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16
16화
“이보시오! 우리를 개방으로 데려다줄 수 있겠소?”
인공의 목소리는 조금도 주눅 들거나 기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당당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런 인공을 대하는 남채화의 태도는 보기 역겨울 만큼 알량했다.
“글쎄요, 하는 거 봐서요.”
“뭐, 하는 거 봐서?”
인공이 두 눈을 부릅뜨자 남채화는 야멸차게 거절했다.
“하는 꼴 보니까, 그나마도 하기 싫어지는데.”
남채화가 두어 걸음 물러서더니, 그대로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이런! 이대로 보낼 순 없다.’
다급해진 장설이 한달음에 다가가, 남채화의 앞을 막으며 간절히 말했다.
“이보시오, 남채화 어른! 어찌하여 사람을 이리도 실망시키는 것이오.”
―엥! 실망!
등을 보인 채 몇 걸음, 발을 내디뎌 가던 남채화가 걸음을 멈췄다. 장설의 말에 꼭지가 당겨서였다.
“살 만큼 사신 양반이 어찌하여 그리도 어리석단 말이오. 크게 실망하였소. 귀에 거슬릴지는 모르나…….”
바로 그 순간 등을 돌렸던 남채화가 다시 돌아섰다. 협상의 여지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런 남채화의 태도에 장설은 바로 말을 돌렸다.
“남채화 어른! 우리 같은 지성인들만이 아는 뭐 그런 거 말씀입니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횡설수설하는 장설. 그는 괜히 얌전히 있는 인공을 걸고넘어졌다.
“이런 자를 사람 취급한다는 건 우리 지성인에게는 인격적 낭비라 생각합니다. 아예 무시하고, 저하고 얘기합시다. 언짢으셨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부디 저 무식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옆에서 장설이 하는 말을 속수무책 듣고 있는 인공은 속이 다 뒤집어질 지경이다.
남채화는 의심의 눈길로 장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대체 이자의 속셈이 무엇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자기 편을 저렇게 헐뜯어 가며 나에게 애원하듯 매달리는 것인가.
그렇게 유심히 인공과 장설을 번갈아 살펴보던 남채화는 급기야 막말을 쏟아냈다.
“여기, 이 싸가지없는 놈은 누구이며, 싸가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이런 녀석을 감싸려 드는 그쪽은 누구시오?”
남채화의 아우성을 듣는 인공은 수차례나 그녀를 쥐어박을 기세로 주먹을 어깨까지 들었다 놨다 했다. 에효, 저거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거. 팍 그냥 죽여 살려! 장설은 매서운 눈매로 인공을 흘겨보며 그의 태도를 질책했다.
보란 듯 선을 넘는 남채화를 대하는 장설 또한 인공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속내를 숨긴 채 굴곡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말씀드리기조차 민망하게도, 이 녀석은 제 동생이고, 저는 이 녀석의 형입니다.”
“둘이 형제야? 그럼 똑같은 놈이잖아. 에잉, 됐어. 일 없으니까, 딴 데 가서 알아봐.”
삿대질까지 해가며 인공과 장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남채화를 보는 용하는 얼핏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하잖아? 누가 봐도 뻔한 연기를 왜 저리도 태연하게 해 대는 걸까? 용하는 아직 세상을 알지 못했다. 이 세상은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닙니다. 부디 이 녀석의 무례함을 용서하시고 넓으신 도량으로 선처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녀석이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니었는데, 몇 해 전 크게 사고를 당한 이후 사리분별력에 문제가 생겨 머리가 좀, 아니 많이 모자랍니다.”
장설의 말에 인공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하, 머리가 모자라? 내가? 참다못한 인공이 마침내 입을 뗐다.
“형님! 정말 끝까지 이러실 겁니까? 이깟 거지 꼬락서니를 한 늙은 할망구가 도대체 뭐라고, 그리 오금도 제대로 못 펴고 쩔쩔매시는 겁니까?”
“당장 그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 한 마디만 더하면, 그 잘난 주둥아리! 아예 쓰지도 못하게 뭉개 버릴 것이다.”
더는 견딜 수가 없다. 곧 죽는 한이 있어도 할 말은 해야겠어. 인공은 끝내 억울함을 견디지 못해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곧 길게 한숨만 내쉬며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찌그러졌다.
“그만 노여움일랑 푸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여력이 되는 한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여력? 그럼 나 국밥 좀 사 줘.”
“국밥 말씀입니까?”
“여러 소리 말고 사 달라고 하면 그냥 좀 사 줘.”
고집스러운 말투였다. 그런 남채화를 대하는 장설은 매 순간 시원시원했다.
“그럽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근처에 국밥 맛있게 하는 데가 어디입니까?”
남채화는 막힘없이 시원시원한 장설을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이었다.
“국밥만 전문으로 하는 데는 없고, 요 뒤에 주막이 하나 있거든. 거기 국밥 먹을 만해.”
“그럼 그곳으로 갑시다. 인공 자네도 뒤따르게. 덕분에 탁배기 한잔하고 좋잖아.”
장설은 아직도 심통을 부리는 인공을 조금이라도 달래 주고자 노력했고, 인공은 탁배기 한잔이란 말에 금세 앙금을 가라앉히고 산책하러 나가는 댕댕이처럼 남채화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치며 신이 나서 소리쳤다.
“형님! 저 먼저 갈 터이니, 형님도 곧 따라오십시오.”
맨 뒤에서 남채화의 뒤를 따라가는 인공과 용하를 보는 장설의 시야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띄었다. 웬일인지 용하의 발걸음이 자신감에 차 있었고, 그 광경은 이미 지금 가는 길에 익숙한 듯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고 걸음을 내디뎠다. 장설은 좀 빠른 걸음으로 용하에게 가까이 갔다.
“용하야, 혹시 주막이 있는 곳을 알고 있는 것이냐?”
장설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용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아느냐?”
“일전에 한번 가 본 적 있습니다.”
“오, 그랬었구나. 난 또 무슨 해괴한 일이라도 있었나 하고 괜한 상상을 했구나. 미안하다.”
“아닙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사과까지 하고 그러십니까?”
“어린 녀석이 퍽이나 너그럽구나. 큰 그릇을 가졌어.”
장설은 잔잔한 미소로 용하를 바라보았다. 용하와 장설이 담소를 나누며 걷는 동안 인공은 탁배기 한잔에 꽂혀 엄청난 집중력으로 남채화를 따라 걸었다. 지금 인공의 눈엔 남채화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꽁무니를 바라보는 인공의 눈동자는 미동도 없었다.
어느새 주막 앞에 도착한 네 사람은 평상을 하나 차지하고 앉았다.
“주모!”
조급함이 짙게 밴 목소리였다. 인공의 우렁찬 외침이 있자, 주모가 부엌에서 나와 부리나케 종종걸음 쳤다.
“에고고고, 어서 오시와요.”
주모는 갖은 호들갑을 떨어 가며 자지러질 듯한 헤픈 웃음으로 용하 일행을 맞이했다.
“거, 좀 빨리빨리 다니시오.”
인공은 조급한 마음에 생트집을 잡아가며 주모를 나무랐다.
“여기 국밥 네 그릇 하고 탁배기 좀 내오시오.”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와요. 금방 탁배기와 국밥을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막 주모가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국밥 한 그릇 더!”
남채화가 한 말이었다. 남채화의 말에 주모는 얼른 머릿수를 눈대중으로 세어 보고는.
“거참, 이상하시오. 네 그릇 맞는데 한 그릇을 더 달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시오?”
“주모, 나 잊으셨소?”
남채화의 말에 주모는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남채화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 미안하구려. 하도 오랜만에 와서 내 못 알아보았소.”
그러고는 인공과 장설을 번갈아 바라보며 달라진 주문량을 확인시켰다.
“그럼 국밥 한 그릇 추가하겠습니다.”
“거, 주모! 탁배기부터 좀 내오시오. 김치 쪼가리하고.”
“눼눼, 그리 하겠습니다요.”
오랜 세월 주막을 한 탓인지, 주모는 그동안 보았던 다른 주모에 비해 눈에 띄게 손이 빨랐다. 이를테면 탁배기와 국밥 다섯 그릇을 내오는 데 걸린 시간은 흔히, 이미 만들어 놓은 떡볶이를 그릇에 담기만 해서 내오는 것만큼이나.
주모 못지않게 네 사람의 식성 또한 범상치 않았다. 국밥을 순식간에 먹어 치운 용하 일행은 어느새 트림하며 냉수로 입을 헹구었다.
‘예감이 안 좋아. 저것들 하는 짓이 아무래도 그냥 튈 것 같거든.’
용하 일행의 행동이 아무래도 수상했던지, 주모는 입구 쪽을 서성거리며 그들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폈다. 남채화도 주모와 같은 심정이어야 마땅했지만, 그녀는 조금도 불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음, 주모가 입구 쪽을 서성거린다는 건, 우리가 무전취식 할 것 같으니까 미리 손을 쓰는 거잖아. 흠, 내 알 바 아니지. 저것들이 개방에 갈 의사가 확고하다면, 이 정도는 알아서 해결하겠지, 뭐.’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빠끔한 남채화는 지금 이 분위기를 아까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체되자, 인공이 장설에게 눈치를 주었다.
“형님!”
입 모양으로 장설을 수차례나 불렀지만 장설은 나 몰라라 하는 기색이었다.
인공이 어떻게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자 주모는 못 본 척 등을 돌렸다. 그 틈을 타 인공이 장설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형님, 어서 계산하세요. 서둘러 개방으로 가야 하잖아요.”
인공의 성화에 장설은 어정쩡한 태도로 눈에 띄게 시간을 끌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어서 국밥값을 치르고 개방으로 가야 할 텐데…….”
그 순간 인공의 촉이 장설의 속셈을 감지해 냈다.
“형님, 혹시…….”
장설은 옅은 고갯짓으로 대답을 하며 귀엣말로 속삭였다.
“가서 국밥값을 만들어 올 테니, 예서 남채화와 시간을 좀 끌고 있거라.”
인공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형님…….”
장설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용하를 부추겼다.
“용하야, 나하고 잠시 어디 좀 다녀오자꾸나. 늦어지면 국밥 계산은 인공이 할 것이야.”
주모 들으라고 일부러 그러는 게 눈에 보일 만큼 우렁찬 목소리였다.
장설이 용하를 앞세우고 주막을 빠져나가자, 인공은 울상을 지었다.
“뭐야 이거, 나만 이노꼬리 잡힌 거야?”
한편, 저잣거리로 나온 용하와 장설은 국밥값을 벌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장설 어른,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인공을 혼자 저리 둘 순 없지 않느냐? 반 시진 안에 국밥값을 만들어 돌아가야지.”
“그러니까요, 그건 알겠는데. 어디 가서 어떻게 국밥값을 만들 것인가, 그게 문제잖아요.”
“사지 멀쩡한데, 이 저잣거리에서 그깟 국밥값도 못 만들겠느냐.”
바로 그때였다.
“저놈 잡아라!”
어디에선가 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린 곳에서는 한 중년의 여인이 애를 태우며 젊은 사내 뒤를 부지런히 쫓았다. 뒤를 흘깃거리며 달아나는 사내의 손에 봇짐 하나가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날치기임이 틀림없었다.
“보았느냐? 이 광경은 저잣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 북적이는 데 가서 소매치기를 잡아 족칠까 했는데, 그보다 훨씬 빠르게 국밥값을 벌 기회가 온 것 같구나.”
장설은 한달음에 달려가 젊은 사내의 덜미를 잡아 그 자리에 메다꽂았다. 그 광경을 본 용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설이 자기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사내를 거뜬히 메다꽂는 광경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 * *
앞장선 인공은 불룩한 배를 내밀고 여보란 듯 득의양양 걸었다. 그 바로 뒤를 따라 걷는 용하는 간혹 인공의 윗옷을 내려 그의 배를 가려 주었다. 맨 뒤를 걷는 장설과 남채화는 줄곧 무슨 말인가 주고받았다.
“그런데 혹시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시오. 대답할지 말지는 일단 들어 보고 판단하겠소이다.”
“음, 그게… 국밥 말입니다. 왜 하필 두 그릇인지…….”
“아, 그거! 그게 궁금하셨구먼. 좋소. 그것이라면 대답 못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소이다.”
“고맙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셔서.”
“왜 하필 국밥이 두 그릇이었는가 하면, 첫 번째 그릇은 그대의 마음씨를 보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 그릇은 그대의 지혜를 보기 위함이었소.”
음, 첫 번째 그릇은 마음씨를, 두 번째 그릇은 지혜를!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데, 남채화의 행동에는 남다른 혜안이 담겨 있었다.
분명 무언가 있다. 지금까지 행동으로 보아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남채화가 아니다. 장설은 이때다 싶었다. 기회를 놓칠 순 없다. 당장 물어보자.
“저는 어떻습니까? 어르신 마음에 드셨는지요?”
장설이 물었지만, 웬일인지 남채화는 선뜻 대답하지 않은 채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