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God wants to live in peace RAW novel - Chapter 83
마신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 83화
* * *
썰지 않은 김밥을 그대로 한 입 베어 먹어 봤다. 서준의 만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분식집 김밥과는 다른 이 맛…… 그래, 이 맛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가 해 준 김밥 맛.
‘시금치를 넣길 잘했어.’
특히 시금치가 잘 데쳐졌다. 너무 무르지 않게끔.
김밥 한 줄을 뚝딱 해치운 서준은 김밥 한 줄을 도마에 올렸다. 이제 썰어 먹어 볼 생각이었다.
김밥을 써는 작업은 굉장한 고난이도의 기술이다. 자칫 힘을 너무 많이 주게 되면 김밥 옆구리가 터져 나갈 수가 있다.
그렇다고 또 힘을 너무 안 주게 되면 잘린 단면 사이로 김밥 속들이 다 튀어나오게 된다.
이때는 칼을 불에 달궈 주면 좋다. 수분을 이용하는 것도 좋지만 서준은 불에 달구는 방식을 택했다.
엄마도 그랬던 기억이 있다. 불에 달군 식칼을 김밥에 대고 잘라 봤다.
쓰윽-!
김밥이 아주 예쁘게 잘려 나간다. 김밥을 다 썬 서준은 접시에 담아 의자를 들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산들바람이 불고 있다.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바람이다. 햇볕 역시 따사롭다.
자연이 주는 기쁨과 함께 접시에 담은 김밥을 먹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분명 이상하다 생각할지도 몰랐다. 마치 가만히 앉아서 김밥만 먹는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서준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었다. 온전히 음식에만 신경을 집중할 수 있다.
김의 고소함, 밥의 찰기, 단무지의 새콤달콤함, 햄의 훈연향, 볶은 당근의 쌉쌀함, 오이의 아삭한 식감, 시금치의 은은한 달달함.
이것들을 하나하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순식간에 김밥이 동이 났다. 한 줄 더 썰어 올까 하는 생각이 들 즈음.
“형.”
연준이었다.
“서우는?”
“어린이집 버스에 태워서 보냈지. 근데 여기서 뭐 해?”
“밥 먹는데.”
“밥이 어디 있어?”
서준이 빈 접시를 들어 보였다.
“다 먹었나 보네.”
“맛있더라.”
“근데 왜 혼자 궁상을 떨면서 먹어? TV라도 보면서 먹지.”
“궁상인가?”
“그럼 궁상이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겠다.”
격변 이후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하지만 바뀌지 않은 것도 있었다. 혼밥에 대한 인식이었다.
연준이 빈 접시의 밥알과 김 가루를 보고 서준이 먹은 음식을 추측했다.
“김밥인가?”
“어떻게 맞혔냐?”
“나 어렸을 때 김밥 킬러였잖아. 이 정도는 당연히 맞히지.”
서준은 피식 웃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연준이도 김밥을 참 좋아했다. 세상 어떤 아이가 김밥을 마다하겠냐마는 연준이는 특히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싫어하던 당근도 김밥에 들어간 건 뱉지도 않고 잘 먹었다.
“밥 안 먹었으면 너도 먹을래?”
“안 그래도 늦잠 자는 통에 굶고 왔는데 잘됐다.”
가게 안으로 들어간 서준이 김밥 두 줄을 썰어 접시에 담았다. 이미 연준은 TV 앞에 앉아 있었다.
접시를 내려놓자 연준이 갑자기 눈을 감았다.
“나 김밥 속 재료 뭐 들어갔는지 안 봤다.”
“그게 왜?”
“뭐 들어갔는지 맞혀 보게.”
“자신 있나 보다?”
“자신 있지. 옛날에도 이걸로 형 이겨서 형 오예스 몇 박스나 뺏어 먹었는데.”
“쉽진 않을걸.”
“두고 봐. 다 맞힌다.”
연준이 손을 더듬거리며 접시의 김밥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우적우적-
순간 연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건 못 맞힐 수가 없지.”
“그래서 뭐가 들어갔는데?”
“단무지, 햄, 지단, 시금치, 그리고…… 오이하고 맛살. 맞지?”
“어떻게 다 알아맞히냐?”
“엄마가 만들어 준 김밥 맛이랑 똑같잖아. 못 맞힐 수가 없지.”
“어렸는데도 기억하나 보네.”
“기억은 안 나. 근데 미각이 기억한다고 해야 되나?”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네.”
“근데 이 맛 진짜 오랜만이다.”
“할머니도 이렇게 해 주셨잖아?”
“할머니는 시금치 대신 깻잎 넣었지.”
“시금치가 아니라?”
“어. 난 다 기억해.”
하긴…… 할머니 김밥은 자신보다 연준이 더 많이 얻어먹었으니까.
“할머니표 김밥이랑 비교하면 어떠냐?”
“할머니한테 죄송스럽긴 한데 이게 훨씬 맛있다. 엄마 레시피라 그런가?”
어쩌면 맛 자체는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게 더 맛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람의 미각은 때론 그 대상에 한해서 미화되기도 하는 편이었다.
서준은 혹시 연준도 그런 게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엄마표 김밥의 맛을 기억하기에는 연준이 많이 어린 나이였으니까.
연준이 김밥을 모두 비워 갈 즈음.
가게 앞에 트럭이 멈춰 서더니 목에 수건을 두른 기석태가 들어왔다.
“오늘은 웬일로 두 분 사장님께서 아침 일찍 나오셨네요?”
“네. 어쩌다 보니…….”
“아! 그리고 저번에 문자로도 말씀드렸지만…….”
기석태가 괜스레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에 연준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공급 단가 올라간 게 어디 사장님 탓인가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린 기석태가 말했다.
“그럼 주문하신 것들 다 창고로 옮겨 놓겠습니다.”
“기 사장님, 식사는 하셨어요?”
“식사요?”
“오늘도 안 하셨죠?”
“아뇨. 오늘은 진짜 했습…….”
꼬르륵-!
서준이 작게 웃었다.
“아침 거르는 게 습관되면 나중에 나이 들어 고생한다더군요. 마침 김밥 만들어 먹던 참이니 좀 드시고 가세요.”
기석태는 난감해하는 모습이었지만 굳이 거절하진 않았다. 그도 서준이 만든 김밥 맛이 내심 궁금한 것이다.
주방으로 들어간 서준이 금방 김밥을 내오자 기석태가 탄성을 터뜨렸다.
“시금치가 들어갔네요?”
“네. 혹시 시금치는 싫어하시나요?”
“싫어하긴요. 저희 어머니도 시금치 넣어서 김밥 해 주시곤 했거든요. 그게 생각나서요.”
“아…….”
“그럼 염치없지만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김밥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던 기석태가 눈을 부릅떴다.
“맛있습니다!”
“그런가요?”
“네. 혹시 재료로 뭐가 들어간 건가요? 나중에 저희 아들 녀석 소풍 갈 때 따라서 만들어 주게요.”
서준이 속 재료들을 읊어 주자 기석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맛살이 들어갔군요. 저희 어머니는 맛살은 안 넣어 주셔서 몰랐네요.”
“그럼 어떻게 해 주셨었습니까?”
“단무지랑 시금치, 그리고 오이랑…… 또 뭐였더라. 아! 당근이랑 햄이요.”
“맛살 하나만 빠진 셈이네요.”
“사장님도 이렇게만 만드신 건가요?”
“네.”
“맛살 하나만 빠져도 맛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군요.”
기석태는 서준이 가르쳐 준 레시피를 휴대전화에 메모까지 했다. 나중에 꼭 만들어 보겠다면서 말이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인사와 함께 기석태가 트럭에 올랐다.
부릉!
트럭이 출발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연준이 말했다.
“기 사장님이 아까 맛살이 하나 빠졌다고 하셨잖아.”
“어? 어.”
“그거 때문에 갑자기 생각났다.”
“뭐가?”
“나 열네 살 때였나, 열다섯 살때였나. 아…… 열네 살이었겠다. 그때 할머니 병원에 계실 때잖아.”
“그랬지.”
“학교에서 소풍을 간대. 근데 차마 할머니나 형한테 말할 수가 없는 거야.”
서준이 몰랐다는 듯 연준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피식 웃었다.
“뭐 분식점에서 사 갈 수도 있었는데 그 이천 원이 그렇게 아깝더라? 할머니 병원비니 약값이니 돈 들어가는 게 많았잖아.”
“그래도 이천 원 정도는 달라고 했으면 줬을 건데…….”
“그랬지. 근데 그냥 아까웠던 거야. 괜히 자존심도 상하고.”
“자존심이 왜 상해?”
“다른 애들은 다 엄마가 해 주는 김밥 도시락에 싸 오는데 나만 스티로폼 일회용기에 싸 간다는 게, 뭔가 어린 나이에 자존심이 상하더라고.”
이건 서준도 미처 몰랐던 이야기였다. 그 때문인지 서준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일만 있었던 건 아닐 것이다.
연준에게는 알게 모르게 금전적인 문제와 관련한 사연들이 많을 거다.
‘어려웠으니…….’
서준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서 소풍은 어떻게 됐는데?”
“그냥 갔지 뭐.”
“그럼 밥은 어쩌고?”
“형, 현수 기억하려나?”
“현수…… 아, 그 키 작고 오른쪽 귀에 사마귀 있던 애 말하지?”
“어. 점심때 뻘쭘하게 앉아만 있는데 갑자기 현수가 오더니 자기는 이거 혼자 다 못 먹는다고 같이 먹자더라. 양이 많은 것도 아니었어. 내 자존심 생각해서 그렇게 말해 준 거지. 그때 그게 얼마나 고맙던지…….”
“그런 사연 있는 줄 알았으면 옛날에 현수 우리 집 왔을 때 용돈이라도 좀 쥐여 줄 걸 그랬다.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냐?”
연준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3년 전까지는 명절에 한 번씩이라도 연락하고 지냈는데 언제부턴가 연락이 끊겼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잘 있겠지.”
연준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현수의 직업은 포터였다. 포터들의 생존율은 그 어떤 직업군보다 낮다.
통계에 따르면 각성자들보다도 낮았다.
그리고 고위험군에 속한 포터인 현수의 연락이 두절됐다는 의미는…….
연준은 애써 불길한 생각을 떨쳐 냈다.
“그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형 말대로 어디 잘 있겠지?”
“그럼.”
그때였다.
“정말 무소식이 희소식이었으면 좋겠군…….”
이제 막 잠에서 깬 듯 부스스한 몰골의 박연이었다.
“일어나셨어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면, 정말 그런 거라면…….”
진정한 여신도 잘 있는 거겠지.
물론 다른 남자와 함께…….
‘후.’
아니, 그거면 됐다. 어딘가에 잘 있다는 그거 하나면…… 다른 남자와 있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부디 잘 사시오, 진정한 여신…….’
깊게 한숨을 토해 낸 박연이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김밥을 가리켰다.
“아침부터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상한 걸 만들었군. 이건 뭐지?”
“박연 씨, 김밥 처음 보세요?”
“김…… 밥?”
“네.”
“처음 보오.”
그 말에 연준이 탄식을 내뱉었다. 김밥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요즘은 외국인도 아는 게 김밥이었다. 하물며 드라마 덕후인 박연이 김밥을 모른다?
말이 안 된다. 김밥을 모른다고 한 건 상징적인 의미리라.
‘박연 씨도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연준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드셔 보세요. 형이 만들었는데 진짜 맛있어요.”
“생긴 건 별로 맛있어 보이진 않은 것 같소. 새까맣고 칙칙해 보이는 게 영…….”
‘생각보다 김밥에 얽힌 사연이 복잡하신가 보네…….’
김밥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리라.
박연의 표정을 보며 연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박연은 혐오스러운 것이라도 본 듯 김밥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는 어릴 적 김밥에 대한 안 좋은 일을 겪었을 것이다. 경우의 수야 많다.
자신처럼 소풍날 김밥을 챙겨 가지 못해 놀림을 받았다거나…… 엄마가 해 준 김밥을 먹어 본 적이 없다거나…… 등등.
그리고 만약 그런 거라면 연준은 그 트라우마를 박연이 극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보기엔 이래 보여도 엄청 맛있어요.”
“혹시 독이 들진 않았소?”
“하하하. 농담도 심하시네요.”
힐끗.
서준을 흘긴 박연이 말했다.
“왠지 그럴 것 같아서 말이오.”
“설마요. 보세요. 저도 잘 먹잖아요.”
오물오물 맛있게 먹는 모습에 식욕이 동한 박연이 실눈을 뜨며 서준을 바라보더니 김밥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