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그래.”
“…용의 대행자가 왜, 아니,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용이 나리를 노린답니까? 나리는 저 위대한 백금룡의 대행자인데요? 용을 죽인 것 때문에 원한이라도 사신 겁니까? 그럼 왜 그동안 아무런 말씀도-”
순간 입을 뻐끔댄 필립이, 이내 쏟아내듯 질문을 토해냈다.
숨 넘어가겠네, 새끼.
“나도 몰랐다. 날 쫓아오는 놈이 있다는 것도, 그놈이 용의 대행자라는 것도. 전부 마주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들이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알려줄 수 있겠느냐?”
한 손을 들어 필립의 말을 막은 메브가, 녹색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며 덧붙였다.
“네 말을 의심해서 묻는 건 아니야. 사실 나도 의문을 품고 있었다. 놈이 다루는 힘에서 신성력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해서, 나는 공허의 힘이리라 여겼지.”
“그게 바로 용의 마력이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이안이 말을 이었다.
“나는 신성력과 혼돈력, 용의 마력을 모두 경험해 봐서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소. 게다가 그놈을 죽인 뒤에 나타난 기척도 분명 용이었지. 아마 경도 느끼셨을 텐데.”
“그랬지. 공허의 존재이리라 여겼을 뿐…. 그래… 비단 공허의 괴물들만이 그런 존재감을 지닌 건 아니지. 용이라 해도 충분히….”
메브가 비로소 탄식을 흘렸다. 뭔가 말하려는 필립에게 다시 기다리라는 눈빛을 보낸 샬롯이 덧붙였다.
“하지만 타락용은 이미 죽었을 텐데. 네가 죽인 용의 잔해를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만.”
“타후므리트는 죽은 게 맞아. 대행자를 보낸 건 다른 놈이다.”
“어떤 놈인지, 짐작은 가?”
테사이아가 뒤이어 물었다.
그녀는 다른 일행들과 달리, 그저 흥미로울 뿐이라는 듯이 눈을 빛내며 술을 홀짝대고 있었다.
사실 이미 이름까지 알고 있었지만, 이안은 태연하게 어깨를 까딱였다.
“글쎄. 백금룡은 모든 용은 언젠가 필연적으로 광기에 물들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했었지. 타후므리트가 사랑에 눈이 멀었듯이.”
술잔을 든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그 흑기사 놈은 본인을 사도라 칭하고, 자신이 섬기는 용을 참된 신이라 여겼다. 그러니까 이놈은, 자신이 신이라는 과대망상에 빠진 놈이겠지.”
“그렇게 정신 나간 용이 있다면, 어째서 아직까지….”
“…역천룡.”
읊조리던 샬롯의 말을, 필립의 얼빠진 목소리가 잘랐다.
일행들의 시선을 받은 그가 미간을 좁히며 덧붙였다.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니시겠죠? 다른 것도 아니고, 역천룡의 전설인데요. 신을 참칭하며 천상에 오르려 한, 희대의 악룡.”
샬롯과 테사이아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빡였다.
물론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게임에서 라크마흐와 싸우기까지 했지만, 놈의 사연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사제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말해 주곤 하는 이야기다.”
입을 연 건 메브였다.
“먼 과거, 대륙을 피로 물들이며 공포로 군림하던 악룡이 있었다. 그 힘이 어찌나 강대한지, 같은 용조차 그를 막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정도였다지. 그의 오만은 극에 달했고, 끝내 자신을 신이라 칭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종족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용들조차 그의 뜻을 따랐다더군.”
포도주로 입술을 축인 그녀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놈은 끝내 천상에 오를 준비까지 했지. 교단의 용사들이 떨쳐 일어선 건 그때였다. 그들은 황금의 용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는 그 청을 받아들여 함께할 용들을 모았지. 그리고 악룡이 의식을 거행하는 그날, 결사대와 악룡을 숭배하는 이들 간의 전투가 펼쳐졌다. 수많은 용과 교단의 용사들이 목숨을 잃었지.”
메브의 목소리가 아련해졌다. 먼 과거, 이 이야기를 듣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듯.
“그리고 그들의 희생과 염원이 천상에 닿아, 악룡에게 신벌이 내렸다. 그리고 황금의 용이 그의 날개를 꺾어 추락시켰지. 그리고 교단의 용사들이 목숨 걸고 용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신을 참칭한 악룡은 죽었고, 그 이름은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졌지. 그리고….”
어깨를 으쓱인 그녀가, 묘한 눈빛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인간의 편에 선 용들은 교단의 성자가 되었다. 악룡의 날개를 꺾은 용이 바로, 그 위대한 백금룡이지. 교단은 신과 용의 가호를 모두 받게 되었으며, 모든 인간이 한마음으로 빛을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시대가 열렸다더군. 그러니 항상 찬란한 여신과 교단의 성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라는 게, 내게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사제님의 말씀이셨다.”
“재미있는 이야기네.”
재미는 개뿔. 뻔하기만 하구만.
테사이아의 말에 이안이 소리 없이 코웃음을 치는 사이.
“이제 보니, 그게 단순한 전설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메브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맺었다.
이안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양이오.”
“…제가 꺼낸 말이긴 합니다만.”
필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생각할수록 믿기 어렵군요. 전설에 의하면 역천룡은 죽었습니다. 말 그대로 까마득한 과거의 존재이기도 하고요. 전쟁의 시대와 내전의 시대보다도 더 먼 옛날이요.”
“글쎄. 내가 느낀 바로는 멀쩡히 살아 있던데.”
“다른 용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백금룡은 용이 일으킨 문제에는 전력으로 개입할 권한이 있어 보였다. 다른 놈이 있다면 진작 처리했을 거야. 그의 시선을 피해 이런 짓을 꾸밀만한 용이 여럿일 것 같진 않다만.”
“…그럼, 이안 나리께선 정말 그 고대의 악룡이 아직도 대륙 어딘가에 멀쩡하게 살아 있으리라 보신다는 거군요.”
“일단은. 난 그딴 전설보다, 내가 직접 경험한 걸 더 믿어.”
사실 이미 답을 알아서 죄다 끼워 맞춘 거긴 하지만.
“루 솔라여….”
비로소 탄식을 흘린 필립이, 술을 벌컥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런 엄청난 죄를 저지른 존재를, 왜 죽이지 않고 살려 뒀답니까?”
“죽음은 지나치게 자비로운 형벌이니까.”
잔을 든 샬롯이 툭 내뱉었다. 필립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교단은 그 악룡이 산채로 고통받게 만든 거다. 가능한한 오래. 어쩌면, 영원히.”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과거 우리 수인들이 섬기돈 신도,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처지가 되었으니까.”
“아하….”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댄 필립이, 애꿎은 술잔만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럼 그리 확신하실만 하지요. 제가 무지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라. 나 역시 찬란한 여신을 섬기니까.”
샬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메브가 탄식하듯 읊조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토록 오랜 형벌을 받으면서도 야욕을 버리지 않았단 말인가…. 놀랍고도 두려운 일이군. 지금에 와선 어떤 괴물이 되어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버리지 않은 수준이 아니지. 그 와중에도 자신의 신도를 만들고, 힘을 내릴 수도 있는 상황까지 만들어 낸 거니까.”
이안이 덧붙인 말에 순간 굳어졌던 필립과 메브가, 이내 탄식했다.
“그렇겠군요. 왜 나리를 노린 건지도 알겠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백금룡에게 원한이 깊을 테니, 대행자를 죽이는 방식으로 복수하려는 거겠죠.”
“이유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
잔에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켠 이안이, 빈 잔을 툭 앞에 내려놓았다.
“그보단, 그놈의 대행자가 하나가 아니리란 사실이 더 중요하지.”
“……!”
테사이아를 제외한 일행 모두의 눈이 커졌다. 샬롯이 그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런 놈들이 더 있단 거냐?”
“날 죽이고 유일한 대전사가 될 거라고 지껄였으니까. 비슷한 처지인 놈이 여럿인 거야. 그 도마뱀이 내 목에 보상이라도 건 모양이지.”
“훌륭하군… 또 그런 엄청난 것들과 싸울 수 있다니.”
미소 짓는 샬롯을 제정신이냐는 듯 바라본 필립이, 이내 탄식했다.
“그래서 여기 계속 머물면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하신 거군요.”
“그래. 놈들은 내 위치를 아니까. 아마, 제국을 경유했을 때 알려졌겠지. 내 신분을 정확히 밝힌 건 그때가 처음이니까. 어쩌면, 이미 다른 놈이 오고 있을지도 몰라.”
“시간상으로도 이상하지 않군요. 어쩐지, 우연이라기엔 너무 공교롭다 여기긴 했습니다만. …잠깐만요. 맙소사, 루 솔라여.”
문득 깨달은 듯 탄식한 필립이, 이안과 메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럼 제국에는 타락자뿐만 아니라, 역천룡을 섬기는 이교도들까지 암약하고 있단 거군요!”
당연한 얘길 굉장히 놀랍다는 듯이 하네.
이안이 헛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어쩌면 다 한통속일지도 모르지.”
“그러진 않을 것이다. 백금룡께서 엄연히 존재 하신데, 어찌….”
“그거야 모를 일이지. 남몰래 공허의 고대신을 섬기는 사제도 있는 판국에, 역천룡이 대수겠소?”
툭 내뱉은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물론, 백금룡을 다시 만나면 물어볼 생각이었다. 정말 몰랐는지, 아니면 늘 그렇듯 알면서도 방조 중인 것인지.
만약 후자라면 그걸 빌미로 주머니를 왕창 털어주리라.
“하지만…. 으음, 그래.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중얼거리는 메브의 눈빛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분노나 결의보다는 암담함에 가까웠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시련을 앞둔 것처럼.
“그러니까, 요약하면 웬 미친 늙은 용이 이안을 노리고 있으니까, 더 개판이 되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거지?”
술만 홀짝이던 테사이아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알았어. 납득할 만한 이유였으니까, 받아들일게. 이야기도 꽤 재미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당분간은, 신분을 밝히는 것도 조심하는 게 좋겠군.”
덧붙인 이안이 메브와 필립을 돌아보았다.
“우리 위치가 알려지면 그놈의 또 다른 하수인이 따라붙게 될 테니까. 평소라면 별 상관없지만, 이제 우리는 타락자들을 색출해야 하잖소.”
“근처에서 소란이 일면 놈들의 귀에도 들어갈 테고, 늘 그랬듯 쥐새끼처럼 숨어 버리겠죠.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필립의 대답에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메브를 바라보았다.
“경도 마찬가지요. 경이 나를 돕고 있다는 것도, 이미 공공연히 알려지고 있을 테니까. 어쩌면 이미 타락자들의 귀에 들어갔을 수도 있소.”
“…그래. 당분간은, 이름 없는 방랑 기사가 되어야겠구나.”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샬롯이 묘하게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테사이아도 혀를 차고는 읊조렸다.
“아쉽게 됐네. 너희가 하는 걸 보면서, 다음번엔 나도 내 소개를 할 생각이었거든.”
“…테사가요? 왜요?”
필립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종자가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해야지.”
“주제를 모르는군. 네가 이안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샬롯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테사이아가 느긋하게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당연하지. 난 무려 원로 요정이라고. 요정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슬쩍 턱 끝을 치켜든 그녀가, 샬롯을 내려다보듯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존재가 함께한다는 걸 알리는 것만으로도, 이안에게 도움이 될 거야. 내 말이 틀려?”
“…제기랄.”
그녀를 노려보던 샬롯이 나지막이 읊조리고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어이없다는 듯 웃음 지은 필립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신분을 감춰도 눈에 띄지 않는 건 어렵겠군요. 이 두 분이 계시니 말입니다. 뭔가 가짜 신분을….”
이안의 표정을 보고 잠시 말을 멈춘 필립이, 눈을 끔뻑이고는 덧붙였다.
“왜 테사를 그렇게 보십니까?”
“저 녀석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
“……?!”
샬롯이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테사이아도 설마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테사.”
“응, 응…?”
아공간에서 꺼낸 은 브로치를 테이블 위에 놓으며, 이안이 덧붙였다.
“넌 이제부터 아이나스다.”
“……?”
테사이아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안이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나와 경이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동안엔, 네가 일행의 얼굴이 돼라. 너는 아이나스 가문의 원로고, 우리는 네 호위가 되는 거야.”
“그래도 괜찮을까…? 꽤 이름난 가문 같다며.”
“이미 원한을 샀는데, 하나 더 얹어진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웬만해선, 놈들의 귀에 들어갈 일도 없겠고.”
“그렇다면….”
멍하니 입을 벌리는 샬롯을 힐끔댄 테사이아의 얼굴에, 비로소 악동 같은 미소가 번졌다.
“할게. 되게 재미있을 것 같아.”
“다른 사람들 앞에선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넌 원로니까. 아주 오만한 귀쟁이처럼 굴어야 돼.”
“염려 말거라.”
테사이아의 말투가 돌변했다.
말투만 변한 게 아니었다. 눈매는 서늘하게 가라앉고, 입꼬리는 끝만 살짝 올라갔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던 것보다도 훨씬 더 고고하고 오만해 보이는 미소.
비록 눈가에 멍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긴 했지만, 특유의 분위기를 헤치지는 못했다.
소리 없이 일어선 그녀가 천천히 몸을 기울여 손을 뻗었다. 테이블에 놓인 브로치를 집어 들며, 그녀가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기꺼이 그리해 줄 테니.”
“훌륭하군.”
이안의 대답에, 그녀의 미소가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렇지? 지금까지 본 것들을 좀 따라해 봤어.”
“그건 절대 잃어버리지 마라. 만약 아이나스를 아는 누군가가 증명을 요구하면, 그걸 보여줘야 하니까.”
“안 잃어버릴 자신은 없는데.”
중얼댄 그녀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턱을 살짝 치켜들며 이안을 내려다본 그녀가, 브로치를 내밀며 느릿느릿 덧붙였다.
“그러니 이건 네가 잘 보관하거라, 이안.”
“미치겠군….”
샬롯이 눈을 질끈 감는 가운데, 피식 웃은 이안이 브로치를 받아들었다.
곧 브로치를 아공간에 대충 던져 넣은 그가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