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96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96화
흐릿한 시야로 아는 놈 얼굴이 보였다.
“…큰세진?”
“너 열 엄청 나는 것 같은데.”
확신은 못 하겠지만, 아마도 큰세진은 기겁한 표정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참고 대답했다.
“…큼, 어. 약 먹었어.”
“약만 먹을 게 아니라… 야, 너 병원 가라. 회사에 전화 내가 해줘?”
“……무슨 중병도 아니고… 됐어. 몸살이야.”
큰세진이 혀를 찼다.
“빨리 나을 수 있는데 뭐하러 앓아? 그냥 수액이라도 한 방 맞고 와. 처방 약도 센 거 받고.”
“…….”
귀찮은데, 솔직히 좀 솔깃했다.
‘회사에서 그 정도는 내주겠지.’
그래도 대기업 자회산데 이 정도는 산재 처리해 줄 거라는 기대가 있다.
그러다가 현재 상황을 깨달았다.
“아… 오늘 매니저 형 쉬는데.”
“택시 부르면 되지. 대충 챙겨입어.”
“…….”
택시가 선택지에 있었군.
나는 전화 통화를 마치는 큰세진을 바라보다가, 겨우 이성적인 의문점을 도출했다.
“너 근데 왜 여기 있냐.”
“받을 게 있어서 잠깐 회사 오면서 들렀어. 나 집 근처잖아.”
회사에서 받을 게 있다고?
“뭘 받는데.”
“그게 지금 중요하냐? 됐고 옷이나 갈아입자. 택시 곧 온 댄다.”
“……어.”
나는 느릿느릿 일어나서 땀에 절은 티를 벗어 던지고 대충 후드를 꺼내입었다. 으슬으슬해서 덥진 않았다.
“도와줘?”
“됐다.”
대충 이러고 가면 되겠지. 얼굴 가리게 마스크만 쓰면…….
“자, 쓰시고.”
“…….”
귀신같이 알아채네. 나는 마스크를 귀에 걸며 순순히 인정했다.
“고맙다.”
“알면 됐다. 나한테 잘해.”
큰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아, 택시 근처라신다. 내려가자.”
“어. 정문으로 가면 되냐.”
“그쪽으로 불렀어. 따라와.”
“……?”
대충 보니 배웅해 주겠다는 게 아니라 같이 가주겠다는 느낌인데 이거.
“그냥 나 혼자 살짝 갔다 올게.”
“혼자 살짝 가다가 혹시 쓰러지면 어떤 기사가 날지 상상해 보렴.”
“…….”
패배를 인정한다.
“가자.”
“그래.”
나는 입 다물고 큰세진을 따라 내려가서 택시를 탔다.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멀미를 참고 있자니, 얼마 안 가서 병원에 도착했다.
* * *
“훨씬 낫지?”
“그러네.”
나는 선선히 수긍했다. 수액에 대체 뭐가 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색이 다른 두 팩을 맞고 나니 컨디션이 확 나아졌다.
‘그냥저냥 참을 만한 몸살 정도.’
큰 병원인 데다가 위치상 연예인이 제법 오는지 조용히 끝난 것도 아주 괜찮았다.
“가서 밥 먹고 약 먹으면 되겠네. 캬, 이런 친구 또 없다.”
“그래. 고맙다.”
“…별말씀을.”
큰세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숙소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눈앞에 가득 쌓인 상자 더미가 나타났다.
“……!”
그냥 택배 상자가 아니다. 아이보리색 포장지에 진녹색 리본이 감겨있는, 규격 다른 이 상자들은…….
“아, 벌써 옮겨주셨네.”
“…….”
나는 태연한 큰세진에게 조용히 물었다.
“…너 생일이냐?”
“어? 아, 문대라면 검색하면서 봤겠구만~”
큰세진이 찡긋 웃었다.
“맞아. 내 생일 모레야. 8월 1일.”
“…….”
회사에 받을 게 있다는 게 저 선물 더미였나 보다.
‘…생일 일주일 전부터 호들갑 떠는 놈인 줄 알았는데.’
입도 벙긋 안 할 줄은 몰랐다.
사실 며칠 전에 스치듯이 SNS에서 본 걸 기억해 내지 못했다면, 저 선물 더미도 데뷔 기념 서포트려니 하고 지나갈 뻔했다.
어쨌든, 생일 당사자는 태연했다.
“생일이 휴가 중간에 지나가니까~ 인증샷부터 먼저 찍어두려고 했지. 이런 건 또 당일에 바로 봐야 기분이 좋잖냐.”
“그건 그렇지, 그리고… 일단 축하한다.”
“그래~ 생일에 감동적인 축하 톡이랑 기프티콘 보내줘. 치킨 정도로 만족해드림.”
나는 피식 웃었다.
“…오늘 네가 치킨값은 했지.”
“…! 문대 이것까지 들으면 두 마리도 딜해볼 수 있겠는데?”
“뭐?”
큰세진이 씩 웃더니, 부엌으로 걸어 들어가서 웬 냄비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거 갈비찜이다?”
“……갈비?”
갑자기 어디서 그게 튀어나왔냐.
“내가~ 숙소에 혼자 있을 친구가 걱정되어서~ 내 생일상에서 빼 왔다는 거 아니냐!”
“…!!”
“막… 감동이 흘러넘치지 않니? 휴가 중에 팀메이트를 위해 갈비를 가져온 큰세진… 크, 어디 나가면 미담으로 말해라.”
“…….”
“고마워서 말문이 막혔구나? 괜찮아. 그럴 수 있지.”
큰세진은 손을 흔들며, 도로 현관으로 향했다.
“나 돌아가 볼 테니까, 휴가 동안 건강 관리 잘해라. 갈비찜 꼭 데워먹고.”
“…선물 인증샷 찍어줘?”
“하하, 됐네요. 아픈 놈이 무슨. 나 회사에서 이미 찍었어.”
큰세진은 ‘또 아프면 병원 다시 가’라는 충고를 남기고 그 길로 사라졌다.
“……”
‘이런 일도 다 겪어보는군.’
아플 때 누구랑 같이 있어 본 적도 별로 없고, 대체로 귀찮은 일만 늘었기 때문에 이번 건 제법 새로웠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편하네.’
…돌아오는 큰세진의 생일에는 정말 치킨이라도 보내야겠다. 내 휴일에 그 정도 값어치는 있지.
‘자, 그럼 약 먹고 다시 모니터링을…….’
드르륵.
스마트폰에 톡이 도착했다.
[선아현 : 문대야 휴가 잘 보내고 있니? 난 첫 상담을 이제 끝냈어. 좋은 분이신 것 같아서 이번에는 정말 열심히 도전 보려고 해. 너한테 꼭 고맙다는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문자를… (더 보기)]“…….”
이건… 변한 게 없군. 그래도 단체방에 안 올린 게 어디냐 싶다.
더 보기를 눌러줬다.
요약하자면 고맙고 휴가 동안 혹시 놀러 올 생각 없냐는 말이다.
‘없다.’
나는 ‘상담 잘 받은 건 축하하고 난 몸이 안 좋아서 쉬려고 한다’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소파에 폰을 던져두고 약을 먹고 오니, 장문 문자가 5통으로 증식해 있었다.
게다가 단체방에 알림이 더럽게 많이 떴다.
확인해 보니 벌써 큰세진이 그룹 단체방에 오늘 일어난 일을 다 떠들어둔 모양이다.
[차유진 : 건강해요 형! (우는 기본 이모티콘)] [류청우 : 일하다 쉬니까 그랬나 보다. 혹시 너무 힘들면 연락해.] [김래빈 : 할아버지가 홍삼 주셨는데 숙소 복귀할 때 가져갈까요? (흐릿한 물통 사진)] [큰세진 : 나도 줘 (폭소하는 이모티콘)]…이런 식의 대화가 몇십 개 쌓인 것이다.
“……허.”
이쯤 되니 나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이놈들이 어디 옆방쯤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고맙긴 하네.’
쉬는데 귀찮게 무슨 연락이냐고 할 법도 한데 말이다.
심지어 이세진에게도 톡이 왔다. 물론 단체방은 아니었지만.
나는 먼저 온 순서대로 차근차근 답변을 달았다.
일단 선아현에게는 ‘몸은 잘 낫는 중이고 네가 눈치 없이 놀자고 권유했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으니 걱정 마라’는 내용을 보냈고, 이세진에게도 적당히 괜찮다고 보냈다.
마지막으로 단톡에도 같은 내용을 올렸다.
[병원 갔다 와서 괜찮아졌습니다. 다들 휴가 잘 보내세요.]그러자 확인한 사람들의 오케이 이모티콘들로 화면이 가득 찼다. 뭐… 피드백이 빠르고 긍정적이니 좀 유쾌했다.
‘이제 밥이나 먹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갈비찜과 즉석밥을 데웠다.
갈비찜은 꽤 맛있었다.
* * *
박문대가 컨디션을 회복하며 조용히 휴가를 마무리했을 때, 테스타의 팬들은 SNS에 올라온 테스타의 휴가 소식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중이었다.
-아현이ㅋㅋㅋㅋ 수세미 뜨기 시작했대 귀여워…너무 귀여워…! (반쯤 뜬 수세미 사진)
-오늘의 래빈이: 할아버님과 초당옥수수를 먹었었습니다…
에어컨 밑에 앉혀서 신비복숭아 초당옥수수 배 빵빵해질 때까지 먹여주고 싶다 진짜
-청우가 찍어서 올려준 곳 어딘지 아시는 분?ㅠ 산인 것 같은데 이 여름에 산을 올랐니 청우야…? 그것도 휴가 때..?
특히, 큰세진은 자신의 생일날을 전후로 온갖 사진과 동영상을 푸는 통에 떡밥이 넘쳤다.
특히 가장 인기 있던 것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자신들의 Hi-five 음악방송 무대 소리에 맞춰 립싱크를 하는 테스타의 짧은 영상이었다.
물을 마시거나 책을 읽는 등 일상적인 행동을 하며 거실을 지나가던 테스타가 괜히 흥을 타서 남의 파트를 따라 하고 지나가는 것은 만 단위의 공유를 타며 화제가 되었다.
-아니 왜 리얼리티보다 여기서 더 친해 보이냐고ㅋㅋㅋ
-나 진짜 배우세진이도 장단 맞춰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차유진 랩 파트에…ㅋㅋ
-서로 많이 편해진 것 같아서 마음이 뜨듯해짐… 흑흑… 테스타 꼭 연장해… 100년해…
그리고 리얼리티 여행의 마지막 편까지 방영되며, 팬들은 테스타의 데뷔 활동이 잘 마무리된 시원섭섭한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딱 한 멤버의 팬들에겐 여운은 아직 즐기긴 일렀다.
바로 본방송을 코앞에 둔 박문대의 팬들이었다.
-드디어 오늘이 왔다.
-문대ㅠㅠ 예능ㅠㅠ 넘치는 분량ㅠㅠ
-이게 뭐라고 나 어제 긴장해서 잠을 못 잤어…
-예고편 보니까 탈출한 살인범이랑 괴담 이야기 나오던데 우리 문대 아닌 척 겁먹어서 선배님 졸졸 따라다녔을 거 생각하니 안 봐도 벌써 귀엽고 꿀잼이고 그 장면을 맑은 정신으로 보기 위해 오늘 연차를 쓴 내가 승리자
└ㅋㅋㅋㅋ아니 얼마나 기대에 찬 거얔ㅋㅋㅋ
긴장한 팬들의 기대 속에서, 이번 주의 는 방영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눈 오는 산 중턱의 산장에서 만나는 두 사람의 콩트였다.
[갑자기 눈보라가 쳐서 놀랐는데, 산장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날씨 상황 보고 얼른 들어와 있었습니다.]문제가 있다면 둘 다 연기에는 소질이 없었다는 점이다.
졸지에 좋은 개그 코너가 됐다.
실시간으로 프로그램 온에어를 달리던 커뮤니티 댓글마다 웃음이 터졌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조난 당하신 게 아니라 비즈니스 미팅하시는 것 같은데요 두 분
-의문의 회의실 바이브
-참리더 청려님 어디 가고 재현이 튀어나왔냐 아이고 재현아 누가 보면 세미나에서 만난 줄 알겠어
-문대야 겨울이라는 설정이잖아 너 지금 더워서 패딩 벗으려다 멈칫했짘ㅋㅋㅋㅋㅋ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나눠 마시고, 배낭에서 어설프게 꺼낸 발열 인스턴트를 나눠 먹는 장면도 사람들을 실소하게 만들었다.
-문대 방금 닭발 도시락 못 본 척 함ㅋㅋ
-아니 댕댕쓰 본인이 챙겨온 설정인데 처음 보는 것처럼 배낭 뒤지고 있어!
-청려 당신 한여름에도 온수만 마신다고 후배한테까지 이 여름에 끓는 아메리카노를… (말잇못
-도시락 맛없나 봐 둘 다 먹으면서 말이 없어졌어ㅋㅋㅋ
창문의 애매한 눈보라 CG는 그 위화감을 더 웃기게 살렸다.
[그 순간,] [갑작스러운 굉음이 울렸다…?]게다가 자잘한 자막까지 들어가자 더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산장을 울리는 어마어마한 굉음] [조난자1 : 천둥인가? (담담)] [조난자2 : 일단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담담)]-산사태로 산장에 고립되었지만 긴장 따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무한 생산해내는 PPL 제품이 있기 때문이다.
└ㅋㅋㅋㅋㅋㅋ미치겠네
-둘이 완전 도찐개찐임ㅋㅋㅋㅋ
└자기들은 되게 몰입해서 하는 중이라고 생각중일 거예요… 아마…
이 끝없는 콩트의 굴레가 끊어진 것은 청려가 괴담 이야기를 꺼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