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391
391화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대행자의 권한.
‘이건 또 뭔…?’
용의 대행자는 용의 권역에서 합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게 설명의 전부였다. 보상은 스킬 하나였다. 진언 공명.
확인과 동시에 완료된 퀘스트에, 이안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정말 난쟁이들을 도와준 게 아르케아스인 건가? 아니면….’
모든 용의 권역에서 같은 권한을 가지는 걸까. 하지만 의문을 해결할 틈은 없었다.
“너도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군. 이안 호프….”
디아나는 물론, 놀란 표정의 루시아도 그를 돌아보고 있었으니까.
“…뭐, 놀라운 건 사실이니까.”
이안이 왼팔을 자연스럽게 내리며 읊조렸다. 디아나가 묘하게 뿌듯한 눈빛으로 입술을 비죽이는 가운데, 루시아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커요…. 어떻게 도시 지하에… 이런 유적이….”
“정확히는 산 내부에 있는 거야.”
거드름을 피우듯 슬며시 턱을 치켜든 디아나가 덧붙였다.
“우린 여길 드라그 벨가라고 부르지. 고대 땅딸보들 말이라더군.”
무슨 뜻인지는 모르는 모양이지.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나온 통로는 도시의 한쪽 끝 가장자리였다.
우측으로는 건물 하나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는데, 난쟁이들에게 맞게 만든 듯 지붕이 이안의 머리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이안이 보기엔 벽돌이나 석회가 아니라, 본래 존재하던 지층을 그대로 깎아 만든 것 같았다.
‘침입을 꼼꼼하게도 대비해 뒀네.’
나머지 집들은 반대편에 존재하는 걸 보면, 이 집 한 채만 의도적으로 시야를 가리기 위해 이렇게 지은 게 분명했다.
“여긴 정말 용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해요. 제아무리 고대 난쟁이들이라도, 이런 걸 만들 수 있을 리 없어요.”
통로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길을 눈에 담으며 루시아가 읊조렸다. 공동의 벽면을 따라 건물과 길이 나란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건 진언 회로만 봐도 확실하지.”
그녀와 달리 천장을 올려보고 있던 이안이 읊조렸다.
종유석 하나 없이 다듬어진 천장은 완만한 둥근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정교한 주문 회로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진언 회로가 잔뜩 섞여 있는, 대체 얼마나 많은 주문이 섞여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회로였다.
도시에 번지는 은은한 빛과 온기. 오염된 마력조차 느껴지지 않는 신선한 공기까지. 이 공간의 모든 것들이 저 주문 회로 덕분에 유지되고 있으리라. 어쩌면 이 공동 자체가 마법으로 유지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대체 여기서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버틴 건지 궁금했는데…. 이제 알겠네.”
물론 동력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인근의 마력을 흡수해 영구히 작동하고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몇 명이나 살고 있나요? 수백 명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루시아가 덧붙였다. 녀석은 거리를 걷고 있는 주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인원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글쎄.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군.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디아나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루시아와 눈빛을 교환한 이안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입구의 건물을 지나치자, 비로소 도시의 모습이 조금 더 확연해졌다. 그들이 나온 층은 상층부였다. 위로 하나, 아래로 두 개의 층이 더 존재했다.
거리를 오가는 거주민들의 모습도 더 다양해졌다.
인간. 난쟁이. 요정. 심지어 오크로 보이는 덩치 큰 이들도 아무렇지 않게 뒤섞여 있었다. 잘 찾아보면 수인도 몇 명쯤 섞여 있을지도 몰랐다.
‘시끌벅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자들처럼 보이는 건 아니었다.
루시아의 고개가 곧 도시 건너편 쪽으로 돌아갔다.
“맙소사… 이게 전부가 아니었군요.”
이안도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하 도시는 공동의 절반 정도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대편 역시 네 개의 층이 거대한 계단처럼 나뉘었다. 최상층에는 찰흙으로 대충 빚어 이어 붙인 듯한 기다란 건물이 있었는데, 그 위로 굴뚝 같은 굵은 석관 몇 개가 건물과 동굴 벽면으로 이어졌다. 뻥 뚫린 창문과 문 사이로 흐릿한 불빛이 아른거렸다.
“정말 경작지도 있고요.”
루시아는 그 아래층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과 난쟁이, 오크가 뒤섞여 땅을 헤집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루들을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잿빛의 덩굴이나 길쭉하게 솟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불길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아래는 감자. 위는 옥수수지.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불러.”
디아나가 과거 이안과의 대화를 떠올린 듯 덧붙였다. 물론, 이안은 경작지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다.
그는 다소 평평한 바닥. 도시와 경작지를 나누듯 흐르고 있는 냇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뻥 뚫린 제법 큰 동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지하수였다. 냇물 좌우로 우물도 두 개나 있었다.
“씻을 수 있겠군. 그렇지?”
제발 그렇다고 대답해주길 바라며 이안이 내뱉었다.
지금 그와 루시아는 거지꼴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벽을 넘은 이후로 제대로 씻어본 건 고작해야 두 번에 불과했다. 신발과 옷은 한참 전부터 너덜너덜했고, 백린 갑옷 역시 흙먼지와 마물들의 체액이 말라붙어 엉망진창이었다.
디아나가 그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물론이지. 인간답지 않은 말을 하는군.”
“마음만 먹는다면… 여기서 평생 나가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루시아가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주민들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의 존재를 깨달은 듯, 이미 몇몇이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디아나가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실제로도 많이들 그렇지. 하지만 완전한 자생은 불가능해. 외부의 물자를 계속 공급해야 유지할 수 있지. 밖을 오가는 이들이 모두 나눠 짊어지는 의무야.”
그녀의 시선이 도시 건너편을 훑었다.
“대신 이 안에서 두더지처럼 땅을 파지 않아도 되지. 사실, 여기 처박혀서 사는 것에 정말 만족하는 건 반 토막들뿐이야.”
건너편 최상층, 하나로 길게 이어진 건물을 눈에 담은 그녀가 덧붙였다.
“그것들은 저기서 뚱땅댈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을 테니까.”
“저게 공방이었군….”
이안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건물 안에 흐릿한 빛이 아른거리는 건 화로가 있어서였던 모양이었다.
하긴. 여긴 본래 난쟁이들의 도시가 아니던가. 공방이 존재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재료를 어디서 구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잘하면 필요한 장비를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금화가 통할 것 같진 않은데. 물물 교환을 해야 하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주민들 사이를 지나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난쟁이. 디아나에게 가볍게 턱인사를 건네는 요정들.
몇몇 인간과 요정들은 디아나처럼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무 가면부터 코까지 얼굴을 반만 가면과 철가면까지. 가지각색이었다. 공통점은, 다들 무장을 한 상태라는 사실이었다. 아마 저들이 드라그 벨가의 수색병, 올빼미들이리라.
‘그런데 뭔가….’
뇌리를 간질이는 듯한 이질감에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사이.
“맙소사….”
루시아가 낮은 탄식을 흘렸다. 그녀를 돌아본 이안은 곧바로 탄식의 이유를 깨달았다. 드물지만 아이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의 눈에 띈 건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였다.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의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민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경 태생… 아니, 지하 태생이라고 불러야 하는 아이들인가.’
안색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영양실조를 걱정해야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
이안이 한쪽 눈을 깜빡이자, 놀란 표정을 지은 꼬마가 어머니의 뒤로 숨었다. 이안은 어깨만 으쓱이고는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쨌건, 이안과 루시아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시선은 벽 바깥의 소도시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경계와 호기심.
이윽고 디아나가 계단으로 접어들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지어진, 최상층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저기로 가는 건가?”
이안이 디아나의 뒤에서 속삭였다. 최상층은 가장자리를 제외하고는 광장처럼 공간을 비워 둔 상태였다. 그리고 그 뒤편의 벽면에는 제법 커다란 출입구와 창문들이 내부로 뚫려 이어지고 있었다. 사방이 암벽으로 막힌 지하라 가능한 건축 방식이었다.
“그래. 저기가 이 도시의 내성이다.”
“여기도 신분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나? 예를 들면, 사는 공간이라던가.”
이안이 툭 덧붙였다. 걸음을 살짝 늦춘 디아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역시 너도 밖에서 온 인간이긴 하군. 이안 호프.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걸 보면. 신분이 상당히 높았던 모양이지?”
그래서 물어본 건 아닌데.
이안이 속으로만 읊조리는 사이, 디아나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예 없진 않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능력이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제 몫을 다하면, 그것만으로도 합당한 대우를 받지. 넌 모르겠지만….”
디아나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세상이 이렇게 되고 나서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죽은 게 썩어 빠지거나 무능한 귀족들이야.”
“그래…?”
어째, 사회 자체는 이쪽이 더 건강한 것 같은데.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린 이안이, 루시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어쨌든 그럼, 신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군.”
말에 담긴 속뜻을 곧바로 이해한 듯 루시아가 입맛을 다시는 사이, 디아나가 계단 위로 올라섰다.
탁 트인 광장 너머. 아치를 그리며 뻥 뚫린 출입구 좌우에는, 창을 든 오크들이 서 있었다.
굳이 필요해 보이지 않는데도 갑옷까지 전부 착용하고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채였다.
“아까도 말하려고 했는데, 의외네요.”
루시아가 속삭였다.
“난쟁이들과 오크들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여기서 그런 건 의미 없어. 뭐, 여전히 사이가 썩 좋진 않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속삭인 디아나가 이내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출입구 좌우의 오크를 훑었다.
“디아나 에레노스다. 백작 각하를 뵈어야겠는데.”
눈동자만 굴려 그녀를 바라본 오크가, 아래에서 위로 삐죽하게 송곳니가 솟은 입술을 달싹였다.
“용무는?”
“벽 너머에서 온 생존자들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유랑단이 돌아왔다. 아주 긴급한 사안이다.”
디아나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꽤 놀랄 만한 이야기일 텐데도, 오크들은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따라와라.”
내뱉은 오크가, 옆의 오크에게 손짓을 보내고는 몸을 돌렸다.
이안을 돌아본 디아나가 재빨리 속삭였다.
“협조하면서 기다려. 곧 돌아올 테니까. 제발… 문제될 일만 만들지 않아 주면 좋겠군.”
이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노력해 보지.”
“…부디. 제발.”
못내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일별한 디아나가 오크 경비병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진심인데. 속으로만 덧붙이며, 이안이 소리 없이 실소를 흘렸다.
협박과 강요로 시작된 일이긴 하지만. 어쨌건 디아나는 여기까지 그들을 무사히 데려다주지 않았는가.
중간중간 자잘한 장난질을 시도하긴 했지만. 그녀가 요정이라는 걸 감안하면 거의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난처하지 않게 배려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이안 본인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물론.
“무장을 전부 해제하시오.”
앞으로 다가온 오크 경비병이 내뱉은 건 그때였다. 덩치와 인상에 걸맞지 않게 정중한 말투였다.
“앞에 내려 둘게요.”
루시아가 선선히 허리 뒤쪽에 찬 철퇴와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문 옆에 내려놓았다. 이안은 양팔만 옆으로 들었다.
“나는 비무장 상태라서.”
“그럼 확인하겠소.”
오크가 솥뚜껑 같은 손을 내뻗었다. 곧 크고 굵은 손길이 이안의 몸 곳곳을 훑었다.
‘거 꼼꼼하게도 만지네, 시발.’
이안의 미간이 절로 씰룩댔다.
갑자기 난쟁이들의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딱 봐도 숨겨 둔 게 없는데, 굳이 사타구니까지 깊이 확인하다니.
“확인됐소. 조용히 대기하시오.”
이윽고 손을 뗀 오크가, 루시아가 내려놓은 단검과 철퇴를 한 손으로 집어 들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이안이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시는 사이, 슬며시 곁으로 붙은 루시아가 속삭였다.
“아무래도 도시의 지배자를 만나게 될 것 같은데. 말을 아끼시려고요?”
“그래.”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결과가 뒤따르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게다가 여긴 바깥과는 여러모로 문화가 다르지 않던가. 그 휘황찬란한 칭호와 신분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아직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뭔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루시아가, 이윽고 슬쩍 오크의 눈치를 살피고는 덧붙였다.
“전 그대로 말할게요.”
“전부?”
“네. 하나만 빼고요.”
마법을 뜻하는 것이리라.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흠…. 그래. 뭐, 나도 고용주는 필요하니까.”
슬쩍 눈동자만 굴려 루시아를 내려다본 이안이 덧붙였다.
“그럼 네 소개는 내가 해 줄까?”
“네…? 아니, 그러지 마세요.”
루시아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이안 님이 그러신다면 견딜 수 없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다 알잖아요. 절 부끄럽게 만들지 마세요.”
그러면서, 나한테는 왜.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어깨를 으쓱였다.
출입문 너머의 통로로 디아나와 오크 경비병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안이 양손을 목 뒤로 감싸 쥐며 미소 지었다.
“생각보다 빨리 나왔군.”
“그래….”
다소 피곤한 얼굴로 대답한 디아나가, 둘을 번갈아 돌아보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들어가자. 백작 각하께서 보자고 하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