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
샬롯이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얼마나 필요해질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지간한 건 하루면 구할 수 있을 거다. 병기고에 물건이 제법 있어 보이더군. 도시의 대장간에도. 관리를 적당히 구슬리면 구매할 수 있을 거야.”
“최면이 딱인데, 이젠 쓸 수가 없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번 시도나 해 볼까?”
테사이아가 끼어들었다.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괜한 짓 하지 마라. 그냥 돈으로 사. 경, 내일 샬롯과 함께 장비를 구매해 주시오.”
“그러지.”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술병을 받아 드는 사이, 필립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설마, 모레 바로 떠나려는 건 아니시겠죠? 나리께서 요양하시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요양은 무슨.
피식한 이안이 붕대를 칭칭 감아 팔을 고정해 둔 그의 어깨를 턱짓했다.
“나보단 네 걱정이나 해라. 그 상태론 칼도 못 휘둘러.”
“전 거뜬합니다. 성물의 가호를 받고 있으니까요. 상처가 깊긴 했습니다만 덧나는 일 없이 아물고 있고, 후유증도 없을 겁니다.”
“센 척만 늘어선…. 경은 어떻소?”
“나는 네 뜻에 따르겠다. 언제라도 상관 없다.”
“준비는 우리 셋이 해도 충분하니까, 너희 둘은 휴식에만 전념하면 좋겠군.”
메브에 이어 샬롯이 덧붙였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필립이 단호하게 내뱉었다.
“종자인 제가 굳은 일에 빠질 수는 없죠. 쉬시는 건 이안 나리만으로 충분합니다.”
“글쎄…. 지금 네 꼴로 봐선 별 도움 안 될 것 같은데. 주근깨.”
테사이아의 직설적인 말에, 이미 발그레하던 필립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곧 그가 힘을 쓰지 않고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흥정이나 협박 따위였다.
일행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저마다 다음 여정을 위해 준비해야 할 물품들에 대해 떠들어 댔다.
이안은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주먹만 쥐락펴락했다.
아직 몸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통증은 적었지만, 부러지고 금 간 뼈가 간신히 이어 붙은 정도일 터였다.
어쩌면 타락용에게 죽다 살아난 때보다 회복할 시간이 며칠은 더 필요할지도 몰랐다.
하긴. 이번에는 회복을 도와줄 용의 마력이 없었다.
‘이것도 충분히 괴물 같은 회복력인데. 사람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군.’
피식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럼, 모레 아침에 떠나는 거로 하지.”
필립이 홱 그를 돌아보았다.
“정말 그렇게 빨리요? 겨우 하루만 더 쉬시겠단 말씀이잖습니까!”
“혹시 나 때문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이안. 부족에 남은 시간은 그리 촉박하지 않아.”
샬롯이 뒤이어 덧붙였다. 고개를 저은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이동하면서 쉬면 돼. 대신 여기 머무는 동안엔 꼼짝도 하지 않을 거니까, 내가 나설 일 없게 확실히 준비해.”
“…그래. 그러지.”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브도 자기만 믿으라는 듯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러시다면야 어쩔 수 없죠, 하고 중얼댄 필립이 이내 일행을 한차례 돌아보고는 미소 지었다.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군요. 저와 우리 나리 둘이서만 타락자를 추적하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용을 죽인 북부의 초인에, 눈을 가리고도 뱀파이어를 죽일 만큼 뛰어난 수인 전사. 거기다 한때는 마족이었던 원로 요정까지 함께 해주시게 됐으니 말입니다. 이 여정의 끝에 얼마나 대단한 타락자가 기다리건, 아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듭니다.”
술잔을 든 그가 취기 어린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래 봐야 개인에 불과할 자가, 흡혈 일족 전체만큼 강할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메브와 샬롯, 테사이아가 동의하듯 술잔을 들었다. 이안이 중얼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 자리에 미구엘이 없어서 다행이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놈이 있었다면, 네가 하면 안 될 말만 줄줄이 골라서 읊는다고 난리를 쳤을 테니까.
속으로만 읊조린 이안이,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들었다.
“술이나 마셔라.”
굳이 분위기를 망칠 말을 다 내뱉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잔에 담긴 포도주를 단숨에 전부 마신 테사이아가, 텅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은 건 바로 그때였다.
“그래서, 대체 제국 서부 어디로 가는 건데? 타락자는 또 뭐고.”
“그러고 보니, 테사는 아직도 모르시겠군요. 흠… 어디서부터 말씀 드려야 할지.”
“처음부터 전부.”
“그럴까요? 좋습니다, 어차피 밤은 이제 시작이니까요.”
“너도 한 번씩 마음에 드는 소릴 하네, 주근깨.”
웃음 지은 필립이 술을 들이켜고, 테사이아가 능숙하게 자신의 술잔을 채웠다. 메브와 샬롯도 연신 술을 홀짝이며, 시작된 필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술꾼들만 모였군.
이안은 소리 없이 웃음 지으며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왁자지껄한 대화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늦은 밤, 접시와 술병이 남김 없이 비워질 때까지.
***
예고대로, 이안은 방을 떠나는 일 없이 휴식에 전념했다.
아침부터 육류 위주의 식사를 배불리 하고, 그 외의 시간은 전부 침대에서 보냈다.
물론 일행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필립은 물론이고 테사이아까지 그랬다. 심지어 흥정에 꽤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무표정하게 빤히 응시하고 있으면, 다들 귀족에게 추궁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초조해한다는 것이다.
아마 원로 요정으로 거듭나면서, 특유의 이질적이고 고고한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진 덕분이리라.
“제가 얘기할 때는 콧방귀만 뀌던 상인들이 알아서 물건 값을 깎아줍니다. 이젠 슬슬 화가 날 지경이군요.”
잠결에 이런 필립의 투덜대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칠 정도였다.
“샬롯도 이런 기분이셨습니까?”
“아니. 나는 그럴 때 손톱이나 이빨을 보여준다. 그러면 거기서 숫자가 조금 더 줄어들지.”
“…….”
“아무래도 넌 흥정에는 재주가 없는 것 같군, 필립.”
“아니… 그런 걸 흥정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넌 말과 마차의 점검에만 신경 써. 힘쓰는 일도 하지 마라. 어깨의 상처가 터질지도 모르니까.”
“…예.”
때때로 방에 돌아오는 일행의 대화를 귀에 담으면서도, 이안은 잠에 취한 하루를 보냈다.
일행은 정말 단 한 번도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밤에도 바닥에 깔린 가죽 위에 저마다 흩어져 누워 잠을 청했고, 침대를 양보하려는 이안의 말은 아무도 듣지 않았다.
이안이 침대를 벗어나기 시작한 건 다음 날 오전 부터였다.
도시가 이른 아침부터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포도주가 담긴 술잔을 든 이안이 창가에 나른하게 기대 섰다.
일행이 머무는 방은 성의 가장 높은 층, 가장 깊은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내성의 정문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도시의 전경은 비스듬하게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안의 시선은 크고 작은 건물들 너머, 막 성문을 통과하는 일련의 무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도시를 빠져 나가는 건 오스릭 경이 지휘하는 병사들입니다. 국경의 펠미르로 가서, 성의 지휘권을 장악할 계획이라더군요.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요. 현 지휘관들은 흡혈 일족의 끄나풀이라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까요.”
어떻게 알았는지, 뒤에서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메브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그가, 이안에게 다가오며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새 영주인 벨란 자작은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진작 떠났습니다. 도노반 주교님을 대동하고 수도로 간다더군요. 거기서 왕가와 도시의 혼란을 잠재운다는 명목으로 실권을 잡을 생각이겠죠. 더불어 새 작위도 받고 말입니다.”
걸음을 멈춘 그가 짧게 혀를 찼다.
“다들, 영지를 손에 넣을 생각에 눈이 벌개진 모양입니다.”
“명분도 충분하고 시간 싸움이나 다름 없는 문제이니 서두르는 건 이해가 간다만….”
읊조리며 이안의 곁에 선 메브가, 하늘을 덮은 먹구름만큼이나 칙칙한 도시의 전경을 훑으며 덧붙였다.
“병력을 너무 많이 차출했다. 덕분에 글루미르는 지금 무방비나 다름 없어. 본래도 병력이 그리 많지는 않아 보였거늘….”
“그게 다 우리 덕분 아니겠습니까. 애초부터 전선에서 동떨어진 지역인데, 이젠 근방에 마물도 없으니까요. 이미 어제부터 성문을 활짝 열어두고 사람들을 받더군요. 이곳은 안전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겠죠.”
“…어쨌든, 우리는 이제 안중에도 없단 거군.”
심드렁하게 내뱉은 이안이 술을 홀짝였다. 필립이 어깨를 으쓱였다.
“떠날 준비까지 바쁘게 하고 있으니 더 그럴 겁니다. 사실, 우리가 여기 눌러 앉는다고 해도 막을 명분도 없고요. 엄연히 루 사드의 구원자들 아니겠습니까? 새 영주가 서둘러 떠난 건 그래서일지도 모릅니다.”
필립이 묘한 눈빛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나리가 마음을 바꾸시기라도 하면, 글루미르를 내어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러길 바라는 말투로군.”
“그럴리가요. 나리가 고작 이런 영지 하나를 다스릴 인물은 아니시죠. 나라 하나라면 모를까.”
나라도 줘도 안 가지거든? 차라리 스킬 포인트 하나가 더 좋지.
짧게 실소한 이안이 무관심한 눈길로 도시를 훑으며 내뱉었다.
“떠날 준비는?”
“거의 다 끝났습니다. 우리가 도시에 들어올 때 탔던 제국제 마차를 타고 떠날 겁니다. 말도 세 마리 준비해서, 먹이를 든든하게 먹여주고 있고요. 옷과 식량도 충분히 구비해 뒀습니다. 보다시피, 급한 대로 새 장비도 구했고요.”
필립이 멀쩡한 오른팔을 옆으로 펼쳐 보였다. 한쪽 견갑이나 팔목 보호대 따위가 전부 새로 산 물건이었다.
그 와중에도 방주 상단에서 구매한 물건 중 멀쩡한 것들은 짝이 안 맞아도 그대로 쓰고 있어서, 성기사의 종자 보다는 베테랑 용병 같아 보였다.
“그래. 알아서 잘 했겠지.”
이안이 술을 홀짝이며 대답하는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묵직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각종 장비들을 품에 안은 샬롯과 테사이아였다.
식탁 위에 장비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많이도 샀군.”
“다 네 거다, 이안.”
이어진 샬롯의 말에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나 혼자 쓰기엔 많아 보이는데.”
“쓸만해 보이는 건 다 들고 왔다. 물건 보는 안목은 네가 가장 좋으니까, 골라서 선택할 수 있게.”
“걱정 마. 남은 건 가지고 가면 돈을 다시 돌려 받기로 했으니까. 물론 그건 야옹이가 할 거고.”
테사이아가 물건들을 짝을 맞춰 늘어 놓으며 덧붙였다.
무슨 맞춤 서비스인가.
비로소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흡혈 일족과의 전투 이후로, 그는 사실상 장비를 전부 새로 맞춰야 했다.
“이거. 이거. 이거. 그리고-”
이안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툭툭 건드려 보고는 어렵지 않게 필요한 것들을 분류했다.
아쉽게도 대부분은 전에 쓰던 것보다 성능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좋은 장비라도 결국은 소모품이었다. 성물에 가까운 단죄의 검조차 반 토막이 나버리지 않았던가.
“좋아. 끝이네.”
이안이 선택할 때마다 휙휙 장비들을 침대 옆에 옮겨 놓은 테사이아가, 손을 탁탁 털며 미소 지었다.
“남은 건 야옹이가 돌려주러 가고, 난 이제 뒷마당으로 나갈 거야. 빨강 머리가 검술을 알려 주기로 했거든.”
“검술을…?”
이안은 새삼 테사이아를 눈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각종 가죽 방어구들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심지어 옆구리에는 그럴싸한 장검도 한 자루 끼워둔 채였다.
활동성을 중시한 복장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어엿한 요정 전사가 따로 없었다.
원로는 마법사인 것 같던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사라고 검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가 그렇듯이.
“염려 마라, 이안. 다치거나 사고가 생길 일은 없게 할 테니.”
메브가 덧붙였다. 짧게 웃은 이안이 잔을 내려놓았다.
“날 두들겨 패던 때처럼만 하지 마시오. 저 녀석 성격에, 그러면 정말 죽자고 달려들지도 모르니까.”
“그럼 그만큼 배움이 빨라지겠군.”
그러시겠지.
이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 침대로 향했다.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을 때 억지로라도 더 자둘 필요가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덜컹대는 마차나 말 안장 위에서 종일 시간을 보내야 할 테고, 모닥불에 의지해 잠들고 이슬을 맞으며 깨어나는 생활이 반복될 테니까.
일행들이 조용히 방을 빠져 나가기 시작한 가운데. 맨 뒤에 선 필립이, 침대에 누운 이안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모든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나리는 맘 편히 쉬기만 하십시오. 우리는 내일, 무탈하게 글루미르를 떠나게 될 겁니다.”
***
‘…무탈은 개뿔.’
이안이 생각과 함께 눈을 뜬 건 늦은 새벽이었다.
어두운 천장을 응시하는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염된 마력의 파장이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순간에 갑자기 나타났고, 심지어 그리 멀지도 않았다.
신경이 곤두서는 가운데, 귓가로 아주 희미한 소리가 파고들었다.
두꺼운 판자를 부수는 듯한 소리. 이어진 짧은 비명.
…대문을 부수고 들어온 건가.
이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
“…….”
이미 눈을 뜨고 있던 테사이아와 상반신을 일으킨 메브. 그리고 샬롯까지 연달아 일어나 서로를 한차례 돌아보았다.
철컥, 촤르륵-
그리고 곧,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마다의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대화는 한 마디도 필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