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34
무림맹주 주일비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둘러앉은 염백호, 진백, 모용인, 기수 등도 입을 열지 않아 맹주 집무실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주일비가 한참 만에 모용인에게 물었다.
“15명의 고수란 말이지요?”
“예. 숫자는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상흔이나 경공을 펼친 흔적으로 봤을 때 결코 녹록치 않은 무공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주일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승전축하연 때 기분 좋게 마신 술이 아직 깨지도 않았는데, 골이 지끈지끈 아픈 일이 벌어진 것이다.
“혹시, 모용세가가 따로 원한 살 일을 한 게 있습니까?”
다른 문파들은 전부 승전을 하고 돌아왔는데, 적이 콕 찝어 모용세가만 몰살시킨 이유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정사대전에 참여하기 전에 다툼이 있었던 세력이라고는 녹림72채밖에 없습니다.”
주일비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좋습니다. 우리 무림맹에서 책임지고 모용세가의 복수를 하겠습니다.”
무림맹주로서 소속 문파의 한을 풀어주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즉시 전 병력에 집결 명령을 내렸다.
승전축하연 다음날 바로 출정 명령이 내려지는 게 좀 이례적이긴 했지만 각 문파들은 별 불만 없이 모였다.
승리한 군대는 피곤하지 않다는 말이 있듯이, 다들 또 다른 승전에 목말라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주일비는 이전 수색작전처럼 각 문파에 나누어 맡기지 않고 병력을 크게 세 덩어리로 편성했다. 중군이 어제 모용세가가 당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좌우 날개가 보조하기로 한 것이다.
적 진영에 고수 무리가 있다는 점을 감안한, 약간은 신중한 대형이었다.
기수는 사매들과 함께 따로 특정 부대에 속하지 않고 자유로이 행동하기로 했다.
상황에 따라 대처하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붙였지만, 그의 속마음은 능소화, 양여옥, 호운혜, 백서린, 당운영, 사하 등의 접근을 효과적으로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제 만든 무덤 앞에 도착한 것은 정오가 지났을 무렵.
주일비는 전군에 휴식을 명령했다. 물도 마시고, 건량도 씹으면서 잠시 쉰 무림맹 병력은 본격적으로 대형을 정비하고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한 시진 정도 지나 바위산 너머의 고원으로 올라서자 적의 정찰병과 신호 깃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림맹 군웅들은 어제 모용세가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들었기 때문에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대형을 더욱 긴밀하게 유지했다.
그로부터 다시 반 시진 정도가 지나자 전방에서 적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나름 진형을 갖추는 그들은 옷차림으로 미루어 볼 때 모두 삼황맹 소속 같았다.
수는 1500에서 2000명 가량.
이곳에 옷 무림맹 병력과 비교하면 2배 이상 많았다.
맹주 주일비는 주변 정황을 살핀 후 곧바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총공격!”
적이 더 모이기 전에 승부를 내자는 의도였다.
“와아!…..”
무림맹 군웅들은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고, 곧 삼황맹과 일대 접전이 시작되었다.
기수는 전투에 뛰어들려는 사매들을 진정시켰다.
“우리의 적은 삼황맹이 아냐. 다들 진정해.”
기수는 기감을 끌어올려 고수의 존재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전투는 치열하게 펼쳐졌다. 황토먼지가 날아올라 하늘을 노랗게 가릴 정도였고,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공주가 기수에게 물었다.
“궁주. 뭐 느껴지는 거 있어?”
그녀 역시 고수인 만큼 한귀비의 존재를 찾기 위해 기감을 끌어올린 상태.
그러나 역시 허탕이었다.
마침 강하게 불어오는 황토바람 때문에 가까이 붙어 있는 사매들끼리도 서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제한되다 보니, 적을 찾아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기식을 죽인 채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게 분명해. 좀 더 집중해보자.”
“알았어.”
그러는 사이 전장엔 변화가 생겼다.
삼황맹이 퇴각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수가 두 배 이상 많았지만 무공의 차이 앞에 그 정도 수적 우위는 별 의미가 없었다.
적이 퇴각하자 주일비가 큰소리로 외쳤다.
“적을 추격하되, 함정이나 매복이 있을지도 모르니 너무 바짝 따라붙지는 마라!”
그 명령은 곧 중군과 좌우 날개로 모두 전달되었다.
30분 정도 추격이 이어졌고, 고원의 중앙을 넘어가자 좌우 숲에서 징소리가 나더니 숨어 있던 적 병력이 쏟아져 나왔다.
에상대로 적이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림맹은 당황하지 않았다.
맹주 주일비가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킨 것도 있고, 나타난 녹림72채 역시 수적인 우위만 있을 뿐, 실제 전투력에선 여전히 무림맹이 우위였기 때문이다.
숲으로 인해 황토 먼지가 좀 덜하자 주일비는 주변 상황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고작 이걸 매복이라고 했느냐?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그는 더욱 소리 높여 무림맹 군웅들을 독려했다.
“공격! 적은 우리를 막을 힘이 없다! 공격!”
무림맹 군웅들은 주일비의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를 듣고 더욱 힘을 냈다.
적은 그 기세를 감당해내지 못했다.
매복으로 인해 병력이 크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세를 잡기는커녕 오히려 슬금슬금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그들은 1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총퇴각을 시작했다.
주일비는 타구봉을 높이 휘두르며 외쳤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우리 손으로 모용세가의 복수를 해주자!”
“와아!…”
무림맹 군웅들은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며 한껏 기세를 올렸다.
그 광경을 보고 춘매가 기수에게 말했다.
“궁주. 우리도 가자!”
기수는 진정하라는 의미의 손짓을 한 후 무림맹 상황을 살펴보았다.
혈매궁을 제외한 모든 문파가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돌진하고 있었다.
거기에 끼고 싶은 사매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어째서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거지?’
적 진영에선 고만고만한 고수의 기도밖에 감지되지 않았다.
어제의 수색대는 문파 별로 산개한 병력이었고, 오늘은 무림맹 전체가 하나로 뭉쳐 쳐들어온 거라 섣불리 나서지 않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공주와 시선을 교환한 후 춘매에게 말했다.
“우리는 계속 이 정도 간격을 유지하면서 따라갈 거니까 참전하고 싶으면 갔다 와.”
“알았어. 궁주.”
춘매는 검을 뽑아 들고 경공을 펼쳐 달려갔다.
여인이지만, 동창에서 교육받은 무림인이다 보니 이런 전투 상황에 스위치가 켜지는 모양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다른 사매들도 하나둘씩 춘매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려서 기수 옆에는 공주와 탁지연만 남게 되었다.
아투사도 사람 지지는 새로운 기술을 실전에서 연습해보고 싶은지 손가락 사이에 새파란 뇌전을 빠지직~! 거리면서 다른 사매들과 합류했다.
탁지연이 기수에게 말했다.
“그동안 궁주가 전부 혼자 처리해서 사매들이 심심했나 봐.”
기수는 다른 의미로 사매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렇게 전투적으로 호르몬을 분비하고 나면 오늘밤엔 또 얼마나 광란을 할까?’
순간, 존슨 쪽으로 힘이 빡! 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자존심 상한 존슨이 시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래. 나도 너를 믿어.’
불필요하게 힘이 들어가려는 놈을 달래준 후 기수는 무림맹의 최후방과 간격을 맞추며 따라갔다.
고삐 풀린 망아지.
무림맹의 견고하던 진형은 어느새 사방팔방으로 흐트러졌다.
적들이 온통 등을 보이며 도망치고 있을 뿐이니 굳이 진형을 유지할 필요도 없었다.
계속 긴장 상태로 기척을 살피던 기수와 공주도 차츰 집중력이 떨어졌다.
고수 비슷한 기운조차 감지되지 않은 채로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런 시간의 흐름 덕분에 도망치는 삼황맹과 녹림72채는 우군을 얻게 되었다.
바로 어둠이었다.
맹주 주일비는 자신들이 지나온 길에 널려 있는 적의 사상자와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번갈아 본 뒤 추격 중지를 명령했다.
이만하면 충분한 전과인데 공연히 밤에 적진에 머무는 전략적 불리함을 자청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맹주의 명령은 순차적으로 전달되었고, 무림맹 군웅들은 속속 중군으로 복귀했다.
그때 뒤따르던 기수와 공주의 눈썹이 동시에 꿈틀거렸다.
“나타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수와 공주가 동시에 몸을 날렸다.
탁지연은 그들에 비하면 내공이 약간 딸리는 관계로 적을 감지하지도 못했고, 경공으로 따라붙기도 어려웠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시전하는 경공은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사람의 형체를 거의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고, 지난 자리 뒤로 대기가 급격한 와류를 일으켜 흙 먼지을 회오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나간 후에 폭발적인 파열음이 뒤따라 발생했다.
승전의 기쁨에 취해 있던 주일비는 자신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기수와 공주를 보고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 각 문파의 수장, 간부, 군웅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연무장의 녹아 붙은 창칼을 보며 느꼈던 경외감이 다시 한 번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기수와 공주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갑자기 수십 개의 기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제 추적 과정에 추정했던 것보다 어쩌면 좀 더 강하다는 느낌.
한귀비로 짐작되는 기도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그들 중에 하나라도 잡고 싶은 게 기수와 공주의 마음이었는데, 거리가 상당히 멀었기 때문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상황은 묘하게 돌아갔다.
두 사람이 거의 다 도착했다고 판단한 순간 기도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기수는 반사적으로 공주 쪽을 봤다.
그녀 역시 고개를 가로 젓고 있었다.
기수는 답답했다.
거리가 가깝다면 설령 상대가 기도를 숨기려고 해도 자신들의 내공 수위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감지할 수 있지만,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거리라면 끌어올린 진기를 진정시키고 살기를 거두는 것만으로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기수는 일단 걸음을 멈춘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이나 바위틈에 숨어 있던 삼황맹과 녹림72채 무리들이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을 보고 놀라서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에 상승의 경공을 시전하는 자는 없었다.
기수가 공주에게 확인했다.
“아까 저쪽 방향이었나?”
“맞아. 일단 끝까지 가보자.”
두 사람은 기도가 출현했던 방향을 어림잡아 다가갔다.
그리고 거기서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십여 구의 시신.
하나 같이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는 그들은 모두 같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기수는 그 무복을 잘 알았다.
시신들은 바로 비룡검문의 제자들이었던 것이다.
기수는 그들 중 한 명에게 달려가 맥부터 짚어보았다.
“순우광! 이봐! 정신 차려!”
그는 비룡검문의 수제자였다.
기수가 양십일의 얼굴로 비룡검문 호법을 할 때 직접 검법을 교정해주기도 하고 함께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한, 아주 친한 사이였다.
기수는 그의 명문혈에 장심을 대고 진기를 주입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공주가 기수에게 말했다.
“궁주. 그는 이미 죽었어.”
기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았다.
순우광과 다른 제자들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주까지 오는 동안 함께 지내온 일들이 생각나자 눈물까지 뚝뚝 떨어졌다.
기수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가족이나 친척이 죽은 것도 아닌데 이 정도까지 감적이 복받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무림이란 한계상황에서 친해진 남자들 사이의 정이란 게 의외로 꽤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순우광의 시신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처를 살펴보니 단 일격에 깨끗하게 베인 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일 초에 당한 모습.
어제 모용세가 무사들과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이놈들. 노리고 있었어.”
“무슨 뜻이야?”
“모용세가와 비룡검문을 특별히 노리고 계속 기회를 보다가 순우광이 제자들과 함께 깊이 들어오자 잽싸게 해치우고 즉시 숨어버린 거야.”
“왜 두 문파를?…”
“나와 친하다는 걸 알고 그런 거지.”
“설마…”
“아냐. 무림맹 내부에 아마 수십 명의 세작이 활동하고 있을 거야. 내가 평소에 두 문파와 친하다는 사실 정도는 누구라도 알아낼 수 있어.”
“그럼 궁주를 도발하고 자극하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인다는 거야?”
“틀림없어.”
공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기수는 확실히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기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어쩌면 자기가 자초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본래 얼굴, 본래 이름을 당당히 내세웠을 때부터 자기는 양지에 훤히 노출되고 적은 여전히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 역시 역용을 하고 가짜 이름으로 살았어야 하나?’
후회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냐!’
자기와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애꿎은 주변사람을 쳐서 자기를 무너뜨리려는 제갈세가의 흉계.
그것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