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150
150화
“기꺼이.”
미소 지은 파엘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짓에, 대기 중이던 단원들이 달려와 한 명씩 일행의 곁에 섰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르시면, 어떤 물건인지 자세히 설명해 줄 것이오. 마음껏 구경하시고, 마음껏 물으시오.”
내뱉은 파엘이 이안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경은 내가 직접 모시겠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메브와 필립을 돌아보았다.
“어제 나눈 대화, 잊지 마시오.”
“그러지.”
“아낌없이 고르겠습니다, 나리.”
메브와 필립이 뒤편의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봉인함을 닫은 샬롯도 이안의 곁에 섰다.
“난 너와 함께 보겠다, 이안.”
그러든가.
이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 단검. 도끼. 창이나 철퇴는 물론, 온갖 종류의 방어구와 보조 장비들이 가득했다. 마도구나 화려한 의장용 장비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혹시, 은으로 만든 무기도 있소? 이왕이면 검이나 철퇴 같은 걸로.”
“은을 도금한 검은 몇 자루 있소만. 보시겠소?”
“전부 보여 주시오.”
“알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공손하게 말한 파엘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를 기다리는 사이, 이안은 옆의 마차 앞에 선 둘을 돌아보았다. 메브는 차분한 얼굴로 단원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필립은 눈을 반짝이며 마차 이곳저곳을 살폈다.
곧 단원이 원형 방패를 들고 그의 곁에 다가왔다. 적당한 곡선을 그리는 매끈한 금속 표면. 한복판에 볼록한 돌기가 몇 개 돋아 있어, 내구성을 보강하고 공격을 흘리기에도 더 용이하게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방패를 팔에 장착한 필립이 균형감이 좋다고 떠들어 대며 웃음 지었다.
신났네, 새끼.
이안이 낮게 피식대는 그때, 파엘이 돌아왔다.
세 자루의 검을 이안 앞의 마차에 늘어놓은 그가 말했다.
“은을 두껍게 입힌 검이오만, 아직 날을 벼리지는 않았소. 아시다시피 무기보단 장식품에 가까운 물건이기도 하고 말이오.”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검을 들었다. 세 자루 다 보통 길이의 장검이었다. 검집과 십자 막이, 자루와 무게추의 장식에 더 많은 공을 들인 물건이었다. 은으로 된 칼날까지 확인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사겠소.”
“세 자루 전부 말씀이시오?”
“다 파실 순 없는 거요?”
“그럴 리가…! 이제 이건 전부 경의 소유물이오. 아, 계산은 저분들과 함께 한꺼번에 할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소?”
“편할 대로 하시오.”
“고맙소. 허허, 참.”
품에서 종이와 깃펜을 꺼내며, 파엘이 웃음을 흘렸다.
“보르 저 친구의 말이 맞았소. 경의 말은, 무조건 듣는 게 좋겠군.”
그가 실실대며 종이에 글자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달려온 단원 하나가 그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파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무래도 필립이 그 원형 방패를 산 모양이었다.
모두가 바쁜 와중에, 이안이 느긋하게 샬롯을 돌아보았다.
“두 자루는 네 거다.”
“내가 쓰기엔 너무 무른 칼인 것 같다만.”
“하지만 그놈들을 상대할 때는 필요하지. 내가 전에 알려 준 적이 있을 텐데.”
“……!”
비로소 눈을 치켜뜬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는 은으로 만든 무기로도 죽일 수 있었다.
“망령 같은 것들에게도 효과가 있을 테니까, 한 자루는 항상 차고 다녀라. 원래 쌍검을 다뤘었잖아?”
이안이 덧붙인 말에, 샬롯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그래. 네 것도 내가 날을 벼리겠다. 사람도 벨 수 있을 만큼 날카롭게 만들어 주지.”
“그렇게 해.”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어느새 다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파엘을 돌아보았다.
“제국 강철로 만든, 가장 튼튼한 검을 한 자루 보여 주시오. 그리고 마도구도 전부.”
“바로 대령하겠소.”
단원 하나에게 눈짓한 파엘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다가온 단원이 은검 세 자루를 들고 물러났다. 구매한 물건을 한데 모아 가져다주려는 모양이었다.
“원래 제국의 상인들은, 다 이런 식으로 거래하나?”
이안의 물음에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왕족이나 고위 귀족들을 상대할 때만. 하비에르 같은 경우엔, 상대가 왕이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모시지 않았다.”
정말 특급 서비스였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바삐 움직이는 단원들과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방패를 들고 있었다. 뜻밖에도 흔히 버클러라 부르는, 가장 작은 크기의 원형 방패였다. 단원에게 요구 사항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었는데, 손에 드는 것이 아니라 팔목 보호대에 딱 맞게 고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 거였다.
단원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가능한 모양이었다.
필립은 그 옆에서 투구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머리는 물론 코와 뺨까지 가리는 판금 투구였다.
저걸 쓰면 귀가 많이 울릴 텐데.
이안은 다시 한번 낮게 웃음 지었다. 저들이 쇼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심, 저들은 이런 걸 누릴 자격이 있다 여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긴. 어차피 혼자서는 다 쓰지도 못할 돈인데.’
이만하면 꽤 보람 있는 지출이라 할 수 있으리라.
“준비되었소.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물으시오.”
바삐 마차를 오가며 물건을 가져온 파엘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가 내민 검을 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 확인이 가능한 검이었다.
희귀 등급의, 제국 강철 장검.
장비 파괴 확률이 옵션으로 붙은 비교적 평범한 검이었지만, 내구도나 공격력은 상당히 준수했다.
물론 단죄의 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건 이 세계의 검 대부분이 그럴 터였다.
‘유물이나 성물 정도 되는 검이 한 자루 더 있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면서도 사겠다는 의미로 검을 옆으로 내민 이안이, 앞에 놓인 마도구들로 시선을 돌렸다.
다가온 단원이 그의 손에서 검을 받아들었다. 이안은 가장자리에 놓인 랜턴의 손잡이를 쥐었다. 중앙의 네 면이 유리로 된, 이 세계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정보창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마석등.
“마력으로 작동하는 물건이오. 마석을 이렇게 조정하면, 중앙에서 빛이 나오지.”
파엘이 랜턴 하단의 마석을 꾹 눌러 끼우며 말했다. 유리관 너머로 은은한 빛이 번졌다.
“보시다시피 그리 밝지는 않소. 대신 꽤나 오래 쓸 수 있다더군.”
이안은 마석등을 얼굴 앞으로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에 차고 다니기에 충분한 크기였고, 유리 부분을 제외하면 내구도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그의 시력은 어둠 속에서도 이 정도의 광원만 있으면 충분할 만큼 좋았다.
“이런 건, 마탑의 마법사들에게서 직접 구하는 것이오?”
“그들이 만든 물건을 상인들에게 공급하는 자가 있소. 마법사들은 이런 마도구는 거의 만들지 않소. 하찮다고 여기는 건지, 견습생들이 연습 삼아 몇 개씩 만드는 게 전부지. 어쩌면 용도에 비해 쓸데없이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소. 그렇잖소?”
어깨를 으쓱인 파엘이 덧붙였다.
“그냥 횃불이나 등잔을 들고 다니면 되는데. 굳이 그보다도 어두운 데다 마석까지 필요로 하는 물건을 쓸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오. 심지어 몇십 배는 더 비싸기까지 하고.”
“그걸 알면서도 이걸 사셨군.”
“희귀한 물건이잖소. 물론 마법 무구보다 훨씬 싸다는 이유가 컸지만, 어쨌든 실제로도 마법 무구보다 훨씬 더 소량만 만들어지는 물건이오. 귀족들은, 그런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지갑을 열지.”
“내 지갑도 열렸소. 난 쓰려고 사는 거지만.”
마석등을 옆에 놓은 이안이, 다른 마도구들도 차분히 눈에 담았다.
대부분 희귀하지만 그다지 쓸모는 없는 것들이었다. 회로를 작동시키면 잉크가 지워진다는 책이나, 손바닥에 바람이 불어 땀을 날려주는 장갑 같은.
“호오.”
이윽고 이안은, 그 사이의 고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얇은 표면에 주문 회로가 촘촘하게 새겨진 팔찌였다. 정보창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탄성을 흘린 건, 그 성능 때문이었다.
“안목이 좋으시군. 그게 이 중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오. 잠시 주시겠소?”
이안에게 팔찌를 받아든 파엘이 그대로 손목에 찼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난 그가 손아귀를 까딱였다.
일순간 마력이 번지면서, 번뜩이는 푸른 역장이 팔뚝 위로 피어올랐다.
푸스스-
역장은 불과 몇 초 만에 다시 사그라들었다. 손을 털어 마력의 잔흔을 흩트리며, 파엘이 말했다.
“마력 역장이오. 화살이나 칼날을 한 번 정도는 막아 줄 물건이지. 대 여섯 번 정도 사용하면 마석을 교체해 줘야 하지만… 아시잖소? 권력자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안전을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장은 탐이 나지만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스킬 트리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도 이런 식으로, 존재는 하지만 배울 수는 없는 종류의 마법이나 기술들이 여럿 있었다. 아이템이나 퀘스트를 통해서만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스킬들.
따로 익혀서 써보려는 시도는 진즉에 포기했다. 그는 마력이 마법으로 구현되는 원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가장 비싼 거라면, 얼마요?”
“본래는 금화를 칠십 개는 받아야 하는 물건이오. 하지만 경께는 오십 개에 드리겠소.”
“사겠소.”
이러다 정말 모은 금화를 다 쓰겠는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팔찌를 받아들었다. 보호의 팔찌. 설명대로, 1레벨의 마력 역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남은 횟수는 네 번. 아쉬운 대로 만족스러운 횟수였다.
어쨌건 휘몰아치는 방벽 보다 좁은 범위를, 서리 방패보다 빠르게 방어할 방법이 생긴 것이다.
파엘의 말이 이어졌다.
“소형 마석을 하나 더 챙겨 드리겠소. 공짜요. 많이 구매하셨으니, 이 정도 덤은 얹어 드려야지.”
세공한 마석을 구할 방법도, 찾아봐야겠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방어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후로도 구매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중소 규모의 상단이라 해도, 제국의 상인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물건들이 여럿 있었다.
게임에서 제국의 상인과 마주치길 바랐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러고 보니, 현실이 되고 나서 제국의 상인과 거래한 건 처음 아닌가?’
북부는 엄밀히 말해서, 자치령이니까.
생각하며, 이안은 구매를 결정한 물건들을 돌아보았다. 방패와 투구. 각반. 사슬 갑옷과 견갑. 팔목 보호대. 장검과 은검. 몇몇 마도구까지. 이안은 물론이고 일행이 저마다 고른 물건들이 한가득이었다.
새삼 그간 번 돈이 얼마나 많았는지 실감이 났다.
“대금 확인이 끝났소.”
금화를 딱 맞게 챙긴 파엘이 얼굴 가득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얼굴에 혈색이 돌고 있었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소. 어떻게 처분해야 하나 걱정하던 물건들도 있었는데 말이오.”
“너무 솔직하시군.”
이안이 피식댔다. 그동안 모은 금화가 거의 다 없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 여럿이었으니까.
심지어 흡혈 일족과의 전투를 앞둔 시점이 아니던가.
“물건은 바로 착용하시겠소? 아니면, 여관으로 옮겨 드릴 수도 있소만.”
“마차에 얹어 주시오. 우린 곧 떠날 거니까. 물건을 챙겨서, 한 시간쯤 뒤에 마구간 앞에서 다시 봅시다.”
“한 시간이라. 잘됐군. 나도 남은 물건을 정리해야 하니, 그리하겠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단원들이 멀어지자, 메브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영 마음이 편치 않구나. 네가 목숨 걸고 번 돈을, 너무 많이 쓴 것 같아.”
“그럼 그만큼 더 열심히 싸워 주시면 되겠군.”
덤덤하게 대답한 이안이, 메브와 필립을 일별하고는 여관의 문고리를 쥐었다.
“돈은 또 벌면 그만이오. 떠날 채비나 합시다.”
***
어느덧 오후였다.
보통은 다들 도시를 찾아 들어오는 시간이건만. 이안 일행은 반대로 떠날 채비를 끝마쳤다.
방주 상단의 단원들이 마차에 그들이 구매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실었다.
분배와 정리는 도시를 떠난 뒤에 하려는 모양.
마무리되길 기다리던 파엘이, 비로소 마차에 탄 이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볼 때, 이들은 전쟁에 준하는 위험한 일을 앞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고작 넷이서 저렇게나 많은 병장기를 추가로 구매할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루 사드에 고용되어 전쟁에 합류하려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다면 변방의 판도가 또 한 번 달라지리라.
그런 생각들을 이어 가면서도, 파엘은 아쉬운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하루 더 묵고 가시지. 성공적인 거래를 기념하며, 한 잔 마셔 줘야 하지 않겠소?”
“갈 길이 멀어서 말이오.”
의자에 기대앉은 이안이 말했다. 딱히 아쉽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 북부에서 봤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럼 다음에 합시다. 무슨 용무로 루 사드에 가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다 끝나면 꼭 보르타에도 한 번 들러 주시오. 내 성대하게 대접할 테니.”
파엘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당연했다. 만날 때마다 도움을 주는 자가 아닌가. 루 솔라께서 점지한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훌륭한 상인은 그런 직감을 외면하지 않는 법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들르겠소. 물론, 귀하가 상행을 무사히 끝내셨을 때의 얘기겠지만.”
이안이 덧붙인 말에,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통수로 보르의 시선이 느껴졌다. 흘려듣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일 터였다. 그게 아니라도, 그는 이안의 경고를 이미 가슴에 새긴 상태였다.
“염려 마시오. 일정대로 끝낼 것이니. 아, 그리고 이거.”
파엘이 손에 들고 있던 목함을 내밀었다. 이안이 받아들자, 그가 덧붙였다.
“감사는 좋은 술로 표시해야 하는 법이지. 우리 지방 특산품인데, 포도주를 증류한 걸작이오. 한 모금만 마셔도 향이 다음 날 아침까지 코에 남소. 물론, 독하기도 하고.”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목함을 열어 그 안의 술병을 눈에 담은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파엘을 돌아보았다.
“잘 마시겠소. 남은 돈을 털어서 이걸 몇 병 살 걸 그랬군….”
“보르타에 오시면, 아예 술통째로 드실 수 있게 내 드리겠소.”
“그렇다면 꼭 들러야겠군.”
“말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되겠소? 어제는 어쩌다 보니 그냥 지나가 버려서 말이오.”
덧붙인 말에,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물어보라는 듯한 시선에, 파엘이 목소리를 낮췄다.
“북부의 용살자. 혹시, 누구인지 아시오?”
“…….”
“경이라면 어쩌면 아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마부석에서 가르릉대는 낮은 소리가 번졌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샬롯이 모른 척 길게 하품을 했다. 메브는 헛기침을 하며 안면 가리개를 내렸고, 입술을 입안으로 밀어 넣은 필립도 이안의 시선을 피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다시 파엘을 돌아본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중에 북부에 가게 되면, 북부인들에게 직접 들으시오. 그러는 게 귀하를 위해서도 좋을 거요.”
“……?”
파엘이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뻑였다. 싱긋 미소 지은 이안이 말했다.
“그럼, 연이 닿으면 또 봅시다. 보르타의 파엘. 그리고 보르.”
그가 파엘의 뒤에 선 보르와도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 샬롯이 고삐를 흔들었다.
덩치가 크고 갈기가 풍성한, 북부 혈통의 말들이 힘차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파엘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건넨 두 기수도 재빨리 그 옆으로 따라붙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한동안 푹 쉰 뒤에 북부로 가자.”
뒤에 선 보르가 문득 말했다.
파엘이 그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왜, 북부의 대전사가 용살자라니까, 피가 끓는 모양이지?”
“방금 경이 한 말을 들었을 텐데. 북부에 가서 그 이름을 듣는 게, 단주를 위해서도 좋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혹시, 용살자와 아는 사이라는 뜻이 아닐까?”
드물게도, 보르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군. 다들 북부의 초인이 누구인지 아는 눈치였어.”
“…북부에 가면, 일단 경의 이름부터 팔아 봐야겠군. 운이 좋다면 용살자와도 연이 닿을지도 모르지. 그게 통한다면… 다음번엔 술 한 병으로는 턱도 없겠어.”
내뱉으며, 파엘은 성문을 돌아보았다. 이안 일행이 탄 마차는 이미 밖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 전에, 살아 돌아갈 생각부터 하는 게 좋겠군. 다들 단주만큼이나 욕심에 눈먼 자들이니까.”
이어진 보르의 핀잔에, 파엘이 피식대며 몸을 돌렸다.
“걱정 말게. 우린 무사히 오른델에 도착할 거고, 살아서 돌아오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때는, 제국에 새로운 상인 연합이 탄생하게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