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33
“대본을 대체 어떻게 봤기에 그래? 거울 좀 봐봐. 너 지금 완전 폐인이야.”
“진짜 별거 없는데….”
“별거 없긴! 이 꼴을 하고는!”
준안의 닦달에 우진은 지난 10일간의 여정을 들려주었고,
“…그냥 이렇게 지냈어요.”
“진짜 네가 연기에 미친 놈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준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준비하고 나와. 형이랑 나가자.”
“네? 어디를요?”
“그냥 저녁이나 먹자고. 딱 봐도 그동안 밥도 제대로 안 챙겨 먹은 것 같은데.”
“저 진짜 괜찮아요, 형. 걱정 안 하셔도….”
“그러지 말고 같이 좀 가주라. 오랜만에 내 배우님과 얘기 좀 나누고 싶어서 그래.”
내 배우.
그 짧은 표현 하나에 매니저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참 듣기 좋았다.
“크흠.”
생각해 보니 오그라드는 표현이었는지, 준안은 헛기침을 연신 해댔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 같기도?
우진은 터질 뻔한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금방 나올게요.”
“차에서 기다릴게. 문 앞에 댔으니까 바로 타면 돼.”
“네, 형.”
우진은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니 준안의 말대로 수염이 덥수룩하고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진짜 누가 봐도 폐인이네.’
얼마나 걱정됐으면 준안이 한달음에 달려왔을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단번에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 슥삭슥삭.
덥수룩한 수염을 정리하고 머리를 감으니, 어느새 180도 다른 사람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우진은 옷을 갈아입은 뒤, 문을 나섰다.
“저 왔습니다~”
“오케이. 출발해 볼까.”
우진이 차에 탑승하자마자 준안이 시동을 걸었다.
그래.
일단 오늘은 연기에 대해 잊자.
지금 필요한 건, 힐링이다.
“뭐 먹을래?”
준안이 당당하게 카드를 꺼내 보이며 물었다.
“형. 그거 법카죠?”
“야, 아니야. 형 개인 카드야. 오늘은 형이 쏜다!”
“제가 살게요. 넣어두세요.”
“형이 사주고 싶어서 그래. 내 배우님 맛있는 거 든든하게 먹여보자, 좀.”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괜찮아. 뭐 먹고 싶어? 다 말해.”
“음….”
최근에 들었던 질문 중에 제일 어려운 질문이었다.
물론, 류 감독이 미팅 때 물어본 질문을 제외하고.
“형. 그런데, 만약에요.”
“응? 뭐가?”
“연산이라면 뭘 먹고 싶다고 했을까요?”
“…야, 너 정말!”
“하하하. 농담이에요.”
사소한 장난이 주는 즐거움이 평소보다 배로 느껴진다.
일정 기간 타인과의 교류가 없었다가 생겼을 때 느끼는 즐거움이란 감정.
고독이 종장으로 치닫는 연산에게는 그것이 아마 채홍준사(採紅駿使)를 통해 바쳐지는 미녀와 준마(駿馬)였으리라.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상 속에서 속속 떠오르는 생생한 감정들이 우진의 무거웠던 마음을 한층 가볍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감자탕이 당기는데, 형은 어떠세요?”
“메뉴 좋다. 감자탕, 그거 없어서 못 먹지.”
“저 이 동네 맛집 알아요. 거기로 가요.”
“콜!”
준안이 핸들을 돌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선선한 저녁 공기를 뚫고 스타렉스 차량이 도착한 곳은 동네에서 소문난 감자탕 맛집.
“아우야. 준비되었느냐?”
“물론입니다, 형님. 가시죠.”
도착하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들어간 두 사람.
그리고 잠시 후.
“진짜 맛있네.”
“맛집 인정. 내가 먹어본 감자탕 중에서 최고였어.”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나온 두 사람은 만족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아직 시간이 이르네.”
“그러게요.”
아직 초저녁인 시간.
날씨 좋고, 기분 좋고, 분위기 좋고.
뭔가 이대로 들어가기 아쉬운 건 우진이나 준안이나 마찬가지였다.
“형. 저 갑자기 가고 싶은 곳 생겼어요.”
“어디? 말만 해.”
“한강 가서 맥주 한 캔 콜?”
“좋은 생각이긴 한데, 나 운전….”
“대리 부르면 되죠. 제가 대리비 낼게요.”
이번에는 우진이 지갑을 꺼내 보였다.
“허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친구일세!”
“가요. 오랜만에 한강 가고 싶네.”
“그래. 오늘은 내 배우님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가자.”
곧장 한강으로 향한 두 사람은 비교적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물론, 우진에게는 낯익은 자리이지만.
“받으시오.”
준안이 손에 든 검은 봉투에서 캔맥주를 꺼내 우진에게 건넸다.
– 치익~ 따악!
맥주캔을 따는 경쾌한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 꿀꺽꿀꺽.
우진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 어느 때보다 달콤한 맥주가 술술 넘어갔다.
“크으!”
– 탁.
뭔가 데자뷰인 느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그림의 상황이 있었지.
원생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한강은 왜 온 거야?”
준안이 옆에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우진에게 물었다.
“옛날 생각나서요.”
“옛날 생각?”
“네. 뭐, 사실 그렇게 옛날도 아니에요. 불과 얼마 전이었으니까.”
맞는 말이었다.
물리적 시간으로 따지면 무려 10년을 뒤로 점프했지만, 우진이 직접 체감한 시간은 5개월이 채 안 되었으니까.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봐도 돼?”
생각에 잠긴 듯한 우진에게 준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업영화 오디션이었는데, 최종 5인에서 떨어졌어요. 되게 절실했었는데.”
“와~ 최종까지 갔는데 떨어졌으면 진짜….”
“멘탈이 그냥 아주 산산조각이 났죠.”
“그래서?”
“떨어졌다는 문자 받고 나서 여기에 왔어요. 지금 딱! 이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청승맞게 캔맥주를 깠죠.”
우진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연기 그만두겠다고 다짐하면서 쓴 맥주를 마셨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꿀맛 맥주를 마시고 있네요.”
“진짜 인생 역전이네.”
“감회가 새롭네요. 여기에 앉으니까. 사람 일 참 모르는 거구나 싶기도 하고.”
“‘될놈될’이라고 하잖아. 넌 누가 봐도 될 놈이었던 거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닐걸?”
“저 잘할 수 있겠죠?”
준안이 우진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당연하지. 불안해하지 마. 너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우진이 느끼고 있을 책임감과 부담감의 무게가 준안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시 손에 든 맥주캔을 보며 고민하던 준안은,
“우진아. 사실 형도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형은 너의 연기 방식을 존중해. 당연히 네가 나보다 연기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을뿐더러 배우마다 연기론은 다 다르니까.”
“네.”
“그래도 형은 네 매니저잖아.”
“그렇죠.”
“배역을 준비하는 네 자세는 칭찬이 부족할 만큼 훌륭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로 과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준안의 진심이었다.
“매니저한테 제일 중요한 건 내 배우의 건강이잖아.”
“…….”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과하진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야. 네가 배우로서 할 일을 하는 것처럼, 형도 매니저로서 할 일을 하는 거니까. 너무 서운하게 듣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알죠, 형. 고마워요.”
“에이, 오그라들어. 짠 해!”
두 사람의 맥주캔이 부딪쳤다.
우진은 맥주를 마시며 생각했다.
‘연기 접근 방식을 조금 바꿀 필요는 있겠다.’
외부와 접촉이 전혀 없었던 지난 10일이 주는 영향력이 생각보다 컸던 건 사실이니까.
몸에 좋은 약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임을 다시 한번 깨달은 우진이었다.
30화
스포츠에는 ‘스토브 리그(Stove League)’라는 용어가 있다.
정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정규 시즌이 찾아오기 전까지의 기간을 지칭하는 말.
휴식, 회복, 훈련, 전력보강 등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시기.
배우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이 끝나면, 다음 작품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들 나름대로의 스토브 리그를 갖는다.
다만 스포츠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배우의 스토브 리그는 그 주기와 기간이 굉장히 불규칙적이고 개인마다 편차가 심하다는 것.
배우는 결국 프리랜서 직업이니까.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우진의 스토브 리그는 쉴 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와 늘 붙어있다시피 한 준안의 시점에서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보내고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우진이 크랭크인 전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연기에 매진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준비할 것이 많으니까.
본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기본적으로 쌓아야 할 것들이 생각 외로 많았다.
예를 들면, 사극은 현대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성의 중요도가 훨씬 높다.
이 때문에 우진의 일과에는 항상 발성 훈련이 빠짐없이 들어갔다.
대본에 파묻혀 사는 것은 이미 당연한 일상이고, 류 감독을 통해 추천받은 액션 스쿨도 심지어 주 5회씩 나갔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액션 스쿨은 경기도 파주에 있었다.
서울과 파주를 거의 매일 왔다 갔다 하는 것 또한 엄청난 체력을 소모하는 일.
이 때문에 소속사 측에서 횟수를 줄일 것을 권장했지만,
“괜찮아요. 전 이게 좋아요.”
우진의 얼굴에서는 오히려 화색만이 돌았다.
“저는 일주일 내내 나가려고 했는데, 주위에서 하도 걱정해서 5번만 나가는 거예요.”
그 말에 준안은 혀를 내둘렀다.
왕 배역은 무사 배역과 비교하면 요구되는 액션의 정도가 작다.
그리고 무희 역에 비하면, 연기에 요구되는 가무의 테크닉 정도도 당연히 작을 것이고.
그런데도, 우진은 출연진 중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승마, 춤, 창(唱), 검술 등.
모든 수업에 참여하면서 열의를 불태웠으니까.
“우진아.”
“네?”
“넌 아무리 봐도, 미친놈이 확실해. 물론 좋은 의미에서.”
“하하. 칭찬이죠?”
“아니, 극찬이야. 솔직히 존경스럽다.”
그 모습이 대단하면서도, 왜 저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문득 이해가 되지 않는 준안이었다.
하지만 우진의 입장에서는,
‘부족해. 아직도 많이 부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