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305
통화 자체도 굉장히 오랜만에 하는 데다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던 게 촬영 때니까… 무려 5년도 넘게 지났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성오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 나야, 뭐… 똑같지.
“내가 너한테 연락을 자주 했었어야 했는데, 진짜 미안하다. 만날 촬영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안부를 제때제때 못 물었네.”
– 아니야, 아니야. 나도 너한테 미안하지. 네 소식 뉴스로 매번 챙겨보고 있는데, 선뜻 연락하기가 어렵더라. 거의 쉬지도 않고 연기에 몰두한 배우의 시간을 뺏기도 좀 그렇고.
“뺏다니, 무슨 소리야? 전혀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먼저 신경 썼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 아이고, 아서라. 너나 나나 서로 성격 뻔히 아는데, 이러다가는 해질 때까지 사과만 하겠어!
“하하하, 진짜 그럴 수도.”
우진은 호쾌하게 웃었고, 성오도 마찬가지였다.
이내 우진이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성오야,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시간 언제 돼?”
– 나는 다 되지. 너는 언제가 편해? 내가 네 시간에 맞추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음, 이번 주는 주말에 인터뷰 하나 잡혔어. 그거 말고는, 지금 딱히 스케줄은 없어서 아무 때나 괜찮아. 시간 비워놓을게. 말만 해.”
– 잘됐네. 오늘 저녁에 볼까? 너 지금 어딘데?
“인천 본가에 와 있어.”
– 그러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 예전에 갔었던 집 근처 맛집 있잖아. 오랜만에 거기 생각나네.
“아, 그런데… 그 집이 좀 유명해져서 이제 사람들이 많아.”
우진과 우희가 자주 가는 단골 음식점은, 말 그대로 개봉 이후 우진이 단골이라는 알려져 요즘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저께 어머니, 누나와 직접 가서 먹지는 못하고 배달시켜 먹었었다.
– 아, 그래? 아쉽네. 조용하게 얘기 나눌 만한 곳이 좋은데….
성오가 말끝을 흐렸다.
아쉬워하는 말투였는데, 이 대목에서 우진은 성오가 자신에게 뭔가 할 말이 있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 사실, 너한테 할 얘기가 좀 있어서 보자고 하는 것도 있어.
성오가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 거지?”
– 어, 오랜만에 전화해서 이런 얘기는 좀 미안한데…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고.
“성오야.”
– 어?
“나도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 안 할 테니까, 너도 금지야. 네가 보자고 하면, 나는 무슨 일이든 나갈 거니까 그런 걱정 넣어두고. 친구끼리 미안한 게 어딨어. 넌 나한테 소중한 친구이자, 은인인데.”
– …….
우진의 말에, 전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우진이 금세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조용한 곳이면 차라리 집에서 먹자. 청담동으로 와. 나도 시간 맞춰서 출발할게.”
– 그게 좋겠다. 알겠어. 주소 하나만 남겨줘.
“오케이, 이따 보자.”
– 그래, 고맙다.
성오와의 약속을 잡은 뒤, 우진은 잠시 어머니의 가게에 들렀다가 청담동으로 향했다.
* * *
저녁 일곱 시.
– 띵동.
“우진아, 나 왔다!”
성오가 도착했다.
“아이고, 그냥 몸만 오라니까.”
양손이 가득한 친구의 모습을 본 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원래 처음 방문할 때 두둑하게 오는 게 내 철칙이야.”
“다음에는 너희 집에서 먹어야겠다. 그때, 오늘 받은 거에 두 배로 돌려주겠어.”
“그러시든가요~ 이거 어디다 놓으면 되냐?”
“바닥에 놔. 내가 정리할게. 너는 편하게 앉아있어.”
잔뜩 사 온 것도 모자라서, 앞치마를 따라 입으려는 성오를 겨우 만류하는 우진이었다.
성오는 이내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집이 참 좋다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가장 먼저 초대했어야 하는 사람인데, 가장 늦게 초대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연신 들었으나.
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으니, 고이 접어두기로 했다.
그렇게, 잠시 후.
음식이 완성되었다.
값비싸고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대접하고 싶었지만, 식당보다는 집에서 먹자는 결론이 나온 후였고.
이왕 집에서 먹을 거면 배달음식보다는 직접 정성스럽게 차려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우진은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출발해 장까지 봐왔었다.
원생에서 자취만 15년을 했고, 현생으로 돌아온 지금도 자취 인생을 연장하고 있다.
데뷔 후에는 거의 현장에서 먹으니까 숨겨왔었던 요리 실력을 뽐낼 기회가 없었지만.
오늘은 마음껏 뽐낼 수 있어서 좋았다.
성오도 어쨌든 매니지먼트 일을 하고 있으니까, 집밥이 가장 그리웠을 거고.
“와, 네가 직접 다 한 거냐?”
“당연하지. 자취만 몇 년째인데.”
“나도 자취만 10년째 하고 있는데, 왜 난 요리 실력이 안 늘까?”
“먹어봐. 보기엔 그럴듯해도, 맛은 장담 못 한다.”
“얼씨구, 네가 못 먹을 음식을 내놓을까?”
성오가 곧장 찌개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너는 배우 안 했어도 성공했겠다, 인마! 음식점 사장님 해도 되겠는데?”
“맛있냐?”
“완전.”
“다행이네. 일단 식사부터 하자. 퇴근하자마자 바로 왔을 텐데, 배부터 채워.”
우진이 성오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러자, 성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미세하게나마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티를 내지 않고 받아들인 술잔을 비워냈다.
한다는 얘기가 회사 얘기구나.
우진도 굳이 티 내지 않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
간단한 안주를 곁들이며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 두 잔.
술이 술술 넘어가는 찰나.
“우진아.”
성오가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꽃을 피워냈다.
“나, SJ 관둘 거다.”
“……?!”
“사실 오늘 일 끝나고 온 게 아니고, 사직서 내고 왔어.”
이번에는 우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게 하는 한 마디였다.
301화
“사직서를 내고 왔다고?!”
“어, 대표실 책상에다가 아주 잘 보이게 놓고 왔지. 혹시, ‘부재중 사표’라고 들어봤어?”
“그게 뭔데?”
“음, 뭐랄까. 세상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사직서를 내는 방법이라고 해야 하나? 안 대표가 대표실에 없을 때, 사표를 ‘후다닥-’ 두고 나오는 거야.”
“……?”
이게 대체 뭔 소리람.
성오의 말에, 우진은 순간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네가 들어도 어이가 없지?”
“야, 미안하다. 웃으려고 웃은 게 아니야. 나도 모르게, 그만.”
“괜찮아. 너처럼 반응하는 게 정상이야. 나도 처음에 직원들이 다이렉트로 줄줄이 대표실 책상에 사직서 던져놓고 퇴사하는 광경 보면서 헛웃음을 터트렸었다니깐. 진짜 너무 어이가 없더라고. 이게 좋게 표현하면 퇴사인데, 나쁘게 말하면 그냥 도망치는 거나 다름없잖아?”
“그렇긴 하지. 네가 SJ에서는 매니지먼트팀 수장인데, 입장이 좀 많이 난처했겠다.”
“오죽하면 내가 ‘부재중 사표’라는 용어까지 만들어냈겠냐고. 이 어이없는 일이 SJ에서는 일상이었다, 일상.”
성오가 잔에 가득 담겨있는 소주를 입속으로 ‘훌훌-’ 털털 넣으며 말했다.
“그래서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더욱 어이가 없어.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만약에 그만두더라도 나는 끝까지 내 할 일은 하고 나오겠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결국에는 나부터가 그런 식으로 사표를 던지고 나올 줄이야.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성오는 셀프로 채운 잔을 재차 비우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는데, 이 이상은 힘드네. 그래서, 이제 그만하려고. 오늘로써, SJ와는 끝났어.”
“…….”
“사표 쓰고 나니까 굉장히 후련한데, 한편으로는 무척 서운한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내 마음을 아직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말끝을 흐리는 성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깊은 한숨이 물씬 섞여 나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오가 SJ엔터테인먼트를 퇴사하겠다는 결정까지 내린 걸까.
상대적인 거다.
우진에게 SJ엔터테인먼트를 묻는다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름에 불과하다고 말할 것이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지 오래고.
어느 정도냐면….
무려 3년 동안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오직 안종훈을 위한 ‘배역 따오는 기계’마냥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종장에는 토사구팽당했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진정 스스로가 겪었었던 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새까맣게 잊고 살았다.
말이 나온 김에 애써 과거를 떠올려봐도, 이제는 기억이 도통 나질 않는 게 팩트였고.
그만큼, 지금의 ‘나’는 SJ엔터테인먼트 따위가 감히 말을 붙일 수도 없는 위치에 서 있으니까.
그 누구 앞에서도 ‘내’ 자신이 이 정도 급의 배우라고 거들먹거려본 적이 없건만.
만약 안승준과 안종훈 부자를 마주하게 된다면, 한 번쯤은 거들먹거려보고 싶기도 하다는 생각이 ‘슬쩍-’ 들곤 한다.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만나게 되더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SJ엔터테인먼트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에 반해, 성오에게는 SJ엔터테인먼트라는 존재의 의미가 조금 남달랐다.
본인의 정체성과도 같은 곳이었을 테니까.
성오가 처음 매니지먼트 업계에 발을 들였던 곳이었고, 우진이 배우로서 활동한 기간보다도 더 긴 시간을 한 소속사에 몸담아왔다.
그뿐이랴.
성오는 SJ엔터테인먼트의 초창기부터 함께 한 스태프였으며, 생애 처음으로 담당한 연예인이 바로 안종훈이었다.
그 이후에 합류한 우진과는 서로 동갑인 덕분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었고.
“우진아. 나는 배우가 아니니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어, 말해.”
“네가 여태까지 했던 작품 중에서 가장 소중한 작품이 뭐냐?”
“되게 어려운 질문이네. 하나를 딱 꼽아서 말하기가 되게 힘들어. 다 소중하거든.”
“에이, 그래도 하나만 골라봐. 네 필모에서 딱 하나만.”
“굳이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아무래도 데뷔작이 가장 애착이 가겠지? 그게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테니까.”
“역시! 나도 네가 데뷔작을 뽑을 줄 알았다.”
“하나만 뽑아보라고 하니까 뽑은 것뿐이야. 다 똑같이 소중해. 그나저나, 갑자기 그건 왜?”
“아, 잠깐만.”
– 지익, 지익.
성오가 ‘부욱-’ 찢은 마른오징어 조각 하나를 입에 물었다.
“배우한테는 데뷔작이 절대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이듯이, 매니저도 그래. 처음 맡은 스타를 못 잊는 법이야.”
“종훈이 말하는 거야?”
“그래, 걔는 진짜 아픈 손가락이거든. 너 예전에 기억나? 종훈이 에서 사고치고 난리 났었을 때.”
“기억나지. 현장에서 라이브로 봤었는데, 그 충격적인 장면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어. 그때 종훈이 매니저였던 친구가 수호였었나? 어렴풋이 기억이 나네.”
“기억력 최고다, 너.”
“배우가 남들보다 기억력 좋은 거 말고, 또 내세울 게 뭐가 있겠냐. 대본 외우는 게 일이잖아. 하하, 마셔.”
– 짠.
두 사람의 잔이 부딪쳤다.
우진이 때마침 비워진 병을 내려놓고, 새 병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잔이 다시 한번 채워진 뒤, 성오가 말을 이었다.
“네가 그때 나한테 플라워엔터테인먼트로 올 생각 있냐고 물어봐 줬었잖아.”
이게 무슨 얘기냐면.
플라워엔터테인먼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배우 전문 연예기획사라는 타이틀을 앞세우고 있지만, 서서히 소속 연예인의 풀을 넓혀왔다.
이 작업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인데, 품에 담으려는 대상은 예능에서 활약상이 큰 연예인들이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자회사가 바로 ‘플라워C&C’였으며, 여기에는 대한민국에서 탑급인 예능인들이나 MC들이 소속되어있었다.
이 자회사가 처음 생겼을 때, 매니지먼트팀 인력 일부의 인사이동이 있었다.
우진의 스케줄이 없을 때, 준안이 다희나 수현의 스케줄에 지원을 분주하게 나갔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부족한 인력을 채워 넣어야 하는 과정에서, 김태곤 팀장은 당시 플라워엔터 내부에서 모두의 신망이 두터운 우진에게도 혹시 알고 있는 지인이나 스카우트할 만한 인물이 있는지 물어봤었다.
우진은 곧장 성오를 떠올렸었고, 마침 안종훈 한 명에게만 올인하는 SJ엔터테인먼트가 휘청휘청하는 모습을 보며 성오에게 가볍게 제안했었다.
물론 그때의 성오는,
“그때 네가 ‘No’라고 했었지.”
“맞아, 그랬었어.”
단칼에 거절했었다.
그 이유는,
“종훈이를 차마 버릴 수가 없겠더라고. 너만큼은 아니어도, 걔가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니잖아?”
“개인적인 감정 같은 거 다 빼고 같은 배우로서만 말하자면, 인정해. 종훈이도 연기 잘하는 배우야. 예전에 할 때 느꼈었어. 걔가 나를 열받게 하는 장면을 찍는데, 걔 연기 보면서 진심으로 열을 받더라고. 감정을 잘 주는 배우야.”
“데뷔하자마자 대한상도 타고, 분위기 좋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안 찾아주는 거 있지?”
“네가 그랬잖아. 내가 로 데뷔하고 나서부터 종훈이한테 들어오는 캐스팅 연락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아, 맞다. 그랬지.”
“나랑 걔랑 이미지가 비슷해서 그런 것 같다고. 이거 너한테서 들은 얘기야.”
“그래. 그래서 종훈이가 너한테 자격지심이 심하다고까지 알려줬었지.”
과거 이야기가 점점 꽃을 피우고 있었다.
두 사람의 과거는 결국 ‘SJ’에 접점이 있기에, 자연스레 안종훈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성오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우진은 계속해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뭐랄까.
성오가 뭔가 말하고자 하는 대마(大馬)를 꺼내기 전에, 주제를 크게 돌리는 중인 느낌이랄까.
하지만, 우진은 내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