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1257
1256
그로부터 몇 시간 후.
“헉, 허억!”
플레이그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정신없이 내달렸다.
“이 악마 같은 놈…!”
해변에서 플레이그를 덮친 그 정체불명의 누군가는, 엄청나게 강했다.
현재 플레이그는 마우레키온 제국의 전체 인구 중 무려 10분의 1을 감염시키는 데 성공한 덕분에 엄청나게 강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플레이그는 그 정체불명의 모험가를 이기지 못했다.
그 정체불명의 모험가는 플레이그가 내뿜는 바이러스들을 모조리 흡수한 것으로도 모자라, 플레이그의 생명력까지 쪽쪽 빨아먹으며 덤벼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레이그는 살기 위해 도망쳐야만 했다.
‘주, 주인님께 가야 돼.’
플레이그는 지크가 있는 프로아 제국으로 가기 위해 도망쳤지만, 모험가는 더 빨랐다.
플레이그가 도망칠 때마다 워프 게이트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정체불명의 모험가에게 패배한 플레이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정글에 숨어들었다.
정체불명의 모험가에게 계속해서 패배하긴 했지만, 그래도 도망치는 건 가능했던 것이다.
‘빌어먹을 놈. 두고 보자. 주인님한테 가서 다 일러바칠 테니.’
플레이그는 오직 지크만을 믿으며, 악착같이 도망쳤다.
저 정체불명의 모험가가 제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플레이그 자신의 주인인 지크보다 강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
태성은 퀘스트를 마친 후 현실에서 쉬기 위해 로그아웃을 했다.
이렇듯 정기적인 휴가는 태성이 게이머의 커리어를 이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너무 게임에만 매달리다 보면 현실의 한태성이 피폐해지므로, 이렇듯 3~4일씩 게임을 아예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곤 했던 것이다.
그런 태성은 오전 일과를 마치고 용설화를 만나 강원도로 향했다.
오래간만에 두 사람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기기로 한 것이다.
물론 경호원들이 따라붙긴 했지만 말이다.
“와. 물회 시원하다.”
“그렇지?”
“응.”
“어렸을 때 엄마 아빠랑 여기 와서 자주 먹었어.”
“그렇구나.”
“다음엔 다 같이 오자.”
“으응?”
“가족여행 같은 거 말야.”
“아.”
“오빠 요즘 어머니랑 동생이랑 시간 많이 못 보냈잖아.”
“그건 그렇지.”
“시간 좀 내.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알겠어.”
태성은 자신의 가족들까지 잘 챙겨주는 용설화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또 사랑을 느꼈다.
‘설화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태성은 용설화와 데이트를 할 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았다.
조금 사이비 같은 표현이었지만, 영혼이 맑고 깨끗하며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가끔 아버지인 용태풍을 대할 때 살짝 포악한 모습을 보이는 것 빼면, 용설화는 완벽 그 자체였다.
그래서인지 요즘 태성의 뇌리엔 자꾸만 가 스쳤다.
‘결혼… 하자고 해 볼까?’
요즘 태성은 용설화에게 푹 빠져 있었다.
용설화라면 평생을 함께해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자꾸만 들었던 것이다.
물론 유부남들이야 그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조언을 하겠지만, 아직 총각인 태성에게 그런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실장님.”
태성은 용설화가 잠시 화장실에 간 동안 경호실장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예, 도련님.”
“혹시….”
“결혼 말씀이십니까?”
눈치 빠른 경호실장은 태성이 왜 말을 걸었는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어, 어떻게 아세요?”
“도련님 눈빛이 딱 그렇습니다.”
경호실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 그래요?”
“결혼 생활 어떻냐고 물어보시려는 거 아닙니까?”
“그렇… 죠?”
“지옥입니다.”
경호실장이 딱 잘라 말했다.
“결혼은 최대한 늦게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 그 정도예요?”
“와이프가 친정에 가면,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
“요즘 통 친정을 안 가서 죽을 맛입니다.”
“하하… 하하하….”
그렇게 말하는 경호실장의 표정은 정말이지 늙고, 피곤해 보였다.
“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입니다.”
“아?”
“일 마치고 들어가서 잠들어 있는 딸아이 얼굴을 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아내도 포악해서 그렇지, 제 평생의 동반자라고 생각하면 너무 사랑스럽고 예쁘지요.”
“그럼 결혼은 좋은 건가요?”
“최대한 늦게 하는 게 좋습니다.”
“예…?”
“하하하.”
총각인 태성은 그런 경호실장의 심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행복하다더니, 또 최대한 늦게 하라는 그 말에 담긴 속내를 단 1도 짐작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심이 서신다면, 해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경호실장이 태성에게 조언했다.
“저는 인생사 가장 큰 고통이 후회라고 생각합니다.”
“음?”
“설화 아가씨를 놓치고 후회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시면, 해야 하는 결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어차피 도련님께서는 능력은 충분하시니, 마음 가는 대로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경호실장의 말대로, 태성은 언제든 결혼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비슷한 또래의 남성들은 집 한 채 마련하기도 힘들어하는 판국이고, 한참 일에 집중할 나이이기도 했다.
신입사원 티를 벗고 슬슬 실무에 매진하며 커리어를 이어 나갈 시기인 것이다.
하지만 태성은 달랐다.
이미 조 단위의 재산을 축적한 태성은 경제적으로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기에, 언제 결혼해도 상관없었다.
용설화 역시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한 여성이라서, 아무런 부담이 없기도 했다.
‘말… 해 볼까?’
태성의 고민은 깊어졌다.
용설화를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어서, 이제는 결혼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차오를 지경까지 되었던 것이다.
***
그날 밤.
“와. 오빠, 보여? 너무 예뻐.”
“그러네.”
태성은 용설화와 함께 강릉의 명소인 안반데기라는 곳에서 별을 구경하며 로맨틱한 시간을 가졌다.
서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별들이 쏟아지는 것처럼 반짝이고, 또 그 별들이 모여 하나의 바다를 이루며 은하수가 되었다.
사랑하는 용설화와 별 구경을 하고 있노라니, 태성의 감정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언제 한번 날을 잡아서….’
태성이 프러포즈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오빠.”
태성과 함께 자동차 트렁크에 걸터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던 용설화가 입을 열었다.
“우리….”
“응?”
“결혼할래?”
“어?!”
태성은 너무나도 놀라서 그만 나자빠질 뻔했다.
“겨, 결혼???”
“응.”
“가, 갑자기…?”
“싫어?”
용설화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 그게 아니라!”
태성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렇지! 갑작스러워서!”
“그런가?”
“그럼!”
“오빠 생각은 어떤데?”
“어… 그게….”
태성이 대답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어.”
“정말?”
“응.”
태성이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얘기를 꺼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어.”
“그랬구나.”
“근데 설화 니가 이렇게 불쑥, 갑작스럽게 먼저 얘기 꺼낼 줄은 몰랐어.”
“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나도 너랑 결혼하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
태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용설화를 꼭 안아주었다.
“우리 차근차근 이야기 나눠 보자.”
“응, 오빠.”
그렇게 태성과 용설화는 찬란한 은하수가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서, 미래를 약속한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단순한 커플을 넘어서,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
며칠 후.
“폐하, 특이사항 있어 보고 드려요.”
지크는 로그인하자마자 나인테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뭔데?”
“플레이그로부터 연락이 끊겼어요.”
“뭐?!”
지크가 화들짝 놀랐다.
플레이그는 마우레키온 제국에 전염병 사태를 일으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고, 프로아 제국과 아주 정기적인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크의 노예이니만큼, 어디서 뭘 하든 위치만큼은 보고하도록 연락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플레이그가 사라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무슨 일인데?”
“아직 몰라요. 마우레키온 제국 남부 해변에서 어떤 모험가와 전투를 벌인 후 도망쳤다고는 하는데, 그 이후로 행방을 알 길이 없어요.”
“모험가?”
“우리 판단으로는….”
나인테일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모험가 베오울프 같아요.”
“……!”
“아무래도 슈트카르트 황제의 명령을 받고 플레이그를 추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플레이그를 발견했고, 전투를 벌인 거죠.”
“전염병 사태는 어때?”
“여전히 위력이 좋죠.”
“그렇다는 건… 아직 플레이그가 죽지는 않았다는 거네?”
“맞아요.”
“위치, 파악해 봐.”
지크가 나인테일에게 명령했다.
“플레이그는 죽으면 안 돼. 우리의 소중한 자원이야. 플레이그가 전염병 사태를 일으켜 줘서 당장 전쟁이 안 벌어지는 거야. 어떻게든 지켜내야 돼.”
“알겠어요.”
플레이그가 사라지면?
마우레키온 제국을 휩쓸었던 전염병 사태가 진정된다.
그렇게 되면, 슈트카르트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쟁을 일으킬 터였다.
그러면 곤란했다.
현재 마우레키온 제국은 곳곳에서 반란까지 일어나고 있어서, 슬슬 분열의 확산 조짐이 보이는 중이었다.
전염병 사태가 최소 6개월 이상 계속되어야 프로아 제국에 유리한 만큼, 플레이그는 지크가 지켜내야 할 가장 소중한 전략자원이었던 것이다.
‘때가 왔어.’
지크는 곧 이건과 싸우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플레이그를 뒤쫓는 자가 다름 아닌 이건이라면, 지크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지크나 이건이나 지난 1차전에서 서로 납득하지 못할, 찜찜했던 승부를 기록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그때의 싸움을 철저히 분석하고 피드백하며 2차전을 준비한 만큼, 이번 승부는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았다.
지크와 이건.
둘 중 누가 세계 최고의 BNW 프로게이머인지를 가리는 승부가 될 예정인 것이다.
물론 이건의 경우 그 어떤 공식적인 경기에도 출전할 수 없는 몸인지라 프로게이머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우리 정보국에서 계속 플레이그의 행방을 찾고 있는데, 여의치가 않아요.”
나인테일이 지크에게 어려움을 호소했다.
“플레이그가 마우레키온 제국에서 사라진 만큼, 정보원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내가 갈게.”
지크가 선뜻 나섰다.
“어차피 나 아니면 플레이그를 구출할 사람이 없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직접 가야 해.”
“폐하께서 가주신다면 믿을 만하죠.”
“위치가 어디야? 알려 줘.”
“여기예요.”
나인테일이 지도를 펴 지크에게 플레이그의 도주 경로에 대한 브리핑을 해주었다.
“워프 게이트는 이미 봉쇄됐고, 근처에 있는 영웅의 조각상들도 파괴된 상태예요.”
“음.”
“그렇다면… 제가 플레이그라면 여기로 도망칠 것 같아요.”
나인테일이 가리킨 곳은 마우레키온 제국의 남부에 자리한 어느 정글이었다.
그곳은 남부의 대정글만큼은 아니지만, 그 절반은 충분히 될 정도로 면적이 매우 넓었다.
“여기밖에 없어요. 아직 안 죽었다는 것만 봐도, 여기로 도망쳤으니까 가능한 일일 테죠.”
“수색이 쉽지 않겠는데?”
“맞아요.”
“그래도 가야지.”
지크는 즉시 발걸음을 옮겼다.
두근두근!
그런 지크의 심장은 거세게 뛰고 있었다.
이건.
지난 10년 전부터 세계 최고의 게임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그 전설적인 게이머이자 악당을 상대하러 가는 길이니만큼, 흥분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