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514
기수는 가볍게 달리며 바닥에 떨어진 대도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지난번에 써 본 경험에 의하면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에 편한 무기였다.
물론 황호의 칼처럼 예리하지는 않았지만 진기를 주입하면 철갑 정도는 간단히 벨 수 있었다.
기수가 전진하는 쪽으로는 병사들이 도망치다가 목책이나 군막에 길이 막혀 서로를 타고 넘고, 잡아당기느라 한바탕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개중에는 활을 쏘거나 창칼을 휘두르며 덤비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이나 도망치는 자들이나 결과는 같았다.
기수는 대도를 휘두르면서 속으로는 진기를 순환시켰다.
일반 병사들과 청탑산 무리의 실력엔 현격히 차이가 있어서, 그런 식의 여유를 부려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좌우 발칸포 사격으로 상당부분 소진되었던 진기가 빠르게 회복되는 것을 느끼며 기수는 슬쩍 뒤를 한 번 봤다.
조민과 조현에게 고마웠던 것이다.
고작 10명이 적진을 마음껏 누비고 다니면서 군량과 치중에 불을 지르는데도 적은 그들을 막지 못했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말 탄 장교가 나타나기만 하면 기수가 즉시 파천강기를 날려 제거했기 때문이다.
지휘권자가 없는 부대, 그것도 겁먹고 도망치는 부대에게 있어서 숫자가 많다는 것은 전혀 장점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서로 밟고 밟히는 방해물만 될 뿐이었다.
밤새도록 군영 곳곳에서 불이 나고, 장교들은 죽어 자빠지는 참상이 이어지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기수와 동료들은 철수했다.
뒤늦게 철기병이 출동했지만, 그들은 결국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준마 10필만 제공하고 말았다.
한적한 곳으로 빠져나온 기수는 부상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지친 사람은 있었지만 다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9명의 얼굴엔 다들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기수와 함께라면 이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한 것이다.
은혈대법 상태의 적 300여명이 한꺼번에 달려들 때는 정말 아찔했다.
비종이 실력을 드러내고, 천마교가 최선을 다했어도 아주 길고 힘든 밤이 될 거라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상황을 단번에 정리해버린 무시무시한 신공!
같은 편에 그런 절세고수가 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힘이었다.
혈천제가 먼저 기수에게 다가가 물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거뜬해.”
“지쳤으면 연공 좀 하던가.”
“므흐흐…. 괜찮아. 싸우는 도중에 해결했어.”
기수의 웃음소리가 이상하게 비틀려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민도 그렇고, 혈천제도 그렇고, 미녀들이 자청해서 연공을 하자고 하니까 꼭 도시락 싸들고 소풍 온 기분이었다.
아무 때나 까먹을 수 있는 아주 맛있는 도시락.
그런 생각을 하며 키득거리던 기수는 무당장문인, 진백 등과 시선이 마주치자 즉시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진백이 물었다.
“궁주. 다음 계획은 무엇입니까?”
“어제와 같습니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쉬면서 다음 공격대상을 찾을 것입니다.”
“그 일… 우리가 해도 되겠습니까?”
기수만 혼자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 같아 미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가야 놈들의 위치를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인지라 진백도 더 이상은 조르지 않았다.
10명의 일행은 작은 시내가 흐르는 숲을 찾아 들어가 말을 매어두고 피를 씻어내며 휴식을 취했다.
그동안 남자 중 가장 막내인 곤륜파 방옥이 경공을 펼쳐 먹을 것과 술, 갈아입을 옷 등을 잔뜩 사왔고, 정말 소풍 같은 분위기로 회식이 이어졌다.
기수는 밥을 먹고 말에 매어져 있던 담요를 풀어 잠시 잠을 잔 뒤 날이 어두워지자 다시 솔로로 정찰을 나갔다.
일단 고지대로 올라가 자신의 기감이 어느 정도 범위까지 감지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보았는데, 청탑산 패거리로 의심되는 자들이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이번엔 150에서 200명 정도.
급히 창주로 가는 것으로 보아 아마 어젯밤에 일어난 급보를 전해 듣고 조사를 위해서, 혹은 증강 파견된 인원으로 보였다.
기수는 미소 지었다.
‘바보 같은 놈들. 당하고도 배우는 게 없다니…’
기수는 똑같은 방법으로 처리해주리라 마음먹고 그들의 위치를 확인해두었다.
그날 밤.
10명은 말을 타고 적진으로 돌진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보병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자 목책 수십 개가 놓여 있었고, 청탑산 무리는 기척만 느껴질 뿐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기수는 순간적으로 그것이 기문진임을 알아차렸다.
‘이놈들이 준비해놓고 우리를 기다렸구나!’
아차 싶었다.
기문진 공부를 꽤 했다고는 해도, 현재의 진법은 전혀 생소했다.
그때 비룡검문 문주 진백이 나섰다.
“내가 파진을 해보겠습니다.”
기수는 그가 기문진식에 능통하다는 사실을 알고 한 시름 놨다.
“부탁합니다. 제가 옆에서 호위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대도를 뽑아 들고 옆에서 그를 지켰다.
진백뿐만 아니라 조민과 조현, 무당장문인 등도 기문진에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진백이 맥락을 짚으면 그들이 특정 방위에 놓인 목책을 부쉈고, 그때마다 튀어나오는 청탑산 패거리는 기수가 파천강기로 해치웠다.
결국 청탑산 무리가 공들여 만들어놓은 기문진법은 고작 30분 정도를 버티다가 완전히 풀리고 말았다.
시야가 트이자 기수는 대도를 말안장에 걸고 트윈 발칸포 사격을 시작했다.
“이 새끼들이 어디서 개수작을 부려!”
기문진 사용에 대한 무차별 보복 사격은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어제와 달리 청탑산 무리는 맞서 싸우기보다는 도주를 택했다.
그러나 기수는 말에서 내려 경공으로 따라가면서 놈들을 쥐 잡듯이 처단했다.
사방으로 흩어진 덕에 일부는 살아날 수 있었지만, 그 수는 미미했다.
더 이상 죽일 놈을 찾을 수 없게 된 기수는 말로 돌아와 대도를 휘두르며 반란군 진영을 누비기 시작했다.
지휘관이 없는, 있어도 곧 사라지는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이틀 연속으로 군영 여기저기 불길이 솟아올랐고, 병사들은 형편없이 무너져 도망치기 바빴다.
자신감을 얻은 기수는 아예 창주성으로 달려갔다.
성문 위 누각엔 적 장수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높은 성벽과 깊은 해자를 믿고 도망치지 않았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무림고수라고 해도 오르기 어려운 높이의 성벽.
그러나 기수는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그가 다가가자 궁수들이 일제히 활을 쏘았지만 기수는 거침없이 성문 위로 날아올랐고, 무관 복장을 입은 사람은 전부 다 죽여 버렸다.
청탑산 고수들도 일초지적이 못 되는 판에 일반 무관들이 그의 공격을 막기는 불가능했다.
기수는 병사들에겐 굳이 살수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청탑산 패거리와 반란군 장교들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었다.
원래 군대란 것이, 일방 사병들은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 큰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항상 위에서 명령을 내리는 장교들이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기수가 성문 위를 평정하는 동안 다른 동료들도 위로 올라왔다.
곤륜파 방옥이 성벽에 던져 꽂은 다섯 개의 암기 자루를 밟고 올라온 것이다.
기수는 그들을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우리가 창주성을 되찾은 것 같습니다.”
주변에 있던 궁수와 병사들은 이미 무기를 팽개치고 다들 도망친 상태.
사실, 기수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단지 10명만으로 수만의 병력을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늘어난 파천강기의 사거리를 활용하여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들을 눈에 띄는 족족 전부 죽이고 보니까 반군의 지휘체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성 안과 밖에서 몰려다니는 병사들은 목 잘린 닭처럼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기수는 성벽을 내려가 창주 성안 대로를 걸으며 장교급 무관들을 눈에 띄는 대로 사살했다.
그렇게 도지휘사 관아로 들어가자 한 무리의 무관들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나왔다.
물론 그것은 부질없는 저항이었다.
도지휘사 관아를 평정한 기수는 안찰사 관아로 향했다.
그곳에도 관아를 지키는 무관들이 있었고, 역시 모두 소탕되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포정사 관아.
기수는 거기서도 무관들은 모두 제거하고 포정사를 비롯한 문관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는 사이 아침이 되어 사방이 훤히 밝았다.
포정사는 부들부들 떨며 기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수가 그에게 호통을 쳤다.
“네 죄가 무엇인지 아느냐?”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죄를 아느냐고 물었다.”
포정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기수가 그에게 알려주었다.
“너는 가짜 황제를 진짜로 믿고 반란군에게 성을 내주었다.”
“가, 가짜라고요? 하지만 저는 칙서를 받았습니다.”
“남경의 황상이 진짜고 북경의 황제는 가짜다. 그가 황궁을 차지하고 옥새를 훔쳐 제멋대로 조칙을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기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네가 모르고 한 짓 같으니까 목숨 구할 기회를 주겠다.”
“예.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방금 전에 내가 한 말대로 공고를 붙여라. 네 직인을 찍어서.”
“하겠습니다! 당장 하겠습니다.”
포정사 입장에선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한 일이라도 할 상황이었다.
“창주의 백성들과 도지휘사 소속 병사들이 모두 수긍할 정도로 논리 정연하게, 동시에 감정을 움직일 수 있도록 잘 써야 한다.”
“아, 알겠습니다. 북경의 가짜 황제와 척회왕을 꾸짖고, 남경의 황상을 모셔오는데 모두 힘을 모으자는 식으로 쓰겠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다.”
기수는 미소 지었다.
역시 말을 만드는 건 문관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얘기하는 걸 가만히 들어보면 포정사 역시 척회왕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기수는 포정사에게 추가사항을 얘기했다.
“척회왕과 전군도독 황호의 반란에 대해 강조하고, 후군도독부와 좌군도독부만이 진정한 황제의 군대니까 앞으로 그들에게 협조해야 한다는 얘기도 집어넣어라.”
“알겠습니다.”
진백이 옆에서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수의 무시무시한 무공을 바탕으로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창주성을 달랑 10명만으로 점령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지휘관이 없다고 해도 병사가 수만이고 주민은 훨씬 더 많았다.
포정사의 직인이 찍힌 포고문은 그런 면에서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었다.
당장 반군이 모두 돌아서지는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그들 마음속에 의심의 씨앗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주민들은 본래 황군이건 반군이건 자기네들을 걱정 없이 살게 해주는 쪽에 붙기 마련이니까 선택 가능한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의미가 있었다.
포고문은 포정사 관아는 물론 4대문에 내걸렸다.
기수는 포정사에게 명하여 외부에서 온 병력 말고 창주 본래 토박이들로 이루어진 병력을 모으도록 했다.
그 일은 의외로 쉽게 이루어졌다.
토병은 대부분 성 안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오도 되기 전에 2천이 넘는 병력이 모였다.
그들 중에 지휘관급이 거의 없는 것은 기수가 밤사이 일 처리를 너무 완벽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기수는 집결한 그들 앞 높은 연단에 올라가 금패를 보여준 후 자기가 진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척회왕과 가짜 황제를 처단하기 위해 왔음을 밝혔다.
그리고 병사들의 속마음이 어떤지 서너 명을 골라서 읽어보았다.
그런데, 예상 외로 자기 말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
의심스러워서 더 많은 병사의 마음을 읽어보았는데, 표본의 크기가 커지면서 더욱 신뢰할 수 있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왜 이러지? 척회왕 진영이 민심을 장악한 거 아니었나?’
기수는 몇 명 더 마음을 읽다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판단을 좌우하는 것은 어느 황제가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었다.
그들은 얼마전까지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후군도독 곽승을 믿고 있었다.
곽승이 선 편이 진짜라는 식으로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었다.
기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게 바로 민중의 지지를 얻는다는 거구나.’
곽승 같은 사람이 국회의원에 출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의외로 협조적인 2천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 안에 있는 외부 병력을 몰아내고, 성문과 성벽 지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고작 10명으로 시작했지만 하룻밤 사이에 창주성을 수비할 정도의 병력이 모인 것이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포정사의 글재주가 소문과 여론을 만들어서 숨어 있던 병사들을 끌어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포정사보다는 후군도독의 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거나 기수와 동료들 입장에선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수가 애당초 창주성을 점령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숲에 숨어 지내면서 기습작전을 벌이기보다는 성벽을 의지해서 지키는 편이 반군 진영에 훨씬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으니 전략을 바꾸는 게 당연했다.
설령 반군이 창주성을 되찾기 위해 공격한대도 문제없었다.
공성전을 벌이는 사이 좌군과 후군도독부를 동시에 치자는 작전은 어그러질 것이고 많은 병력을 잃을 것이었다.
그리고 게릴라전은 그때 가서 새로 시작해도 되는 것이다.
또, 성에 자리 잡으면서 한 가지 다른 이점도 생겼다.
제대로 된 건물의 숙소에서 잘 수 있는 것이었다.
목욕통이 딸린 방을 고른 기수는 조민과 조현에게 말했다.
“나. 그동안 너무 무리한 것 같아. 내공 소모가 심해서 큰일이야. 어쩌면 좋지?”
자매의 뺨이 발그레 상기되었다.
“그, 글쎄요. 우리가 도울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도움이 될지 안 될지, 한 번 시험해볼까?”
“그럴까요?”
기수는 예쁘게 미소 짓는 자매를 한 팔에 한 명씩 끌어안고 욕실로 들어갔다.