도 생기지 않는구려.”
공손앙은 승리감을 음미하는 중이라고 오해한 모양이지만, 변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마음이 평온해지자마자 눈을 떴다.
이때, 높은 지위의 군복을 입은 사내가 담장 위로 솟구쳐 사뿐하게 올라서더니, 공손앙에게 정중히 물었다.
“현승님, 괜찮으십니까?”
그러고는 뚫린 벽이 아니라, 문을 통해 나오는 진천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이 되었다.
진천이 너무 어리고, 외모도 예상 밖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하지만 곧 본래의 표정으로 진천을 노려보며 또 물었다.
“진입할까요?”
“진입은 무슨. 별일 아니니까, 군사들이나 잘 단속하고 있게.”
“예, 현승님. 내려가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잠깐. 이후로 종종 마주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진 문주와 인사 나누고 내려가게.”
군복 입은 사내는 즉시 진천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진 문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방위군을 지휘하는 현위 신불이라고 합니다.”
신불이 말을 잘 듣는 부하인 건지, 공손앙이 수하들에게 인정받는 상관인 건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정중한 인사를 받았으니, 정중하게 화답하는 게 도리.
“반갑습니다, 신 현위님. 하오문 문주 진천입니다.”
신불은 진천의 존대하는 말투와 정중히 인사하는 태도가 무공이 고강한 흑도의 수장답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의외라는 표정이었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장 아래로 사라졌다.
신 현위가 사라지고, 공손앙은 계단 아래까지 내려와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진천과 눈싸움을 벌였다.
진천은 말했다.
“공손 현승께서 호언장담한 대로 웃질 않아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니면 계속 이어서 할까요?”
공손앙은 싱긋이 웃었다.
“잠깐이긴 해도 기절까지 해놓고, 비무를 계속 이어서 하자는 말을 할 만큼 나는 얼굴이 두껍지 않소.”
“그런데 왜 저는 공손 현승께서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요? 표정이 마치 억울해하는 거 같습니다.”
“실제로 억울해하고 있소. 그러나 승패에 연연해서가 아니오.”
“그럼 무엇이 억울합니까?”
“진 문주는 분명 내 장법을 상대할 적수공권의 무공이 없는 것처럼 피하기만 했소. 그런데 내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형태에, 위력도 대단한 장법에 당하고 말았으니, 억울할밖에.”
즉, 속임수에 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공손앙은 설마 자기와 겨루는 중에 장법을 창안했다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고의로 숨겼다고 오해를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곧 한숨을 내쉬며 자책했다.
“사실 진 문주가 나의 방심을 의도했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소. 실전이었다면 속임수에 걸리지 않아야 하고, 방심했다는 자체로 어리석고,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그 어떤 변명도 무의미하기 때문이오. 그렇기에 나는 진 문주에게 무공과 심기 양쪽에서 패배했다고 할 수 있소. 비록 내가 자신하는 무공이 장법이 아니라 도법이라고 해도 말이오.”
“묘하게 미련이 남아 보이는 승복 선언이로군요.”
“하하, 오해요, 오해. 내가 졌다니까.”
그런데 공손앙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뒤늦게 몸의 이상을 느꼈기 때문이다.
손바닥이 불에 닿은 것처럼 후끈거리고, 온종일 팔굽혀펴기를 한 것처럼 손목부터 어깨까지 욱신거리고, 등을 시작으로 허리를 지나 허벅지에 이르는 근육이 아플 정도로 뻑뻑하게 굳어 있었다.
사실 잠깐 기절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으니, 당연한 후유증이었다.
그런데 공손앙은 곧 기이한 점을 깨달았다.
‘왜 내상이 없지?’
혹시나 해서 급히 기를 움직여, 혈도를 따라 움직여보았어도 내상으로 의심할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분명 내상을 입어야 하는데.’
아니면 진천이 마지막 순간에 장력을 조절했던 걸까?
회수, 분산, 와해, 투과, 또는 진천의 장법이 그러하듯이 그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기이한 상승의 수법으로 말이다.
공손앙은 변함없이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무덤덤한 표정의 진천을 꿰뚫어 볼 것처럼 바라봤다.
‘그 정도로 공력의 수발과 변형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려면 최소 절정의 경지가 아니면 불가능할 텐데. 말이 안 돼. 말이 안 된다고. 하지만 따져보면 진 문주와 관련하여 말이 안 되는 게 한둘이 아니로군.’
그렇기에 공손앙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진 문주가 대단한 고수임을 확인했으니, 나는 이만 물러가리다.”
진천은 어리둥절했다.
“이대로 그냥 간다고요? 다른 제보에 관해서는 묻지도 않는 겁니까?”
무엇보다 현령의 죽음에 대해서 따지지 않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손앙은 옷에 묻은 먼지와 흙을 털어내며 대수로울 게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외조부가 그러시더이다. 어떤 이의 마음은 열 길 물속보다 알기가 어렵지만, 어떤 이의 의도는 행동 하나로 열을 이해하게 만든다고.”
진천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 상궁이 자신의 곁에서 어머니이자 스승이 되어주었기에 극단적으로 삐뚤어지지 않은 채 불우했던 삶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처럼, 공손앙에게는 외조부가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공손앙은 마치 진천의 속내를 알아채고 긍정해 주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아까 대청에 나온 사람들이 진 문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걸 보고, 반면 각오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을 때, 이미 진 문주에 대한 부정적 제보들에 대해 따지는 자체가 의미 없다고 결론 내렸소.”
그렇다면 비무는 왜 하자고 했던 걸까.
“이만 헤어집시다.”
공손앙이 포권을 하려고 하자.
“배웅하겠습니다.”
진천이 다가가 그의 옆으로 섰다.
공손앙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 하나만 해도 되겠소?”
“경청하겠습니다.”
“내가 볼 때 진 문주는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오.”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싸움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들은 있소. 그게 강호인이오.”
“그렇다면 저는 강호인이 아니로군요.”
“어찌 강호인을 싸움으로만 정의할 수 있겠소. 애초 진 문주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강호에 얽혀 있는 하오문의 문주가 되었으니, 죽을 때까지 강호인인 거요.”
“금분세수(金盆洗手)를 하면 어떨까요.”
“그럼, 강호에서 벗어났다는 착각에 빠져, 뒤에서 비웃음을 받는 강호인이 되겠지.”
“그렇군요.”
“여하튼, 싸움이란 게 그렇소. 정말 작은 문제로 시작해서 한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원수도 되는 거요. 그 작은 문제라고 하는 것은 표정, 말투, 손짓 등으로 생긴 오해인 경우가 허다하오. 정말 말도 안 되게 흔하고, 사소한 걸로 목숨을 다투는 곳이 강호요.”
“저는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으니, 그런 문제로 시비가 붙어서 다툴 일은 없겠군요.”
“그렇지 않소. 오히려 진 문주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이 싸움의 발단이 되기가 쉽소. 진 문주가 어떤 말에도 감흥을 보이지 않으면, 자기를 무시한다고 기분 나빠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까. 강호인이란 족속이 대부분 그렇소. 쓸데없이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하지.”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억지로라도 웃으시오. 크게, 환하게, 있는 힘껏.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으면 미소라도 지으시오. 물론 애초에 시비를 걸겠다고 작정한 자들에겐 어떤 웃음도 통하지 않겠지만, 웃는 얼굴에 침을 뱉는 자는 그리 많지 않소.”
“하지만 제가 웃으면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지던데요. 남들은 오히려 놀라고, 기분 나빠했습니다.”
방 누님만 해도 비웃는 것처럼 오해하겠다고 걱정하지 않았던가.
“거울을 보고 연습하시오. 웃음도 무공처럼 수련을 많이 할수록 능숙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즐거움이든 슬픔이든 분노이든, 자신을 똑바로 직시해야만, 자신의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법이니, 거울을 보고 연습하는 걸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오.”
“혹시 그 말도 외조부님이 해주신 겁니까?”
“그렇소. 믿기지 않겠지만, 나도 어릴 때는 답답할 만큼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오.”
“잠깐씩 웃지 않을 때의 얼굴이 워낙 퉁명스럽고 무뚝뚝해 보여서, 믿기기는 합니다.”
“참 솔직한 사람이구려.”
“말씀드렸다시피 거짓말과 아부에 재능이 없습니다.”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지. 그건 그렇고 진 문주, 오늘 방위군을 이끌고 온 것은 훈련 차원이었고, 역시 훈련 차원에서 장원을 포위했으니, 진 문주의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하오.”
“…….”
“그리고 현령님은 나를 포함해서 모두에게 비밀로 한 공무로, 역시 목적지를 알리시지 않은 채로 장기 출장 중이오. 그러니 허현의 행정에 불만이 있거나, 반대로 허현의 발전과 민생의 안정에 대해 제안할 게 있다면 나를 찾아오시오.”
멈춰선 진천은 함께 멈춰선 공손앙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눈싸움을 벌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진천은 다시 걸었고, 공손앙은 한층 진중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떠나기 전에 이번은 현승으로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하겠소.”
“경청하겠습니다.”
“초심을 잃지 마시오. 나는 장기 출장 중이신 헌령님과 달라서, 만약 진 문주가 이전 흑도문의 수장들처럼 헛짓거리하고, 허현과 현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꼴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아, 그래서 비무를 했던 것인가.
지금은 아니어도 훗날 하오문과 사생결단을 낼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가정을 염두에 두고 말이다.
비무를 통해 진천의 무공 수준을 가늠하고, 만약 전쟁이 벌어지면 진천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미리 계획하고 대비하기 위해서.
그렇기에 당장의 승패는 중요한 게 아니었으나, 전략 전술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심리 싸움에 밀린 것이 억울했던 것이고.
“유념하겠습니다.”
물론, 추정에 불과했기에 진천은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할 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떠나시기 전에 저도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공손 현승께서 바쁜 공무로 장기 출장 죽이신 현령님의 공백을 틈타, 그 행태를 고대로 답습한다면, 저 역시 현승님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공손앙은 웃었다.
“유념하겠소.”
이후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다.
때로 대화 없이 걷는 데도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충족될 때가 있는데, 지금 두 사람의 마음이 그러했다.
둘은 그렇게 정문을 나섰다.
그때.
“문주님!”
정문 앞에 진을 친 방위군 너머로 포우산과 문도들이 잔뜩 각오한 표정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방위군이 훈련 중이라 하니, 부문주와 문도들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거기서 멈추세요.”
포우산 등은 진천이 아무런 긴장감도 없이 공손앙과 함께 나란히 나오며 가까이 오지 말라고 제지하니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감히 지시를 거부하지 못하고, 즉시 멈춰 섰다.
“진 문주가 문도들을 잘 통제하고 있군. 아주 든든하오.”
공손앙은 기껍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신불에게 말했다.
“신 현위. 훈련은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가세.”
“예, 현승님. 방위군은 현청으로 귀환한다.”
공손앙과 신불, 방위군이 떠나고, 포우산은 얼른 진천에게 다가가 물었다.
“문주님, 어찌 된 겁니까?”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요.”
“네?”
“왜 이제야 왔습니까?”
포우산은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습니다.”
“만약 동료들에게 일이 생겼을 때 이렇게 늦었다가는 시체만 발견하게 될 겁니다.”
“아!”
뒤늦게 깨달은 포우산은 스스로 뺨을 때리고,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반성하고 끝날 일이 아닙니다.”
“……?”
“왜 늦게 알았는지, 어떻게 하면 이런 정보를 빨리 듣고, 빨리 대응할 수 있는지, 방법을 찾으세요.”
아마도 송웅의 구상 속에, 그리고 궁가방이 나아갈 방향에 그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누구나 궁하면 변화를 모색하고, 결국 답을 볼 수 있게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부문주에 임명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즉각 답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고민하고, 실행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고민하고, 개선하고, 실행하기를 반복하세요. 답을 얻을 때까지.”
“명심하겠습니다, 문주님.”
문득 남궁쾌에게 들은 조언이 떠올라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고 혼자서만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주위의 도움도 받으세요.”
“예, 문도들과 함께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래야지요.”
진천은 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어쨌든, 부문주도 그렇고 모두들 도망가지 않고 와준 건 고맙습니다.”
풀이 죽어 있던 포우산과 문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진천이 문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큭큭.”
그들을 돌아보며 웃음까지 지으며 하는 말에는.
“여러분을 죽이지 않은 보람이 있네요.”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모두 난감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