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83
제 883화
백린의각은 지구 별 병원처럼 분과가 엄청 나뉘지 않았다.
의술 관련으로는 약재당, 침구당, 추나당, 재생당의 4개 당이 전부인 것이다.
본래 3개 당이었다가, 재생당이 추가되며 4개 당이 된 것뿐.
연구당은 직접적인 치료가 아닌, 의약품 개발이니까 별개.
무력당 역시 싸우는 조직이니까 논외.
산부인과도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소아과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영유아 환자는 주로 약재당과 침구당이 받아서 치료한다.
추나당은 보통 관절이나 근육을 다루기 때문에 영유아가 이쪽에서 치료받을 일이 거의 없기 때문.
부술당은 부술이 필요한 상황에서 요청하면 협진하는 형태로 돕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진천희가 보고서로 받은 문제의 환자는 약재당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드르륵.
소리를 치자마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안에는 인자한 인상의 노파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서류가 펼쳐져 있었고,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던 중이다.
약재당주 만파곡.
그녀가 진천희의 등장에 고개를 돌려 시선을 주었다.
“소각주 아닙니까? 상당히 급해 보이는군요.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데……. 어째 미간이 딱딱한 것이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겝니까?”
만파곡이 오랜만에 얼굴을 본다고 말할 만하다.
진천희는 한번 출장 가면 몇 달은 외부에 있는 경우도 허다하고.
백린의각은 현재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다 보니 그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거기에 만파곡 자신도 일이 쌓이는 중.
병실과 환자의 수도 늘어나고, 의원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기 때문.
그러다 보니 같은 의각인데도 당주인 만파곡과 진천희가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저번 만두 대회 같은 행사 때나 좀 얼굴을 비치는 수준이니까.
그런데 오랜만에 본 진천희가 저리 굳은 얼굴로 급히 들어오니 만파곡이 놀랄 만도 했다.
“강녕하셨습니까, 약재당주님.”
우선은 포권을 하며 인사하는 진천희.
인사는 중요하다.
강호인의 예의니까.
이는 삼국지연의에도 쓰여 있다.
“홀홀. 이 늙은이가 뭐 별일이야 있을라고. 그래. 무슨 일이십니까?”
“약제당 병실에 입원한 구십이 번 환자 때문에 왔습니다.”
진천희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 만파곡. 그리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구십이 번 환자면… 그 아이 말이로군요. 후……. 괴질이죠. 괴질이야. 불치병인 괴질이니…….”
그녀의 얼굴에 슬픔과 안타까움이 배어난다.
그 환자가 어떤 환자인지 알기 때문이다.
“제가 진료해 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아는 병일 수도 있습니다.”
“흐음, 그 말. 우리 약재당을 못 믿는다는 말로 받아도 되는 겁니까?”
만파곡의 말이 바늘이 되어 찌른다.
따갑다.
의원들, 그것도 높은 자리일수록 자신의 전공에 태클 거는 것을 싫어하기 마련.
거기다 진천희는 까마득하게 어린 새파란 놈이다.
소각주라고는 해도 만파곡 역시 쌓아온 연륜과 긍지가 있기 마련.
이 시대에 긍지란, 어찌 보면 목숨과도 같다.
긍지를 잃었다는 것만으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시대에서, 그녀가 그리 말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것은 만파곡이 평생 쌓아온 자부심을 긁는 것이니까.
‘실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덮어놓고 화를 내시는 분은 또 아니시지.’
자존심만 내세웠다가는 백린의각에서 오래 살 수 없다.
명분이 있는가.
그것을 묻는 것임을 영민한 머리로 곧바로 파악했다.
진천희가 말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최근 다른 지방에서 오래된 의서를 입수하여 혹시 가능할까 싶어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진천희는 그렇게 둘러댔다.
이제는 잊혀진 오래된 의서라면 그녀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니까.
“그 책을 본 당주도 볼 수 있겠습니까?”
“예. 범어로 쓰여 있어서 해석이 어려운데 조만간 바로 사본을…….”
“에이, 됐습니다. 됐어요.”
그녀는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저었다.
상의원 이상부터는 그랬다.
자기 전공은 빠삭하게 알고 열심히 공부하지만, 그 이상은 하기 귀찮아한다.
그녀 나이에 이제 와서 범어까지 공부하고 있자니 얼마나 귀찮을까.
차라리 그 시간에 삐약이들 시켜서 번역을 하라고 하고 말지.
상의원은 절대 이런 귀찮은 일로 고생하지 않는다.
고생은 그녀의 삐약이들이 하겠지.
그리고 상대는 소각주 진천희.
없는 걸 지어낼 인물이 아님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계속 설사하다 사망하는 일은 천형이라 여겨지니 사실 의각에도 좀처럼 이런 아기가 오는 일은 없지요. 괴질이라고도 하고, 체질이라고도 하죠. 의원마다 부르는 말은 다르지만 어찌 되었건 천형의 일종임은 변함이 없습니다.”
“네.”
“그렇게 설사하다가 살아남으면 저승차사가 봐준 것이고. 그대로 이승을 하직하면, 그 또한 하늘이 정한 명이니 어쩔 수 없다 여기지 않던가요.”
“그렇지요.”
“그러다 보니 이 지방 산파들 역시 그런 체질의 아이가 태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 치성을 드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 체질을 정녕 낫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 일단 체질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괴질도 아니니 치료도 안 되고요.”
그 말에 만파곡이 기가 막혀서 되물었다.
“아니, 그러면 대체 어떻게 낫게 한단 말입니까.”
“크면 나아집니다.”
“무슨 수로?”
만파곡도 답답해졌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진천희는 태연하게 미소 짓고 있다.
‘저 미친놈 웃음.’
하지만 왜일까. 그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만파곡이 말했다.
“원래라면 이렇게 어거지로 다른 당주에게 환자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제가 먼저 요청하는 형식으로 하고 예외로 두겠습니다. 그런 경우는 있으니 말입니다.”
진천희가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어휴, 됐습니다. 소각주님도 명령으로 하시면 될 것을 굳이 이렇게 은밀히 저를 찾으신 건, 제 면을 신경 써서 그런 것 아니십니까.”
맞는 말이었다.
여기서 진천희가 멋대로 만파곡의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선다면, 책임자인 만파곡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니까.
현대인이 보기에는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싶다만, 중원에서는 체면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한다.
이곳 사람들은 그만큼 체면이라는 것을 천금처럼 여긴다.
의각도 중원의 특성이 담겨 있으니 당연했다.
“그러면 같이 가지요.”
만파곡이 먼저 앞장섰다.
“환자에 대한 기록을 이미 보신 모양이지만…….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핏덩이지요. 젖을 먹으면 토하기도 하고, 설사는 매번 있고요. 계속 쇠약해져만 갑니다.”
“부모 마음이 말이 아니었겠군요.”
진천희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만파곡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는 산모가 아이를 낳던 도중 강호의 혈사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합니다. 결국 산모는 식음을 전폐하고 하루 종일 울고 계십니다. 산파의 증언에 따르면 심각한 난산이었다고 하더군요. 그걸 이겨낸 것이지요.”
그렇게 끌어안은 아이다.
하지만 들려온 소식은 남편의 부고.
이 아이까지 잃으면 산모는 가족 둘을 모두 잃어버리는 셈이다.
“수액을 놓아주기도 하고 양생기를 불어넣어주기도 하며 시간을 끌고 있지만 이걸로는 부족합니다. 결국 아이는 사망에 이르겠지요. 그 과정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 어미의 심정이 썩어들어 가지요.”
남편을 잃고 이제 아이까지 잃게 생겼다.
허나 만파곡의 표정은 차분했다.
오랜 의원 생활 동안 포기하는 법을 배운 것이리라.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아무리 노력해도 살릴 수 없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을 수십 년을 반복해온 삶.
그녀 얼굴에 있는 주름이 마치 오래된 협곡과도 같았다.
고통의 흔적이다.
“이 이상 할 수 있는 연명 치료가 거의 없습니다. 이걸 정녕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확답하긴 어렵지만 한번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진천희는 환자가 입원해 있는 별채에 도착했다.
‘아, 상당한 세가 사람이겠구나.’
환자가 이름을 가명으로 쓴 것을 알고 있다.
마교, 그리고 사파의 사람이 보통 이런 일이 많다.
‘아니면 정파여도 은원관계가 복잡한 세가나.’
거기다 남편이 강호의 혈사에 휘말려 죽었다 들었다.
산달이 다가오는 만삭의 아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할 시기에 혈사에 휘말려 죽을 정도면.
‘높은 확률로 은원이겠지.’
세가는 그 역사만큼 은원이 깊으니까.
거기다 핏덩이 아이를 데리고 의각 본산까지 올 수 있을 정도라면 보통 집은 아닐 터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심지어 별채까지 따로 빌릴 정도라니.’
의원이 와도 못 고친다 여겨지는 괴질, 또는 체질 아닌가.
강호에서 대부분은 아기를 포기하는 쪽을 택하니까.
안으로 들어가니 산모가 아기를 안고 있었다.
그녀 역시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는지 표정이 핼쑥했다.
아이 역시 말라 있었는데 참 기이했다.
저 정도 개월 수면 보통이라면 얼마나 포동포동한지 엉덩이나 겨드랑이같이 살 접힌 부분에 빨갛게 땀이 찰 정도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도 아이는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약재당주님께서 아이를 열심히 지키셨구나.’
계속 설사만 하는 아이다.
산모는 만파곡과 함께 온 진천희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러고는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소… 소각주님 아니십니까. 혹시 제 아이를 고칠 방도를 찾으신 겁니까.”
아아, 절망 속에서도.
그런 절망 속에서도 부모는 아이를 놓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해봐야죠. 잠깐 진맥을 해봐도 될까요?”
부디 진천희가 생각하는 병이길 바랐다.
“당연하지요. 여기, 어서, 어서.”
아기 포대기를 받고는 진천희는 눈을 감고 오랫동안 진맥을 했다.
그러고는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태어났을 때에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까?”
“당시만 해도 건강했습니다. 산파 말로는 이렇게 커다란 놈은 처음 받아 본다고 할 정도로 우량했으니까요.”
그런 애가 이렇게 마르다니.
“설사는 얼마나 하나요?”
“젖 물리는 족족 다 빠져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배가 아픈 건지 울다가 이제는 기력도 없어 울지도 않습니다.”
“그렇군요.”
다시 진맥.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질문을 한다.
그 과정을 한참 반복하다가 이윽고 밖으로 나왔다.
만파곡은 답답한지 다시 물었다.
“그래. 이건 대체 어떤 병입니까? 아니면 체질?”
진천희는 방금 전 산모 앞에서 지었던 부드러운 미소는 어디 가고.
이제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답했다.
“아마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이라는 병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
“예. 우유. 그러니까 젖을 소화하지 못하는 병……이라고 하기보다는 체질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죠.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젖을 소화하지 못하는 체질이 있거든요.”
유당(乳糖)이라는 것은 우유에 들어 있는 탄수화물을 뜻한다.
대다수의 젖을 만드는 생물들은 자신의 새끼를 이 모유로 기르기 마련.
그러나 선천성 유당불내증의 경우에는 아예 모유 자체를 먹을 수가 없어서 죽을 수밖에 없다.
유당을 소화시키게 도와주는 유당분해효소 단백질이 생성되지 않기 때문.
‘일종의 체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
사실상 치료 방법은 존재치 않는다.
알아서 나이 들어서 왜인지 우유를 잘 먹는 경우야 좀 있다만.
만파곡이 진천희의 말을 듣고는 기겁했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러면 대체 어떻게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된다는 거죠? 소각주님. 지금 산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실 겁니다.”
처음부터 못 고친다고 하면 모를까 희망을 줘버렸다.
진천희마저도 다시 돌아와 못 고친다고 말하면 대들보에 머리라도 박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굉장히 정신적으로 위험한 상황.
진천희가 말했다.
“뭐, 치료는 불가능해도 건강하게는 살 수 있습니다.”
“방도가 있단 말입니까?”
“예. 젖 대신 다른 걸 먹이면 되니까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저 정도 아이는 죽도 못 먹는다는 걸 잊으신 건 아니시지요? 적어도 석 달, 넉 달은 되어야 합니다.”
혹시 애 키워본 적이 없어서 이러는 건지 묻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 한 번만 제게 맡겨 주세요. 당주님.”
“후, 알겠습니다. 어차피 달리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이대로면 아기는 죽는다.
눈앞에 젖이 있는데도 소화를 못 시키고 죽어야 했다.
그게 천형(天刑).
말 그대로 하늘이 아기에게 내린 벌이다.
하지만.
‘소각주께서 뭔가 방법이 있으신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