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475
#닥터 플레이어 475화 – 외전 23
마침, 좀비화 사태와 폭동으로 인해 철의 제국 황도는 여기저기 피해가 컸고, 레이몬드가 활약할 기회가 많았다.
철의 제국 시민들은 레이몬드의 혼신을 다한 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아아! 타국의 황제께서 우리를 위해 저토록 몸을 낮추다니.”
“저런 분이 세상에 있으실 줄이야.”
늘 그렇지만, 레이몬드는 환자들을 대할 때 누구보다도 숭고하고 따뜻한 얼굴을 하였고 그의 치료를 받는 이들은 단 한 명도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런 모습은 레이몬드뿐이 아니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보고 배운 게 레이몬드인지라, 페닌 치료원의 제자들은 환자들에게 늘 친절하고 따뜻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고압적인 힐러들만 만나다 가슴을 어루만져주듯 따뜻한 레이몬드 일행의 치료에 순식간에 미담이 퍼져 나갔다.
레이몬드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좋아. 다들 각오하고 있으라고. 모두 나의 호구로 만들어줄 테니.’
거기에 쐐기를 박는 일이 일어났다.
드디어 한슨이 도착했다.
“신 한슨! 위대하고 장엄하고 숭고한 대륙의 빛, 대륙의 소금, 가난의 황제, 레이몬드 폐하를 뵙습니다!”
한슨이 존경을 넘어 숭고에 가까운 얼굴로 예를 올렸다.
한슨은 의료 복지 정책, 교육 쪽으로 맡은 일이 많아 함께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합류한 것이다.
‘특히 이번에는 카탈 왕국의 신임 추기경이 되었다고 했지?’
카탈 왕국.
대대로 힐러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왕국으로 레이몬드의 제자인 쥬드가 국왕이었다.
쥬드와 한슨은 레이몬드를 향한 존경심으로 의기투합한 후 긴밀한 사이를 유지 중이었다.
레이몬드가 황제가 됨으로써 공석이 되었던 추기경직을 한슨이 맡기로 하였다고 한다.
‘둘이 저러다가 결혼까지 하는 건 아니겠지?’
레이몬드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슨과 쥬드, 라.
……뭔가 무서운 커플이 될 것 같았다.
“그래, 바쁠 텐데 이렇게 불러 미안하구나.”
빈말이 아니라, 한슨은 레이몬드 못지않게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제 의무는 폐하의 빛을 세상에 퍼뜨리는 것이니, 폐하를 따름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꼭 오고 싶었습니다.”
한슨은 고개를 돌렸다.
린든을 향해서였다.
“……폐하의 보필을 린든에게만 맡기기에는 불안한 점이 있어서 말이지요.”
“……!”
린든은 잔뜩 겁을 먹었다.
‘또 저 악마가 나한테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린든은 여전히 한슨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린든뿐 아니라, 페닌 치료원의 모든 제자는 한슨을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했다.
“린든, 폐하를 잘 보필하고 있었겠지?”
“그, 그게…….”
린든은 말을 더듬었다.
‘내가 잘했나? 폐하께서는 별말씀 없으셨는데. 하지만 폐하는 원래 소고기 먹자는 것 말고는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시니까.’
레이몬드가 하는 말은 늘 둘 중 하나였다.
첫째는 환자와 백성을 위하는 숭고한 이야기.
둘째는 소고기 이야기.
‘소고기는 열심히 잘 먹긴 했는데.’
린든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자신감 없어 하자 한슨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때, 뜻밖의 인물이 나섰다.
“폐하의 수제자인 제가 보기에 린든 경의 보필은 특별한 문제 없었어요.”
“……!”
크리스틴이었다.
린든은 크게 감동한 얼굴을 하였다.
‘크리스틴 경이 날 위해 나서주다니. 혹시, 정말로 크리스틴 경이 나를?’
린든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한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섰다.
한슨도 크리스틴은 인정했다.
한슨이 보건 정책, 교육 쪽으로 성과를 보이고 있다면, 크리스틴은 명실상부한 페닌 치료원의 넘버 투의 힐러였다.
“크리스틴 경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안심하겠습니다. 다만, 하나 틀린 말씀이 있군요.”
“뭐죠?”
“수제자란 말 말입니다.”
한슨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폐하의 최고 수제자는 이 한슨인데 말입니다.”
“……!”
크리스틴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한슨과 크리스틴의 시선이 허공에서 파지직 부닥쳤다.
‘크흠, 또 저러네.’
레이몬드는 둘의 대립에 헛기침하였다.
크리스틴과 한슨은 만날 때마다 저랬다. 지금까지도 수제자 자리를 놓고 겨루는 둘이었다.
‘그래도 긍정적인 면이 많으니까. 특히, 한슨은 호구들 늘리는 데 가장 탁월한 솜씨를 지니고 있고.’
그 생각처럼, 한슨이 오자마자 현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힐러들 전원 부동자세!”
“충!”
그리폰들을 타고 한슨과 함께 날아온 힐러들이 연무장에 기립하였다.
어지간한 기사단을 능가하는 패기에 철의 제국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게 십자연맹제국의 힐러들?’
‘육탄전을 해도 내가 질 것 같아.’
힐러들이 허리에 찬 메이스가 태양 빛을 받아 위협적으로 빛났다.
선두에 선 한슨이 외쳤다.
“구호 열창!”
“살려야 한다!”
“폐하의 빛을 따르자!”
“목소리가 작습니다. 본 교수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참고로, 한슨은 이번에 새로 개교한 ‘의과대학’의 초대 학장이었다.
힐러들이 움찔하였다.
“살려야 한다!”
“폐하의 빛을 따르자!”
“여전히 작습니다! 그런 목소리로 환자들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폐하의 빛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살려야 한다!”
“폐하의 빛을 따르자!”
연무장을 떠나갈 듯한 함성.
“그러면 작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작전명은 ‘철의 제국에 폐하의 빛을!’. 각 조장은 작전의 핵심을 다시 복창하십시오.”
“폐하의 빛처럼 철의 제국의 환자들에게 따뜻한 치료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혹시나 불친절함으로 폐하의 빛에 먹칠하는 자. 이 한슨이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작전을 시작하십시오!”
한슨이 양성한 힐러들이 전장에 나가는 기사처럼 비장한 얼굴로 출진했다.
삼삼오오 조를 이루어 거리를 배회하는 힐러들의 모습에 철의 제국 시민들은 긴장한 눈빛을 보냈다.
“누구지?”
“웬 못 보던 기사들이?”
“기사가 아니라, 표식을 보니 십자연맹제국의 힐러들 같은데?
“그런데 무슨 얼굴들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귀환병처럼 패기 넘치는 힐러들의 모습에 시민들이 겁을 먹고 있을 때였다.
시민들과 눈을 마주친 힐러들이 급방긋 미소를 지었다.
“혹시 몸이 불편하십니까?”
“……!”
“몸이 불편하신 것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힐러들이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시민에게 다가왔다.
“사, 살렬?”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치지 않습니다. 저희는 레이몬드 폐하의 빛을 따르는 페닌 치료원의 힐러들입니다. 여봐라! 여기 이 할아버님께서 몸이 불편하신 것 같다!”
“충!”
“친절하게 모시겠습니다!”
“빛을 따르자!”
힐러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환자(?)의 상태를 진단했다.
“무릎에 퇴행성 관절염이 있으십니다!”
“요추 허리 쪽에도 디스크가 의심됩니다!”
“좋아, 처방 약을 전달해 드리도록!”
힐러 일행을 이끄는 조장은 따뜻한 손길로 노인 환자의 손을 잡아주었다.
“통증에 많이 불편하셨을 것 같습니다. 지금껏 고생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제가 가슴이 아프군요.”
“네? 네?”
“여기 약입니다. 드셔 보시고 효과가 있으시면 페닌 치료원 임시 지부로 다시 와주십시오. 언제든 따뜻하게 모시겠습니다. 환자분 가신다. 인사 구호 열창!”
“환자분, 건강하십시오!”
“건강하십시오!”
“빛을 따르자!”
그런 모습이 철의 제국 여기저기서 펼쳐졌다.
한슨이 보낸 힐러들은 이번 사태로 피해 입은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마치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환자들을 찾아 헤맸다.
한 번 힐러들의 표적(?)이 되면 그냥 벗어날 수 없었다. 반드시 불편한 점을 치료받게 되었다.
철의 제국 시민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세상에 저런 분들이 있다니.”
“풍기는 기세는 전투 병기 뺨치는데, 따뜻해.”
“저분들이 레이몬드 황제를 따르는 힐러들이라고?”
철의 제국 시민들 사이에서 페닌 치료원의 명성이 수직 상승했다.
그런데 한슨이 일을 너무 잘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페닌 치료원의 치료를 받고 싶습니다!”
“저도 치료해 주십시오!”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 자체는 나쁜 일은 아니었다.
원래도 철의 제국 시민들을 호구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니.
문제는 속도였다.
‘환자들이 몰려오는 속도가 너무 빨라!’
레이몬드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러면 철의 제국 지부를 당장 개설해야 하잖아!’
원래 레이몬드는 철의 제국에 페닌 치료원 지부를 개설하는 건 몇 년 뒤로 계획했다.
페닌 치료원은 아직 십자연맹제국, 자유 도시 연합에서도 확장 단계라 철의 제국까지 치료원을 개설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정확히는 돈이 부족했다.
‘십자연맹제국, 자유 도시 연합에서도 아직 적자란 말이야.’
레이몬드는 울상을 지었다.
계산상 최소 5년, 어쩌면 10년 이상은 지나야 흑자로 전환될 수 있었다.
그래서 속도를 조절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치료원 개설을 미룰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제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군요, 고객님.”
한 손에 대출 계약서를 팔랑거리며 로즈가 싱긋 웃었다.
“…….”
레이몬드는 눈물을 삼켰다.
간신히 빚을 갚나 했더니 도루묵으로 돌아갔다.
‘왜 난 개미처럼 일하고 있는데, 심지어 돈도 제법 많이 벌고 있는 것 같은데, 가난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지. 아니야. 방법을 찾자.’
레이몬드는 지출을 줄일 방법을 고민했다.
다행히 답이 있었다.
철탑을 이용하는 거였다.
‘철탑 건물을 그대로 페닌 치료원으로 쓰는 거야!’
치료원 개설 비용에 가장 큰 부분은 당연히 땅값이랑 건물값이었다.
특히 철의 제국은 부동산 비가 비싸기로 유명해 기존의 건물을 임대할 경우 막대한 비용을 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철탑은 황도뿐 아니라, 철의 제국 곳곳에 지부를 가지고 있으니 그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하면 확장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물론, 철탑 측에서는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 긍지 높은 철탑이 어쩌다가 십자연맹제국의 야만인들에게…….”
“이런 치욕을 감당할 바에는 차라리 철탑을 해체하는 게 낫겠습니다!”
탑주 랠프는 철탑의 생존을 위해 페닌 치료원의 산하에 들어가는 걸 수긍했지만, 반발하는 이들은 당연히 있었다.
특히 십자연맹제국을 무시하며, 철탑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힐러들이 그러했다.
‘탑주인 랠프도 어쩔 수 없이 로즈 님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이니까.’
레이몬드는 팔짱을 끼며 고민했다.
‘철탑의 등골을 완전히 빨아먹으려면 힐러들을 마음으로 굴복시켜야 해.’
페닌 치료원이 지금 막대한 적자를 내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치료원 확장 비용.
둘째는 새로운 의술 힐러 양성 비용.
철탑의 힐러들을 굴복시켜 의술을 속성으로 교육하면 힐러 양성 비용도 크게 아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기를 눌러주긴 해야겠네.’
레이몬드가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할 때였다.
이번에도 한슨이 나섰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폐하.”
“응?”
“굳이 폐하께서 나설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저 무지몽매한 이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건 이 한슨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한슨이 태연히 말했다.
“폐하의 빛은 위대하고 깊으니, 그 진리의 일부만 알려줘도 저들은 폐하의 광명에 눈이 멀어 진심 어린 충성을 바치게 될 겁니다.”
“…….”
레이몬드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이 과한 것 같았으나, 한슨이다.
한슨은 단 한 번도 이런 일에 레이몬드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한슨은 용맹 무쌍한 기사처럼 홀로 철탑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