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know nothingness? RAW novel - Chapter 45
16. 어깨동무 (1)
“오랜만이야. 그간 잘 지냈어?”
오랜만에 만난 황수원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예의가 발랐다.
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아는 황수원이 아닌데. 무슨 일 있었나?”
“그야…….”
황수원의 시선이 유진의 뒤를 향했다.
박유원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껄렁한 자세로 서 있었다.
“이야, 서울 죽이네.”
황수원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유진에게 말했다.
“심마에 든 환자까지 고쳐서 나타났는데, 아무렇게나 대할 수는 없지. 우리 앞으로도 좋은 관계 유지하자고.”
“그거야 네 태도에 달려 있겠지.”
“내가 뭐 어쨌다고.”
“김비서의 따귀를 아주…….”
“아, 시끄러!”
황수원이 손사래를 쳤다.
“지난 일은 좀 잊으라고. 어쨌건, 네가 심마를 고쳤다는 사실은 입단속을 해 뒀다. 알려지면 귀찮아질 테니까.”
심마에 빠져 사라진 고수가 한둘이던가.
그런데 심마를 치료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은퇴한 무인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 파문이 일 것이다.
황수원이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건 감추려고 해서 감춰지는 게 아니니까, 혹시 피곤한 일 생기면 말해. 어지간한 건 커버해 줄 수 있으니까.”
“이제는 든든한 척까지.”
“자꾸 뭐라 하지 말고. 혹시 신변에 위협이 생겨도 나한테 말해라.”
“초면에 시계 풀고 때리려던 녀석이 이제는 내 걱정을 해 주는군.”
“아, 그건!”
소리 내어 웃은 유진은 뒷짐을 진 채 황수원을 지나쳤다.
“잘 알았으니, 어서 그 프로젝트라는 게 뭔지 보러 가자고.”
얼마 전 유진은 황수원에게 박유원을 위한 일자리를 부탁했다.
유진은 내심 경비 업무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수원이 전혀 다른 제안을 했다.
“저 꼬마, 싸움 좀 하는 거 맞지?”
“제법 하지.”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황수원이 뒤를 곁눈질했다.
박유원은 보통의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 곱상하게 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딱 보았을 때 강해 보이는 외모는 아니다.
“너는 5초 안에 질 거다.”
“굉장한 고수였군.”
“굉장한 고수 아니라도 너는 그냥 눕히지.”
“아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그래서.”
유진이 앞을 턱짓했다.
“무슨 일을 하는데 이렇게 덩치들을 모은 거냐?”
박유원의 이력을 들은 황수원은 새로 만든 프로젝트팀에 그를 넣어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프로젝트팀이 하는 일은 비밀이란다.
황수원의 의도가 의심스러워 따라와 보았더니, 시커먼 정장을 입은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깡패 짓 하러 가는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덩치들이 많아?”
“비밀이야. 이건 회사 일이거든.”
황수원의 말에 유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황수원이 씩 웃었다.
“박유원, 저 친구는 이제 나와 일하는 거야. 너랑은 관련 없으니 신경 꺼.”
“더 궁금하고 의심스러워지는군.”
“그렇게 걱정되면 구경 정도는 해도 된다.”
황수원은 유진과 박유원, 그리고 그가 이끄는 직원들을 차에 태웠다. 이후 서울 근교의 어딘가를 향했다.
그리고 대호문(大虎門)에 도착했다.
유진이 미간을 모았다.
“여기는 왜 온 거지?”
“대호문은 황용금속공업의 협력 업체다.”
“그런데?”
“그냥 보고 있으라고.”
그러고는 황수원이 정문으로 가 소리쳤다.
“얘들아, 가자!”
황수원을 필두로 한 무리가 대호문의 정문을 넘어섰다.
“깡패 짓 아니라더니…….”
유진과 박유원은 일단 꽁무니를 따라갔다. 박유원이 항의했다.
“지금 이거 뭔데요? 이 사람들 건달이에요? 유진이 형님, 저한테 똑바로 살라 하셔 놓고는 정작 절 건달들한테 파신 겁니까?”
“그게 아니라…….”
“이거 누가 봐도 건달…….”
두 사람이 속닥대는데, 앞에서 황수원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대호문주님! 저 왔습니다!”
그의 방문을 기다렸다는 듯, 대호문의 사람들이 나왔다.
전부 무인들이었는데, 하나같이 호랑이가 그려진 검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대호문의 무인들이 황수원 무리를 둘러싸듯이 섰다.
황수원이 데리고 온 인원은 유진과 박유원을 포함해 스무 명 안팎이었는데, 대호문은 오십 명이 넘었다.
이윽고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 우리 황 전무가 직접 왔네. 여기까지 귀한 발걸음을 하고.”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뒷짐을 진 채 걸어 나왔다.
그는 다른 무인들과 달리 황금색의 비단 무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나 급한가?”
노인이 웃음을 흘렸다. 황수원은 개의치 않고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대호문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암, 오랜만이야. 전에 봤을 때는 아주 어렸던 것 같은데.”
“기억납니다. 그때 저한테 잘해 주셨지요.”
“그랬나?”
대호문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나는 수인이, 수헌이한테 잘해 줬던 것 같은데. 황 전무는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정이 안 가더라고.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았어. 욕심부리지 말라고 내가 꿀밤도 먹여 줬었지.”
조롱하는 듯한 어조였으나 황수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대호문주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욕심을 못 버리고 여기까지 왔나.”
“예.”
황수원은 다시 허리를 숙였다.
“대호문주님께 다시 한번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나는 이미 대답을 준 걸로 아는데…….”
“마음을 바꾸어 주십시오.”
“내가 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노인이 누구길래, 저 싸가지 없는 황수원이 왜 연신 허리를 숙이고 있는가. 무슨 약점을 잡혔기에 저러는 것인가.
그때, 단서가 될 만한 말이 황수원의 입에서 나왔다.
“이번 총회에서, 부디 저를 지지해 주십시오.”
그러자 대호문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나만 지지해 주면 자네가 이기는 건가?”
“대호문주님이 지지해 주시면 큰 힘이 될 겁니다.”
“그래도 이기는 건 아니란 거지.”
“앞으로 다른 주주들도 만날 예정입니다.”
“내가 붙으면 다른 애들도 붙겠지, 뭐…….”
“부탁드립니다.”
그제야 유진은 상황을 이해했다. 대호문주는 황용금속공업의 대주주였고, 황수원은 그런 대호문주에게 주주 총회에서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사정하러 온 것이다.
“행님, 둘이 뭐라는 거예요?”
“아무래도 주주 총회 때문인 것 같군요.”
“주주 총회요?”
“저 녀석이 황용금속공업의 후계자가 되려고 발악하는 중입니다.”
“황용금속공업이요? 거기 대기업인데. 그럼 저 사람 재벌집 아들이에요?”
“그런 셈이지요.”
“부럽다.”
“부러워할 만한 녀석은 아닙니다.”
“에이, 그래도…….”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와중이었다.
“거기 자네들 둘은 왜 그렇게 목을 세우고 있나?”
목소리가 들려와 눈을 드니, 대호문주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수원을 위시한 직원들은 이미 대호문주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
대호문주가 한층 미간을 찌푸렸다.
“상사인 황 전무가 저렇게 부탁하고 있잖나. 그런데 자네들은 왜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냐고.”
유진은 화가 많은 성격이 아니다.
따라서 대호문주라는 노인네가 괜히 트집을 잡았을 때, 굳이 그를 휠체어 신세로 만들어 주겠다든가 깽판을 치고 현판을 부수겠다든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은 했지만 실행에 옮길 의지는 없었다.
그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저는…….”
유진은 황수원의 뒷모습을 잠시 노려보고 말을 이었다.
“목 디스크가 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그러면서 목뒤를 잡았다.
대호문주가 납득했다.
“아, 그래? 디스크는 조심해야지. 젊은 친구가 벌써부터…….”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유진의 곁에 선 박유원을 향했다.
“그러면 거기 어린 친구, 자네는 왜 고개를 안 숙이나? 자네도 목 디스크가 있나?”
목이 불편한 사람처럼 엉거주춤 서 있던 유진은 사고 치지 말라는 뜻으로 박유원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박유원은 당황한 눈치였다.
“저, 저는요…….”
박유원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유진을 따라 디스크 흉내를 내려는 듯 목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유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란히 목 디스크라고 하면 누가 봐도 거짓말이다.
“그게…….”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박유원이 이내 결심했다는 듯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사나이 박유원! 그냥 고개를 숙이는 걸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뭐라……?”
대호문주가 눈썹을 치켜떴다.
고개 숙이고 있던 황수원의 직원들까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돌아보았다.
사람들의 이목이 모인 가운데, 박유원은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가 두 팔을 펼쳤다.
“사나이 박유원! 대호문주님께 제 진심을 표하겠습니다!”
박유원이 좌우로 펼쳤던 손을 가지런히 이마에 포갰다.
그리고 절을 하는가 싶더니.
물구나무를 섰다.
대리석 타일로 이루어진 연무장 바닥에 머리가 짓눌렸으나 박유원은 개의치 않고 모든 체중을 정수리에 실었다.
절 중의 절이라는 그랜절이었다.
등장한 이래 줄곧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던 대호문주가 처음으로 당황했다.
“그, 그게 뭔가?”
곁에 있던 문하생이 대호문주에게 속삭였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최고의 예법으로 통하는 그랜절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는 것을 넘어, 아예 거꾸로 머리를 박는 겁니다. 지고한 존중의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대호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올라간 게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그래, 그래. 잘 알았으니 그만하게. 그러다 어디 다치겠군.”
“예!”
박유원은 체조 선수처럼 매끄러운 몸짓으로 다시 곧게 섰다.
대호문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지. 나는 이 말이 부하나 제자들한테도 통용된다고 믿어. 사람은 무릇 리더를 따라가게 되거든.”
대호문주가 앞으로 나와 황수원의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어린 시절의 황 전무는 정이 가는 구석이 없는 밉상이었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제법 어른이 되었나 보군. 저렇게 예의 바른 친구를 부하로 두고 말이야.”
“가, 감사합니다.”
“다들 일어나. 허리들 세워. 늙은이 불편하게 왜들 그러나.”
대호문주가 너털웃음을 쳤다.
“자알 보았네. 자네들의 성의.”
“그럼 생각을 바꾸신 건지…….”
“어허, 황 전무. 아직도 욕심을 못 버렸나?”
“세상에 욕심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쯧쯧…….”
대호문주가 혀를 찼다.
“이래서 자네는 사업가라는 거야. 무인이 못 돼.”
뒷짐을 진 대호문주가 유진과 박유원을 턱짓했다.
“무인은 저런 친구들이지.”
“그럴지도 모르죠.”
“황 전무.”
“예.”
“자네가 볼 때 나는 어떤 쪽 같나?”
“대호문주님은…….”
황수원이 혀로 입술을 핥은 다음 말을 이었다.
“물론 무인이십니다.”
“그래, 그렇지?”
대호문주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그러니까 우리, 무인의 방식으로 대화를 진행해 보자고.”
“무인의 방식?”
“요리사는 요리로 말하고, 가수는 노래로 말하지. 그럼 무인은?”
“무공 말입니까?”
“다섯 판.”
대호문주가 손짓하자, 대호문의 문하생 다섯 명이 앞으로 나왔다.
“다섯 명씩 다섯 판 겨루자, 이 말이야.”
대호문주가 손가락으로 황수원의 가슴을 찔렀다.
“물론 황 전무, 자네도 나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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