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8
#닥터 플레이어 8화
느낌이 좋지 않았다.
‘플레이어 시스템이 미래에 발생할 환자도 예측할 수 있는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때, 랑스가 다시금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설마 거절하지는…….”
“하겠습니다.”
“……!”
뜻밖에 순순한 승낙에 랑스의 눈이 커졌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레이몬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퀘스트 보상만으로는 부족하지.’
이렇게 된 것, 레이몬드는 최대한 뽑아먹을 수 있는 건 뽑아먹기로 하였다.
“연회가 끝난 후 얼마 뒤에 있을 정식 치료사 자격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십시오.”
“……!”
정식 치료사 자격시험!
도제 중 실력을 인정받은 이만 치를 수 있는 시험이다.
이 시험에 합격해야 한 명의 떳떳한 치료사로 독립할 수 있다.
레이몬드가 더럽고 치사해도 벨런드 치료원에 버티고 있는 이유였다.
“F급의 치유력도 안 되면서 무슨 자격시험을…….”
“수석 치료사님께서 방금 왕궁 파견을 가라며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제게 자격은 충분하다고.”
랑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게 말하긴 했다.
스스로의 말에 발목을 잡힌 셈이라 랑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단, 이번 연회 때 훌륭히 제 몫을 하고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어쨌든 승낙을 얻어낸 레이몬드는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치료사 시험을 치를 자격을 얻었어! 이제 시작이야.’
정식 치료사!
도제랑은 차원이 다른 신분이었다.
종자와 작위를 받은 기사와도 같은 차이였으니까.
‘치료사 자격만 따면, 당장 벨런드 치료원을 떠나야지.’
어쩔 수 없이 머물고 있지만, 벨런드 치료원에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전에.’
레이몬드는 랑스를 찌릿 노려보았다.
치료사 자격을 얻으면.
랑스, 저놈만은 남들 안 보는 데서 불러내서 흠씬 두들겨 패주고 떠날 거다.
* * *
결정했지만, 막상 왕궁으로 가려고 하니 레이몬드는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껏 그를 가장 악랄하게 경멸하고 괴롭힌 건 치료사들이 아니었다.
왕궁에서 당했던 일들에 비하면 치료사들의 괴롭힘은 귀여운 수준일 뿐이었다.
치료사들은 그를 형편없고 한심할지언정 그나마 사람으로는 취급해 주긴 했으니까.
왕궁에서 레이몬드는 정말 더러운 오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귀족들. 심지어 하녀와 시종 같은 고용인들까지 모조리 그를 경멸했다.
가장 압권은 다른 왕족들이었다.
같은 아버지를 두었지만, 레이몬드와는 전혀 다른 존재인 찬란하고 고귀한 왕손들은 그를 참으로 잔학하게 괴롭혔다.
왕궁 연회에 참석하면 분명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에라도 무를까?’
순간 진심으로 그런 고민이 들었다. 그만큼 과거의 트라우마가 컸으니까.
‘도제인 내가 안 간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거야. 랑스가 더 괴롭히려고는 하겠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안 갔는데 만약 심각한 환자가 발생하면 어떻게 하지? 치료사들이 있긴 하지만, 힐이 안 통하는 응급 상황도 많잖아.’
연회에는 여러 치료사가 파견 나간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힐은 여러 제한점이 있는 치료였다.
힐이 안 통하는 종류의 응급 환자가 생긴다면? 그렇다면 그 환자는 죽는다.
‘어쩌지?’
고민하던 레이몬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문득 이런 오기가 든 것이다.
‘내가 잘못한 건 없어. 왜 내가 피해야 해?’
지금껏 무수히 많은 고통을 당하며 레이몬드는 그런 의문을 가졌다.
왜 내가 괴로워해야 하는가?
잘못은 내가 한 게 아닌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아무런 잘못도 한 게 없었다.
원해서 ‘더러운 오물’로 태어난 게 아니니까.
솔직히 말해 잘못은 그의 아버지, 국왕이 했다. 그는 피해자일 뿐이다.
‘피하지 말자.’
그러니 두렵고, 무섭지만 맞서기로 했다.
과거의 소심한 레이몬드였다면, 절대로 이런 결정을 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달라졌다.
새롭게 생긴 능력이 그에게 자신감과 강단을 주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환자를 위해 두려움에 맞서기로 하였습니다!] [환자를 위한 플레이어의 마음에 ‘강철의 심장’이 반응합니다!] [일시적으로 ‘강철의 심장’의 숙련도가 A로 올라갑니다!] [강철의 심장]분류 : 속성 스킬
등급 : 레전드리
숙련도 : D → A
-항상 강철 같은 의지와 굳건한 심지를 유지한다.
-숙련도 상승은 연회 기간이 끝날 때까지 유지됩니다!
놀랍게도 그 순간, 레이몬드의 가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동시에 강렬한 의지와 굳건한 심기가 자리하였다.
‘이게 바로 숙련도 A의 효과?’
이전에 경험했던 불완전한 강철의 심장이 아니었다.
두려움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환자를 향한 강렬한 의지에 레이몬드의 눈빛이 빛났다.
‘그래,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기죽지 말자. 할 수 있어!’
레이몬드는 안 좋은 생각은 그만두고 좋은 생각만 하기로 하였다.
‘만약 연회에서 고위 귀족이라도 살리면 큰 보상을 받을지도 몰라. 잘 생각해 보면 큰 기회야!’
돈!
그 달콤한 단어에 레이몬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드시 환자도 살리고, 큰 보상도 받아내리라.
‘반드시 해내는 거야.’
레이몬드는 내친김에 다른 스킬도 구입하기로 했다.
분명 연회에 참석했을 때 도움이 될 스킬이 있을 거다.
‘스킬 마켓 열람.’
그러자 메시지가 촤르륵 떠올렸다.
[스킬 포인트로 원하는 스킬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직업 등급이 낮아 구입할 수 있는 스킬에 제한점이 많습니다!] [현재 구매 가능한 스킬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조 스킬 5종] [속성 스킬 3종]‘구입 가능한 보조 스킬 확인.’
그러자 예상 밖의 목록이 떠올랐다.
[구입 가능한 보조 스킬]-기초(D급) 화염 마법
-기초(D급) 수계 마법
-기초(D급) 풍계 마법
-기초(D급) 전격 마법
-기초(D급) 대지 마법
“…….”
레이몬드는 순간 당황했다. 전혀 생각지 않은 내용이었다.
“마법? 스킬 포인트로 마법을 익힐 수 있다고?”
그 의문에 답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법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류의 도구! 마법을 익혀 환자 치료의 도구로 사용하십시오!]그 설명에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의 용도는 전투에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 여러 실생활에도 깊게 사용되고 있다.
잘 응용하면 환자 치료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거 잘못하면(?) 일반 마법사들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는 것 아니야?’
레이몬드는 얼떨떨하게 생각했다.
숙련도(D)라는 문구는 훗날 숙련도를 올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숙련도를 높게 올리면 해당 분야를 전문으로 사용하는 마법사보다 그 마법을 더 잘 다룰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레이몬드는 마법은 젖혀두었다.
마법은 그 마법이 꼭 필요한 환자를 만날 때 익힐 생각이었다. 스킬 포인트는 제한되어 있었으니까.
‘구입 가능한 스킬 열람.’
[구입 가능한 스킬]-친절한 의사 되기! (일반)
-효율적인 의무 기록 작성법! (일반)
-진상 대처법! (일반)
레벨이 낮아서인지, 대단한 스킬은 없었다. 주로 환자 의사 관계(Patient-Doctor relationship)에 관한 스킬들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특별히 할 만한 건 없네.’
물론 친절해지고, 기록을 잘 쓸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필요한 스킬은 아니었다.
‘잠깐. 진상에 대처하는 법은 쓸모가 있지 않을까?’
연회장은 귀족들이 모이는 곳이다.
얼마나 진상이 많겠는가?
익히면 분명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구입.’
[‘진상 대처법!’ 스킬을 구입하였습니다!] [스킬 포인트가 30포인트 소모되었습니다!] [진상 대처법]분류 : 보조 스킬
등급 : 일반
숙련도 : D
-진상을 마주하실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됐어. 이제 가자.’
준비를 끝낸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탄신 연회 날이 다가왔고, 레이몬드는 5년 만에 왕궁에 입궁했다.
* * *
레이몬드가 있는 ‘휴스톤 왕국’은 ‘철(鐵)의 제국’과 함께 대륙을 양분하는 ‘십자 연맹 제국’의 10개의 구성국 중 하나였다.
십자 연맹 제국을 구성하는 십국(十國)은 3강(强), 3중(中), 4약(弱)으로 분류되는데 그중 휴스톤 왕국은 ‘4약’에 속했다.
원래는 중(中)에 속하는 강국이었지만, 여러 안 좋은 일을 겪으며 국력이 약해진 것이다.
그러다 당대의 걸출한 국왕인 기사 왕 오든의 노력으로 다시금 국력을 회복하며 도약 중이었다.
“위대한 국왕 전하의 이름을 높이며!”
“기사 왕 만세!”
기사 왕.
휴스톤 왕국의 국왕 오든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오든은 뛰어난 왕이었다.
전장에서는 뛰어난 기사이자 지휘관이었으며, 백성들을 생각하는 위정자이기도 했고, 귀족들의 존경을 받는 군주였다.
그렇게나 걸출한 국왕이었기에 그의 치세 아래 휴스톤 왕국은 대단한 발전을 이룩했고, 백성들과 귀족들은 그의 이름을 높여 불렀다.
건국 이래 가장 훌륭한 국왕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치부가 있었다.
바로 사생아 레이몬드였다.
‘그 위대한 왕이 그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사실 다른 나라였으면, 사생아의 존재가 그렇게 큰 흠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철의 제국’의 경우에는 혼외 자식에게 상속권을 주는 일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십자 연맹 제국, 특히 휴스톤 왕국은 사생아의 존재에 엄격했다.
그건 휴스톤 왕국이 기사도를 숭상하기 때문이었는데, 혼외 사생아는 기사도를 지키지 못한 불결한 수치로 여겼다.
특히 모든 기사의 군주라는 왕이 혼외 사생아를 낳은 건 치명적인 흠이었다.
더구나 오든은 보통의 다른 귀족과 다르게 사생아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다.
“그 사생아만 아니면, 흠집 하나 없이 완전하실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어쩌다 그런 사생아가 태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국왕을 욕할 수는 없다.
그러니 사람들은 비난의 화살을 레이몬드에게로 돌렸다.
쓸데없이 더러운 자식이 태어나 왕의 무결함을 훼손시켰다고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왕의 위대함을 논할 때마다 유일한 오점인 레이몬드의 존재를 헐뜯었다.
“그 그림자 왕자가 출궁한 지도 벌써 5년이나 되었구려.”
“스스로 나가 다행이지 않소.”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 치료사가 되려고 나갔다고 하던데…… 듣자니 치유력도 형편없어서 벌써 5년째 도제라고…….”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연회장 구석에 대기하고 있는 치료사들에게로 향했다.
그러다 한 인물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왜소한 체구를 지닌 미청년이었다.
‘저 청년은?’
‘설마 그림자 왕자?’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당황해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전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맑은 분위기가 흐르는 청년이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호수처럼 기분 좋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부드러운 느낌이 흘렀고, 잔잔한 눈동자에서 흔들림 없는 심지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