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69
제 2 장 제왕검형에 맞서다!
장건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짜증도 나고 화도 났다.
‘아, 진짜 왜 이렇게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사람들이 많은 거야?’
다른 때라면 장건도 이렇게 화가 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어미 바구미와 새끼 바구미들은 ‘이히히, 맛있구나. 우리가 건이 녀석이 먹을 쌀까지 다 먹어 버리자.’라면서 열심히 쌀을 파먹고 있을 것이다!
맛난 쌀을 파먹으면서 이히히, 웃고 있을…… 먹으면서 똥까지 싸고 있을 바구미들의 모습이 장건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아까운 쌀!’
없어지는 쌀들에 비례해 땡땡하게 부풀어 오를 바구미들의 배를 생각하면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바구미를 척결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장건은 눈을 찌릿하게 떴다.
‘비무하자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이젠 일하는 곳까지 찾아와서 방해를 하다니.’
순간 뿌연 김 같은 것이 장건의 발끝을 건드렸다.
“이크!”
놀란 장건이 발을 오므리며 반걸음을 물러났다. 뭔지 몰라도 그것이 기의 일종이라는 건 알았다.
‘근데 대체 이게 뭐야?’
이제 안법에도 익숙해진 장건은 순식간에 기를 끌어 올려 암법(暗法)과 명법(明法)을 번갈아 썼다.
‘응?’
장건은 저도 모르게 ‘우와’ 하고 탄성을 지를 뻔했다.
남궁호가 눈을 어지럽힐 만큼 현란한 잿빛 덩어리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남궁호의 몸에 커다란 기둥 같은 덩어리가 하나 서 있었고 그 주위를 수많은 작은 구슬들이 호위하듯 맴돈다. 작은 빛 역시 잿빛을 띠고 있다.
그것이 남궁호의 위기였다.
‘정말 희한하네. 아니, 희한한 건 희한한 거고, 바빠 죽겠는데 나한테 왜 이래?’
그래도 위기가 저런 식으로 발현되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아마도 남궁호가 익힌 무공의 영향으로 위기가 사용되거나 변형된 모양이다.
자세히 보니 기둥처럼 보인 덩어리는 정말 기둥이 아니었다. 커다란 잿빛 위기의 덩어리가 엄청난 속도로 남궁호의 기경팔맥을 돌고 있어서 기둥처럼 보인 것이다. 보통 사람보다 수십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돌고 있다.
그것은 마치 하늘로 검극을 향한 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검이 주변을 장악한 듯한 모습이다.
‘대단하다…….’
거기다 남궁호의 무위가 높은 만큼 그의 위기는 완전히 불투명할 정도로 색이 짙다. 안법을 번갈아 쓰지 않으면 잿빛 덩어리들 때문에 남궁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그 커다란 잿빛 위기의 덩어리는 가공할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마치 파편처럼 연신 작은 덩어리들을 튕겨낸다.
작은 덩어리들은 원심력에 의해 사방으로 퉁겨지며 남궁호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래서 제왕검형의 권역은 커다란 원을 그린다.
사람의 기세라는 것은 위기에서 나온다. 기세가 눌린다는 건 자신보다 강한 상대의 위기를 대했을 때 느끼는 것이다. 당연히 저 지고한 경지의 고수가 내뿜는 위기에 부딪치게 되면 압박을 받게 된다.
비록 작은 덩어리라 하더라도 농도가 무시무시하게 짙고 가속까지 붙어 힘이 배가되어 있다. 덩어리 하나하나가 일급 고수가 지닌 위기와 비슷하다.
비슷한 무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정면으로는 저 덩어리들을 받아내며 움직일 수 없다. 모용전과 소림승들이 꼼짝도 못하고 움츠러든 것처럼 말이다.
어느새 장건은 신기한 수법에 빠져들었다.
‘흐응.’
한눈에 보기에도 장건보다 훨씬 높은 무위를 가진 사람이다. 장건도 그 안으로 들어선다면 움츠러들어서 움직이기 힘들 터였다.
하지만 장건은 그 안으로 들어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작은 위기의 덩어리 하나가 쏜살같이 장건의 몸을 향해 달려든다. 장건이 슬쩍 허리를 뒤로 젖히니 덩어리는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장건의 코앞을 스쳐 지나간다.
덩어리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아차 하면 부딪칠 뻔했다.
‘정말 신기하네.’
문각의 백보신권이 자연의 기, 내공으로 인간이 가진 본래의 기를 타격하는 수법이라면, 남궁호의 제왕검형은 인간이 가진 본래의 기, 위기로 상대의 위기를 억눌러 제압하는 수법이다.
기세로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을 무공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기세가 상상도 못할 만큼 무지막지하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맥은 문각선사님의 백보신권과 비슷하구나.’
같은 ‘검(劍)’자가 붙었지만 검성과 검왕의 수법은 완연히 다르다.
저 무시무시한 위기의 덩어리들이 난무하는 제왕검형의 범위 안에서 펼쳐지는 남궁호의 검은 아무리 하류의 검법이라 하더라도 무시무시할 것이다.
원정 온 적을 안방에서 맞이하는 것과 흡사하다. 심하게 말하자면 반칙이나 마찬가지다.
고수들이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하수에게도 방심하다가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남궁호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보다 약한 하수에게는 완벽할 정도로 강했다.
자신보다 낮은 상대를 철저하게 짓누르는 힘.
그것이 바로 제왕검형이었다.
‘정말 무공이란 알면 알수록 신기하구나.’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해도 이런 새로운 수법을 보면 또 흥미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남궁호의 제왕검형은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장건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제왕검형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사람 몇을 꼽는다면 현 강호에서는 우내십존 정도에 불과했다.
장건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위기를 볼 수 있으니 쉽사리 제왕검형의 권역 안에 갇히지 않았다. 아무리 빠르고 수가 많다 한들 위기의 덩어리들이 일정한 원을 그리고 있으니 그 밖으로 피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장건은 위기를 타격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 ☆ ☆
남궁호의 기운을 느끼고 달려온 윤언강과 허량은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구경하던 풍진을 만났다.
풍진이 핀잔을 던졌다.
“이놈의 늙은이들은 이게 문제야. 하여튼 뭐 재미난 일 없나 하고 돌아다니다가 건수만 생기면 득달같이 달려든다니까.”
허량이 대꾸했다.
“그러는 넌 우리보다도 더 먼저 달려왔잖아?”
“나야 선구안을 가지고 한참 전부터 와 있었지. 딴 거 볼 거 없어. 소림에선 쟤만 쫓아다니면 볼거리가 생기는데 뭐 하러 이리저리 돌아다녀?”
둘의 말다툼에 윤언강은 별 관심이 없었다. 남궁호와 장건이 대립하는 모습을 본 윤언강이 얼굴을 찌푸렸다.
“남궁호, 저 친구가 좀 화가 났나 보구만.”
“내 볼 땐 장난이나 쳐볼까 한 것 같은데, 지금은 아주 애를 잡으려 들고 있더만.”
윤언강의 얼굴 표정은 좋지 못했다. 제자와의 비무를 앞둔 장건에게 남궁호가 해를 가하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파지는 것이다.
하지만 무당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허량이나 제자가 뭘 하든 관심 없는 풍진으로서는 그저 재미난 구경거리일 뿐이었다.
괜히 문사명이 먼저 장건과 비무를 하게 되어 무당이나 청성이 화산에 뒤쳐진다는 소리를 들을 바에야 지금이 훨씬 나았다.
“말려야겠군.”
윤언강이 막 나서려 하는데 허량과 풍진이 말렸다.
“아서. 가만 있어봐. 이제 막 재밌어지려 하는데 왜 찬물을 끼얹으려고?”
“괜히 끼어들었다가 주책 부린다는 소리나 듣지 말고 여기 앉아서 구경이나 해.”
윤언강이 별수 없이 걸음을 멈추자, 한순간도 놓치기 아깝다는 듯 허량과 풍진은 바로 고개를 돌려 장건과 남궁호를 보았다.
“저 조그만 녀석은 남들보다 기감(氣感)이 월등한가? 어떻게 족족 제왕검형의 사정권에서 벗어나지?”
“가만 보면 뭔가 피하는 듯 움직이고 있는 거잖냐.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뭘 피하면서 움직이는 거야.”
“남궁가 놈이 살검(殺劍)라도 날리는 중인가?”
유형화된 살기를 쏘아내어 장건을 공격하느냐고 물은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 대신 풍진이 면박을 주었다.
“이놈아, 그럼 우리가 모를 리 없잖아.”
“하긴, 살검을 날렸으면 우중충한 살기가 느껴져야 정상이지.”
가만히 보고 있던 윤언강도 한 마디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 눈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보법을 밟고 있는데 그게 마치 공동파의 제마보처럼 보이네. 허…….”
“전엔 나한보라고 들었는데? 거 봐. 나한보잖아.”
“저건 곤륜파의 천종미리보 아냐?”
장건의 움직임은 굉장히 최소화 되어 있다. 보법을 밟아도 걸음으로 밟는 게 아니라 발끝으로 조금씩 움직인다. 멀리서 보면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십여 장도 넘게 떨어져 있다고는 해도 우내십존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허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문각선사는 무슨 개뿔…… 홍오의 진전을 이은 게 맞구만. 아니지, 홍오가 훔친 무공을 다 이어받은 것 같구만.”
장건과 직접 손을 맞댄 허량이지만, 장건이 공동파나 곤륜파의 무공을 견식할 기회가 딱히 없었다는 것 정도는 안다. 단번에 배운다고 해도 홍오가 보여주었으니 배웠을 터다.
“저런 놈이 내 제자가 되었어야 하는데…….”
안타까운 마음은 허량이나 윤언강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대체 뭘 보고 피하는 거야? 설마하니 제왕검형을 보고 피하나?”
“제왕검형을 피하는 거라면 그냥 뒤로 물러나면 그만이지. 굳이 이리저리 제자리에서 움직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윤언강의 말에 풍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그럼 보통 사람은 보지 못하는 뭔가를 보고 있다는 얘긴데.”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수법으로 남궁가 놈이 공격을 하고 있거나.”
장건이 우연찮게 안법을 잘못(?) 익혀 위기를 보게 되었다고는 그들조차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윤언강이 풍진에게 물었다.
“한데 왜 남궁호 저 친구가 갑자기 손을 쓰게 된 건가?”
“아참!”
풍진이 돌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바닥에서 손톱만한 작은 돌멩이들을 주웠다.
그리곤 발로 땅을 쓱쓱 밀어 평평하게 만들고는 돌멩이들을 뿌렸다.
윤언강과 허량은 풍진이 갑자기 무슨 짓을 하나 싶어 풍진을 쳐다보았다.
“공기놀이라도 하자는 건가?”
“그게 아니고…… 잘 봐.”
풍진이 쪼그리고 앉아 손바닥으로 땅 위를 훔치듯 슬쩍 휘저었다.
한 번 휘젓고 나자 바닥에 뿌렸던 돌멩이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풍진이 손바닥을 내 보였다. 사라졌던 작은 돌멩이들이 풍진의 손바닥 안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그게 뭐 어쨌다고?”
허량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여러 개의 물건을, 그것도 순식간에 손바닥에 붙이는 건 그들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건 그냥 단순히 흡결을 운용하는 것 뿐이잖냐?”
허량이 손을 내밀자 풍진의 손에 있던 돌멩이들이 허공을 둥둥 떠서 허량의 손 안으로 날아간다.
“이까짓 허공섭물이야 요즘은 개나 소나 다 한다던데, 이게 뭐?”
다른 사람들이 보았으면 기겁할만한 이야기를 허량은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면면이 이미 그쯤은 밥 먹는 것보다 쉬운 것이다.
풍진이 씨익 하고 웃었다. 마치 허량의 그런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럼 이건 어떨까?”
풍진은 차마 돌멩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색한 작은 알갱이들을 내보였다. 손톱 반의 반도 안 되는 크기였다.
풍진은 다시 발로 땅을 밀었다. 이미 윤언강과 허량이 오기 전부터 연습하고 있었는지 작은 돌 하나 박힌 것 없이 땅이 매끈했다.
그 위에 풍진은 작은 알갱이들을 뿌렸다. 팔이 한쪽만 있지 않았다면 팔짱이라도 끼웠을 듯한 태도다.
“뭘 하자는 건지, 원.”
허량은 제자리에 서서 손바닥을 땅 쪽으로 향했다.
휘익.
작은 알갱이들은 물론이고 바닥의 흙까지도 한 움큼 하늘로 떠올라 허량의 손바닥에 붙었다.
“응?”
허량이 눈썹을 추켜세우자 풍진이 낄낄댔다.
“가만 있어봐.”
우수수.
허량은 손바닥에 붙은 흙과 알갱이들을 다시 떨구었다. 그리고는 풍진이 한 것처럼 쪼그리고 앉아 손바닥으로 땅을 훑었다. 땅에 닿지는 않게 하면서 반뼘 정도 거리를 두고 손바닥을 움직였다.
자석에라도 끌린 것처럼 알갱이들이 허량의 손바닥에 올라와 붙는다. 그러나 작은 알갱이들 뿐 아니라 흙도 일부 올라와 붙었다.
“아니? 이게 왜 이래?”
무거운 돌멩이를 당기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작은 돌멩이를 당기려 하니 그 힘에 의해 흙먼지가 날아와 함께 붙는다.
“낄낄낄.”
풍진의 웃음에 허량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허량이 손을 탁탁 털면서 쏘아붙였다.
“넌 할 수 있냐? 할 수 있어서 웃는 거냐?”
“몇 번 연습하니까 겨우 되긴 하더라만. 생각보다 많이 피곤하더라고.”
“이런 젠장, 차라리 십 리 밖의 돌멩이를 땡겨오라는 게 더 쉽겠다. 뭐 하러 이깟 일에 심력을 소모해?”
허량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도전에 나섰다. 승부욕이 부족했다면 지금의 위치에까지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름난 고수들은 모두 태생부터 승부욕이 강하다. 그래서 더 강해지고 점점 더 강해진다.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지만 승부욕이 끓어올랐다.
허량이 심혈을 기울여 천천히 손바닥으로 땅을 훔치자 그제야 제대로 알갱이들만 손바닥에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어렵구만. 사람 살리고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워. 흡결을 섬세하게 운용해서 기를 조절하지 않으면 안 돼.”
풍진이 여전히 킬킬대며 말했다.
“만약 바닥의 흙이 쌀이고 돌멩이가 쌀벌레라면?”
“뭐?”
“쌀 한 가마니에서 그렇게 벌레를 골라내는 데 일다경도 안 걸린다면?”
윤언강과 허량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풍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도 궁금하지? 어떻게 그렇게 내공을 기가 막히게 운용할 수 있는지 궁금하겠지? 그래서 남궁호 녀석이 저러는 거야.”
그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설명되었다.
“허!”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세 노인은 즉시 고개를 돌렸다.
남궁호와 장건이 싸우는 모습도 궁금하지만 그 뒤의 일도 궁금했다.
☆ ☆ ☆
‘너무 빨라서 맞출 수 있으려나?’
장건은 잠시 고민하면서 눈앞을 휙휙 스쳐가는 작은 덩어리들을 주시하고 있다가 곧 공력을 끌어올려 손을 뻗었다. 주먹이 아니라 손끝에 공력을 담아 손가락으로 쳤다.
땅!
정확히 장건의 손가락에 하나의 파편이 걸려들었다.
하지만 남궁호가 지닌 위기의 일부 조각에 불과한 파편의 반발력은 생각보다 컸다.
“우앗!”
파편이 폭발하며 장건은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뒤로 나동그라졌다.
“아고고.”
장건은 쌓아둔 쌀가마니에 몸을 부딪치며 굴렀다.
“역시…… 적당히는 안 되는 모양이네.”
정말 고수를 만난 듯하다.
철비각 종유의 위기를 파괴할 때에도 꽤 힘이 들었는데 지금 위기는 작은 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만큼이나 세다. 그냥 평범한 덩어리가 아니라 남궁가의 비전 무공으로 위력이 배가(倍加)된 위기의 덩어리라 그러하다.
그것이 하나가 아니라 수십 조각이었다.
“역시 내공이 문제야. 요즘 좀 덜 먹어서 그런가? 앞으론 좀 더 열심히 먹어야겠다.”
장건이 투덜대면서 일어섰다.
이를 본 모용전과 소림승들은 깜짝 놀랐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예닐곱 걸음도 더 떨어진 거리에서 장건이 허공으로 손가락을 퉁겼는데 뭔가 파열하는 금속성이 울리며 본인이 나가 떨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작 장건을 상대하고 있던 남궁호는 더 놀랐다.
장건이 손가락을 퉁기는 순간 제왕검형의 권역이 조금이지만 흔들렸던 것이다!
남궁호는 아주 약간이었다고 해도 왠지 가슴이 철렁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놈…….’
어떤 방법으로 제왕검형을 건드렸는지는 모르지만 이건 자존심이 상할 문제였다.
실제 남궁호의 무공 실력은 화산의 검성에 버금가는 검법에 있다. 제왕검형은 그의 검이 가진 위력을 한층 높여주는 검공의 일부일 뿐이다.
강호를 종횡하던 때, 대부분의 경우 제왕검형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으나 제왕검형만 썼다면 남궁호는 검왕(劍王)으로 불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왕검형이 남궁가의 비전인 동시에 남궁호가 가진 두 번째 검이라는 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조금 열을 받았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
남궁호는 제왕검형을 끝까지 밀어붙이기로 했다.
남궁호가 다시금 마음에 검을 세웠다.
하지만 장건의 눈에는 남궁호와 겹쳐진 검 모양의 위기 덩어리가 더 뚜렷해지는 것으로 보였다.
남궁호가 가진 본래의 위기가 더욱 가속하며 빨라지고 그에 따라 튕겨져 나오는 파편의 덩어리도 수가 많아지고 빨라졌다.
장건도 피할 수만은 없었다. 피한다고 해 봐야 결국엔 어쩔 수 없이 물러날 뿐이니 이젠 반격할 때였다.
장건이 함께 공력을 끌어 올리며 주먹을 뻗었다.
꽝!
파편이 부서지며 폭발 때문에 장건의 몸이 휘청거렸다.
장건은 이를 악물고 다시 권을 내밀었다.
가슴 앞에서 파편과 장건의 주먹이 맞부딪쳤다.
떵!
장건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파편을 부수는 것보다 남궁호에게서 튕겨 나오는 파편의 수가 훨씬 많았다.
장건은 질린 얼굴이 되었다.
“와아…….”
적이 몰려와 몇 명을 겨우 쓰러뜨렸는데 그 뒤에 십만 대군이 버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 ☆ ☆
“그런데 저 녀석은 아까부터 대체 뭘 치는 거야?”
장건은 그냥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것뿐인데 뻥뻥 튕겨지는가 하면 살벌한 폭발음까지 나고 있었다.
“얼씨구? 그냥 허공에 뻘짓하는 게 아닌 모양인데? 남궁가 놈이 움찔움찔 하잖어.”
풍진은 손이 하나뿐인 것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이럴 땐 박수라도 치면서 웃어야 제 맛이건만.”
허량도 한 마디 했다.
“쯧쯧, 대검호(大劍豪)라는 놈이 새파랗게 젊은 녀석한테 저렇게 쩔쩔 매는 걸 보니 우내십존은커녕 우내구존이 될 날도 머지않아 보이네그려.”
사람이 자기 당한 건 기억 못한다고, 허량은 남의 일처럼 남궁호가 당하는 걸 고소해 했다.
“우내구존이라고 하면 어감이 이상하잖냐. 차라리 딴 놈 하나 끼워서 우내십존 하면 되지.”
“괜히 그러다가 우내십좆이니 뭐니 한다. 그냥 구존 해. 십좆보단 낫잖어.”
“응? 우내십좆?”
풍진이 되물었다.
“아니, 어떤 에미애비도 없는 자라새끼가 그딴 소리를 해?”
“왜 양가장의 신창인지 뭔지 하는 꼬마 있잖아. 성질 더럽다고 소문난 놈. 그놈이 그랬대. 강호에 소문이 파다해.”
풍진이 눈에 불을 켰다.
“그런 건방진 놈이 다 있나! 이거 사파나 마교보다 더 나쁜 놈일세?”
윤언강도 심기가 불편한 기색으로 허량에게 물었다.
“자넨 그런 말을 또 어디서 들었나?”
“젊은 사람들과 교류를 하다 보면 다 이것저것 주워듣는 게 생기는 법이지. 그러니까 자네들도 젊은 사람들하고 좀 어울려. 나이 많다고 위신만 세우다 보면 세대차이 난다고 따돌림 당한다.”
윤언강이 빤히 허량을 쳐다보았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의 얼굴로 빙글빙글 웃고 있다.
“환골탈태 한 번 했다고 정말 젊어진 줄 아는 모양일세?”
“억울하면 너도 하든지.”
둘이 그러고 있을 때도 풍진은 분을 못 참겠는지 이를 빠득거리고 갈았다.
“양가장의 신창이라고 했냐? 조만간에 어디 그놈 면상 좀 봐야쓰겄다. 내 앞에서도 그런 소리 할 수 있는가 보자.”
허량이 풍진을 토닥였다.
“괜찮아. 네가 아니라도 그놈 아마 곧 혼쭐이 날 게야. 우내십존에 좆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겠지. 좆보다 무서운 게 있거던.”
풍진은 그 말에 조금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허량의 말에 누군가를 떠올렸는지 살짝 몸서리도 쳤다.
“하긴 고 성깔에 그런 말을 들으면 아마 양가장은 쑥대밭이 되고도 남을걸. 나 같아도 고 무서운 것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만을 바랄 테니까. 아마 내 생각인데 ‘네 눈에 난 좆도 안 되게 보이냐!’하면서 문부터 부수고 들어갈걸?”
“큭큭. 그러겠지. 그러고도 남겠지.”
여전히 불편한 얼굴로 윤언강이 말했다.
“험. 자꾸 불편한 말 하지 말고 고운 말들 쓰게. 나이 들어서 그게 무슨 망측한 말들인가.”
“다 늙어서 가리긴…….”
“원래 세상일에 초탈하면 다 이렇게 가릴 게 없어지는 거야.”
윤언강의 이마에도 힘줄이 돋았다.
“방금 젊어졌다고 한 친구가 늙어서 가린다고 순식간에 말을 바꾸는 건 뭐고, 소림에서 다짜고짜 칼질부터 한 친구가 세상일에 초탈했다는 건 또 뭔가?”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 노인네가 뭘 그리 따져, 따지긴.”
“이래서 득도(得道)도 못한 잡것들하고는 말을 섞는 게 아냐. 에잉.”
윤언강은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대꾸를 하기엔 추잡스러워서 더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너희들은 계속 좆타령이나 하든지!”
그렇게 말을 던진 윤언강은 괜히 화난 눈초리로 장건과 남궁호의 맞대결을 지켜볼 뿐이었다.
☆ ☆ ☆
장건은 질겁했다.
겨우 두 번 연속으로 충돌했을 뿐인데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으로 몸이 울렸다.
“이러다간 저 파편들을 다 없애기도 전에 내 내공이 먼저 없어지겠네.”
대환단과 독정으로 내공이 급증한 후에 장건도 자신의 내공이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래인 소왕무나 대팔의 내공도 자기만큼은 되지 않았다. 무진도 자신보다는 적다. 그런데 그만한 내공으로도 저 노인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공이 지극한 수준인 문각이었다면 자신의 모든 내공을 쏟아 부어 단번에 백보신권을 날렸을 테고, 그랬다면 많은 파편이 한꺼번에 쓸려 나갔을 것이다. 파편이라고 해도 결국은 자신의 위기이니 위기를 크게 손상당한 남궁호는 먼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하나 아직 문각만큼의 내공을 쌓지 못한 장건에게는 난관일 수밖에 없었다.
성큼.
남궁호가 한 걸음을 내딛자 위기의 덩어리들도 그만큼을 앞으로 튀어나왔다.
핑핑핑핑―
유성추처럼 위기의 덩어리들이 마구 날아들었다.
장건은 급히 나한보를 밟으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등 뒤에는 쌀가마니가 쌓여 있었다.
턱, 하고 등에 쌀가마니가 걸리자 장건은 아차 싶었다. 너무 노인의 몸에서 튀어나오는 위기만 생각하다 보니 뒤를 신경 쓰지 못했다.
‘크, 큰일났다.’
장건이 멈칫한 순간.
이미 장건은 남궁호가 펼치는 제왕검형의 권역 내에 완전히 갇히고 말았다.
‘으아아!’
남궁호의 몸에서 뿜어지듯 나오는 위기의 파편들이 순식간에 장건의 몸을 여러 번 투과하며 지나갔다.
대번에 몸이 뻣뻣해지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다리가 묵직해지며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휙휙휙!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잿빛 위기의 파편들이 마구 몸을 통과할 때마다 장건은 현기증이 일었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차라리 다행인데, 뭔가가 몸을 뚫고 지나가는 광경을 똑똑히 보고 있는 것이다. 불쾌한 것보다 끔찍했다.
‘빨리 벗어나야 되는데…… 이러다간 쌀을 바구미들이 다 먹어치우겠어!’
내공을 끌어 올리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남궁호가 쏘아낸 위기의 파편들이 장건의 내부를 지나가며 내공의 흐름을 끊고 있었다. 경락을 따라 움직여야 할 내공이 뚝뚝 끊기며 단전에서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
‘망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목숨이 경각에 달하며 생사의 고비를 넘긴 장건이었지만 지금만큼 망연자실하기는 처음이었다.
‘이젠 어쩌지?’
내공의 운행이 멈춰 안법이 풀리면서 위기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눈앞을 오가던 잿빛 덩어리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며 대신 남궁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남궁호는 마치 ‘알밤을 몇 대 때려줄까, 아니면 볼기를 까서 후려쳐줄까’하고 즐겁게 상상하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잡혔군.”
“잡혔어.”
“제왕검형에 갇히면 거의 끝났다고 봐야지.”
윤언강의 말에 허량과 풍진이 그를 돌아보았다.
“꼭 언제 상대해 본 사람처럼 말하네?”
“그러게?”
윤언강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젊었을 때 비무를 한 적이 있었네.”
“호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비겼네.”
“진짜?”
“그럼 내가 뻔히 탄로 날 거짓말을 하겠나?”
“흐음.”
윤언강은 허량과 풍진의 의심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설명했다.
“제왕검형의 영역 안에 들게 되면 우선 몸이 위축되네. 행공을 하는 것도 쉽지 않지. 뭐랄까…… 그래, 마치 잔뜩 몰린 군중의 한가운데에 끼어 있는 듯한 느낌일세. 팔다리를 움직이는데 내 몸 같지 않고 불편해져.”
“그런데 어떻게 비겨? 그럼 남궁가 놈이 이겨야 말이 되는 거 아냐?”
“대신 남궁호 저 친구의 검도 둔해지지. 제왕검형을 유지하는데 상당한 내공이 소모되는 모양이야.”
“오호라. 검에 집중을 못한다는 말이군?”
“말하자면 그런 셈일세. 하나 그 안에 든 나 또한 마찬가지고.”
집중을 못한다고 해도 그 차이는 보통 고수가 알아채기 힘든 정도다. 하나 촌각으로도 생사를 가를 수 있는 경지에서는 그 차이도 어마어마하다.
풍진이 뚱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게 뭐야. 결국은 그냥 물귀신이잖아. 너 죽고 나 죽자는 거 아냐.”
“무공 수준이 비슷하다면 그렇단 말일세. 조금이라도 수준 차이가 있다면 격차가 훨씬 더 현격하게 벌어지겠지.”
“흐음.”
윤언강이 뭔가 찜찜한 듯 첨언했다.
“오래전의 일이니 지금 얘기는 아닐세.”
“누가 뭐랬나? 젊었을 땐 둘 다 비슷했다고 인정해주지. 뭐 그깟 것쯤.”
그때 풍진이 ‘어? 어?’하며 허량의 어깨를 쳤다.
“왜 그래?”
“저거저거, 너희 무당파의 무공 아니냐? 태극경인지 뭔지 하는 그거. 흐느적흐느적 하는 게 딱 그 모양샌데?”
“엥?”
허량이 기겁하며 눈을 돌렸다.
윤언강도 ‘호오’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홍오가 언제 저런 걸 가르쳤을까? 저건 무당의 비기(秘技)일 텐데.”
허량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를 꽉 깨물었다. 턱의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도드라졌다.
“저 망할 녀석이!”
장건은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리며 팔을 젓고 있는 중이었다. 언뜻 보면 헤엄이라도 연습하는 듯했다.
그러나 분명 어설프긴 한데, 거기에는 묘하게도 태극경의 이치가 담겨 있었다.
단순한 원의 동작이 아니라 음과 양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태극의 원리. 손과 함께 몸이 부드럽게 움직여 음양합일을 이루는 움직임.
그것은 분명 절도와 강맹함을 주로 하는 소림의 무공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풍진이 칼칼한 목소리로 웃어댔다.
“아이고, 배꼽이야. 언제인지 몰라도 네놈까지 밑천을 털렸구나! 이놈 저놈 가릴 것 없이 꼬마 대도(大盜)에게 다 털려버렸어!”
허량은 화가 나면서도 어쩔 줄 몰라했다.
내원에 숨어들었다가 들통 난 사건은 다른 이들이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입 싼 풍진과 윤언강 앞에서 장건이 태극경을 쓸 줄이야!
“저 빌어먹을 녀석은 왜 제대로 안 하고 엉터리로 해서 사람 꼴을 우습게 만들어? 이 녀석아, 하려면 제대로 해! 제대로!”
그나마 허량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고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