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 독재자의 정체
2034년 1월 23일.
에반스 부통령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서 인류연합과 미국 간의 짧은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
인류연합은 승전국임에도 관대한 처분을 약속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미국 수뇌부 중에서 우주감옥에 끌려간 것은 제임스를 비롯한 소수의 의원과 납치에 관여한 군인들뿐이었다.
재판 과정도 참으로 간단했다.
인류연합의 관례대로 인공지능 판사가 즉석에서 죄목과 증거, 형량을 쭉 읊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유지하의 납치에 관여했던 자들이 전부 세틀러호에 실려 우주로 날아갔다.
그 과정에서 문제의 우주감옥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사람들은 황량한 우주공간에 덩그러니 떠 있는 무개성한 플랫폼을 보곤 충격과 공포에 혀를 내둘렀다.
―와우. 진짜 지랄맞게 생겼네.
―저기서 썩느니 자살하는 게 나아.
―의외로 중력은 있다고 하네. 밥도 제대로 주긴 하는데 버티기가 어렵다고 하네.
―왜?
―안에서 독방 창문으로 지구를 볼 수 있는데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나 봐.
―우주에 홀로 버려진 느낌이겠지…….
―우주감옥을 한 번이라도 경험하고 나면 두 번 다시 범죄를 안 저지르는 경향이 높다고 하더라고.
―저길 두 번 간다고 생각하니까 소름이 쫙 끼치네.
아무튼 유지하는 그렇게 소수의 인원을 감옥으로 보낸 후에는 별 처벌을 하지 않았다.
인공지능 재판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정치인들도 자신이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전쟁에서 진 마당에 너무 목소리를 높여도 좋지 않다.
유지하는 점령군처럼 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니까.
만 단위의 사망자가 발생했음에도 의외로 미국 내부에서 유지하를 원망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는 피해자였고 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것은 끝까지 인류연합과 유지하를 반대하며 갈등을 일으키려 하던 자들이었다.
―그래,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전쟁을 한 덕분에 이 꼴이 됐다. 이제 어쩔 거냐?
―유지하를 죽이거나 납치해야 된다고 선동하던 게 너희놈들 아니었어? 어디에 쥐새끼처럼 숨은 거지?
―이제는 왜 항복했냐고 지랄하던데, 만약 핵전쟁을 했다면 미국인이라는 분류 자체가 없어졌을 거야, 이 멍청이들아.
오프라인은 물론이고 온라인에서도 유지하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많은 사람이 전부 사라졌을 리는 없고 언젠가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찍소리도 못하고 숨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무지성이 사라지고 인류연합에 협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양국의 전쟁으로 세계의 금융이 박살난 마당에 경제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었다.
―온갖 숫자놀음으로 거품을 키우면 뭐하나? 전쟁 한 방에 모조리 증발하는데.
―다시 거품을 키울 수는 있겠지만 플레이그가 침공하면 또 날아갈 것이다. 더 이상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
―인류연합을 봐라. 승전국이라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전쟁에도 불구하고 별 타격이 없다. 우리도 저런 경제 구조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당장 금융계를 무너뜨리는 건 어려웠다.
현대국가의 경제와 금융은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분리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라를 새로 만드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아무튼 미국이 항복한 시점에서 감옥에 끌려가지 않은 수뇌부는 대거 하야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유지하와의 인맥을 과시하며 재등장한 리처드 번스타인이었다.
그는 일각의 의심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방문해 유지하와 회담을 가졌다.
“솔직히 지금도 믿기지가 않는군요. 그런 얘기를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유지하는 미국인들의 생각을 뜯어고치겠다고 마음먹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실제로 해냈다.
전쟁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의 미국에서 그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보긴 힘들었다.
번스타인은 이제 자작극 가능성을 언급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졌고 이제 지구의 지배자는 유지하다.’
평범한 세상이었다면 초강대국의 독재자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끼치기는 힘들다.
하지만 2034년의 지구는 언제 플레이그에 공격당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세상이었다.
유지하의 예지에 의하면 앞으로는 상황이 호전되기는커녕 더 심각해질 예정이었다.
그러니 미국도 바뀌어야 하는데 정확히 어떤 식인지는 번스타인조차 알지 못했다.
그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입을 열었다.
“국내에서도 변화의 필요성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방향성에 대해서는 혼란스러워합니다. 다들 대체 뭘 바꿔야 하느냐에 대해서 묻곤 하죠.”
“별거 없습니다. 미국은 거대한 나라이고 갑자기 모든 것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나도 잘 압니다. 내가 원하는 건 확실한 협력입니다.”
“확실한 협력이라…….”
“이번 전쟁으로 미군 전체가 와해되었을 겁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병력이 상당히 남았지만 전략적 측면에서는 전멸한 거나 다름없었다.
어스 플릿이 모든 전력을 가동했다면 진짜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유지하의 목적은 미군의 전멸이 아니었기에 상당수가 생존할 수 있었다.
“사망자의 유족에게 위로금과 연금을 지급하십시오. 적지 않은 돈이 들겠지만 그 많은 무기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적게 들 겁니다.”
가슴 아픈 얘기지만 현실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미국의 많은 무기가 사라졌다.
전쟁에서 진 이상 그걸 복구할 이유도 여력도 없었다.
이제 미국이 가야 할 길은 국방비에 들어가던 막대한 자금을 어디론가 돌리는 것이다.
그건 일부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유지하의 주머니가 아니었다.
“그 돈으로 자원을 확보하고 우주에 진출하십시오. 나아가 화성에 기지를 만들고 우주선을 건조하면 됩니다. 인류연합이 돕겠습니다.”
“새로운 어스 플릿을 만들라는 의미입니까?”
유지하는 고개를 저었다.
“어스 플릿은 해체될 겁니다. 이제 더 이상의 전쟁은 필요 없습니다.”
번스타인은 유지하라는 인간 자체가 전쟁을 불러온다고 말하는 음모론자들에게 이 발언을 들려주고 싶었다.
결국, 그가 한 말이 맞았던 것이다.
“인간과의 전쟁은 끝났습니다. 이제 남은 건 플레이그와의 전쟁뿐입니다.”
물론 지구에서 전쟁을 완전히 없애는 건 인류연합의 힘으로도 불가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와 종교, 인종 등의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고 유지하의 목적도 그걸 모두 막는 게 아니었다.
“80억 인구 전부를 평화롭게 할 순 없습니다. 원래 나는 9억 정도를 생각했습니다만 거기에서 조금 더 늘어나도 상관은 없습니다.”
“메가시티에 수용할 수 있는 인구군요? 그걸로 플레이그를 막을 수 있습니까?”
“인공지능이 계산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메가시티 밖의 사람들은 내가 알 바 아닙니다.”
“미래를 본다고 하셨지요? 그들은 어떻게 됩니까?”
“전부 죽습니다.”
“…….”
번스타인은 침묵했다.
이런 무서운 말을 확답하듯 할 수 있다는 건 유지하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그는 타는 목을 물로 축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부터 많은 사람이 당신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했었습니다. 이제 지구에서 당신을 적대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으니 슬슬 정체를 드러내도 좋지 않겠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적대세력이 존재하지만 별 의미가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인류연합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까지 영향권에 넣은 그에게 일개 국가가 반대하고 테러 단체가 적대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뭐 나쁘지 않겠지요.”
애초에 유지하가 정체와 세틀러호를 숨긴 것은 대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두려워하는 건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전 세계가 적대시하고 감당하지 못할 인구가 메가시티로 몰려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얼추 준비가 갖춰졌다.
완벽한 건 아니지만 메가시티는 많은 인구를 받아들였으며 충분한 방어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유지하를 적대하는 세력도 없어졌기에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대중에 공개하는 건 안 되겠지만 번스타인과 같은 핵심 인물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그의 가족이 메가시티의 시민이 되었으니까 별문제는 없겠지.
‘이제 내정을 다지고 최고평의회를 만들 때가 됐다.’
그의 목표는 플레이그 박멸이고 그게 이뤄지면 선지자의 고향으로 떠나야 하기 때문.
원래 아르마가 계획한 로드맵에도 최고평의회 설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언제까지고 권력을 독점할 순 없지 않은가.
“이 건은 몇 분을 초대한 후 직접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거 기대되는군요. 음모론대로 우주선이라도 튀어나오는 거 아닙니까?”
유감이지만 세틀러호는 끝까지 숨겨야 한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미하일로프 러시아 대통령과 배성민 비서실장 등을 포함한 각국 정치인들이 청와대 집무실에 모였다.
유지하는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나는 2180년에서 왔습니다.”
“…예?”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 * *
“2103년, 플레이그의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수억 명의 인구가 사망했고, 인류는 힘을 합쳐 메가시티를 만들었죠. 이게 내가 있었던 시간대의 역사입니다.”
“인류는 선지자의 유물과 메가시티를 기반으로 플레이그에게 대항하려 애썼습니다. 많은 우주선과 무기를 만들었고, 사이커를 전선에 내보내 싸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2177년, 인류는 최후의 한 명을 남기고 멸종했습니다. 통합우주군의 군인이었던 그는 우주를 배회하다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살아났죠.”
유지하는 뒷말을 생략했지만 모두가 연상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인류 최후의 생존자였던 것이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 아니, 다른 시간선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그가 있던 세계는 평행세계의 지구일지도 모른다.
각국의 정치인들은 심하게 눈을 깜빡이며 발언 내용을 해석하려 애썼다.
그나마 젊은 축에 들어가는 배성민 비서실장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그 인류 최후의 생존자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왔다는 말씀이십니까? 2177년에서 2025년으로요?”
“정확히는 2180년입니다. 나는 어설트 아머… 그러니까 작은 우주선에 3년 동안 처박혀 있다가 구출되었거든요.”
“그 군인을… 대통령님을 구한 인공지능이 루시아입니까?”
“아르마입니다. 그녀는 인류연합의 인공지능으로 원래는 몸이 없었으나 여기에 와서 안드로이드를 만들어 몸으로 사용했죠.”
책상에서 타이핑을 하고 있던 아르마가 일어섰다.
갑자기 왜 일어서는 거지?
다들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별안간 그녀가 머리를 뽑았다.
“푸웁!”
미하일로프 대통령이 놀라 캑캑거렸고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선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리 안드로이드가 보편화되었다고 해도 아내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번스타인은 입을 딱 벌리다가 턱 관절이 어긋나는 바람에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가장 놀란 건 배성민 비서실장이었다.
바로 옆에서 지켜봤음에도 전혀 안드로이드인 줄 몰랐었는데.
아르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도로 붙이곤 의자에 앉아 타이핑을 해나갔다.
“어, 음… 안드로이드란 건 확실히 알겠군요…….”
분위기가 진정되자 유지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재 강인공지능 루시아라고 하는 존재의 정체는 아르마입니다. 아르마는 수억 개로 이뤄진 연산유닛의 집합체로, 지금까지 내가 선보인 기술 전부를 설계했습니다. 원래 인류연합의 유산이죠.”
사람들은 2180년의 군인이 어떻게 과거로 돌아왔는지 궁금해했으나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그의 행적을 되새겨보면 외계인이 아니라 미래인이 확실했다.
그는 미래에서 현 시대로 온 것이다.
번스타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보기관에서 분석한 게 맞았군. 혹시 어딘가에 거대한 우주선 하나 숨기고 있지 않습니까? 2025년 가을쯤에 한국해 근처에서 작은 쓰나미가 있었다고 하던데.”
수많은 정치인의 암살 건까지 해서 음모론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 자리에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유지하는 우주선 얘기는 얼버무렸다.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하느냐겠죠. 인류는 멸망했습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인류는 멸망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과거로 돌아왔습니다.”
“인류연합과 메가시티를 만들었고, 사이커를 모았습니다. 이제 남은 건 모든 자원을 끌어모아 우주선을 만들고 파일럿들을 훈련시키는 겁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여러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인류연합의 대통령부터 미국의 차기 대통령 후보, 러시아의 대통령과 독일의 총리까지 사실상 인류를 이끌어간다고 할 만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의 결정이 인류 전체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지하는 다시금 강조했다.
“미래의 인류는 플레이그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미래는 오지 않을 겁니다. 내가 왔고, 여러분이 도울 것이고, 무엇보다 역사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미래에서 플레이그는 2103년에 최초로 지구를 침공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70년 이상 빨리 도착했죠.”
다들 그 말을 듣곤 고개를 끄덕했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2103년의 인류는 대체 어떻게 했기에 수억 명이 죽은 겁니까?”
“나도 잘은 모릅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에는 인류가 당시의 기록을 지워 버렸기 때문이죠. 다만 현재보다 훨씬 더 심한 상태였음은 분명합니다. 선지자의 유물을 일부 국가만 가진 상태였을 테니까.”
일부 국가가 독점했다면 당시의 상황은 보나 마나 뻔한 것이다.
슈퍼파워를 지니고 다른 국가를 식민지 취급하며 극심한 거품경제를 이뤄냈겠지.
플레이그에 대한 진지한 대비 없이 향락과 사치에 젖었을 것이다.
유지하도 선지자의 유물을 독점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는 협력만 약속한다면 얼마든지 공유할 의향이 있었다.
미하일로프 대통령은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꺼냈다.
“한 대 피워도 되겠습니까?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서 머리가 어질어질하군요.”
“얼마든지 피우십시오. 보드카도 한 잔 가져다 드릴까요?”
“아, 술은 됐습니다.”
정상들은 뿌연 연기 속에서 심각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거기엔 세계의 향후 경영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러시아의 미하일로프 대통령은 하루라도 빨리 인류연합에 통합되길 원했다.
“메가시티 러시아가 진정한 통합의 시작이 되겠군요.”
유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를 밝히는 김에 왜 러시아에 신경을 썼는지도 말하고 싶었으나 관두었다.
러시아인들이 그에게 호감을 가진 덕분에 통합이 큰 소란 없이 진행되고 있는데 굳이 재를 뿌릴 이유는 없었다.
번스타인은 흥분되는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전쟁을 어떻게 수습하나 했는데 더 큰 문제가 생겼군요. 이거 큰일입니다.”
“간단합니다. 반으로 나누면 됩니다.”
“…미국을요?”
“이번 전쟁으로 나를 증오하고 내 방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다만 충분히 목소리를 낮췄을 뿐이죠. 그들을 설득하려는 노력 대신 협력하기로 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더 효율적입니다.”
“미국을 반으로 나눈다라…….”
“영토나 시스템을 반으로 나누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메가시티에 들어올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는 거지요. 만약 뉴욕을 침공한 감마 파이브 이상의 플레이그가 수백 마리 나타난다면 미국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번스타인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걸 막는 건 불가능합니다.”
“메가시티와 인류연합은 가능합니다. 그러니 언제든 도시를 뜰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오.”
“다소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신상을 파악하고 조건에 맞는 인원을 추려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에테르 감응력… 그러니까 블랙메탈 인자를 보유했다 생각되는 사람은 프리패스입니다.”
“메가시티 아메리카를 만드는 건 안 되겠습니까?”
“10개의 메가시티라… 계획에는 없었는데.”
유지하가 고민하는 척하자 독일의 발터 총리까지 나섰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민주주의나 자유를 따질 때가 아니군요. 살아남는 게 우선이니 말입니다.”
“플레이그가 언제 대대적으로 침공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사례를 봤을 때 그리 멀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죠.”
“동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에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그 전에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책상 밑에 서랍장으로 위장하고 있던 워커 한 대가 철컹철컹 변형하더니 벽면에 영상을 비추었다.
사람들은 이제 이 정도로는 놀라지도 않았다.
“저건 플레이그에서 나온 에테르 코어…….”
“저 코어가 주변 금속을 침식한다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런데 침식 능력은 플레이그의 등급과 코어의 크기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구에 방문했던 녀석들은 아주 작은 개체들이죠. 군대로 따지면 이병, 일병쯤 될 겁니다.”
정상들이 코어의 크기를 보며 하나같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장군쯤 되는 녀석의 코어는 얼마나 크단 말인가?
벽면의 사진이 교체되며 거대한 플레이그 코어가 드러났다.
유지하와 아르마가 바로 옆에 서 있었기에 얼마나 큰지 짐작이 되었다.
“크, 크군요…….”
“저 정도면 플레이그 본체의 크기는 어느 정도나 됩니까?”
“플레이그 레비아탄급입니다. 정규 플레이그 중에서는 가장 거대한데 1km를 가볍게 넘어갑니다. 지금까지 인류연합이 선보였던 무기는 전부 저 괴물을 연구해서 나온 겁니다. 레일건과 에테르 레이저, 이온 빔까지요.”
벽면에 인류연합이 파괴했던 플레이그 레비아탄 개체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지간한 빌딩이 초라해 보일 정도의 거대한 괴물이었다.
미래의 인류는 저런 괴물 수백 마리와 싸워왔단 말인가?
사람들은 왜 유지하가 그토록 강압적이고 냉정하게 독재를 했는지 깨달았다.
저런 괴물과 싸우다 멸망당했으니 독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겠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고 비효율적인 것 등 많은 단점이 지적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유지하는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런 플레이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반응탄뿐입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 여러분은 방주에 들어갈 사람을 선별하십시오. 조건을 완화하는 건 안 됩니다. 메가시티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인구 밀도가 높은데 소란이 커지면 위험하겠죠.”
“이해했습니다. 최대한 신경을 쓰겠습니다.”
“추가적인 메가시티는 협의 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은…….”
다들 하나라도 된 양 입을 다물었고 유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없는 이야기 듣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나를 믿어주십시오. 모든 것은 인류를 위해서입니다.”
그간 유지하는 인류를 위해서라는 발언을 자주 해왔지만 비웃음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잔혹한 독재자가 대중을 기만하며 농담을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수장들은 그의 정체와 진정한 목적에 대해서 믿게 되었다.
2180년의 미래에서 2025년의 과거로 돌아온 인류 최후의 생존자.
독재자의 정체는 바로 그였던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에 뵙도록 하죠.”
회의가 끝나고 다들 청와대를 나갔다.
유지하는 아르마까지 내보내고 청와대의 정원을 바라봤다.
일부에게나마 비밀을 밝혀서인지 속이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의자 뒤에 배성민 비서실장이 섰다.
“대통령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미래에서 오셨다면 제 생각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실 것 같은데, 맞습니까?”
“첫사랑에 실패만 안 했다면 비서실장만 한 아들이 있었겠죠.”
갑작스러운 농담에 그가 당황했고 유지하는 빙긋이 웃었다.
“농담이고 내 아이들이 살아 있었다면 비서실장보다는 약간 아래 연배였을 겁니다.”
살아 있었다면…….
유지하가 뒤를 슥 돌아보며 물었다.
“젊은 대통령 모시기가 좀 아니꼬웠던 모양이죠?”
“아, 아닙니다. 단지 너무 침착하셔서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 대통령 하는구나 생각했을 뿐입니다.”
“침착은 무슨. 정신없이 뛰어다녔을 뿐이죠. 일은 아르마가 다 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더라도 그가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가 결코 낮지는 않을 것이다.
배성민은 그의 등 뒤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낱 독재자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